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의에서 연극으로>
-가면극과 마당극을 이해하는 하나의 시선-
1. 인간의 삶은 수많은 체험으로 구성된다. 하지만 그러한 체험이 진정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표현되고 구성되면서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어야 한다. 하나의 집단 속에서 각자의 체험 특히 특별하고 강렬한 체험은 ‘이야기’의 형식을 띠고 계승되거나 공연의 방식으로 이어진다. 체험을 공연하는 것은 과거를 복원하면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일 뿐 아니라 미래의 삶에 대한 방향과 목표 그리고 계획을 만드는 것이다. 원시 공동체를 비롯하여 다양한 사회에서 발견되는 ‘제의’는 ‘공연’의 형태를 통해 사회의 혼돈과 위기를 극복하고 교정과 통합을 추구하는 다양한 요소가 숨겨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삶의 체험은 공연이나 연극적 제의를 통해 재현되고, 다시 제의와 공연은 인간의 삶에 영향을 주는 순환적 구조가 존재하는 것이다.
2. 상징인류학자 빅터 터너는 『제의에서 연극으로』에서 사회구조 속에서 발생하는 특별한 변화를 야기하는 사회적 사건을 ‘사회극’으로 명명하고 그것이 어떻게 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사회를 재구성하는가를 민족지적 관찰 방법을 통해 탐색한다. 그는 ‘통과의례’에서 기존의 관계 및 공간과 단절하고 새로운 영역으로 이동할 때 발생하는 위험과 불안을 제의적 형태를 통하여 안정감을 부여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하면서 사회의 거대한 변화를 야기하는 위반과 위기 현상에서도 ‘제의’와 ‘법’은 혼돈을 막고 안정과 재통합을 이루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3. 터너가 발견한 사회극의 단계는 위반, 위기, 교정, 재통합(또는 분열)이다. 하나의 사회는 필연적으로 갈등과 충돌이 발생하고 특정 세력에 의한 위반이 시작되면서 사회의 위기가 확장된다. 위기가 점점 커져나갈 때 공동체의 교정세력은 제의적 형태나 법을 활용하여 갈등을 봉합하고 분열을 극복하려 시도한다. 이때 교정세력이 활용하는 것 중 하나가 설득과 선동의 수사학을 예술적으로 발전시키는 제의의 공연적 방식이다. 제의적 공연은 근본적으로 사회적 갈등의 뿌리를 해결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불안과 공포의 심리를 안정시켜주거나, 사회 전체에 해를 끼친 것들을 상징적 행위를 통해 제거하거나, 때론 희생양을 선정하여 그것을 사회로부터 추방함으로써 사회의 불안을 소멸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상징적 행위는 공연의 방식으로 표현된다.
4. 터너의 사회극 단계에서 제의적 ‘공연’의 중요성은 그것이 사회적 체험 속에서 만들어지는 위반과 위기의 ‘불확정성 상태’를 교정하고 사회를 다시 재통합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체험은 이야기의 형태를 구성하고 공연의 방식으로 재현되면서 사회적 갈등은 예술적 양식으로 전환된다. 그리고 그렇게 표현된 예술적 양식은 다시 사회적 심리구조에 반향적 영향을 주는 것이다. 터너의 인류학적 개념에 기초했을 때, 제의에서 연극과 같은 공연으로의 전환은 사회의 갈등과 충돌에 대한 공동체적 관리 방법의 하나로 활용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공연인류학’은 이러한 인간의 공연을 탐구하여 그 속에 담긴 사회와 인간의 상호작용을 파악하는 것이다.
5. 터너의 ‘사회극’이론에 기초하여 한국의 가면극과 그것을 계승한 마당극의 성격을 본다면 사회집단의 갈등에 대한 조정현상을 관찰할 수 있다. 가면극은 농촌 지역의 마을굿에서 시작되었는데, 마을굿은 마을의 풍요와 안녕을 비는 집단적인 제의였다. 이러한 제의 중에서 민중들과 갈등을 겪는 양반이나 승려들을 풍자와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그들에 대한 공격을 공연의 방식으로 표출시킴으로써 비록 근본적인 문제 해결까지는 이르지 못했어도 일시적인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함으로써 공동체의 존속에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사회적 갈등에 대한 민중의 의식이 강화되고 심화됨으로써 가면극의 내용도 점차 공격적으로 변하게 되었는데 이 또한 갈등에 대한 대응정도가 달라졌다는 것을 암시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때, 가면극에 대한 전면적 금지는 그동안 문화적, 공동체적으로 가능했던 위기의 관리가 가능하지 않게 되었다는 점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6. 70-80년대의 마당극의 등장은 사회적 위기가 극단적으로 연극의 형식으로 재현되던 실험이었다. 터너는 교정의 단계에서 효과적으로 제통합의 단계로 이전하거나 때론 교정이 실패하여 분열의 단계로 전환하기도 한다고 했다. 마당극의 실험은 사회적 갈등을 극명하게 표출시킴으로써 사회적 의식을 고취시켰고 직접적인 행동의 도구로 활용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형식적이며 행동적 방식은 극의 예술적 심화에는 부정적 영향을 주었다. 마당극의 예술적 깊이는 실험되지 못했고 갈등조절의 형태는 축소되었으며 문화운동적 요소가 너무 강조됨으로써 대동굿의 형태로 전환되었다. 연극에서 보여줄 수 있는 다양한 실험적 요소를 포기하고 너무도 쉽게 집체적 공연방식으로 이동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마당극에 내재해 있던 ‘갈등의 통합적 역할’은 더 이상 효과를 발휘할 수 없었다.
7. 터너의 이론에 기초하여 한국의 가면극과 마당극을 평가할 때, 그것은 사회적 위기에 대한 효과적인 반응과 교정의 역할을 사회지도충이 아닌 민중이 담당했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회적 갈등을 민중의 주체적 행위를 통해 극복하려 시도했다는 점은 그것이 때론 체제친화적인 수동적 행동으로 흘러가거나 반대로 극단적인 분열을 선동했을지라도, 근본적인 목표는 최대한 공동체를 보전하면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특별한 태도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가면극과 마당극의 저항적, 민중적 성격 뿐 아니라 공동체의 지속적인 안정과 질서의 재구성을 향한 치열한 노력과 의지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첫댓글 - "삶의 체험은 공연이나 연극적 제의를 통해 재현되고, 다시 제의와 공연은 인간의 삶에 영향을 주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