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없음의 소리 있음
이혜연
좋아하는 시가 있다. 중당(中唐) 시인 백거이(白居易)와 『비파행(琵琶行)』이다. 한때 비파로 장안을 주름잡았던 기녀(妓女)와의 만남과 그의 명연주를 칠언(七言) 88행(行)으로 풀어낸 시다.
당시 백거이는 강주사마(江州司馬)로 좌천되어 주장(九江)에 내려와 있었고, 그 여인은 퇴기(退妓)로 장사치의 아내가 되어 있었다. 두 사람 다 나락으로 떨어져 실의와 회한에 빠져 있는 상태였다.
어느 가을밤, 손님을 전송하러 심양강가에 온 백거이는 떠나는 이와 배 안에서 술잔을 들어 석별의 정을 나누려니 쓸쓸함이 밀려오는데, 풍류를 아는 그로서는 음악이 없으니 더욱 쓸쓸한 심사가 되었다. 그때 어디선가 비파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소리 나는 쪽으로 배를 저어 가 한 곡조 더 들려줄 것을 간청했다. 몇 번의 사양 끝에 모습을 보인 여인이 비파를 잡고 연주를 시작하려는데, 줄을 고르는 소리에서조차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백거이는 이를 ‘곡조도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정이 느껴진다.'(未成曲調先有情)며 감탄했다.
이어진 연주, 그를 묘사한 백거이의 문장은 명불허전(名不虛傳)이다. 그런데 그중에도 나를 매혹시킨 문장은 따로 있다.
別有幽愁 闇恨生(그윽한 근심 있어 말 못 할 한이 풍겨 나오니)
此時無聲 勝有聲(이는 소리 없음이 소리 있음을 능가함이라)
때론 현란하게, 때론 유장하게 좔좔 흐르던 연주가 어느 순간 샘물이 얼어붙듯 뚝 끊긴다. 그리고 이어지는 잠깐의 침묵, 그 침묵에서 도리어 백거이는 그 여인의 속 깊은 이야기를 듣는다. 최고의 비파 연주로 장안을 들썩이게 했던 여인이 예(藝)하고는 거리가 먼 장사치와 살고 있으니 그 한이 여북했을까. 그 절절한 한을 어떤 소리로 표현해 낼 수 있겠는가. 그저 침묵할밖에. 소리 없음을 만들어 낸 여인이나 그 소리 없음에서 소리를 읽어 낸 백거이나 가히 최고의 예인(藝人)들이라 할 수 있겠다.
동병상련이라고 할까. 당시 백거이가 처한 상황으로 보아 그의 심사도 그 여인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치부해 버릴 수도 있다. 그가 이어진 연주를 들으며 옷소매가 다 젖도록 울었다는 결미를 보면 제 설움이 없지 않았을 거라 짐작이 된다. 하지만 절대적 음감(音感), 절대적 감각이 없고서는 만들어 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는 것이 침묵의 소리다. 어느 순간에 침묵할 것인가를 알아야 하고, 그 시점에서의 침묵이 의미하는 바를 읽어 내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근래 들어 한 젊은 대중가요 가수의 노래를 들으며 나는 그 절대음감을 느꼈다. 절정으로 치닫는 순간에 그가 만들어 내는 잠깐의 침묵들, 오로지 목소리만으로 공명(共鳴)을 더욱 깊게 만드는 무반주 부분들, 그 여백과도 같은 침묵에서 청중은 도리어 전율을 느끼고 깊은 감동을 받는다. 그의 음악적 조예(造詣)가 엿보이는 순간들이다.
나이 먹을수록 친구가 있어야 한다는데 내게는 막역한 친구가 없다. 네 것 내 것 없고, 속속들이 사정을 아는 너나들이 친구를 만들지 못했다. 나를 죄 드러내 보이고 난 후의 허전함, 너와 나 경계 없이 넘나들다 보면 찾아오는 식상함과 지루함, 상허 이태준은 『고독』이라는 수필에서 ’안해와 아기가 옆에 있되 멀리 친구를 생각하는 것도 인생의 외로움이요, 오래 그리던 친구를 만났으되 그 친구가 도리어 귀찮음도 인생의 외로움일 것이다.’ 했다. 친구 사이에도 상허의 ’고독‘과도 같은 거리, 여백이 필요한 것이다. 말없이 앉아 있어도 서로의 속내를 읽을 수 있는 사이. 그러기 위해서는 너를, 나를 속속들이 알면서도 때맞추어 무심하고 침묵할 줄 아는 사려 깊음과 여유를 갖는 게 필요할 터이니 쉽지 않을밖에.
친구뿐일까, 몇 줄의 문장에 내 생각의 모두를 담아낼 수 있는 그런 글을 쓰고, 그 행간의 침묵들을 읽어 낼 줄 아는 독자 몇 사람 가질 수 있다면 더없이 행복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요즈음이다.
출처 : 월간문학
첫댓글 고독
거리
말없음
소리 없는 소리를 듣는 마음...
아~
그렇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