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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說 허준(許浚) 第88話>
- 이은성 지음 / 소설 동의보감
免賤 第二
양예수의 핏기 가신 안색이 떨고 있었다.
내의원 정청이 정적에 빠져들고 있었다. 모든 눈과 입이 얼어붙어 있었다.
이때였다. 진숙궁에서 공빈의 시중을 들던 노상궁과 임금 선조를 수행하던 노란 눈을 한 꺽다리 내시가함께 엎어질 듯이 굴러들어오며 숨가쁘게 소리소리 질러대기 시작했다.
"형벌을 멈추시오! 병자가 나았소 이다."
"병자가 나았으니 형벌을 멈추시오."
일동이 모두 두 사람을 둘러쌌고 정작이 고함쳤다.
"병자가 나았다니?"
달려온 둘은 그 정작도 양예수도 무시한 채 꿇은 허준을 부축해 일으키며 허준의 두 손을 싸쥐었다.
"병이 나았습니다. 공빈마마 아우님의 병이 깨끗이 나았습니다!"
갑자기 누군가의 입에서 환성이 터졌고 흥분한 얼굴들이 몰려들었다.
왕사인 내시가 거푸 말했다.
"어서 가십시다. 상감마마께서 몸소 부르고 계시오이다!"
오히려 이 마당에서도 냉정한 것은 허준이었다.
"병자가 어떻게 나았는지 그 증상을 말해주오!"
노상궁이 달려온 숨찬 호흡에 아직도 흥분을 담아 빠른 어조로 말했다.
"의원께서 돌아간 뒤 격분한 병자가 속았다 하며 스스로 얼굴의 침을 뽑아던지고 밀어놓은 밥상을 당겨 음식을 먹었습니다. 도저히 말릴 기세가 아니었고 또 술까지 가져오라 고래 고함을 질러댔는데 그 입놀림 끝에 불현듯 보니 얼굴은 어느새 온전한 모습이 되어 있었사옵고 눈알도 제 모습이었더이다. 이에 놀란 공빈마마께옵서 양볼을 이리 땡겨보고 요리 땡겨도 제 모습이었더이다.
의원이 말하던 가슴 밑 딴딴한 멍울도 어느덧 만져지지 않사옵고 그때 상감께서 납시어 자초지종을 들으신 후 공빈마마와 함께 병자의 흔적을 수십 번 확인한 끝에 그제야 나았다 믿으시고 의원을 부르라 하시어 어명을 받들어 달려오는 길올시다."
"똑똑히 가슴 아래 멍울이 없더이까?"
"거푸 말하오나 괴질의 흔적을 만져본 건 소인뿐이 아니라 상감께오서도 손수 어수를 대어 확인하오시고 공빈마마께오서도 만져보았는데 신기하다 놀랍다 하시며... 어서 어서 가십시다."
허준이 얼굴을 싸고 꿇었다.
그 입에서 터져나온 건 유의태의 이름이었다.
"스승님 ..."
허준의 울음 앞에 잠시 숙연하던 내의원 정청이 다시 숨을 돌리며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술렁거림은 곧 환호로 이어졌고 이제야 환호를 지르는 사람들의 숫자로 보아 양예수는 고립되어 있었다.
"전하께오서 기다리시오니 더 지체하지 마오."
내시가 허준의 팔을 잡고 채근했다.
허준이 고개를 들었다.
그 눈에 먼저 들어온 건 쓸어안을 듯이 눈앞에 다가서 있는 정작의 얼굴이었고 그 얼굴 곁으로 이공기와 이명원의 얼굴도 있었다. 이공기가 자기 일처럼 감격해 울고 있었다.
그토록 냉정한 정작의 눈에 물기가 어린 채 화안히 신뢰의 미소를 담아 웃고 있었다.
"속히 가오. 가서 그대의 처방 결과를 그대의 눈으로 확인해야 하리."
이공기와 이명원이 자기 일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허준이 이제야 아직도 서 있는 양예수에게 아뢰었다.
"소인 물러가도 되오니까?"
양예수는 입을 열지 않았다.
두 다리를 떨고 있었다.
이미 그 존재는 허깨비처럼 공허했다. 모두의 시선이 오로지 허준에게만 향해 있었다.
"소인 물러가도 되오니까 ..."
양예수는 말없이 돌아서 정청에 오르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으로 사라졌다.
김응택도 갈 바를 모르고 어기적거리다가 뒷전으로 물러났다.
"속히 가보시게."
정작이 상급자의 모습으로 말하자 내시가 허준을 이끌듯이 하며 앞장섰다.
"다녀오게."
"다녀오오."
이공기와 이명원이 허준의 뒤를 몇 발 따라가며 격려했다. 허준의 모습이 정청 밖으로 사라졌을 때 미사가 달려나왔다. 소식을 들은 의녀 하나가 재빨리 갇혀 있던 그녀를 끌어내온 것이다.
"너도 쫓아가거라. 허의원과 함께 너도 병자의 수발을 들었으니 함께가 마땅하지 않느냐."
미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기뻤다. 그러나 문득 불안도 했다. 허봉사의 성공은 다시 옛날 혜민서에서 처럼 자기와 허봉사가 함께 일할 기회가 끝날지 모른다는 불안이 그녀의 가슴으로 밀려들고 있기 때문이었다.
허준은 더 돌아보지 않고 멀어지고 있었다.
그때 또 두 사람의 내시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자기도 부르는 것인가?'
그 미사의 기대 속에 달려온 내시 두 사람은 눈에 익었다.
상감마마의 거동을 조석으로 수행하는 신체 우람한 내시들이 었다. 허의원을 천거한 정판관을 찾아 그 내시들은 정작과 함께 허준이 사라진 방향으로 다시 급히 사라져갔다.
그러나 그 미사의 쓸쓸함을 아무도 관심할 이가 없었다.
허준을 도와 결연히 나섰던 이공기와 이명원을 둘러싸고 이제야 내의원은 축제 분위기였다
도약사령이 겁도 없이 허준의 손목을 자를 뻔했던 작두를 냅다 걷어찼다. 김응택의 눈이 돌아보거나 말거나 그도 이젠 노골적으로 허준편이었다.
김응택의 눈이 참담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임금 선조가 물었다.
"본관은 양천이라 ..."
"황공하옵니다."
허준이 깊이 시선을 깔았다.
"과인이 그대의 이름을 늘 기억해 두리로다. 의원이라 해도 병자를 다 낫운다 기필할 수 없는 것임에 설사 두 왕자의 외숙이 병이 낫지 아니했다 할지라도 그대의 정근 하는 모습을 과인이 보았고 모두 증언하는 터임에 체벌을 가하는 건 가혹하다 여기던 터인데 입 돌아간 흔적도 바루고 그 괴병의 뿌리를 뽑았다 하니 이토록 기꺼울 수가 없어."
"황공무지 하옵니다."
"허나."
"예."
"하늘이 뛰어난 재주를 내심은 부디 좋은 일에 쓰라는 뜻이니 더욱 정진하여 난병과 괴질에 신음하는 이들을 구하도록 애쓰라
"황공무지 하옵니다."
들어올 제 툇돌 아래까지 내려가 몸소 허준을 맞았던 공빈이 아직도 벌겋게 감격에 상기한 얼굴로 허준을 바라보며 사과했다.
"다시 말하오만 내가 참을성 없는 동생의 말만 듣고 허의원을 오해한 일 용서하시오."
"황공하옵니다. 하오나 ..."
"말하오."
"모습이 돌아왔다 하여 다 나았다 여기는 것은 이른 일이옵고 회복기의 섭생이 까다롭사오니 본인은 물론 간병하는 이들이 감당할 일들이 남았다 여기옵니다
"다 시키는 대로 하리다. 허의원이 하라는 대로. 그 아이도 이 은혜를 평생을 두고 잊지 아니할 게요."
허준이 다시 시선을 깔았다.
병을 낫운 것도 내 힘이 아닌 스승님의 죽음을 대가로 처음으로 반위의 실체를 적발해 낫운 것이 스스로도 더없는 감동을 맛보고 있었다.
밖에서 노상궁이 조신하게 아뢰는 소리가 났다.
김병조가 다른 방에서 옷을 갈아 입고 의원께 감사의 치사를 하고자 기다리고 있다는 전갈이었다.
사랑하는 여자의 기쁨 앞에서 임금 선조도 그 용안을 활짝 펴고 발 밖에 호종해 선 승지에게 일렀다.
"들으니 의관에게 노모가 있다 하니 과인의 기꺼운 뜻을 사찬을 내려 대신 전하도록 하고 의관 또한 여러 날 정근하느라 피곤할 것이라 속히 귀가케 하여 편히 쉴 수 있도록 어의의 허락을 받아주오."
허준이 허리를 굽혔고 선조가 다시 영을 보탰다.
"과인이 본 바도 그러하고 이번 일 의관과 함께 애쓴 여러 인물 들이 있을 것이라 내의원에도 사찬을 내리어 과인의 기쁜 뜻을 전해주오."
이날 내의원은 때아닌 사찬을 감격해하며 한판 잔치가 벌어졌다
너나없이 허준을 화제삼았다. 모두 허준의 시대가 열린 것을 의심치않았다.
... 그랬다.
허준이 쌓아온 의업에 대한 성심과 정열, 집념이 그에게 새로운 인생을 요구하며 시작된 날이기도 했다.
궐내외의 의약과 시탕을 총괄하는 삼의사 중 내의원과 혜민서에 인사 이동이 일었다.
공빈이 두 어린 왕자의 잦은 병치레의 수발을 들 의원으로 애써 허준을 꼽았으므로 허준이 두 품계를 승차하여 종7품 직장이 되어 선임 이명원과 더불어 내국(관내의 약재출납과 내의원 으로부터의 주야 붙박이 파송의원) 근무가 되었고 혜민서로 나간 김응택을 대신하여 내의원 사무를 관장하게 된 정작이 자신의 보좌역으로 지명한 이공기 또한 내의원 근무가 된 것이다.
"네 반골이 우리를 밀어내고 대궐을 차지했다."
양예수를 붙좇으며 다음 대의 어의라는 달콤한 환상에 빠져 있던 김응택은 무참하게 깨진 자신의 꿈 앞에서 공공연히 정작 이하 허준, 이공기, 이명원을 거명하며 그렇게 비방했으나 그 자신 내의원에서 자기 신세가 끈 끊어진 두레박 신세임은 스스로 더 잘 알고 있었다.
아직 어의라는 위명과 함께 양예수가 삼의사 중 최고기관인 전의감에 버티고 있었으나 내의원이며 혜민서의 업무보고가 정작을 거치도록 도제조가 결정 하고서야 양예수야말로 이번 사건으로 가장 외로운 처지로 전락한 셈이었다.
"어의의 소임이 주야로 막중하고 보니 어찌 일일이 아랫것들의 됨됨이까지 고루 살필 수가 있었겠소. 다행히 정판관이 삼의사의 젊은 의원들과 교류가 잦은 듯하니 소소한 일들일랑 정판관에게 떼어 맡기시오."
말인즉 부드러웠으나 그건 지난날 주위의 추천을 묵살하고 허준을 혜민서로 내보낸 질책이었고 도제조 노수신의 그 말 한마디로 양예수는 태산반석처럼 믿었던 자기의 시대가 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물론 전의감은 어의, 태의(어의의 자간역), 수의(발생한 병증에 대한 전문의)들이 왕실에 병자가 발생하면 수시로 회동하는 막중한 기관이다.
그러나 임금과 그 지친이 늘 의원을 필요로 하는 병자들이 아니고서야 위엄은 있되, 왕실에 병자가 없을 제는 전의감의 어의직 같은 한직이 없다.
병자는 없어야 하나 병자가 없음을 한가롭다 투정하는 것은 불경에 속할 것이다. 그 한가로움을 장차에 대비한 의약의 토구에 시간을 보내어 유유자적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바빠도 좋다. 어의라는 서슬 푸른 자신의 권위 앞에 아랫것들이 무시로 찾아들어 이런 일 저런 일 부지런히 아뢰고 지시 받아가고 보고해오는 그 번잡함 속에서야 진짜 살아 있는 자신의 권위가 느껴진다 할 것이다.
더구나 유달리 명예욕이 치열한 양예수로는 갑자기 타의에 의해 바쁜 생활이 거두어지고 날마다 찾아드는 그 한정함은 견딜 수 없는 굴욕으로만 느껴지는 것이다
더구나 내리 세 임금을 받든 삼대의 어의라는, 역대 그 누구도 이루지 못한 영예를 이미 보장 받았다 여겨 추호도 의심 않던 그로서는 오늘 이 지경에 이르게 한 허준이란 존재에 침식을 잃을 정도로 증오심이 끓었다.
허준 따위 어줍잖게 보았었다.
지난날 유의태로부터 받은 수모도 자기 손아귀에 거머잡은 삼대 어의라는 영예로 잊을 수 있었다. 인생의 승리자는 자기라는 확신과 함께 ...
그러나 사태는 역전된 것이다. 오늘 전의감에 고적하게 틀어박혀 있는 자신의 모습은 정작과 허준의 모해에 의해 천애고도에 귀양살이하는 모습에 무엇이 다르랴 싶은 것이다.
집에서 문밖을 나서면 또대궐에서 정청 밖을 나서면 마주치는 얼굴들이 지난날과 다름없이 읍해 물러서고 허리를 굽히는 것은 여일하다. 그러나 어딘가 그 모습 들은 지난날들과 다르게 느껴져서 양예수는 뒤돌아 보기가 불안하다
허리는 굽혔으되 돌아본 순간 그 얼굴들은 이미 고개를 돌리거나 비아냥거리고 있는 얼굴로 바뀌어 있을 것만 같아서다.
"허준이와 의술 경쟁을 한 끝에 어의가 졌다네."
"허준 그 사람의 의술이 어의보다 한두 수 위라네."
들리지도 않으나 자기의 뒤통수에 달라붙은 눈들이 모두 그런 얘기를 하고 있는 듯해서였다.
"차대의 어의는 허준으로 이미 낙점이 찍혔다네."
누웠거나 앉았거나 양예수는 자신의 고막을 울리는 그 환청에 경기를 할 지경 이었다.
'이 양예수 이렇게 끝날 수 없다!'
터수는 틀려도 유일한 말벗이요 입에 혀처럼 충복이던 김응택조차 궐밖 혜민서로 내쫓겨나가고선 이젠 호통칠 부하도 말벗도 없는 자기의 몰락이 또한 미칠 지경 으로 조바심났다.
"기회를 잡아야 해! 내 주인은 공빈이 아니고 상감인즉 상감의 내게 대한 신임이 더 빛 바래기 전에 기어이 다시 한번 기회를 잡아야 하고말고."
늦여름 전의감을 둘러싼 울창한 참나무숲에서 끝도 시작도 없는 소란한 쓰르라미 소리에 딴때없는 적막감을 느끼며 양예수는 앙다물었던 입 안에서 카악! 가래침을 긁어올려 타구에 내뱉었다.
임금이 병이 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온 대궐이 발칵 뒤집히고 숨을 죽이고 주시하는 속에서 자기의 시술에 의해 기적적으로 소생시키는 그 길만이 자기의 운명을 타개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처절한 소망에도 불구하고 청년 선조는 연일 건강했다.
김응택은 절망했다.
내의원 높고 좋은 자리에 있을 때엔 꿈에도 돌아보지 않던 혜민서였으나 석 달째를 넘기면서 그는 이곳에조차 자기가 맘놓고 설 자리가 없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날이면 날마다 새벽부터 몰려드는 병자와 그 가족들이 너나없이 허준과 이공기를 찾는 것이 분해 미칠 지경이었다.
처음 여러 날은 그 두 사람이 궐내로 직처를 옮겨갔음을 애써 태연한 낯색으로 일러주었으나 어디에서 소문을 얻어들었는지 병자와 그 가족들은 두 사람이 없음을 알자 벌써 혜민서에 찾아올 이유가 반감됐다는 얼굴을 했다.
"허준이만 의원이 아니요, 우리도 어엿한 내의원 의원이오!"
더러 다혈질의 젊은 의원들이 진찰패를 받아들자 마자 허준과 이공기의 재실 여부를 물어오는 환자들에게 볼멘 소리를 내질렀으나 허준과 이공기가 베푼 미식(헌신적인 의료행위)을 맛본 병자들은 눈을 부라리는 의원들의 첫인상에서부터 혜민서에 낙망하는 눈치였다.
거기에 미사가 더러 사정이 딱한 병자들에겐 허준의 집 위치를 일러준 뒤로는 아예 혜민서를 젖혀놓고 애고개 허준의 집으로 찾아가는 인수가 많다는 소문도 김응택을 조바심치게 했다.
허준을 능가하지 아니하고서는 어의의 자리를 영영 넘겨볼 수 없다.
김응택은 처음 혜민서에서 수집한 허준과 이공기의 행적을 본떠 병자의 고름도 빨고 퇴청 시각을 무시, 병자의 간병을 위해 밤샘도 해보았으나 하루 이틀도 아니요 날이면 날마다 밀려드는 병자들 앞에선 마침내 의지가 꺾이고 만 것이다.
더구나 누가 주시해주는 이도 없으며 자기를 밀어주던 양예수도 제 코가 석자나 빠진 이 마당에 내일에의 보장도 없는 헌신을 언제까지나 계속한다는 의욕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러나 포기하고 나니 더더욱 앞길이 막막했다.
침에는 누구 못지 않게 자신이 있다 자부하는 김응택이되 자기의 솜씨를 선보일 병자가 왕실 안에 아니 나타나고는 소용없는 일이었다.
또 이미 저토록 요란하게 성망을 드높인 허준이 버티고 있는 한 천행으로 왕실에 병자가 발생했다 한들 그 병자의 입진이 허준을 건너뛰어 자신에게 맡겨지리란 기대는 실현될성 부르지가 않았다.
갑자기 양예수도 밉기 시작했다. 그가 주고자 했다면 벌써 오래 전에 자신의 침술을 드러내보일 기회는 무수히 있었을 터이다.
그가 정작이 허준에게 보이는 관심의 열에 하나만큼, 백에 하나만큼이라도 쏟아주었다면 자기 또한 오늘 이 지경에 이르지 아니했을 터이다.
왕실의 귀한 이일수록 자신이 독식하고 자기만의 명예를 드높여간 양예수의 약삭빠름을 멀잖아 당연히 굴러온 자기의 자리로 여겨 한마디 보채지도 못한 채 참고 지내온 지난날의 자신의 어리석음도 한이 되었다.
'포기를 해? ... '
종5품 판관이면 문무관의 터수로 치면 한 고을의 원이다.
병을 고친 공이 있어야 오르는 내의원의 품계이고 보매 비록 그들과 동격이라 우길 수는 없다 해도 내의원 판관이었다는 관품을 지닌 채 낙향하면 눈먼 재물 따위 꽤나 모을 수 있으리라.
내의원 판관까지 지낸 의원이란 소문 하나로 인근 돈 많은 병자 집에서 다투어 가마를 대령하여 모셔가는 세태인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으므로 ...
그러나 어의를 눈앞에까지 바라보던 그로서는 허준과 의술로 정면대결도 벌이지 못한 채 이제 여기서 포기한다는 것은 너무나 아쉬웠다.
'세상에 병이 반위만 있는 건 아니잖은가!'
그리고 지존이나 왕실에서 반드시 허준이 낫울 수 있는 병만을 앓을리도 없잖은가.
비록 앞으로 허준을 천거하는 주위 인물들이 많을 것이로되 허준이 그 모든 병을 모두 고쳐낸다는 법도 있을 리 없다.
"환고향하는 결심이야 언제든지 늦지 않은 일이니 내게 올 기회를 기다려야 하리!"
가난한 병자들로 악머구리 끓듯 바글대는 혜민서 각 병동의 광경을 흘겨보며 김응택은 그렇게 자기의 마음을 다잡았다.
내국이 관심해야 하는 각전과 각궁에 혹시 병고의 낌새가 없나 두루 저녁 문안을 마친 허준은 하루 해 무탈한 대궐을 감사한 마음으로 돌아보며 퇴청길에 나섰다. 애고개 호젓한 산비탈길은 찬가위를 앞둔 소슬바람이 상쾌했다.
그 허준이 집 앞 개울을 건넜을 때였다.
자기 아들 겸이를 앞세우고 한 인물이 사립 밖에 서 있는 걸 보고 놀랐다. 사신 행차를 따라 명나라에 파견되었던 유도지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근자 스승 유의태의 면영이 가뜩이나 자주 뇌리에 떠오르는 허준은 스승의 혈육이 문득 자기의 눈앞에 나타난 사실에 놀라움을 느끼며 도지의 손을 굳게 잡았다.
"사행이 돌아왔다는 소문은 수일 전에 들은 듯합니다만 수토 불편한 대륙길에 얼마나 고생이 되시었소?"
"관품이 이미 유별한 터에 말 놓아 해도 되오리까?"
"무슨 소릴 하오."
허준이 다시 찬번 유도지의 손을 힘있게 흔들고 집안으로 이끌었다.
계속 ~~
著者, 放送作家 故 李恩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