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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간도대토벌과 경신참변
1. 일제의 간도 침투,
2.<3.13>만세 시위,
3.무장단체 결성과 <봉오동 전투)
4. 일제의 간도침략 준비와 훈춘사건 조작
5. 일제의 간도토벌과 한국인의 수난
6. 간도참변에 관한 당시 기록
간도토벌, 대학살의 현장인 연변 땅을 밟은 지 어언 3년 6개월이 되어 가고 있다. 그 사이에서 학살의 현장이라는 사실도 모르고 독립유적지를 따라서 정동, 석현, 수남촌, 봉오동, 연통라자, 대황구, 와룡촌, 장암동, 청산리, 걸만동, 소영자, 육도구, 옹성라자, 대교동 등등에 다녀왔다. 연변의 혹독한 겨울 추위를 알기에 일제의 겨울철(10월~ 4월) 7개월에 걸친 대토벌과 학살, 가옥 방화, 곡물 방화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이글거린다. 죄 없는 백성들이 겪은 고통과 가슴에 맺힌 한을 어떻게 풀 것인가!
간도참변에 대한 당시의 기록 몇 개를 소개하며 눈물을 그 분들의 전에 바친다.
함북노회 제7회록에는 교회의 피해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금당촌 교회 영수 1인, 전도사 2인, 교인 7인 피살, 남별리교인 50명 참살, 감옥에 갇힌 자, 징역선고를 받은 자, 떠난 자, 실종자 이루 헤아릴 수 없음.8)
다음은 박은식 선생의 탄식이다.
그들의 장교라는 것들이 많은 병사를 지휘하여 각 부락의 민가, 교회, 학교를 비롯하여 수만 석의 양곡을 불태워 버렸다. 그리고 우리 겨레라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총으로 쏴 죽이고, 칼로 찔러 죽이고, 몽둥이나 주먹으로 때려 죽였다.
산 채로 땅에 묻기도 하고 불로 태우고 가마솥에 넣어 삶기도 했다. 코를 뚫고 갈빗대를 꿰며 목을 자르고 눈을 도려내고, 껍질을 벗기고 허리를 자르며 사지에 못을 박고 손발을 끊었다.
사람의 눈으로 차마 볼 수 없는 짓을 그들은 무슨 재미나는 일이라도 하는 것처럼 했다. 할아버지와 손자가 동시에 죽음을 당하기도 하고, 혹은 부자가 한자리에서 참혹한 형벌을 당하기도 했다.
남편을 죽여 그의 아내에게 보이기도 하고, 아우를 죽여 형에게 보이기도 했다. 죽은 부모의 혼백상자를 가지고 도망가던 형제가 일시에 화를 당하기도 했으며, 산모가 포대기에 사인 갓난아기를 안은 채 숨지기도 했다. 9)
박은식은 북경과 천진에서 발간된 <태오사보>의 기사를 인용하였다.
간동이라는 곳에서는 일본군이 각 부락에서 14명의 양민을 붙잡아 넓은 들판으로 끌고 가 큰 구덩이를 팠다. 그러고는 다른 마을 사람들을 시켜 장작∙석유 등을 가져오게 했다. 잡아온 14명을 총살하고 화장한 뒤, 백골을 구덩이 속에 던져 버려 시체조차 구별해 찾을 수 없게 만들었다. ~중략~
용정촌에서 40리 떨어진 어떤 마을에서는 일본군이 밤 1시에 도착하여, 사람들에게 강제로 집을 나오게 했다. 사람들이 집을 나서자마자 곧 발포하여 한 집에서 2,3명씩의 희생자를 냈다. 그러고는 그 시체들을 한군데 모아 불태운 뒤, 다시 집을 불태우고 교회에 불을 질러 건물 19동이 불태웠다.
어느 외국인 선교사가 이 참상을 목도했는데, 새 무덤이 30군데나 되었으며, 고아와 과부들이 무덤을 둘러싸고 울고 있어, 차마 눈으로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이 사망자들은 모두 선량한 백성들이다. 혁명운동을 한다는 이들은 일본군이 마을로 들어오기 전에 이미 피신했으며, 피살된 사람들은 모두 불구자들이나 노약자들뿐이었다.
어떤 선교사는 말하기를 “나배교회가 불탈 때는 한국인 6명이 손발이 묶여 불 속으로 던져졌으며, 소왕교회에서는 먼저 교인들을 교회 안에 감금한 뒤 불을 질렀다”고 했다.
일본군의 만행은 주로 기독교 신자들을 상대로 했으니, 무릇 교회가 있는 부락이면 성한 데가 없었다.10)
일제 측 자료는 장암동과 장암동 참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연길현 용지사 장암동은 화전사 허문동 과 함께 모두 불령선인의 소굴로 불리 우고 있는데 동지방의 영신학교 및 화전사의 배영학교 등을 불령행동의 획책장소로 삼고 있다. 그리고 이 지방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인 대부분은 예수교신자들이며 불령행동의 주모자들은 모두 예수교 신자들이고 불령행동의 음모는 이 불령자들로 부터 꾸며지고 있다.
우리 토벌대는 적도들의 음모 장소로 되는 집(소각된 가운데는 영신학교도 들어있다고 한다)들을 소각하고 적의 시체는 우리나라(일본) 풍속대로 화장하고 부락의 생존자들을 모아놓고 우리 군대의 토벌 취지를 말하고 장래에 있어서 불령행동을 하지 말 것을 경고하고 동 지방에서 철퇴하였다.
그 후 시체 화장이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군대, 경찰 등 인원을 파견하여 협력하게 하여 완전히 타지 않은 시체 및 유골들을 유족, 친지들 혹은 부락대표자들에게 부탁하고 령수증을 받았다.11)
간도토벌 당시 용정 캐나다장로교 산하의 제창병원 원장이었던 마틴은 장암동 참변에 대하여 <견문기>를 남겼다.
날이 밝자마자 무장한 일본보병들이 야소촌을 빈틈없이 포위하고 높이 쌓인 낟가리에 불을 질렀다. 그리고는 전체 촌민더러 밖으로 나오라고 호령하였다. 촌민들이 밖으로 나오자 아버지고 아들이고 헤아리지 않고 마구 사격하였다. 아직 숨이 채 떨어지지 않은 부상자도 관계치 않고 그저 총에 맞아 쓰러진 사람이면 마른 짚을 덮어놓고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불태웠다. 이러는 사이 어머니와 처자들은 마을 청년 남자들이 살해당하는 것을 강제적으로 목격하게 하였다. 가옥은 전부 불태워 마을은 연기로 뒤덮였고 그 연기는 용정촌에서도 볼 수 있었다. ~중략~ 마을에서 불은 36시간이 지났는데도 계속 타고 있었고 사람이 타는 냄새를 맡을 수 있고 집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 중략~ 알몸의 젖먹이를 업은 여인이 새 무덤 앞에서 구슬프게 울고 있었고 ~중략~ 큰 나무 아래 교회당은 재만 남고 두 채로 지은 학교도 같은 운명이 되었다. 새로 만든 무덤을 세어보니 31개 였다. ~ 중략 ~ 다른 두 마을을 방문하였는데 우리들은 불탄 집 19채와 무덤 36개와 시체들을 목격하였다. 12)
이튿날 일본군 17명은 다시 장암동에 쳐들어와 유가족을 강박하여 무덤을 파헤치게 하고 채 타지 않은 시체를 다시 소각하였다. 사건 당일 현장을 조사한 연길현 경찰 제5분소 순경 “총진하”는 장암동참안에서 조선족주민 33명이 사망되고 2명이 부상당했다고 보고하였다.13)
로이터 통신 27일 상해발신의 글의 일부이다.
동창태에 구금된 한국인 9명을 몇 리 밖으로 옮긴 후, 죄의 유무를 불문하고 그대로 죽여 버렸다. 머리를 찍히거나 가슴을 찔러, 피살된 사람 중에는 교회 간부가 3명, 교원이 2명이었다.
이날 경내에서 한국인 교회 하나가 소실되고, 며칠 후 또 교회 하나가 파괴당하였다.
처음에는 일본군들이 불을 지르려고 했는데, 다행히도 중국인들이 나서서 ‘만일 방화하면 온 마을의 무고한 중국인들에게 까지 재앙이 미친다.’고 강경히 항의했기 때문에 파괴당하기만 하였다.
11월 4일, 또 교회당 1채 성경 등 모든 종교서적이 불타버렸다. 8명을 체포해갔는데, 그 중에서 교원 1명, 교회 간부 2명은 벌써 교회당 안에서 죽었다. ~중략~
중국 경내에서 일본인들이 이렇게 행동하였으니, 중국의 주권을 전혀 무시한 셈이다. 그러니 중국인들의 일본인들에 대한 감정이 어떻겠는가는 더 말할 필요조차 없다. “14)
중국 동삼성 재경학생연합회가 왕청현으로 부터 받은 글의 일부이다.
또 진주한 일본군대는 모두 마을과 산골짜기 안으로 들어가서 한국의 독립군을 수색했다. 진짜 독립군은 벌써 모두 달아나고, 화는 무고한 백성들이 당하고 있다.
왕청 한 고을에도 각지의 보고에 의하면, 피살된 한국인이 1천명이 넘었으며, 그 밖에도 알려지지 않은 일이 얼마든지 있다고 한다. 일본군들은 한국인들의 가택을 수색할 때 마다 모든 세간을 뒤진다.
그리하여 글자 하나라도 독립운동과 관련이 있으면, 곧 온 집안 식구를 1명도 남김없이 모두 총살하고, 그 집과 양식을 불태운다고 한다.
왕청∙대감자∙대황구∙탁반구∙대왕청 등지의 한국인 피해가 더욱 심하며, 그 가혹한 수단과 참혹한 정경은 차마 들을 수 없다고 한다.
총살하고 생매장하기도 하며 여자는 흔히 칼로 찔러 죽인다고 한다. 어느 곳에서는 수백 호 되는 한국인 마을에서 도망한 사람이 겨우 10명이며, 한국인 학교와 교회도 일시에 불탔다고 한다.
11월 20일, 왕청 북쪽에서 한국인 10여 명을, 포승으로 손바닥을 꿰어 잡아끌고 왔다고 한다. 참으로 나라 없는 백성은 상갓집 개보다 못한 것이다. 15)
경신참변은 악마의 탈을 쓴 일제가 동북아를 식민지 삼으려는 탐욕으로 저지른 잔인무도한 조선인 민간학살이었다. 그러나 나라를 제대로 통치하지 못한 조선과 조선 양반이 힘없고 약한 상민들에게 유산으로 물려 준 준비된 재난이기도 하다.
“아베님, 용서해주십시오.”라는 구호를 외치던 엄마부대 집단과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뉴 라이트’ 지식인들과 함께 한 하늘아래에서 살아야 하는 현실이 서글프다.
“나라 없는 백성은 상갓집 개보다 못한 것이다.” 라는 말이 청년들의 가슴에서 공명되기를 빌며 <간도참변>에 학살당한 조상들을 추모하며 그 분들이 꿈꾸었던 소박한 세상을 꿈꾼다.
2019.11.8.금
우담초라하니
각주
1) 간도는 흔히 북간도를 의미하며 현재 연변지구에 해당된다. 백두산을 기점으로 해서 서쪽 방향에 있으며 압록강 상류 대안 위쪽에 있는 유하현, 관전현, 홍경현, 장백현 등이다.
2) ⌜룡정3.13반일운동⌟ 80돐 기념문집에서 윤병석, 안장원은 3만 명, 강룡권은 ⌜21세기로 매진하는 중국조선족 발전방략연구⌟ 제 2장 항일투쟁 (상)과 중국당국의 <외교보존서류> 에 기재된 길림성장 곽종희의 <밀자>에는 2만 여명으로 집계 되였다.
3) 1명은 장례식이 끝난 후, 제창병원에서 집으로 돌아가서 순국하였다.
4) 김춘선 저, 북간도한인사회의 형성과 민족 운동, 471쪽
5) 학자에 따라서 적게는 1만5000명, 많게는 2만 5000명으로 추산한다.
6) 박은식 서문당 출판 ⌜독립운동지혈사⌟446~453쪽
7) 김춘선 저, 북간도한인사회의 형성과 민족 운동, 517쪽
8) 양봉송 편저, 훈춘조선족발전사, 75쪽
9) 박은식 서문당 출판 ⌜독립운동지혈사⌟445~446쪽
10) 박은식 서문당 출판 ⌜독립운동지혈사⌟454~455쪽
11) 김철수 저, 연변항일사적지 연구, 437,439, 441,442쪽
12) 양소전 외 4인 공저 ⌜중국조선족혁명투쟁사⌟207쪽
13) 동상서 208쪽
14) 박은식 서문당 출판 ⌜독립운동지혈사⌟467, 468쪽
15) 동상서 470, 471ㅣ쪽
참고서적
1) 박은식, ⌜독립운동지혈사⌟, 서문당, 2019
2) 김춘선, ⌜북간도 한인사회의 형성과 민족운동⌟,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16
3) 김광희 외 다수, ⌜연변문사자료 제8집 종교사료전집⌟연변정협문사자료위원회, 1997
4) 김철수, ⌜연변항일사적지 연구⌟, 연변인민출판사, 2002
5) 박환, ⌜만주지역 한인민족운동의 재발견⌟, 국학자료원,2014
6) 박창욱외 다수, ⌜룡정3.13반일운동 80돐 기념문집⌟,연변인민출판사, 1999
7) 양소전 외 다수, ⌜중국조선족혁명투쟁사 ⌟, 연변인민출판사, 2009
8) 김기봉, 방영춘, 권립 편저, ⌜일본제국주의의동북침략사⌟, 연변인민출판사,1987
9) 김동섭, ⌜화룡인민의 항일투쟁⌟, 연변인민출판사, 2006
10) 최석숭, ⌜훈춘조선족이민사⌟, 연변교육출판사, 2015
11) 김춘선, 안화춘, 허영길, ⌜최진동장군⌟,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2006
12) 양봉송 편저, ⌜훈춘조선족발전사⌟연변대학출판사, 2018
13) 강룡권 외 다수, ⌜21세기로 매진하는 중국조선족발전방략연구⌟,료녕민족출판사, 1997
14) 김춘선 외 다수, ⌜항일전쟁과 중국조선족⌟,연변인민출판사, 2015
15) 안화춘, 김철수 외 다수, ⌜연변조선족사 상⌟,연변인민출판사, 2011
16) 김춘선, 김철수 외 다수 ⌜중국조선족통사상권⌟, 연변인민출판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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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 경신참변의 실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