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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집회 설교)
1장 1절-5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왜 이 세상을 만드셨느냐? 성도의 영적인 면에서 이룰구원을 염두에 두시고, 이걸 근거로 하고 눈에 보이는 세상을 만드셨다.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 살면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이 마음을 알게 하려고 만물을 지은 것이니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고, 먹고 마시고 하는 모든 것을 경험을 하면서 그 분의 이 마음을 생각하는 것이 신앙이요 깨달음이 되는 거다.
눈에 보이는 것은 언제 사라져도 한 순간에 사라지고, 세상 마지막이 되지 않아도 지금까지 내 눈앞에 있었는데 한 순간에 사라지고, 어제까지는 있었는데 오늘 아침에 보니 사라진다. 순간이다. 그러면 순간에 사라지는 것들을 왜 만드셨느냐?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다.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과 속성을 입는 것을 말하는데, 이 구원을 입게 되면 희로애락을 느끼는 마음이 풍성해진다. 그러니까 우리로 이 세상에 살도록 한 것은 깨닫고 하나님처럼 마음이 풍성해지라는 거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성경 66권의 맨 처음에 이 말씀을 하셨는데, 이게 무슨 뜻이냐? 이 말씀이 모든 성경의 뚜껑이라는 거다. 이걸 전제로 하지 않고는 모든 성경을 깨달을 수 없는 거고, 온전치 못하다는 거다.
‘태초.’ 이 태초가 언제의 태초냐? 말하자면 몇 년도를 말하는 거냐? ‘태초’ 라는 이 말은 몇 년도를 얘기하는 게 아니라 옛날예기를 시작할 때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에’ 라고 하면서 시작을 하는데, 여기서의 ‘옛날’이란 몇 년도를 말하는 게 아니라 아주 오래 전의 일이라는 것이고, ‘어떤 일의 처음에 그랬다네’ 라는 뜻이듯이 여기서의 ‘태초’는 어떤 일의 시작을 의미하는 거다.
그런데 창세기를 보는 사람들 중에는 2절에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라고 한 것을 근거로 하나님께서 태초의 첫 날에 빛을 만들기 전에 이미 땅이 있었다고 하면서 시간적인 개념으로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니까 이건 무엇처럼 보는 거냐 하면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계신 것처럼 땅도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아니라 언제부터인지를 모르지만 혼돈하고 공허한 상태로 이미 있었다는 식으로 말을 하는 거다. 그러면서 3절의 빛을 첫째 날에 처음으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이걸 어떻게 생각하느냐?
2절의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한 이것도 1절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는 속에 들어있는 거다. 혼돈하고 공허한 땅이 하나님처럼 이미 존재하고 있었고, 첫째 날에 빛을 만들었다고 생각을 하면 안 된다.
그런데 하나님이 천지를 만드셨는데, 여기서의 ‘하나님’이란 복수형의 말로서, 이 말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하나님을 의미하는데, 이 삼위의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분이다. 우리 인간의 표현으로 ‘영원 전서부터 영원까지’란 한 마디로 영원무궁이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는 거다. 그러면 사람도 영원부터 영원까지냐? 아니다. 시작한 날이 있고 죽는 날이 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을 복수형으로 말씀을 하셨을까? 왜 성부 성자 성령이 들어있는 말씀을 하셨을까? 그것은 첫째는 하나님께서는 인격적 속성을 가졌다는 의미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인격자이신 하나님이시니 인간 우리를 만드실 때도 당신처럼 인격자로 만드셨구나’ 하는 것이 전제가 되는 거다.
그 다음에 세 번째는 인격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은 인간은 온전케 되려면 성부 성자 성령의 활동이라야 된다는 거다. 그래야 사람의 온전이 된다. 즉 그래야 성령의 사람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신령천국에서 하나님과 같이 살게 된다는 거다. 네 번째는 인간이 인류 역사 속에 태어나서 마지막 그날까지의 모든 역사 속에 복수형의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활동하시는 역사가 들어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고 성경이 시작이 되는 거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한 것을 ‘하나님께서 산천초목 자연을 다 만들었구나’ 이렇게만 생각하지 말고 좀 더 폭넓게 천지를 만드실 때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활동을 하셨는데, 왜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활동을 하신 거냐? 특히 인간을 만들 때 ‘우리의 모양과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자’ 라고 하셨으니, 인간 자기의 존재를 안 믿는 사람들처럼 생각하지 말아라. 이건 불신이다.
‘창조하시니라.’ 창조는 무(無)에서 유(有)에로이다. 아무 것도 없는 데서 창출해 내서 눈에 보이는 것을 만들었다. 왜냐? 우리의 구원의 깨달음을 주기 위해서다. 하나님은 만능의 능력자시다. 만능의 능력자가 아니면 창조를 못하는 거다. 만능의 능력자는 우리 인간처럼 계산도 다 할 수 있고, 미래도 다 내다볼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의 표현으로 하나님은 만능의 능력자시니까 모든 만물을 순발적 순간적으로 우리의 구원에 적합하게 딱 들어맞게 지으셨고, 또한 그 효력성이 영원히 가도록 만들어 놓았다.
집을 지을 때 집부터 지어놓고 그 다음에 길을 내려고 했는데, 길을 내려고 하는 땅의 주인이 그 땅을 안 팔겠다고 하면 어떻게 되느냐? 길도 없는 땅을 사서 그곳에 집을 짓겠다고 하면 우스운 일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어그러지는 일을 할지라도 만능의 능력자 하나님께서는 하시는 모든 일이 우리의 구원에 딱 맞도록 하신다.
무에서 유에로 만드신다고 하는 것을 창조만으로 보지 말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창조를 하신 것인데,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하나님께서 돌발적인, 깜짝 놀랄, 홀연히 그 역사를 하신다는 거다. 인간의 생각에 들지를 않는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돌발적인 역사를 하신다. 나의 구원을 위해서 그 역사를 하신다. 이런 면에서도 만능의 능력자시다. 그러니까 믿는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하되 닫힌 머리로 생각을 하지 말아라. 하나님 쪽은 열어둬라. 닫아놓으면 못 쓴다. 닫아놓으면 사람이 답답하고 좁고 힘들다.
사람이 어떤 일을 할 때 그 하는 일이 순서가 안 맞고 이치에 안 맞으면 그걸 보는 사람이 참 답답하다. 말에서도 이치가 안 맞으면 굉장히 답답하다. 이게 인격자의 세계다. 안 믿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은 전부가 답답하다. 왜냐? 소원 목적이 변질되고 불타는 세상에 두었으니 이런 사람들의 모든 이해타산도 거기에 자꾸 맞춘다. 그러니 마음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붙어있지를 않는다. 우리가 특히 주의할 것은 이런 사람들과 돈 약속하지 말아라. 큰일 난다.
하나님의 창조는 무에서 유에로다. 이건 전제를 하고, 이처럼 세상만물을 무에서 유에로 창조하신 것은 나의 구원을 위해서다. 나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순발적으로 순간적으로 무엇이든지 하시는 분이로구나. 나의 구원을 위해서 순발적 순간적으로 하시는 하나님을 안 믿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안 믿는 거다.
세상을 누가 만들었느냐? 하나님께서 당신의 주권으로 만든 것이지 누구와 의논을 해서 만든 게 아니다. 우리가 이걸 믿는다면 평소 때도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 중에는 이 주권은 안 믿는 신앙이 허다하다. 이게 뭐냐? 하나님의 주권은 무시하고 자기 계획을 자꾸 놓는다. 이건 ‘아, 이 사람은 주권을 안 믿는구나’ 이렇게 되는 거다. 이건 불신이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우리를 위해서 창조하심을 믿고 들어가는 여기에서 신앙심도 들어가는 거고, 무슨 일도 들어가는 것인데, 목사님들 중에도 보면 그러지를 않고 자기 꾀로 ‘먼저 돈부터 딱 준비해 놓고 주의 일을 하겠습니다’ 라고 하는 사람이 많다. 이건 주님을 믿고 주의 일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돈을 믿고 주의 일을 하겠다는 거다. 목회를 하는 능력은 누가 주는 거고, 목회의 길은 누가 열어주는 거냐? 하나님이 하시는 건데, 이런 목사는 이걸 안 믿는 거다. 돈만 있으면 건물을 사든지 세를 얻든지 해서 목회를 할 수 있는 것으로 아는 거다. 이건 아니다. 목회는 하나님의 말씀의 정신을 다 닦고 나와야 하는 거다.
주님이 제자들을 전도를 보낼 때 ‘뭘 가지고, 뭘 가지지 말고’ 라고 하실 때 ‘전대를 가지지 말라’고 하신 것은 전도를 하는 게 물질로 되는 게 아니라 주님이 전도하신 그 정신 사상을 가져야 된다는 말인데, 요즘 목사님들을 보면 돈을 염두에 두고 목회를 하려고 하니 이건 목회상이 아니다. 목회의 정신이 아니다.
목회를 하려면 골고다 길을 배가 고파도 올라가야 되느냐? 굶어도 올라가야 되느냐? 개인적으로 그렇다면, 식구들을 데리고 갈 때도 가난할지라도 주님이 가신 그 길을 가야 하느냐? 죽어도 가야 하느냐? 그런데 ‘이 길로 가다가 네가 죽는다’ 라고 하면 목회자라고 하는 사람이 다른 길로 가버린다. ‘그곳으로 가게 되면 자녀가 좋은 학교에 가기 어렵다’고 하면 그런 곳에는 가지 않으려고 한다. 목회상은 이런 게 아니다.
‘나보다도, 누구보다도 주님을 더 사랑하느냐?’ 이게 있지 않느냐? 세상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해가 안 되는 삶이지만 목회자는 이런 길을 가는 거다. 인간의 이해 속에서 목회의 길이 되는 게 아니다. 목회라고 하면 의례히 돈 목회를 생각한다. 돈이 목회를 하는 줄 안다. 이런 정신으로 목회를 하다가 어떤 일로 해서 죽는다고 할지라도 이건 목회자의 기본정신도 아니고, 순교도 아니고, 제도 속에 든 거고, 인간 자기 생각 속에 든 거다.
창조는 무에서 유에로. 이처럼 무에서 유에로 만물을 창조하신 것은 당신의 만능의 능력을 우리의 구원을 위해 쓰시겠다는 신호다. 말씀 한 마디로 세상을 만들었다는 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너를 위해서 만능의 능력을 쓰시겠다고 하는 신호다. 이 면이 믿어지느냐? 그리고 ‘천지’란 하늘과 땅만이 아니라 시간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말하는 거다. 존재, 물질, 환경, 사시사철의 환경, 하나님의 주권섭리와 보존이 다 포함이 된다.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는 말은 시간 속에 들어가는 것은 다 포함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다 포함이 된다. 창세기의 천지창조 때 만들어 놓은 것이 요한계시록 속에 있지 않느냐? 그러니까 다 포함이 되는 거다. 세상만사의 구석 구석마다, 사건 사건마다, 환경 환경마다, 그리고 성경 구구절절 속에 하나님의 주권섭리 보존이 들어있으니 만물 속에서,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이 주권을 보는 자가 믿는 사람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런 걸 생각을 잘 못한다.
이방종교는 교주는 있지만 천지 창조주는 없다. 그리고 학계에서 말하는 진화론은 우리로서는 용납이 되지를 않는 거다. 그 어떤 이론으로 진화론을 말을 할지라도 용납이 안 되는 거다. 진화론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마치 물 속에 살던 생물이 ‘이제 물 속에 살기 싫다’ 하고 물 밖으로 나와서 점점 발전을 해서 새가 된다든지 동물이 된다는 식인데, 이게 말 같은 소리냐?
그리고 공룡은 몸집이 너무 커서 지구환경에 적응을 하지 못해서 멸종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공룡의 입장에서 ‘내가 몸집이 너무 크면 먹을 것이 점점 없어지고 배가 고파서 죽겠구나’ 라고 생각을 해서 자기 몸을 점점 작게 만들면 멸종이 되지 않을 텐데, 진화론자들의 말대로라면 몸집이 점점 커지는 것이 진화이니 이게 말이 되느냐?
여러분들은 사람인데, 사람이 계속 진화가 되면 뭐가 될 것 같으냐? 진화론으로 말한다면 ‘사람’이 계속 진화를 하면 ‘오람’으로 되는 거냐? 사람은 머리 앞쪽에 눈이 두 개가 달려있기 때문에 뒤에서 차가 오는 것을 모르니까 ‘뒤에도 눈이 있으면 좋겠다’ 라고 하면서 계속 진화를 하다보면 머리 뒤에도 눈이 생기는 거냐? 원숭이가 진화를 해서 지금의 사람이 된 거냐, 아니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지금의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만든 거냐?
생태계는 동식물이고 간에 환경에 적응을 하다보면 외모 외형은 어느 정도 변화가 있을 수 있는 거지만 이건 하나님께서 법칙적으로 만들어 놓은 생태계가 거쳐야 할 순서일 뿐이지 진화는 아니다. 많은 사람이 떠들면 이치도 아닌 주장임에도 그게 그만 정확한 것으로 아는 것은 정상적인 생각이 아니다. 쉽게 말하면 미쳤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만물을 창조하신 것을 예를 들면 집을 짓는 사람이 먼저 그 집의 설계도를 그리고서 그 설계도대로 집을 짓듯이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짓기로 설계를 하시고 그대로 지은 것은 인간 우리를 하나님의 성품의 사람으로 만드시려는 목적을 위해서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성품의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해서 항상 설계도를 가지고 다닌다.
집을 지으려면 ‘기둥은 몇 개, 석가래는 몇 개’ 하면서 모든 것을 빠짐없이 설계도대로 다 준비를 하듯이 우리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에 두시고 ‘이를 위해서 이런 이런 사건의 재료가 필요하고, 또 한 시간이 지나서, 또 몇 시간이 지나서 이런 이런 사건의 재료가 필요하다’ 해서 이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준비하시고 동원하시고 그대로 진행을 하시는 거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모든 성경이 한 마디로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려는 이게 들어있다. 세상도 이를 위해 만든 거다. 믿는 사람이라면 성경을 통해서 이 사실을 깨닫고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만물을 여기에 합당하게 쓸 줄을 알아야 한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자기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온전을 위해서 만물을 합당하게 쓰는 이것이 이방인들의 삶과 다른 거다. 소원도 목적도 다르고, 먹는 것도 다르고, 밥은 같이 먹지만 먹는 정신이 다르다. 일하는 정신도 다르다.
우리의 온전을 위해서 삼위 하나님께서 역사를 하시는데, 이 일을 위해서 말하자면 성부는 설계자시요, 성자는 설계의 실천자시요, 성령은 감화 감동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속성을 입히시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영육 결합체의 인간이 사지백체와 오장육보, 오각과 오감성 모두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 역사에 순종해 나갈 때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닮게 되어있는 거다.
성도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는 것은, 하나님을 성품을 입는다고 하는 것은 창세기에서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라고 했듯이 성도 속에는 하나님의 성품을 닮게 하시려는 성부 성자 성령의 역사가 들어있으니 하나님의 이 뜻을 잡고 사는 것을 말한다.
이제 여러분들의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 느껴지느냐? 이걸 생각해 봐라. 그러니 이제는 세상을 따라가지 말아라. 그럼에도 여전히 ‘어떻게 먹고 마시고 사나?’ 하고 있다면 뭔가 말귀를 못 알아듣거나 뭐가 문제가 있구나.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