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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산지역 순교자들의 특징과 순교 및 증거 터 연구
박태신(사단법인 내포지방고대문학원 원장)
서종태(신앙문학연구원 원장)
덕산 옥터 순교지 성지조성 후원계좌
덕산성지 후원계좌: 신협 131-021-736156 (재) 대전교구 천주교회 덕산성지
문의: 041-337-4708 (주임신부. 구본국.베난시오)
《목 차》
l. 머리말
2. 덕산지역 순교자들의 유형별 분류와 그 특징
3. 덕산지역 심문 터와 순교 터 규명
4. 맺음말
I. 머리말
홍낙민(루가)과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이 덕산 별라산에 살던 강완숙(골롬바) 등에게 천주교를 전한 것에서 보아 알 수 있듯이 덕산지역에는 일찍부터 천주교가 널리 전파되었다. 또한,한국 초기 교회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들이 많이 배출된 고장이기도 하다. 황무실 태생으로 천주교회가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존창을 통해 입교한 황심(토마스)은 1796 년부터 교회의 밀사로 활동했다. 그리고 황심을 통해 입교한 같은 마을의 이보현(프란치스코)은 주문모 신부를 자기집에 모신 적이 있으며, 정산필은 1794년 말 중국인 신부가 입국하자 서울로 올라가 직접 그로부터 세례를 받고 내포지역 회장으로 임명 되었다. 별라산 출신인 강완숙은 초기 교회에서 여성 명도회장으로 크게 활약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덕산에서는 두 명의 순교자가 나왔다. 정사박해 때 정산필이 덕산 포졸에게 붙잡혀 덕산 관아로 끌려가 여러 차례 문초와 혹독한 고문에도 굳세게 신앙을 증거하고 순교했고,1866년 병인박해 때 김 아가타가 덕산 포졸에게 체포되어 여덟 달 동안 옥에서 굶주림을 감
수하고 인내하다가 1867년 12월에 덕산 옥에서 순교했다. 아울러 복자 김사집(프란치스코)이
1801년 신유박해 때 덕산 포졸에게 붙잡혀 동헌 뜰에서 관장에게 여러 차례 문초와 모진 형벌을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신앙을 증거했고,손자선 성인도 1 8 6 6 년에 체포되어 덕산 동헌 뜰에서 여러 차례 심문과 모진 형벌을 받으면서도 신앙을 굳게 지켰다. 아울러 덕산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해미,홍주,공주 진영의 포졸들에게 체포된 많은 천주교도가 덕산 관아에서 1차 심문받고 해당 진영으로 끌려가 순교했다.
그러나 아직껏 복자 정산필이 순교한 터가 어디이고, 김 아가타가 순교한 옥 터가 어디인지, 그리고 김사집 복자와 손자선 성인 등과 많은 순교자가 심문과 갖가지 형벌을 이겨내고 용감하
게 신앙을 증거한 동헌 터가 어디인지 체계적으로 규명되지 못했다. 아울러 덕산지역과 연고가
있는 순교자들에 관한 체계적인 연구도 아직껏 이루어진 것이 없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덕산지
역과 연고가 있는 순교자들과 덕산의 순교 터 및 신앙 증거 터에 대해 체계적으로 규명해 보기
로 한다. 우선 덕산지역과 연고가 있는 순교자들의 유형을 분류하여 그 특징을 밝혀 보고, 다음
으 로 정 산필이 순교한 터와 김 아가타가 순교한 옥 터, 그리고 김사집 복자와 손자선 성인 등과 많은 순교자가 심문과 갖가지 형벌을 받으면서도 신앙을 굳게 증거한 동헌 터에 대해서도 철저히 규명해 보기로 한다.
2. 덕산지역 순교자들의 유형별 분류와 그 특징
덕산지역과 연고가 있는 순교자는 ① 덕산에서 살다가 덕산 포졸에게 잡혀 덕산에서 순교한 경 우 , ② 덕산에서 살다가 타 진영 포졸에게 잡혀 덕산에서 1 차 심문을 받고 타 진영으로 이송되어 그곳에서 순교한 경우,③ 덕산에서 살다가 타지로 이주해 살던 중 타 진영 포졸에게 잡혀 타진영으로 이송되어 그곳에서 순교한 경우 등 세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러한 세 유형의 순교자들을 교회 측 자료와 관변 측 자료에서 두루 찾아 정리하면,뒤쪽에 제시한〈표 5〉•〈표 6>- 〈표 7〉과 같다.
논의의 편의를 위해 뒤쪽에 제시한〈표 5〉.〈표 6〉.〈표 7〉을 바탕으로 덕산지역과 연고가 있는 세 유형의 순교자들을 시기별로 분류하여 정리하면 아래의〈표 1 〉과 같다. 여기서 보아 알 수 있듯이 덕산지역과 연고가 있는 순교자들은 모두 117명에 달한다. 그중 첫째,덕산에서 살다가 덕산 포졸에게 잡혀 덕산에서 순교한 ①유형에 대해 살펴보면,〈표 5〉에서 보듯이 순교자는 정산필 과 박 아가타 2명뿐이다. 그 이유는 1785년에 편찬된『대전통편』의「형전」에 “체포된 도적은 그 고을에서 심문하여 자복을 받은 뒤 토포사에게 이송한다. 이를 위반한 자는 왕의 명령서를 위반한 율[制書有違律]로 논죄한다.”라고 규정되어 있어,1) 토포사를 겸하지 않은 덕산 현감은 치도을로 다스리는 천주교도를 1차 심문하여 자복을 받은 뒤 토포사를 겸한 진영장이 있는 해미,홍주,공주 등으로 이송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우선 덕산의 양인 집안에서 태어난 정산필은 본래 성격이 괄괄하고 힘이 비상하여 모두가 무서워했다. 그러나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이후로는 아주 겸손하고 온순해졌으며,누구에게나 친절하게 대했다. 1794년 말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정산필은 그를 찾아가 그에게 세례를 받는 행복을 누렸다. 또 이후에는 내포 지역의 회장으로 임명되어 자신의 맡은 직
분을 다했다. 기도와 독서를 부지런히 했으며,자신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끊임없이 가르치고 격
려하는 데 마음을 오로지했다. 정산필은 1797년 내포 지역에서 발생한 정사박해 때인 1798년이나 1799년에 덕산 포졸에게 체포되어 덕산 관아로 끌려가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용감하게 천주의 가르침을 증거했다. 또 옥에서는 함께 갇힌 동료들을 격려하기도 했다.
정산필은 모진 고문에도 신앙을 굳게 지키다가 덕산에서 1899년에 50 ~ 60 세의 나이로 순교했
는데,다블뤼 주교는,정산필이 덕산에서 심문받고 신앙을 굳게 증거한 뒤 사형판결을 받고 덕산의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다고 밝혔다.2 ) 그러나『사학징의』에 실려 있는「1801년 3 월 29일, 충청감영이 발송한 공문」에서는 정산필이 충청도에서 이미 매 맞아 죽었다고 밝혔다. 3) 이중 후대의 자료인 다블뤼 주교의 기록보다 당대의 자료인 충청감영의 관문이 더욱 신빙성이 있고, 또한 토포사를 겸하지 않은 덕산 현감은 자복을 받은 뒤 당연히 정산필을 관할 진영인 해미로 이송해야 했으므로,정산필은 덕산에서 문초를 받던 중 매 맞아 순교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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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법제처 편,『대전통편』, 법제처,1963, 607쪽.
2)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교 순교자 123위 시복 자료
집』,제1집,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 위원회,2005, 273~275쪽.
3) 조광 역주,p역주 사학징의』I,「1801년 3월 29일, 충청 감영이 발송한 공문」,한국순교현양위원회,2001, 127쪽
;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앞의 책,277쪽.
2014년에 시복되어 복자품에 오른 정산필은 시성 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
김 아가타는 본디 내포 사람으로 부모에게 교리를 잘 배워 입교했으며, 장성하자 교우의 집으로 출가했다. 덕산에서 수계를 열심히 하며 자녀를 신앙인으로 잘 기르던 그녀는 1866년 12월에
덕산 포졸에게 잡혔다. 포졸들이 교우들 사이에서 명성이 있던 그의 아들이 간 곳을 대라고 했다. 그러나 그녀가 모른다고 대답하니, 포졸들은 아들 대신 그녀를 끌고 가, 옥에 가두고 그 아들 을 체포하고자 했다. 여덟 달 동안 옥에서 굶주림을 감수하고 인내하며 문초를 기다리던 그녀는 1867년 12월 덕산 옥에서 55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4)
둘째,덕산에서 살다가 타 진영 포졸에게 잡혀 덕산에서 1차 심문을 받고 타 진영으로 이송되어 그곳에서 순교한 ②유형에 대해 살펴보면,순교자는 모두 77명이다. 이를 시기별로 살펴보면, 1801년 신유 박해 순교자가 3 명, 을해 박해여파의 1817년 순교자가 5명, 1839년 기해박해 순교자가 1명, 병인박해(1866〜1870) 순교자가 62명, 개항기 순교자가 1명(1878년), 시기 불명 순교자가 5명이다.
우선 신유박해 순교자 3명은〈표 6〉에서 보듯이 김사집. 윤 바오로. 골롬바이다. 윤 바오로는 덕산 주울 사람으로 홍주 읍내에서 순교했고,5) 골롬바는 덕산 고현내면 별암(현 예산군 고덕면대천리)에 살던 이모라는 양반의 아내로, 김사집과 함께 청주에서 순교했다.6) 그리고 2014년 시복된 김사집(일명 ‘성옥’)은 덕산 비방공면 비방고지(현 당진시 합덕읍 정원리) 양가 집안 태생이다.
그는 과거공부 하던 중에 천주교 신앙을 접했다. 입교 후 세속학문을 버리고 교리를 실천하는 데 만 노력한 그는 일상을 기도와 독서로 보냈다. 그는 교회 서적을 열심히 필사하여 가난한 교우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평소 효성이 지극한 그는 부모가 세상을 떠나자 2년 동안 육식을 삼가면서 교회의 가르침대로 예를 다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 교우들에게 나누어준 책들이 압수되면서 그는 덕산 포졸에게 체포되어 덕산 관아에서 문초와 여러 형벌을 받았으나 신앙을 굳게 지켰다. 그는 10월에 해미로 이송되어 문초와 여러 형벌을 받은 뒤 청주로 이송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많은 구경꾼이 모여 있는 장터(현 청주시 남주동)에서 12월 22일 매 맞아 58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다음으로 1815년 을해 박해 여파의 순교자 5명은〈표 5〉에서 보듯이 덕산 대조지면 배나드리 (현 삽교읍 용동3리) 교우촌에 살던 민 첨지(베드로)와 그의 형수 안나, 손연욱(요셉)과 그의 부친 손여심, 송 첨지(요셉) 등이다. 내포 지방 출신 신자들이 피신하여 살던 경상도에서 1815년 을해 박해의 여파로 1816년 봄에 박해가 일어나면서 그 파장으로 1817년 10월에 배나드리에서 20~30명가량의 신자가 체포되었다.7 ) 그들 중 대부분은 배교한 뒤 풀려나고 5명만 신앙을 굳게지켜 순교했다. 결성 태생인 민첨지는 항상 다른 교유들을 가르치고 격려하는 것을 중요한 일과로 삼아 왔다. 목천 쇠악골로 가서 몇 해 살다가 배나드리로 이사하여 살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애덕을 모범적으로 실천하여 모든 사람의 존경과 애정을 받은 그는 1817년 10월에 형수 안나와 함께 체포되어 함께 덕산 관아에서 1차 문초를 받고 해미로 이송되어 신앙을 굳게 지키다가 60이 넘은 나이로 옥에서 굶주려 순교했다. 8》
성녀 김 데레사의 남편인 손연욱은 온화한 성품과 상냥한 태도로 모든 친지의 사랑을 받았다.
특히 그는 신앙의 의무를 실천하는 데 열성이 대단했고, 하느님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려는열망을 자주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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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한국교회사연구소 편,p 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정리 번호 120번,한국교회사연구소, 1987, 216쪽 : 수원교회 사연구소 역주편찬,『병인치명사적』4. 천주교 수원교구,2020, 727쪽.
5)사를르 달레 저, 안응렬•최석우 역주,『한국천주교회사』상,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616쪽.
6)앙투안 다블뤼 저,최석우•조현범 연숙진 번역,『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미간행 초고본), 32私326쪽 ; 사를르달레 저, 안응렬•최석우 역주, 앞의 책. 609쪽.
7)대전교구청 홈페이지(https://www.djcatholic.or.kr/) 교구성지 배나드리성지.
8)앙투안 다블뤼 저, 최석우•조현밤 연숙진 번역, 앞의 책, 222〜223쪽 ; 사를르 달레 저,안응렬•최석우 역주,『한국천주교회Ah, 중,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97쪽.
그러더니 1817년에 해미 포졸에게 붙잡혀 덕산 관아에서 1차 심문받고 해미로 끌려갔다. 여러 형벌에도 신앙을 굳게 지키던 그는 6 〜 7년 동안 옥살이하다가 가석방되어 옥 옆에 있는 집에서 동생과 함께 살다가 얼마 지나지 않은 1820년에 숨을 거두어 순교했다. 9) 손여심도 아들 손 연욱이 잡혀 간지3일만에 체포되어 해미 진영으로 끌려가 스무 차례 이상 고문을 받았다. 이후 여러 해 동안 옥살이하다가 갑자기 병에 걸려 위독해지자, 관장이 병이 나은뒤 돌아오라며 풀어주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은 1827년에 그도 숨을 거두어 순교했다. 10)
연로한 송 첨지는 재산도 가족도 없어 남의 집에서 하인으로 살다가 위의 교우들과 함께 해미포졸에게 잡혀 덕산 관아에서 1차 심문받고 해미로 끌려가 옥에서 순교했다.11)
다음으로 기해박해 순교자 1명은〈표 6 〉에서 보듯이 유 바오로이다. 덕산 대조지면 창정리 (현삽교읍 창정리) 태생인 그는 가족 가운데 혼자 천주교를 받아들였다. 그는 자식 없이 홀아비 신자들 가운데 살면서도 한 번 받아들인 신앙을 끗끗이 지키며 창정리에서 살다가 1839년 3월에 홍주 포졸에게 잡혀 덕산 관아에서 1차 심문받고 홍주로 이송되어 옥에 갇혔다. 이때 인척인 포졸들이 그에게 배교 한다는 한마디 말만 하면 풀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그는 이를 거절하고 관장 앞으로 끌려가 신앙을 고백하고 여러 형벌을 묵묵히 참아 받았다. 그는 경범죄로 갇혀 있던 박춘오를 비롯한 동료 죄수들에게 천주교를 전파하고자 노력하다가 옥에서 순교했다. 그리그 신자 친척들이 그의 시신을 거두어 매장해 주었다.12)
다음으로 병인박해(1866〜 1870) 순교자 77명에 대해 살펴보면, 1866년 순교자 14명, 1867년 순교자 3명,1 868년 순교자 43명, 1869년 순교자 1명, 1870년 순교자 1명이다. 그중 1866년 순교자가 두 번째로 많은 1867년 순교자가 세 번째로 많은 것은 1866년 8월에 프랑스 함대가 조선을 침공하여 8월 18일 한강을 거슬러 서강까지 올라와 위협하고, 9월 10월에 강화부(江華府)를 점령하고 한강을 봉쇄한 병인양요로 인하여 박해가 격학되고 그 여파가 그다음 해까지 미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1868년 순교자가 43명으로 가장 많은 것은 독일 상인 오페르트와 페롱 시부 일행이 1868년 4월 17일 아산만과 구만포를 거쳐 덕산 관아를 습격한 뒤 군기를 탈취하여 가야산으로 가서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고 파헤친 패륜적인 사건으로 인하여 박해가 더욱 격화되었기 때문이다. 그 여파로 1869년과 1870년에도 순교자가 각각 1명씩 나왔다.
〈표 6〉에서 보아 알 수 있듯이,②유형의 병인박해 순교자 중에는 이미 성인품에 오른 성 오메트르 신부와 성 위앵 신부 2위가 포함되어 있다. 이 중 1863년 6월 하순(양력) 조선에 입국한
오메트르 신부는 서울 주교관에서 1달 동안 조선말을 배우며 지내다가 용인의 손골(현 용인시 수지면 동천리) 교우촌으로 가서 조선 말을 익힌 뒤, 1864년 9월(양력)부터 한강 이남 경기도 지역인 성모취결례 구역을 맡아 활동했다.13)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났을 때 수원의 샘골(현 화성시 양감면 신왕리 샘골)에서 성사를 주며 바쁘게 보내던 그는,신자들이 박해 소문을 듣고 동요하자, 사목 활동을 중단하고 1월 23일 홍주 거더리에 있던 다블뤼 주교를 찾아갔다. 여기서 그는 다블뤼 주교. 위행 신부와 하루를 보낸 뒤,거더리에서 15리 떨어진 덕산 비방곳면 소덜(현 당진시 합덕읍 점원리 서다리(사다리)) 마을로 피신했다.14) 그러나 포졸들의 수색이 심해져, 다블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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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앙투안 다블뤼 저, 최석우•조현범 연숙진 번역,앞의 책,223 ~ 224 쪽 ; 사를르 달레저,안응렬. 최석우 역주, 『한주교회사』중,98~99쪽.
10)앙투안 다블뤼 저. 최석우. 조현범 연숙진 번역,앞의 책,223 〜 224 쪽 ; 샤를르 달레 저, 안응렬. 최석우 역주, 『천주교회사』중, 99쪽.
11) 앙투안 다블뤼저, 최석우 . 조현범 연숙진번역, 앞의책 , 223 쪽 : 사를르 달레저, 안음 렬 . 최석우 역주, 『한국교회사』중,99쪽.
12)앙투안 다블뤼 저, 유소연 번역,『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 내포교회사연구소, 2014, 44~45쪽 : 앙투안 다블뤼. 최석우. 조현범. 연숙진 번역,앞의 책, 324〜326쪽.
13)윤민구 신부. 박희균 공역,『성 오메트르 신부의 편지』, 한국순교자연구회, 2016, 369.441.477쪽.
14)사를 살몽 저, 정현명(로사) 번역,『성 다블쥐 주교의 생애』,대전가톨릭대학교 출판부,2006, 369~372쪽
주교와 함께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갈 계획을 세웠지만 역풍으로 배가 해안을 벗어나지 못하자,다시 떠났던 마을로 돌아왔다. 1월 25일 다블뤼 주교가 체포되자, 그는 이튿날 다블뤼 주교가 있던 거더리로 와 자수했다. 이후 그는 다블뤼 주교. 위행 신부와 함께 홍주 관아를거처 서울로 압송되어, 포도청에서 두 차례 심문을 받은 뒤 군문 효수형 선고를 받고 1866년 2월 14일 보령 갈매못에서 순교했다. 15)
위행 신부는 1865년 5월 3일 드 브르트니에르. 도리. 볼리외 신부와 함께 내포 지방에 상륙하여
다블뤼 주교를 만났다. 그는 다블뤼 주교로부터 조선어를 배운 뒤, 홍주 합남면 세거리(현 합덕읍 대합덕리 삼거리)를 중심으로 충청도 지방에서 사목활동을 했다. 그러던 중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 신자들이 동요하자 1월 23일 사목활동을 중단하고 다블뤼 주교가 있던 거더리로 가서 다블뤼 주교. 오메트르 신부와 하루를 보낸 뒤 세거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포졸들의 수색이 심해지자 그는 분별 있는 신자들의 권유로 덕산 고산면 높은뫼(현 예산군 고산면 몽곡리)의 신여실(바오로) 집으로 피신 했다가, 거기서 20리 떨어진 덕산군 외야면 쇠재(현 예산군 봉산면 금티리)로 옮겼다. 그러나 1월 25일 붙잡힌 다블뤼 주교가 자수를 권유하는 편지를 보내자, 1월 26일 함께 온 포졸들에게 붙잡혀 거더리로 갔다. 이후 그는 다블뤼 주교. 오메트르 신부와 함께 홍주 관아를 거처 서울로 압송되어, 포도청에서 두 차례 심문을 받은 뒤 군문 효수형 선고를 받고 1866년 2월 14일 보령 갈매못에서 순교했다.17) 다른 병인박해기 순교자들은 거론할 대상이 많으므로 나중에 보충하기로 한다.
다음으로 개항기인 1878년 순교자 1명은〈표 6 >에서 보듯이 박 암브로시오이다. 그의 누이의 증언에 의하면, 본디 덕산 도용면 황금리(현 예산군 고덕면 구만리) 사람인 그는 천주교 교리를 듣고 즉시 배워 영세한 뒤 열심히 수계하더니,1878년 박해 때 해미 포교에게 잡혔다. 이때 동네의 비신자들이 빼주어, 그는 배교하지 않고도 풀려났다. 뒤에 다시 홍주 포졸이 와서 그를 체포하자, 동네 비신자들이 관장에게 하소연하는 소장을 올려 빼주려고 하니, 그가 “내 이미 천주 성교를 봉행했으므로 주님을 위하여 죽을터이니 소장을 올려 하소연하지 말고 집으로 돌아가라.”
고 사양했다. 그러자 동네의 모든 사람이 70냥을 들여 살리려 하는데도 죽고자 한다고 욕하고 꾸짖으며 빵을 치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그는 그 능욕을 편안히 받으며 신앙을 굳게 지키다가 며
칠 뒤에 옥에서 교수형을 받아 17세의 나이로 순교했다.17)
이상에서 살펴본 덕산에서 살다 잡힌 ②유형의 순교자들 77명 중 홍주 관아로 곧장 압송된 오메트르 신부와 위앵 신부 2명을 제외한 75명은 규정에 따라 덕산 관아로 끌려가 동헌 뜰에서 관장에게 1 차 심문받고 해당 진영으로 압송되었다. 또한,덕산지역에 살다가 타지로 이주하여 살던 중 잡혀 타지에서 순교한 ③유형의 순교자들 가운데 2014년 시복된 강완숙(골롬바)도 덕산 동
헌 뜰에서 관장에게 심문받은 적이 있다. 즉, 덕산 고현내면 별라산(현 예산군 고덕면 대천리)에 살던 중 남편의 친척인 홍낙민(바오로)에게 교리를 배우고 입교한 강완숙은 1791년 신해 박해의 여파로 내포 지역에서 박해가 일어났을 때 붙잡혀 공주 감영에서 심문받은 적이 있는데,18) 이때 규정에 따라 덕산에서 1차 심문받고 공주로 이송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아울러 덕산지역과 연고가 없는 원시보 복자와 손자선 성인도 덕산 동헌 뜰에서 관장에게 심문받은 적이 있다. 우선 복자 원시보(야고보)는 홍주 합남면 응정리(현 홍주군 합덕읍 성동리) 태생으로,사촌 형 복자 원시장(베드로)과 같은 시기인 1789 〜 1790년에 입교했다. 입교할 때 빈곤한 자들을 위한 자선에 열중할 것을 서약으로써 결심한 그는 빈곤한 자들을 찾아 고통을 덜어 주는 데 전념했다. 1798년에 덕산 포졸에게 붙잡혀 옥으로 끌려간 그는 동헌 뜰로 불려가 관장에게 문초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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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방상근,「오메트르,피에르」,『한국 가톨릭 대사전』9, 한국교회사연구소,2002, 6443쪽.
16)손숙경,「위행」,『한국 가톨릭 대사전』9, 한국교회사연구소,2002, 6731쪽.
17)수원교회사연구소 역주편찬,『병인치명사적』4, 천주교 수원교구,2020, 728〜731쪽.
18)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교 순교자 123위 시복 자료집』,제2집,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 위원회,2006, 313쪽.
이때 그는 주뢰질과 몽둥이로 찌르는 고문을 여러 차례 받으면서도 신앙을 굳게 증거하고 동료들을 대라는 추궁에도 응하지 않았다. 이어 홍주 진영으로 이송되어 두세 차례 잔혹한 고문을 받은 그는 다시 덕산으로 이송되어 혹독하게 매질을 당하여 두 다리가 부러졌다. 이런 상태로 청주로 이송된 그는 배교하면 살려준다고 해도 순교를 갈망하며 여러 날 동안 회초리,둥이, 곤장, 주뢰질 등을 수없이 당한 끝에 1799년 3월 13일 70세의 나이로 순교했다)9)손자선 성인은 홍주 합남면 신리(현 당진시 합덕읍 신리)에서 3대째 천주교를 믿는 가문에서태어났다.
다블뤼 주교가 1866년 1월 25일 거더리에서 붙잡힌 지 4〜5일 후,덕산 포졸들이 신리. 거더리의 몇몇 신자 집을 약탈했다. 이때 그의 집안도 약탈당했는데,얼마 뒤 덕산 관아로부터 약탈당한 돈과 물건을 찾아가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러나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자, 손자선이 나서서 그 물건들을 찾으러 갔다가 천주교 신자인지를 묻는 관리의 질문에 신자라고 당당하게 밝히고 배교를 거부했다. 그리하여 체포되어 관아에서 문초를 받으면서 여러 차례 혹형을 당했다. 그러나 대부모인 천주를 절대로 버릴 수 없다고 진술하며 신앙을 굳게 지켰다. 그러자 형리가 그를 넘어뜨리고 얼굴에 오줌을 누자, 그는 “내가 여러 날 세수를 못 했는데 이것도 은혜로다.”라고 하며 감수하여 인내했다. 이어 그는 해미로 이송되어 두 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혹형을받은뒤, 다시 공주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관장이 믿음의 증거로 살점을 물어뜯어 보라고 명령하자, 그는 팔을 물어뜯어 굳은 믿음을 증명해 보였다. 마침내 그는 1866년 2월 14일 옥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20)
셋째, 덕산에서 살다가 타지로 이주해 살던 중 타 진영 포졸에게 잡혀 본 관아에서 1차 심문 을 받고 타 진영으로 이송되어 그곳에서 순교한 ③유형의 순교자에 대해 살펴보면, 순교자는 모두 38명이다. 이를 시기별로 살펴보면, 정사박해(1797〜 1799) 순교자가 2명, 1801년 신유박해 순교자가 5명,1815년 을해박해 순교자가 3명,1827년 정해박해 순교자가 3명,1839년 기해박해 순교자가 5명, 1846년 병오박해 순교자가 1명, 병인박해기(1866~1870) 순교자가 14명,개항기 순교자가 1명(1879년), 시기 불명 순교자가 4명이다.
우선 정사박해 순교자 2명은〈표 7〉에서 보듯이 복자 인언민(마르티노)과 이보현(프란치스코)이다. 인언민은 양반 집안 출신으로 덕산 대조지면 주래(현 예산군 삽교읍 용동리)에 살았다. 학문을 꽤 익힌 그는 황사영(알렉시오) 진사와 상당한 친분이 있었고, 그로부터 교리를 배우고 입교했다. 그 즉시 집안의 신주들을 항아리에 넣어 물에 던져 버린 그는 서울로 가서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고, 요셉이라는 그의 장남을 그에게 맡겼다. 그의 둘째 아들은 교인들 사이에 유명한집안과 혼인 했으며, 즉시 그들은 집과 재산을 포기 하고 공주로 이주했다.
이후, 그는 이주한 사정을 이해 못 하는 비신자 친척들에게 숨김없이 표명하고 그들에게 천주교를 설명했다. 이곳에서 정사 박해 때 붙잡혀 공주 관아로 끌려간 그는 기탄없이 하느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를 원한다고 밝혔다. 이어 청주로 이송된 그는 주뢰질, 몽둥이 찌르기, 굵은 곤장질 등 가혹한 형벌에도 신앙을 굳게 지키자, 그의 고향 지역을 관할 하는 해미 진영으로 이송되었다. 해미에서도 모진 형벌을 인내하며 믿음을 버리지 않은 그는 해미 읍내장터에서 20여 명의 포졸에게 가혹한 매질을 당한 뒤 커다란 돌로 여러 차례 가슴을 맞고 1799년 12월 15일 63세의 나이로 순교했 다. 21)이보현은 덕산 고산면 황모실(현 예산군 고덕면 호음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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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교 순교자 123위 시복 자료집』,제1집,263〜269쪽.
20) 김성희,「손자선」,『한국 가톨릭 대사전』7, 한국교회사연구소,1999, 4998쪽.
21)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 자료집』,제1집, 287〜289쪽.
양인 집안 출신으로, 24세 때 황심(토마스)에게 교리를 배우고 입교했다. 이후 열성을 발휘하 여 고행과 금욕의 실천에 전념 한 그는 결혼할 마음이 없었으나, 어머니의 권유에 순종하여 혼인했고, 얼마 뒤에 연산으로 이주했다. 그리고 1795년에 지방 순방에 나선 주문모 신부를 자기 집에 모셔 와 성사를 받았다. 정사박해의 여파가 연산 지방에 미쳤을 때,그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가족과 교우들을 격려했다. 그러던 중 집으로 찾아온 포졸에게 붙잡혀 관아로 끌려갔고, 연산에서 모진 형벌을 받은 후, 고향 지역을 관할하는 진영으로 넘기라는 감사의 명령에 따라 해미로 이송되었다.
그는 해미에서도 혹독한 형벌을 받았으면서도 신앙을 끝까지 지키다가 해미 읍내장터에서 1799년 12월 15일 27세의 나이로 매 맞아 순교했다. 22)
다음으로 1801년 신유박해 순교자 5명은 복자 강완숙과 그의 아들 복자 홍필주(필립보) 및 홍
정호. 하느님의 종 황심, 그리고 김 토마스이다(〈표 7> 참조).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덕산 고현내면 별라산에 살던 강완숙은 일찍이 홍낙민을 통하여 입교했다. 그녀의 아들 홍필주도 1790년에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에게 교리를 배우고 입교했고, 시어머니도 그녀에게 교리를 배우고 입교했다. 이후 교리 실천에 열중하던 그녀는 1791년 신해박해 때 붙잡혀 공주 감사 앞으로 끌려가기도 했다. 이후 남편이 천주교 신앙을 배척하여 고향에서 신앙생활을 계속할 수 없자, 그녀는 시어머니와 아들 등을 이끌고 서울로 올라와 신앙생활을 했다. 그녀는 교우들의 성직자 영입 운동을 경제적으로 도왔고,1794년 말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자, 그에게 세례를 받고 그를 도와 활동했다. 주 신부로부터 여회장으로 임명된 그녀는 1795년 을묘박해가 일어나자 자신 집을 그의 피난처로 내놓으며 그의 안전을 도모했다. 또한, 뛰어난 지식과 재치로 많은 사람을 권유하여 입교 시켰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 2월 24일 아들 홍필주 등과 함께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끌려가 누가 문초와 여러 형벌을 받으면서도 줄곧 믿음을 굳게 지켜 그녀는 5월 22일 41세의 나이로, 아들 홍필주는 8월 27일 28세의 나이로 서울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23)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가운데 1위인 황심(본디 이름은 ‘인철’)은 덕산
고산면 황매실(일명 ‘황모실’,현 예산군 덕산면 호읍리)의 평민 집안 출신으로, 이존창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고 같은 마을에 사는 이보현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의 누이를 아내로 맞이했다. 그리고 뒤에 윤지헌(프란치스코)이 사는 고산 저구리(현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에서 30여리 떨어진 연산(현 논산시 연산면)으로 이주해 살았다. 1796년에 교회 밀사로 발탁된 그는 주문모 신부의 요청으로 전라도 신앙공동체가 선교사 영입과 신교의 자유를 얻고자 서양의 큰 선박 청원 운동을 주도 할 때 북경 교회를 왕래하며 밀사로 활약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에는 강원도 춘천으로 피신했다가 제천 배론에 은거해 있던 황사영을 찾아가 주문모 신부의 순교 사실을 알리고, 그와 함께 조선 교회의 사정을 북경 주교에게 알릴 방안을 의논했다. 이후 황사영은 황심의 이름으로「백서」를 작성했으며, 이 편지를 옥천희(요한)를 통해 북경에 전달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북경에서 돌아오던 옥천희가 6월에 체포되고, 이어 황심도 9월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이후 의금부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은 뒤, 10월 23일 옥천희와 함께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사형을 받아 45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24) 김 토마스는 덕산 고을 태생으로, 주문모 신부가 사목 순방을 다닐 때 마부로 따라다니던 사람인데, 그도 신유박해 때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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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위의 책, 293〜301쪽.
23)차기진 역주,『윤유일 바오로와 동교 순교자들의 시복 자료집』제3집,천주교 수원교구 시복시성 추진위원회 1998, 29-119, 223〜 255쪽 ;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오 동교 순교자 123위 시복 자료집』제2집, 307-327 :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교 순교자 123위 시복 자료집j 제3집,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 위원회 2006, 195〜2()1쪽.
24) 김진소,『전주교구사』I , 도서출판 빅 벨,1998, 158~163쪽 :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호편,『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교 순교자 123위』,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 위원회,2018 70~72쪽.
다음으로 1815년 을해 박해 순교자 3명은 2014년에 모두 복자로 시복된 고성대(일명 ‘여빈’,
베드로). 고성운(요셉). 이시임(안나)이다(〈표 6> 참조). 이들 중 고성대. 고성운 형제는 본래 덕산 고현내면 별암(별아미, 현 예산군 고덕면 대천리)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모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언제나 합심하여 성서를 읽고 다른 사람들을 권면하는 데 열심인 그들 형제는 모든 신자의 모범이 되었다. 이후 그들은 1791년 신해박해 뒤 전라도 고산 저구리로 이사하여 살았다. 1801년 신유 박해때는 저구리에서 체포 되어 전주 감영으로 끌려갔으나 배교하고 석방되었다. 이후 그들은 경상도 청송 노래산(현 경북 청송군 안덕면 노래2동)으로 이주하여 지내면서 배교한 잘못을 통회하고 순교하기를 갈망하며 살았다. 그러다가 1815년 부활대축일에 경주 포졸에게 잡혀 관아로 끌려간 그들은 온갖 형벌에도 한결같이 신앙을 굳게 지켜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여기서도 흔들림없이 그리스도를 증거하던 그들은 1816년 11월 1일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25)
이시임은 대대로 무관을 지낸 함평 이씨 집안 출신으로 덕산 고산면 높은뫼에서 태어나 나이들어서 교리를 배우고 입교했다. 오빠 이성지(요한)를 따라 고향을 떠나 유랑생활을 하던 중 한
교우 뱃사공과 강제로 혼인한 그녀는 몇 해 안 되어 과부가 되어 어린 아들 박종악을 데리고 진
보 머루산(현 경북 영양군 석포면 포산동) 교우촌으로 가서 살았다. 여기서 을해박해를 만나 안동 포졸에게 붙잡혀 관아로 끌려갔다. 신앙을 굳게 지킨 그녀는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옥에서 아들을 잃은 그녀는 온갖 형벌에도 끝까지 신앙을 증거 하다가 1816년 11월 1일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34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26)
다음으로 1827년 정해박해 순교자 3명은 이 안드레아. 이성삼(요한). 이성지(세례자 요한)이다. (〈표 7> 참조). 이들 중 이 안드레아는 본래 덕산 고산면 출신으로,그의 조부 때부터 입교했다.
고향을 떠나 경상도 산곡에서 살다가 고산으로 이주한 그는 1827년 정해박해 때 체포되어 전주
로 끌려가 순교했다.2기 이성지. 이성삼 형제는 덕산 고산면 높은외 출신으로 이시임의 오빠와 동생이다. 오빠 이성지는 3형제 중 맏이로, 25세 때인 1803년경 교리를 배우고 입교했으며, 동생 이성삼은 장성해서 입교했다. 많은 비신자 친척 때문에 고향에서 수계생활하기 어렵자, 이성지는 온 가족을 이끌고 산중으로 들어갔다. 이후 온 가족을 데리고 정처 없이 유랑생활하다가 고산 땅에 정착했다. 여기서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돌봐주고 흉년에는 길에 버려진 시체들을 거두어 장사지내 주는 등 봉사활동에 온 힘을 쏟았다. 어려서 문장을 조금 익힌 이성삼은 천주교 서적을 베껴 교우들에게 팔기도 하고 거주 주기도 했으며, 가난한 교우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던 중 정해 박해때인 1827년 3월 23일 온가족 13 명이 전주 포졸들에게 붙잡혀 감영으로 끌
려갔다. 온갖 형벌에도 믿음을 굳게 지키다가 이성삼은 고문의 여독으로 1827년 9월 14일 33세의 나이로 옥에서 순교했고, 이성지는 1835년 4월 15일 58세의 나이로 옥에서 병으로 순교했다.28)
다음으로 1839년 기해박해 순교자 5명은 2014년에 모두 복자로 시복된 정태봉(관명은 ‘만보’,
바오로), 그리고 박춘학(바오로). 김 조이(아나스타시아). 이사영(고스마). 이 프란치스코이다(〈표 7> 참조, 우선 정태봉은 1899년 덕산에서 순교한 정산필 회장의 사촌으로 덕산에 서 1796년 태어났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당숙의 손에서 자란 그는 자립할 수 있는 나이가 되자 전라도 용담 고을로 이주해 정착했다. 고향에서 이미 입교한 그는 순교로 자신의 영혼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졌다. 그는 용담에서 산 지 3년이 지난 1827년에 전주 포졸에게 붙잡혀 전주로 압송되었다.
관아에서 두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으며 신앙을 굳게 지킨 그는 12년 동안 옥살이하다가 183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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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김진소, 앞의 책,218 쪽 :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223-227쪽.
26)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 특별 위원회편 . 『 ‘ 하느님의종 ’ 윤지충 바오로 와 료 순교자 123위』 , 229~231쪽.
27) 김진소,앞의 책,227쪽.
28) 김진소, 앞의 책,230〜232쪽.
4월 17일 전주장터로 끌려가 43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다.29) 박춘화는 덕산 고을 평 민 출신으로 9형제 중 장남이었는데,형제들이 모두 열심이었다. 고향에서 수계생활이 어렵자, 그는 온 가족을 거느리고 순천에서 옹기점을 하는 교우의 집으로 이사했다. 그는 효성과 우애가 깊어 이웃의 칭찬이 자자했고,곤궁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어 사람들로부터 존경받았다. 1839 년에 박해를 피해 고산에 있는 옹기점으로 옮긴 그는 얼마 안 된 8월에 부친과 동생 한 명과 같 이 전주 포졸에게 붙잡혀 감영으로 압송되었다. 도중에 부친은 석방되고,그는 감영에서 문초를 받던 중 세 차례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배교했다. 그러나 옥으로 돌아와 곧 뉘우치고 순교를 결 심한 그는 관장 앞에서 배교를 철회했다. 이 때문에 치도곤 60대를 맞고 1839년 10월 12일 43 세의 나이로 순교했다.3이
김 조이는 덕산 고을 양인 신분의 가정에서 태어났으며,그녀의 남편은 이성삼(바오로)이다. 1839년 박해가 일어나자,어디로 가서 숨어야 할지 몰라 당황하다가 홍재영의 집으로 피신해 있 던 중 12세의 어린 딸 이봉금(아나스타시아) 및 그 집에 피신해 있던 여교우들과 같이 체포되어 전주로 끌려갔다. 관장이 남편의 거처를 묻고 배교를 재촉하며 여러 차례 혹독한 고문을 가했지 만,어느 하나도 대답하지 않고 신앙을 굳게 지킨 그녀는 W월 어느 날 51세의 나이로 옥에서 순교했다. 그리고 그의 딸 이봉금도 10월 그몸〜 11월 1일에 옥에서 교수형을 받아 12세의 나이로 순교했다.지) 이사영은 덕산 출신으로 모친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부친의 반대에도 그는 이 랑곳하지 않고 계속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다. 부친이 사망한 뒤 강원도로 이주한 그는 가산이 거 의 바닥나 다시 고향 덕산으로 돌아와 많은 친척을 천주교로 인도했다. 다시 용천으로 이주했디 가 붙잡혀 서울로 압송된 그는 배교하고 풀려났다. 그러나 그는 1839년 8월에 다시 체포되어 바 교한 것을 후회한다고 밝히고 형벌을 잘 견딘 끝에 12월 말에 교수형으로 순교했다.32) 이 프린 치스코는 앞에서 살펴본 1827년 정해박해 순교자 이 안드레아의 아들이다. 그는 본래 덕산 고신 면 출신으로,그의 증조부 때부터 입교했다. 고향을 떠나 경상도 산곡에서 살다가 전라도 고산으 로 이주한 그의 부친은 정해박해 때 체포되어 전주로 끌려가 순교했고,이후 경기 양성으로 이주 한 그는 기해박해 때 붙잡혀 서울로 가서 순교했다.33)
다음으로 1846년 병오박해 순교자 1명은 1984년 시성된 한이형(라우렌시오) 성인이다(〈표 7: 참조). 한이형은 덕산 고을 양반 가문 출신으로,14세 때인 1812년(또는 1811년)에 교리를 배유 입교했다. 자주 예수 십자고상 앞에 묵상하며 절실하게 뉘우치곤 하던 그는 신앙생활을 충실호 하고자 21세 때 아내와 함께 산속 교우촌으로 이주했다. 그는 옷이 너무 남루한 이들을 만나? 입고 있던 자기 옷 중에서 하나를 벗어 주는 등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데 힘썼다. 뒤에 경기5 양지 은이(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남곡리)로 이주했다. 학식과 덕행을 두루 갖추어 훌륭한 5 범을 보인 그는 앵베르 주교에 의해 은이공소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공소 회장의 역할을 하고자 힘쓰던 그는 병오박해 때인 1846년 6월 경포에게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후 문초 와 갖가지 혹독한 고문을 여러 차례 당하면서도 줄곧 믿음을 굳게 지킨 그는 1846년 7월 29일 혹은 8월 1일 옥에서 교수형을 당해 48세(또는 49세)의 나이로 순교했다.34)
다음으로 병인박해기(1866~1870) 순교자 14명에 대해 살펴보면,1866년 순교자 9명,1867낟 순교자가 1명, 1868년 순교자가 3명,1870년 순교자가 1명이다(〈표 7> 참조). 우선 1866년 순고 자 9명 중 이성삼(베드로)은 본디 덕산 사람으로 아이 때 입교했다. 착실히 수계하기 위해 산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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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 특별 위원회편, p ‘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 와 동료 순교자 123위 267〜268쪽.
30) 김진소, 앞의 책,254쪽.
31) 김진소, 앞의 책,260~161쪽.
32) 앙투안 다블뤼 저, 최석우•조현범 연숙진 번역, 앞의 책, 373쪽.
33) 수원교회사연구소 역주편찬, 앞의 책, 659~661쪽.
34) 차기진,「한이형」,『한국가톨릭대사전』12. 한국교회사연구소, 2006, 9517쪽.
로 두루 다니며 살던 그는 공주 소랑리에 살던 중 1866년 10월 15일 체포된 작은 아들 대, 원하여 공주로 끌려가 11월에 55세의 나이로 순교했다.35) 유 베드로는 덕산 태생으로 과천 산에 가서 살며 회장으로 활동하다가 1866년 가을에 잡혀 좌변포도청으로 끌려가 형벌을 5 게 당한 뒤 옥에서 10월에 순교했고,예 김윤호(요한)는 본디 덕산 사람으로 용인 굴암에 가, 다가 1866년 10월에 양주 포교에게 아내 권 마르타와 와 함께 잡혀 양주 관아로 끌려가 4( 나이로 순교했다.3기 장인서는 덕산 대조지면 동리 사람으로 경기도 광주에 가서 살던 중 1E 에 경포에게 잡혀 포도청으로 끌려가 모진 형벌을 당하면서도 신앙을 굳게 지키다가 11월( 세의 나이로 순교했다.38)
신 안드레아는 본디 덕산 개안 사람이다. 입교한 부모가 착실히 수계하기 위해 산골인 성골을 거쳐 용인 고초골에 가서 살던 중 1866년 박해를 만나 붙잡혀 포도청으로 끌려갔[ 소 순교를 바라던 그는 12월 보름께 교수형을 받아 65세의 나이로 순교했다.처) 김학진은 내야면 봉명골(현 예산군 봉산면 봉림리) 사람으로,여러 대 천주교를 믿어 온 구교우의 ; 다. 그는 동갑인 아내와 함께 17세에 천안 엄나무골로 가서 살던 중 1866년에 온 가족이 붙잡혔다. 그중 김학진과 그의 아내만 천안 관아로 끌려가 신앙을 굳게 지키다가 공주로。 어 내외가 함께 교수형을 받아 17세의 나이로 순교했다.에) 윤학첨(요한)은 덕산 개야골(개 가야산) 사람으로,여러 대 천주교를 믿어 온 구교우의 후손이다. 어려서 고아가 된 그를 준 삼촌과 함께 살다가 분가하여 천안 해사동으로 가서 살던 중 1866년에 붙잡혀 천안 곳 끌려갔다. 혹독한 형벌에도 믿음을 굳게 지킨 그는 공주로 이송되어서 배교를 거부하다가 뜰에서 매 맞아 순교했다.41)
1867년 순교자 1명은 조군서이다. 그는 본디 덕산 황무실 사람으로,공주 마련동으로 c 여 살던 중 1867년 8월에 박 서방•윤 서방과 함께 공주 포졸에게 붙잡혀 관아로 끌려갔다. 옥에서 배교하고 풀려나기를 바라는 박 서방과 윤 서방을 권면하여 신앙을 굳게 보존하게 그들과 함께 독약을 받아먹고 순교했다.42) 1868년 순교자 3명 중 신 크리산토는 본디 덕산 실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동정을 간절히 지키고자 하던 그는 동생을 데리고 산중으로 들어 명을 착실히 지켰다. 중간에 간 그레고리오를 만나 공주 무성산에 들어가 살다가 1866년에 가 일어나자 홍주 거더리 근처로 가서 살았다. 그러던 중 1868년 4월에 홍주 포교에게 잡 아로 끌려갔다. 여러 혹독한 형벌에도 신앙을 굳게 지키다가 교수형을 받아 51세의 나이로 했다.4 3) 유 치로는 본디 덕산 사람으로 신창 땅에 가서 살던 중 1866년에 그의 아내와 c 해미 포교에게 잡혀 관아로 끌려가 아내와 함께 교수형을 받아 30세의 나이로 순교했다.44) 년 순교자 1명은 박춘화이다. 그는 덕산 비방곶면 섬말(현 당진시 합덕읍 점원리)에서 살다 주 신리로 이사하여 살던 중 1870년에 경포에게 잡혀 서울 포도청으로 끌려가 30여 세의 L 순교했다.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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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치명일기』472번 : 수원교회사연구소 역주편찬,『병인치명사적』1. 천주교 수원교구,2020, 497쪽 : 수원 연구소 역주편찬,p병인치병사적』2, 천주교 수원교구,2020, 743쪽 ; 천주교 수원교구, 2020. 497쪽 : 수%1 연구소 역주편찬,F병인치병사적』5, 천주교 수원교구, 2020, 157쪽.
36) 『치명일기』42번.
37) 『치명일기』413번 : 수원교회사연구소 역주편찬,『병인치명사적』1, 643쪽.
38) 수원교회사연구소 역주편찬,『병인치명사적』2, 597쪽.
39) 『치명일기』104번 ; 수원교회사연구소 역주편찬,F병인치명사적』5, 91〜93쪽.
40) 『치명일기』573 574번 : 수원교회사연구소 역주편찬,『병인치명사적』2, 749〜751쪽.
41) 『치명일기』572번 : 수원교회사연구소 역주편찬,『병인치명사적』2, 745〜747쪽.
42) 『치명일기』536번 : 수원교회사연구소 역주편찬,F병인치명사적』1. 583쪽; 수원교회사연구소 역주편찬,° 명사■저』4, 555쪽.
43) 『치명일기』66^번 : 수원교회사연구소 역주편찬,『병인치명사적』1, 519〜521쪽; 수원교회사연구소 역주편 인치명사적』4, 667〜6기쪽 ; 수원교회사연구소 역주편찬,『병인치명사적』5, 199〜201쪽.
44) p치명일기』685번 : 수원교회사연구소 역주편찬, F병인치명사적』4, 775쪽.
다음으로 개항기 순교자 1명(1879년)은 이정보(이종보, 프란치스코)이다(〈표 6> 참조). 그는 본 디 덕산 사람으로 구교우의 후손이다. 그는 부친 이학겸(토마스)이 덕산에서 살다가 1867년 5월 에 경포에게 잡혀 서울로 가서 순교한 뒤,“교우를 찾아가라.”라고 한 부친의 지시에 따라 안성 명당리로 가서 살던 중 1879년 드게트 신부가 잡힐 때 경포에게 잡혀 서울로 가서 순교했다.46)
다음으로 순교 시기 불명의 4명 중 김 베드로는 본디 덕산 사람이다. 부모에게 교리를 배워 열심히 수계하던 그는 뒤에 공주로 이사하여 살았다. 그러던 중 그의 아들 김 토마스•김 데레사 부부와 함께 홍주 포교에게 잡혀 관아로 끌려갔다. 여러 형벌에도 아들 부부와 더불어 믿음을 잘 보존하던 그는 오래지 않아 아들 부부와 함께 교수형을 받아 그는 48세,아들 부부는 20세의 나 이로 순교했다.47) 나머지 박 서방은 면천 사람으로,덕산으로 이사하여 살았다. 그러던 중 아들 박사행이 아내와 더불어 홍주 포교에게 붙잡혀 관아로 끌려가 아내와 함께 교수형을 받아 32세 의 나이로 순교했다. 이후 박 서방은 경기도 양주로 가서 살던 중 붙잡혀 양주 옥에서 교수형을 받아 55세의 나이로 순교했다.48)
다음으로 덕산지역과 연고가 있는 ①•②•③유형의 순교자들을 순교지별로 분류하면 아래의 〈표 2〉와 같다. 여기서 보아 알 수 있듯이 우선 덕산에서 살다가 덕산 포졸에게 잡혀 덕산에서 심문받고 순교한 ①유형의 순교자는 2명이다. 그리고 덕산에서 살다가 타 진영 포졸에게 잡혀 타 진영으로 이송되어 순교한 ②유형의 순교자 77명 가운데 홍주 진영의 순교자가 34명으로 가장 많고,덕산지역 관할 진영인 해미 순교자가 27명으로 두 번째로 많으며,공주 감영의 순교자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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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p치명일기』259번 : 수원교회사연구소 역주편찬,『병인치명사적』4, 923쪽.
46) r치명일기』191번 : 수원교회사연구소 역주편찬,『병인치영사적』1, 631~633쪽.
47) 『치명일기』451631.632번 ; 수원교회사연구소 역주편한, F병인치명사적』4. 787~793쪽.
48) F치명일기』416 650-651번.
명으로 세 번째로 많다. 이어 보령 수영의 순교자는 3명,청주 병영의 순교자는 1명,서을 자는 3명,수원 순교자는 1명이다. 아울러 덕산에서 살다가 타지로 이주하여 살던 중 잡큰 에서 순교한 ③유형의 순교자 38명 가운데 서울 순교자가 11명으로 가장 많고,전주 순교 명으로 두 번째로 많으며,공주 순교자가 5명으로 세 번째로 많다. 이어 해미 순교자가 시 주 순교자가 3명, 양주 순교자가 3명,대구 순교자가 3명,보령 순교자가 1명,순교지 미 명이다.
다음으로 ③유형의 순교자들이 체포될 당시 거주한 고을을 정리하면 아래의〈표 3〉고 여기서 보아 알 수 있듯이 덕산지역에 거주했던 신자들이 서울을 비롯하여 경기도,충청I 도, 경상도 등의 여러 도에 가서 살며 신앙생활을 했다. 그들이 이주하여 신앙생활을 한 도별로 살펴보면,경기도는 과천(1), 광주(1),양지(1),양성(1), 용인(2),안성(1), 양주(1) 고을에 7명,충청도는 공주(6), 연산(2), 천안(3), 신창(2), 홍주(2),영춘(1) 등 6개 고을뎌 전라도는 고산(5),용담(2) 등 2개 고을에 7명,경상도는 청송(2), 진보(1) 등 2개 고을어 각각 이주하여 살았다. 이러한 덕산지역 신자들의 타지로의 이주는 복음이 더욱더 넓은 전파되어 나가는 데 적잖이 이바지했을 것이다.
이처럼 여러 도 가운데서도 경기도와 충청도가 6개 고을로 가장 많은 까닭은 무엇일z 충청도 6개 고을에 가장 많은 16명이 이주한 것은 고향과 가까운 같은 생활권이기 때문 각된다. 그리고 경기도 6개 고을에 두 번째로 많은 7명이 이주한 것은 조선 교회의 사목 하는 조선대목구장이 주로 서울에 거주했기 때문에,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성사를 받 리하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이해된다. 단일 고을로는 공주에 가장 많은 6명이,그리고 고 번째로 많은 5명이 이주한 것은 두 지역 모두 신자들이 숨어서 신앙생활을 하기에 유리 지역이 잘 발달해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다음으로 덕산지역과 연고가 있는 순교자들이 살며 신앙생활을 했던 덕산지역의 마을을 박해 시기별로 정리하면〈표 4〉와 같다. 여기서 보아 알 수 있듯이 순교자들이 살며 신앙생활을 했던 마을은 모두 22개에 달한다. 우선 시기별로 보면 정사박해부터 신유박해까지는 순교자들이 살며 신앙생활을 했던 마을이 황무실,주래,별암,높은외,배나드리,별라산,비방고지,주울 등 8개인 데 비하여,병인박해 시기에는 창정리,소재, 강당리,구레골,삽다리,구만리,거동리,가야골, 신프런,섬말,황금리, 동리,봉명골,개안실 등 14개에 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병인박 해 전후에 복음이 더욱더 널리 전파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들 마을을 옛 면별로 살펴보면, 대조지면이 주래. 배나드리. 창정리. 삽다리. 동리 5개로 가장 많고,고산면이 황무실. 높은믹. 구레골 3개로 두 번째로 많고,고현내면이 별암. 별라산 2개,비방 곳면이 비방고지(서덜). 섬말 2개, 도용면이 구만리. 황금리 2개,내야면이 봉명골 1개,외야면이 쇠재 1개,거등면이 거동리 1개,장촌면이 신프런 1개 순이다. 그리고 소속 면을 알 수 없는 마 을이 주울. 가야골. 개안 3개이다.
3. 덕산지역 심문 터와 순교 터 규명
앞 절에서 살펴보았듯이 덕산에서 살다가 잡혀 덕산에서 순교한 신자는 정산필과 박 아가타 2명이다. 정산필은 1899년에 덕산 동헌 뜰에서 심문받던 중 매 맞아 순교했을 가능성이 크고 또 한 성안 읍내장터에서 매 맞아 순교했을 일말의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박 아가타는 1866년 12 월에 덕산 옥에서 순교했다. 또한. 덕산에서 살다가 타 진영 포졸에게 잡혀 타 진영으로 이송되 어 순교한 ①유형의 순교자는 77명 중 위행 신부와 오메트르 신부를 제외한 75명은 덕산 동헌 뜰에서 덕산 관장에게 일차 심문받은 뒤 타 진영으로 이송되었고,원시보•강완숙 복자와 손자선 성인도 덕산 동헌 뜰에서 심문과 여러 형벌을 받았다. 이번 절에서는 정산필이 매 맞아 순교했을 가능성이 클 뿐만 아니라 78명의 순교자가 관장에게 심문과 여러 형벌을 받은 덕산 동헌 터, 정 산필이 매 맞아 순교했을 일말의 가능성이 있는 장터,그리고 박 아가타가 순교한 옥 터 등이 어 디인지 알아보기로 한다.
덕산 옥의 위치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우선 조선 시대에 제작된 덕산 고을 고지도나 읍지(邑 誌)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1872년에 제작된「공주목지도」에 공주의 옥이 표시된 바와 같이 고을 고지도에 옥이 그려져 있는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이에 18세기 중반에 편찬된『여지도서』에 수록된 덕산현 지도,1895년에 간행된『호서읍지』에 수록된 덕산군 지도,18세기 중엽 에 제작된『광여도』와『해동지도』에 수록된 덕산현 지도,『1872년 지방지도』에 수록된 덕산군 지도 등을 두루 살펴보았다. 그러나 옥이 표시된 사례를 한 건도 발견할 수 없었다.
이에 옥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하여 1974년에 한글 학회에서 편찬하여 간행한『한국지명총람』
4(충남편) 하권에 수록된 예산군 덕산면 항목을 살펴보았다. 여기에는 덕산지역에 옥과 관련된 지명이 내라리,복당리, 읍내리 등 3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이를 정리하면 아래의〈표 8〉과 같다.
우선 덕산면 복당리와 외라리에 ‘옥터말(옥토말)’과 ‘옥터논’이라는 지명이 있다. 이중 복당리 의 ‘옥터말(오토말)’에는 평리 북쪽에 있는 마을로,나박소(내라리)의 옥이 있었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그리고 외라리의 ‘옥터 논’에는 안말 남쪽에 있는 논으로, 조선 때 덕산군의 옥이 있었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그런데 복당리와 외라리는 본래 덕산군의 나박소면 지역이고,‘소(所)’는 고려 시대와 조선 초기에,천민들이 집단으로 모여 살며 광물이나 수공품의 생산을 맡아 하던 특수 행 정구역이었다. 그러므로 복당리의 ‘옥터말(옥토말)’과 외라리의 ‘옥터논’은 고려시대와 조선 초기 에 현 복당리와 외라리에 있었던, 천민들이 집단으로 모여 살며 광물이나 수공품의 생산을 맡아 하던 특수 행정구역인 ‘나박소’의 옥과 관련이 있는 지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고덕면 대천리에 ‘옥골(옥굴,옥동)’과 ‘옥골 공동묘지’와 ‘옥골방죽’이라는 지명이 있 다. 이중 ‘옥골(옥굴,옥동/에는 별아미 북쪽에 있는 마을로, 옛 덕산현의 옥이 있었다는 설명이 붙어 있고,‘옥골 공동묘지’에는 ‘대천리공동묘지’라는 설명이 붙어 있으며, ‘옥굴방죽’에는 ‘옥골 남쪽에 있는 방죽’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그런데 태종 5년(1405)에 덕풍현과 이산현을 합병하 여 고을 이름을 ‘덕산’으로 고치고 옛 풍덕현의 치소를 덕산현의 치소로 삼았다. 이어 태종 16년 (1416)에 이산에 있던 도 절제사의 병영을 해미로 옮기고,덕산현의 치소를 이산의 옛 병영으로 옮겼다.49) 또한,덕산 고덕면 대천리는 본래 덕산군 고현내면의 지역으로(〈표 8> 참조),덕산현의 치소가 있던 곳이다. 그러므로 고덕면 대천리의 ‘옥골(옥굴,옥동)’과 ‘옥골공동묘지’와 ‘옥골방죽’ 은 치소를, 이산의 옛 병영으로 옮기기 이전 시기 덕산현의 옥과 관련이 있는 지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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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신증동국여지승람』제19권,충청도 덕산현 ‘고적’.
다음으로 덕산면의 읍내리에 ‘옥터(옥지)’와 ‘옥방죽’이라는 지명이 있다. 이중 ‘옥터(옥지)’에 는 ‘성안에 있는 덕산 옥의 터’라는 설명이 붙어 있고, ‘옥방죽’에는 ‘옥터 옆에 있던 방죽’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그런데 덕산면 읍내리는 본래 덕산 군청이 있으므로 현내면의 읍내(성내,성 안)라 했다가 1914년에 성내리와 동문리•서문리•평리•신리의 일부와 대조지면의 송산리 일부를 병합해 읍내리라 했다(〈표 1〉참조). 그리고 태종 16년에,이산의 옛 병영성으로 터전을 옮긴 덕 산현의 치소(治所)에는 둘레가 2천 6백 55척이고 높이가 9척인 돌로 쌓은 읍성이 있었다.에》그 러므로 덕산면 읍내리의 ‘옥터(옥지)’와 ‘옥방죽’은 천주교 박해 시기에 천주교도들을 구금 하던 덕산현의 옥터와 그 옥 터 옆에 있던 방죽이고,이들 옥터와 옥방죽은 읍성 안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표 8>『한국 지명 총람』4(충남편) 하권 ‘덕산면’에 나오는 옥 관련 지명
그러면 덕산현 읍성 안에 있던 옥터와 그 옆에 있던 옥방죽의 위치는 어디일까. 오영환•박정 자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운영해 오고 있는 ‘한국의 성지와 사적지’라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구 체적인 근거를 제시하지는 않았지만,읍내리 1구 마을회관 자리를 옥 터로 밝히고 그 위치를 표 시한 사진(〈그림 0 참조)을 게시했다.51) 또한,오세택 기자가 작성하여『가톨릭평화신문』2014 년 9월 21일 자에 게재한 기사「복자 124위 순교지를 가다 <14> 예산 순교지」에서도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옥터의 위치를 봉운로 51-1(읍내리 361-1) 읍내리 1구 마을회관 자리로 밝혔다.
그런데 오세택 기자는 해당 기사 앞부분에서 124위 시복 법정 개정 당시 현장 조사에 참여했 던 윤인규(여사울 성지 전담) 신부의 안내를 받아 예산 지역의 관아터,옥 터,순교 터 등의 지번 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로써 볼 때 덕산 관아 터의 위치를 봉운로 51-1(읍내리 361-1) 읍내리 1구 마을회관 자리로 보는 견해는 124위 시복 법정 개정 당시 현장 조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확인한 결과물로 여겨진다. 이 결과물에 따라 덕산 옥 터의 위치를 오영환•박정자는 ‘한국의 성 지와 사적지’라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봉운로 51-1(읍내리 361-1) 읍내리 1구 마을회관 자리로 밝히고, 오세택 기자도「복자 124위 순교지를 가다 <14> 예산 순교지」에서 봉운로 51-1(읍내리 361-1) 읍내리 1구 마을회관 자리를 옥 터로 밝히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뒤에서 밝히 듯이 그곳은 옥방죽. 즉 연정이 있던 곳이 옥이 있던 자리가 아니다.
옥 터 위치의 규명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덕산면 읍내리 365-4번지에서 조부 박인학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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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신증동국여지승람』제19권,충청도 덕산현 ‘성곽’.
51) http://fr.catholic.or.kr/JHS/holyplace.html.
부터 대대로 살아온 그 손자 박태신(기세)의 증언이다. 그는 어려서 덕산 읍성 터에서 친구들과 뛰어놀기도 하고 361-1 번지에 있던 옥방죽에서 우렁이와 물고기도 잡았으며,그의 친구 한OO 이 살던 옥담 안 집에서 친구들과 소꿈놀이하며 놀았는데,그 집은 옥방죽 옆의 읍내리 362-2번 지에 있었다고 증언했다. 또한,그는 옥에서 사람이 죽으면 그 시신을 옥방죽에 버렸고,죄인을 옥방죽에 수장했다는 흉흉한 전설을 듣고 자랐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그는 집안의 여러 어른에게 옥방죽은 연정(違事)이라고 전해 들었다고도 증언했다. 아울러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옥 담 안 집과 옥방죽의 위치가 맞는지 덕산 읍내 토박이인 나이 많은 여러 어른에게 확인해 보았는데, 90여 세인 김경환은 읍내리 362-2번지의 가옥이 옥담 안 집이라고 전해왔다고 증언해 주었다고 밝혔다. 그리고 읍내리 1구 이장직을 수행하고 있는 원OO는 읍내리 363-20번지에 덕산군 옥사 관리사 건물이 있었는데,이 터에 그의 백부가 건물을 짓고 살았다고 증언해 주었다고 밝혔다.52)
이상에서 살펴본 여러 사실을 바탕으로 박태신은 연정인 옥방죽이 있던 361-1 번지 위쪽의 옥 담 안 집이 있던 362-2번지와 옥사 관리사 건물이 있던 363-20번지와 그 주변의 362-1 번지, 362-3~5번지,363-27〜 28번지 등을 포함한 일대의 등근 모양의 지역을 옥사가 있던 구역이라고 밝히면서 그 위치를 표시한 지적도를 서종태에게 건네주었다(〈그림 2> 참조). 이러한 박태신의 견해는 덕산현의 옥터와 옥방죽이 읍성 안에 있었고, 옥방죽은 옥터 옆에 있었다고 밝힌『한국 지명 총람』의 내용과도 합치된다.
또한,덕산현의 옥터와 옥방죽의 위치에 대한 박태신의 견해는 옥방죽인 연정의 위치를 통해 서도 확인할 수 있다.『1872년 지방지도』에 수록된「덕산군 지도」에 보면 읍성 안의 관아 건물 들이 자세히 그려져 있다(〈그림 3> 참조). 이에 의하면 오른쪽 2층 문루가 있는 외아문을 통과해 들어가면 뒤쪽에 동헌(오른편)과 객사(왼편) 권역이 있고, 그 외 건물들은 떨어져 있다. 문루 밖에는 장청과 작청이 있고, 문루를 지나 왼쪽에 장방. 형방청. 공수가 있다. 동헌 권역 뒤편에 군기 고가 있고, 객사 권역 원편 위쪽에 향청이 있으며,그 아래에 좌기청이 있고, 또 그 아래에 사창이 있다. 그리고 오른편 아래쪽 가장 먼 곳에 사정이 있다. 하지만 연정은 표시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18세기 중엽에 제작된『광여도』와『해동지도』에 수록된 덕산현 지도에는 객사 아래쪽 왼편에 연정이 표시되어 있다(〈그림 4〉와〈그림 5> 참조). 특히『광여도』에 수록된 덕산현 지도 에 표시된 연정에는 정자와 연못이 아울러 그려져 있다. 그 위치는『1872년 지방지도』에 수록된 「덕산군지도」에서 보면 사창 아래쪽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러한 연정의 위치는 집안의 여러 어른 에게 박태신이 전해 들었다는 연정,즉 옥방죽 있던 읍내리 361-1 번지와 합치된다. 그러므로 덕 산현의 옥사가 있던 자리는 옥담 안 집이 있던 362-2번지와 옥사 관리사 건물이 있던 363-20번 지와 그 주변의 362-1번지,362-3~5번지,363-27~28번지 등을 포함한 일대의 등근 모양의 지 역이 분명하다고 하겠다(〈그림 2> 참조).
다음으로 규명할 내용은 덕산 동헌 터의 위치이다. 오영환. 박정자는 2009년에 출판한『순교의 맥을 찾아서』와 2011년에 출판한『가족이 함께 가는 성지순례』에서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1799년에 정산필(베드로) 복자,1798년에 원시보(야고보) 복자,1801년에 김사집(프란 치스코) 복자,1866년에 손자선(토마스) 성인 등이 모진 심문과 고문을 당하면서도 신앙을 굳게 증거했던 덕산 관아터의 위치를 현 덕산초등학교가 자리한 읍내리 348-1 번지로 밝혔다.53)
그러나 오영환•박정자는 앞에서 언급한 ‘한국의 성지와 사적지’라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구체적 인 근거를 제시하지는 않았지만,덕산 관아 터의 위치를 봉운로 70-9(읍내리 361-1) 건물 뒤편 공터로 수정하고,그 위치를 표시한 사진을 게시했다(〈그림 1〉). 또한,오세택 기자가 작성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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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이러한 증언은 서종태가 2022년 7월 26일 박태신에게 직접 들은 것이다.
53)오영환. 박정자,『순교의 맥을 찾아서』, 가톨릭출판사,2009, 120쪽; 오영환•박정자,『가족이 함께 가는 성지순례』, 가톨릭출판사,2011, 110쪽.
『가톨릭평화신문』2014년 9월 21일 자에 게재한 기사「복자 124위 순교지를 가다 <14> 예산 순교지」에서도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덕산 관아의 위치를 봉운로 70-9(읍내리 361-1) 건물 뒤편 공터로 밝혔다. 이처럼 덕산 관아 터의 위치를 봉운로 70-9(읍내리 361-1) 건물 뒤편 공터로 보는 견해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124위 시복 법정 개정 당시 윤인규 신부 등이 참여하여 현장 조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확인한 결과물로 여겨진다. 이 결과물에 따라 덕산 관아 터의 위 치를 오영환. 박정자는 ‘한국의 성지와 사적지’라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봉운로 70-9(읍내리 361-1) 건물 뒤편 공터로 수정하고,오세택 기자도「복자 124위 순교지를 가다 <14〉예산 순교 지」에서 봉운로 70-9(읍내리 361-1) 건물 뒤편 공터로 밝히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덕산현 읍성 안의 관아 건물들이 자세히 그려져 있는『1872년 지방지도』에 수록된 「덕산군 지도」를 비롯하여 1895년에 간행된『호서읍지』에 수록된 덕산군 지도(〈그림 6> 참조), 18세기 중엽에 제작된『광여도』와『해동지도』에 수록된 덕산현 지도에서 보아 알 수 있듯이, 덕산현의 동헌은 오른쪽 치우쳐 있었다(〈그림 4〉와〈그림 5> 참조). 반면에 봉운로 70-9(읍내리 361-1) 건물 뒤편 공터는〈그림 1〉에서 보아 알수있듯이 옥터와 같은 방향인 읍성 안 왼쪽에 치우쳐 있다. 그러므로 봉운로 70-9(읍내리 361-1) 건물 뒤편 공터는 덕산현 동헌 터로 보기어렵다.
그러면 덕산현 동헌 터의 위치는 어디일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점은 일제 강점기에 동헌 이 학교로 사용된 경우가 많았다. 또한『1872년 지방지도』에 수록된「덕산군지도」에 배치된 건 물들 가운데 동헌 권역이 현 덕산초등교의 위치와 일치되고(〈그림 2> 참조),아울러 오영환•박정 자가 처음에 구체적인 증거를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동헌 터의 위치를 현 덕산초등학교가 자리한 읍내리 348-1 번지로 밝혔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동헌 터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현 덕산 초등학교의 설립과 발전 파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덕산초등학교 총동창회에서 2003년에 편찬하여 출판한『덕산초 90년사(1912~2002)』를 참고 하여 덕산초등학교의 연혁을 정리하면 아래의〈표 9>와 같다. 이 표에서 보아 알 수 있듯이 덕산 초등학교의 역사는 1909년 12월 27일 설립된 1학급 4년제 사립덕풍학교에서 시작되었다. 이 사 립덕풍학교는 1912년 3월 19일 사립덕산보통학교로 학교명을 바꾸어 인가를 받았고,1912년 11 월 8일 덕산공립보통학교로 전환하여 인가를 받았다. 이어 1912년 12월 12일 사립덕풍학교 1회 졸업식을 거행하고,1913년 1월 13일 사립덕풍학교 시대의 학생 32명을 수용하여 수업을 개시했 다. 1914년 4월 2학급으로 편성하여 운영하고,1915년 4월 3학급으로 편성하여 운영했다. 그리 고 1915년 9월 덕산군 청사를 양도하여 2학급 교실을 증축하고 종전의 교사로부터 이전했다.
이상에서 살펴본 덕산초등학교 연혁에서 주목되는 사실은 1909년 사립덕풍학교에서 시작된 덕산공립보통학교의 교사를 1915년 9월에 덕산군 청사를 양도받아 2학급 교실을 증축하고 종전 의 교사로부터 이전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1909년 1학급으로 시작된 학급 수가 1915년 4 월 3학급으로 늘어나면서 교실이 부족하게 되자,1915년 9월 덕산군 청사를 양도받아 교사로 개 조하고 여기에 2학급 교실을 증축하여 교실을 늘린 뒤,학교를 원래 자리에서 교사로 개조하고 증축한 덕산군 청사로 옮겼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덕산군 청사는 덕산현 동헌을 뜻하므로 덕산현 동헌 터는 원래 자리에서 옮아간 교사가 위치했던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새 교사는 1917년 8월에 옆으로 교실 1개를 증축하고,또 1991년 11월에 서편으로 교실 2개를 증축했다 (〈표 9> 참조).
그런데 현 덕산초등학교 교사 두 동은 2000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그 이전의 교사는 지금의 교사 앞쪽에 자리하고 있었는데,2000년에 교사를 새로 지으면서 이전의 교사를 철거하고 그곳 을 운동장으로 만들었다고 한다.대) 그러므로 덕산 동헌 터의 위치는 현 덕산초등학교 교사 앞에 있는 운동장,즉 이전의 교사가 자리하고 있던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덕산초등학교가 자리하고 있는 곳은 읍내리 348-1 번지인데,이 읍내리 348-1 번지를 다 음 지도에서 검색하면,아래〈그림 7〉에서 보아 알 수 있듯이,매우 넓은 지역에 걸쳐 있다는 사 실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매우 넓은 덕산초등학교 부지가 단일 번지로 되어 있는 것은 1915년 9 월에 덕산군 청사를 양도받아 학교를 원래 자리에서 그곳으로 이전했음을 뒷받침해 준다고 하겠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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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이러한 내용은 덕산 윱내리 토박이인 박태신이 2022년 7월 27일 증언해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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