이 고장 자양의 검단리를 충효동으로 이름한 것은 이 마을에서 태어나신 선열 양세의 충효사적을 기려서이니 그는 곧 산남의진 총수 동엄 정환직 선생과 그 아드님인 단오 정용기 대장이다.
이 양세는 영일정씨이니 고려말 충신 포은선생 정몽주는 방선조요 임진왜란때 향병을 이끌고 영천성을 다시 찾은 호수 정세아 의병장은 파선조로 국난의 고비마다 충절로 이어진 선비의 집안이다. 동엄 선생은 소년시절에 이미 백일장에서 장원하여 휘장을 날리고 출사하여 북부도사 의금부도사 사헌부 감찰 순무대 참모관 이어서 호군당상관에 올라서 순무사겸 토포사로 구월산난도 들을 선무하니 그들은 선생의 인품에 감복하여 스스로 흩어져다.
청일전쟁에는 완전사로 전선을 시찰하고 돌아와서 시찰사이어서 도찰사가 되어 탐관오리를 숙정하고 궁내부 별입시 중추원의관등을 역임하며 궁중화재때 기발한 조치로서 황제를 보호하여 옥배옥수에 이름과 자호와 초상화와 금은 패물등의 하사품이 내려졌다.
천품은 정의롭고 기상은 추상같아 일본공사에게 무례한 내정간섭을 여러번 글로서 꾸짖고 시국수습 방안을 상소하고 친일 역도들을 경고하는 등으로 선생이 남기신 저서는 모두 나라 걱정에
대한 글 뿐이다.
단오公은 한때 헤민원 총무를 잠시 지냈을뿐 일생을 구국운동에 바친 우국지사로 경향간을 오르내리며 동지를 찾아 국권회복을 도모 정부의 실정을 탅핵하기도 하고 때때로 종로에서 민족단결의 열변을 토하며 노래와 시로써 비분을 달래고 국채보상 운동에도 앞장서서 큰일 할 때를 기다렸다. 나라운수는 침략자 일본국의 계획적인 농간으로 점점 더 기울어져 가더니 금세기에 접어들면서 그들의 흉계가 적신들과 내통되어 1905년에는 끝내 을사보호조약을 당하여 주권을 송두리째
빼앗기자 고종황제를 가까이서 모시던 동엄 선생은 황제의 밀령을 품고나와 나라를 지킬 최후수단으로 무력항쟁을 계획 주도할새 단오公은 그뜻을 받들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피끓는 격문으로 의열지사들을 모아 삼남대 의진을 창군 그로부터 줄곧 일본군의 정벌에 들어갔다.
의진의 전성기에는 각 고을마다 분진을 두었으니 규모가 방대했음을 알 수 있으며 기록상 전하는 격전만도 57회이니 항쟁의 치열했음에도 알 수 있다.
흥해와 청하에는 3번씩 함락하여 소굴을 불살랐고 장기 청송 의성 의흥 신령 등 에서 무기를 노획하고 혹은 불살랐다. 신성 건천 자양 북안 신광 기북 및 주사산 비학산 남동대와 북동대에서도 크게 승전하고 월매 두마 상하옥 영양 영덕 운문산 등에서도 잘 싸웠다.
불리했던 싸움은 영덕 유암과 청송 고아실 및 팔공산 접전으로 많은 의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광천과 도평의 혈전에서도 냇물을 붉게 물들였으며 운주산 전투에서는 안국사를 태웠고 보현산 전투에서는 비상사를 태웠다. 입암 전투에서는 단오 정대장이 이한구 중군과 손영각 참모를 더불어 순국 장령이 무너지므로서 의진이 한때 흩어지기도 했다.
총수 동엄선생은 의진을 다시 규합 백발을 휘날리며 노도와 같이 여러 고을의 적을 격파했으나 청하에서 사로잡히여 대구로 호송 적장의 만단유세를 뿌리치고 영천으로 환송되어 조양각 아래서
"[이몸이 죽은들 마음이야 변할소냐 대의가 무거울 뿐 죽음이야 가볍도다 나의 뒤를 그 누구에게 부탁할꼬 뜻을 못 전하고 임종이 다가왔네.] 라는 임종 시를 남기고 순국 하셨다.
총수 유명으로 최세한이 지휘권을 이었더니 그로부터 의진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서 영의 남북전역에 흩어져 곳곳마다 서릿발치는 항쟁사를 남기고 살아남은 의사들은 지하운동으로 들어가서 조국 삼천리와 대륙만리를 휘날리면서 투쟁을 계속하여 광복을 맞았다.
돌아볼때 이 산천 어디엔들 의사들의 피로 물들여지지 않은 곳이 있으랴 ! 그러나 모두가 어떤 명예나 보상을 바란 것도 아니다. 의병에 꼭 가야할 의무도 없었다. 무기나 옷이나 군량을 보급해 주는 기관도 없었다. 오직 끓어 오르는 구국 일념으로 산과 들을 누비면서 싸우다가 초개와 같이 목숨을 바쳤다. 그 살신성인이 대를 이었다. 이가 충효동의 사적이다. 이 숭고한 고장에 사적비를 세워서 나라와 겨례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알게 하는 겨레의 산 교육장으로 삼고져 한다.
상단에는 당시 종군한 의사들의 고귀한 이름을 다 밝혀낼 수가 없어서 확인된 의사만을 기록했으나 전하지 못한 수 많은 의사들의 넋도 함께 모시노니 님들의 높고 매운 얼 모두 여기 강림하시어 저 아름다운 산과 들을 굽어 보시며 길이 겨레의 앞날을 지켜 주시옵소서.
이 고장 충효제는 의진 항쟁시에 소실당한 검계서당의 자리이다. 일제때에 생존의사들이 모은 참동계 돈으로서 서당을 다시 짓는다는 구실로 세워져서 국내외 항일 지하운동의 연락이 끊임없이 오고간 정대장 부자의 추모재이다. 그 러므로 1987년도 국가에서 보수비를 영달하여 영천군수로 하여금 묘소와 함께 다시 다듬고 이어서 충효동 명명 80주년인 1988년5월10일
경상북도지사 이상배 삼가 비를 세우매
대구지방보훈청장 이선오 삼가 글을 짓고
선열양세 유손 희영 삼가 글씨를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