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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18:8)* 눅 18:31-43절) 십자가로 가는 길 예수님은 지금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을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가십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우리 모든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진노(震怒)의 심판(審判)에서 풀려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너무나 철이 없이,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당장 무슨 좋은 일이 생기는 줄 알고, 들떠서 올라가고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당할 일들을 이렇게 정확하게 알려 주셨습니다.
32-33절)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예수님이 이런 사실을 미리 알려 주시는 이유는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 제자들이 믿음이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즉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이 갑자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구약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언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한 것이 이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미리 알게 하셔서 먼저 마음을 준비하게 하십니다.
물론 그때마다 마음이 상했지만, 그렇게 놀라지 않는 것은 나중에는 축복(祝福)으로 위로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어려운 일을 당하면,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고, 더 큰 상급(賞給)을 기대하게 됩니다.
한편 예수님이 여리고 에서 아주 중요한 두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전혀 중요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이 두 사람이 소중했던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기를 간절히 원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은 맹인(盲人)이요, 다른 한 사람은 세리(稅吏)였습니다. 즉 한 사람은 육신이 병든 자였고, 다른 한 사람은 영혼이 병든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두 사람의 병(病)과 영혼(靈魂)의 병을 모두 다 깨끗하게 고쳐주셨습니다. 이 두 사람은 이것이 예수님과의 마지막 만남인지를 몰랐지만, 그들은 이 귀한 기회(機會)를 놓치지 않고, 예수님을 만남으로 죄 용서받고, 새롭게 능력 있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를 받을 만한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지, 예수님 앞에서 나를 비참하게 하는 모든 것들을 해결 받아야 합니다.
Ⅰ.예루살렘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 사람들은 앞일을 모릅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자기 앞에 무서운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그 죽음을 피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다 알고 계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무소부재하시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것들을 다 아십니다.
예수님은 자기 앞에 너무나 끔찍한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피하지 않고, 죽음을 향해 걸어가셨습니다. 31-33절)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예수님은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당할 일을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하셨습니다. ①전체적인 개관(槪觀)을 설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인간들에게 당할 일이 구속사(救贖史)에서 어떤 부분에 해당하는지를 먼저 보여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전체적인 흐름은 보지 못하고, 세부적인 사항만 가지고 따지기 때문에 큰 그림을 놓칠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지금 예수님과 제자들이 예루살렘에서 겪게 될 일을 하나님의 전체적인 계획 중, 최고의 절정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이 일이 생략된다면, 하나님의 모든 인류 구원 계획이 무너지게 됩니다. ②구체적이고 세부적인 부분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직접적으로 고난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로마)들에게 넘겨 져서 무자비하게 고문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희롱(놀림)을 당하고. 수치를 당하고. 얼굴에 침 뱉을 당하겠고. 나중에는 채찍질을 당한 후에 죽음일 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앞으로 있을 아주 세부적인 사항을 모두 다 알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이 맨 마지막인데, 그것은 곧 *그러나* 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문(拷問)하고, 죽일 것이지만, 예수님은 삼 일 만에 죽음에서 살아나셔서 인간의 모든 운명(運命)을 바꾸는 대승리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첫 번째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31절 下)말씀하시기를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간에게 응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일류 역사는 뼈대가 있습니다. 사람의 뼈대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사람의 골격(骨格)을 유지해 주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역사에도 뼈대가 있습니다. 그 뼈대는 곧 하나님의 구원 계획입니다.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은 인류의 시작에서부터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너무나 희미해서 사람들에게 잘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이 구원 계획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아브라함 때부터였습니다. 그(아브라함)가 하나님을 믿은 때로부터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한 가족(家族)을 중심으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에서 집단적으로 탈출하여 한 나라가 되었을 때, 성전(聖殿)과 제사(祭祀)를 통해 아주 구체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은 이스라엘 역사 전체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큰 그림으로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신앙적으로 쇠퇴(衰退)하는 단계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더 많은 약속(約束)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장차 오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신데,*고난의 종*입니다. 그가 이스라엘의 구원을 이루시며, 땅 끝까지 구원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구원의 최고 클라이맥스(climax)입니다. 결국 이 하나의 사건을 위해 이스라엘의 그 긴 역사가 필요했고, 이 한 순간을 위해서 오랜 성전(聖殿)제도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만약 이 한 순간 십자가 사건이 이루어 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 계획은 무효화 됩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성취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구속사(救贖史)적으로 잘 설명한 독일의 신학자 오스카 쿨만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구원 역사의 중심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전에는 모든 것들을 준비하는 단계였고, 그 후에는 이 구원을 확장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겪으실 일의 중요성을 아셨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하나씩 이루어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가만히 계신 것이 아니라, 구약 성경의 주최로서 자신이 직접 하나씩 성취하셨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도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고, 체포될 때에도 자진해서 체포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경이 성취되는 것을 어떤 일보다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구약의 제사 제도나 율법 등 모두는 앞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안내판(案內板)이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목적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안내판은 그곳 목적지를 더 자세하게 알려줍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로 가까워질수록 구약 성경은 더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예수님이 당하실 일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럼 구약 선지자들이 예언한 것이 무엇일까? 앞으로 오실 메시야는 *고난의 종*으로 와서 고통을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와야 할까? 그가 왜 우리 때문에 고난을 받아야 할까?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오시지 않고는 인간의 죄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죄는 오직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 직접 오셔서 책임을 지셔야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은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당하실 일들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32-33절)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일이 어떤 것인지를 세부적으로 다 아셨습니다.
요즘 의사(醫師)들은 환자(患者)들이 수술을 받는 과정에서 겪게 될 일들을 상세하게 알려 줍니다. 그래서 환자는 수술의 과정과 부작용에 대하여 어느 정도는 압니다.
예를 들어서 심장(心臟)수술의 경우, 가슴을 칼로 가른 후에 수술할 것과 또 뇌(腦)수술의 경우, 머리를 깎고, 드릴이나 톱으로 두개골을 열고, 수술할 영상(映像)을 통해 압니다. 그리고 완전히 회복하려면, 몇 주나 몇 달이 걸릴 것을 알려 줍니다. 그것을 알고도 수술을 받는 이유는 그래야만 병이 나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산모(産母)의 경우, 진통이 시작되면, 고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도 힘을 써서 아기를 낳아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 산모도 살고, 아기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단순히 죽음으로 끝나는 사건이 아니라, 우리의 죄(罪)를 치료하는 수술이요, 우리의 영혼(靈魂)을 분만(分娩)하는 출산(出産)과 같습니다. 사53:5절)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예수님은 자신이 당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시면서도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운명하신지 삼 일 만에 살아나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심으로 십자가의 고통을 극복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34절)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그들이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충분히 알아듣도록 여러 번 말씀하셨는데도 그들이 전혀 알아듣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 그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고난을 받고, 죽으신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것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무슨 죄(罪)를 지었기에 죽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데, 어떻게 죽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모든 것은 성경의 예언(例言)대로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믿으면 안 되고, 성경을 믿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창조와⇨ 종말, 천국과⇨ 지옥 등)이 성경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 살다가 모두 죽게 됩니다. 구체적으로 언제 어떻게 죽느냐? 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언젠가는 죽게 됩니다. 죽은 후에는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審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모든 인간들의 운명(運命)입니다.
그리고 세부적으로 이 세상에서 자기 능력껏 모든 것들을 누리며, 살다가 죽을 때는 엄청난 고통이 따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우리들은 어떻게 됩니까? 물론 세부적인 사정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분명히 예수 믿는 순간 하나님 앞에서 죄 용서받고 *의롭다*는 판단을 받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이 세상을 살다가 천국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욕심을 위해 살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성도들에게도 죽음의 고통은 있지만, 그 후에는 영원한 천국의 상급(賞給)이 기다리고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후5:1O절)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善)악(惡)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자신의 인생을 개관적(槪觀的)으로 먼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림을 그릴 때도 밑그림을 잘 그려야 세부적인 그림을 잘 그릴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밑그림은 이미 예수님이 그려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다만 하루하루를 주님을 위해 성실하게 살아가면, 전체적인 그림이 완성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기 자신을 쳐 복종시켰습니다. 그래서 사망 권세를 깨트리고, 다시 살아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자신의 세상 욕심을 죽이면 죽일수록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Ⅱ.여리고 성의 소경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그냥 올라가신 것이 아니라, 미리 제자들을 보내셔서 자신이 지나가신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여러 곳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열 명의 문둥병자도 있었고. *바디매오*라는 맹인도 있었고, *삭개오*라는 세리장도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은 장차 다윗의 자손이 오시면, 사람들의 모든 병을 치료하시고, 천국 백성으로 만들어 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여리고 성을 지나가실 때, 맹인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35-38절)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한 맹인이 길 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무리가 지나감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은 대. 그들이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하니. 맹인이 외쳐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다같이 :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당시 맹인들은 항상 사람들의 동향(動向)에 대해 관심이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동향(動向)을 알아야 돈을 구걸(求乞)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리고에 오래 전부터 예수님의 동향(動向)에 관심이 많은 한 맹인(盲人)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의 관심이 많았던 것은 돈을 구걸(求乞)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관심은 구약 성경의 내용과 다윗의 자손에게 있었습니다.
구약에 그리스도가 오시면, 맹인이 눈을 뜬다고 약속(約束)하신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사35:5-6절 참조). 예수님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것은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①당시에 맹인이 눈을 뜨게 하는 것은 가장 어려운 치료이므로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기적이었습니다(요즘은 안과(眼科) 의사들이 개안(開眼)수술을 하지만)당시에는 메시야만 하실 수 있는 기적이었습니다. 즉 어떤 사람이 맹인의 눈을 뜨게 했다면, 그는 메시야인 것입니다.
②영적 맹인들의 눈(靈眼)을 뜨게 한다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영적(靈的)으로 눈이 멀어서 하나님을 모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眞理)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진리(眞理)에 눈을 뜨게 하시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즉 전에 알고 있던 그 무섭고 두려운 하나님이 아니라,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그를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됩니다(갈4:6).
그리고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잃어버렸던 나의 소중한 가치(價値)를 되찾게 됩니다. 그리고 다음은 진리(眞理)를 따라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영적(靈的) 맹인(盲人)이 눈을 뜨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리고 성(城)의 이 맹인은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 메시야이기 때문에 자기 눈을 뜨게 하실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는 다윗의 자손이 오시면, 자기 백성들의 눈을 뜨게 하신다는 약속(約束)을 들었고, 또 믿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내 눈을 뜨게 하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인 자기가 요구할 당연한 권리(權利)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향하여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해도, 그는 더욱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맹인의 이런 행동은 두 이유가 있었습니다. ①그는 예수님이 자기 가까이 지나가신 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어디 계신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아마 소리를 지르지 않으면, 예수님은 자기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그냥 지나가실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를 불러 주시도록 소리를 크게 질렀던 것입니다. 화니 크로스비 라는 여자는 시골 돌팔이 의사의 잘못 치료로 맹인(盲人)이 되었습니다. 그는 주님이 자기 가까이 오셨는데, 자기가 앞을 보지 못해서 주님을 놓칠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이 찬송가를 지었습니다. 찬송가 279장 *인애하신 구세주여* 비록 앞을 볼 수는 없지만, 내가 소리를 지르면, 주님이 나를 보시고, 나를 불러주신다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②이 사람이 소리를 지른 것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곧 다윗의 자손이며, 메시야이기 때문에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사35:5절)그 때에 맹인이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라는 약속(約束)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예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이것을 요구하는 것을 당연한 권리(權利)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맹인은 39절)앞서가던 자들이 그를 꾸짖어 잠잠 하라.”고 책망해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더욱 크게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들이 상관할 일이 아니라, 다윗의 자손과 자신의 일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를 무시하고, 업신여겨도 *다윗의 자손은 약속(約束)하신 대로 자기를 거절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사람이 *예수님을 귀찮게 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더욱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려면 소극적(消極的)이면 안 됩니다. 적극적(積極的)으로 일대일로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체면과 자존심과 부끄러움을 버리고, 예수님을 향해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보기를 원합니다.* 라고 소리 소리를 질러 기도해야 합니다.
Ⅲ.무엇을 원하는가? 예수님은 이 맹인(盲人)을 부르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십자가에 죽으러 가시면서도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을 한 명이라도 더 만나기를 원하셨습니다. 40-41절)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명하여 데려오라 하셨더니 그가 가까이 오매 물어 이르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이 이 맹인을 부르셨을 때, 다른 성경 막10:50절)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달려왔다”고 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부르셨을 때, 생명의 마지막 기회인 줄 알고, 필사적으로 예수님께 나왔던 것입니다. 그는 외투(外套)같은 것을 챙기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메시야를 만나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이렇게 물어 보셨습니다. 51절)...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우리가 생각하기에 너무나 뻔한 질문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맹인이 무엇을 원하겠습니까? 눈 뜨기를 원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당시는 맹인이 눈을 뜨는 것을 불가능(不可能)한 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막상 예수님 앞에 나온 후, 눈을 뜨게 해 달라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하나님의 메시야가 오시면, 고쳐 주신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맹인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물으신 것은 *너는 내가 누구라고 믿느냐?* 는 질문과 같은 것입니다.
그는 담대히 말하기를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은 *당신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성경의 약속대로 능히 내 눈을 뜨게 하실 수 있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이때, 42절)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 하였느니라.”예수님은 그의 병을 치료하기 이전에 그의 믿음을 받으시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즉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고 선포하셨습니다. 이것은 그의 죄(罪)가 용서되었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 선포와 동시에 그를 잡아매고 있던 질병(疾病)의 올무가 풀리면서 자유(自由)하게 되었습니다.
맹인은 예수님께 돈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를 비참하게 만든 원인을 치료해 주시기를 구했고, 그 즉시 응답을 받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讀者)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고통과 질고(疾苦)를 책임지십니다. 그러므로 나를 비참하게 하는 것은 담대하게 예수님께 부르짖음으로 고침을 받아야합니다. 여러분의 삶을 풍성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 당당하게 요구하십시오.
다른 사람들이 조롱(嘲弄)하거나 비웃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나의 고통을 책임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을 때, 은혜(恩惠)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기도하러 왔지만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아침에 예수님이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느냐? 고 물으실 때, 대답이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냥 우물쭈물 하면, 예수님은 우리를 지나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를 드릴 때마다, 그리고 기도할 때마다, 내가 이번에 꼭 응답 받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준비하고, 기도하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나와의 일대일 관계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이 나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고 물으실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 시시한 것(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구하지 말고, 근본적이며, 가장 중요한 것을 구하여 응답 받는 시간 될 수 있기길 바랍니다. 43절)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찬송가 448장 *주님 가신 길을 따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