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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예배의 본질적 요소
ⅰ. 오늘날 일부 교회의 예배는 세속화되어 영화처럼 흥행성에 최우선 목표를 두는 경향이 있다. TV가 시청률 때문에 시청자를 즐겁게 하는 저질 오락프로그램으로 도배하는 것처럼, 예배도 교인을 모으기 위해 어떻게 하면 ‘회중이 좋아하는 예배’를 구성할까를 고민한다. 많은 신자들은 예배시간에 많이 웃으면 은혜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웃음 7, 눈물 3’의 비율로 배합하면 대박이라는 영화 흥행의 공식을 예배에도 적용하려 한다. 목회자들도 ‘실컷 웃기고 오는 설교가 좋은 설교’라고 권면하기도 한다. 이 시대의 특징인 가벼움과 얕음이 예배에도 침투되고 있다.
ⅱ. 그러나 두려워해야 할 사실은 우리가 드리는 예배 가운데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가 있고, 받지 않으시는 예배가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아벨의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으셨고, 가인의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셨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예배를 드리되 잘못 예배드릴 수 있다는 것이다. 과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의 특징은 무엇인가? 한비자에 ‘수수방원기(水隨方圓器)’란 말이 있다. 물은 그릇 구조에 따라 모양새를 맞춘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그릇 안에 있는 물의 특성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다. 그와 같이 예배 형식도 시대와 지역, 및 그 밖의 외적 여건에 따라 다소 간에 변모할 수 있다. 하지만 예배의 본질적 요소는 변해서는 안 된다.
ㆍ신령으로
ㆍ진정으로
ㆍ믿음으로
ㆍ기쁨으로
ㆍ감사함으로
ㆍ두려움으로
ㆍ헌신함으로
ㆍ순종의 삶의 결단으로
(1) 신령으로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4:24)
① ‘신령으로’란 헬라어 ‘엔 프뉴마’(성령 안에서)이다.
a. ‘성령 안에서’
ⅰ. 이 말씀은 예배는 인간적ㆍ형식적ㆍ의식적ㆍ물질적으로가 아니라 성령의 임재와 인도하심, 그리고 성령의 뜻을 따라 드려져야 한다는 뜻이다. 예배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성령님이다. 성령님의 인도와 역사가 없는 예배는 죽은 예배이며, 비 없는 구름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드릴 때 가장 먼저 성령님의 감동을 간절히 바라고 기도해야 한다.
ⅱ. 성령님의 가장 중요한 사역은 사람의 영혼을 중생시키는 일과 그들을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로 이끄는 일이다. 성령님은 회개하는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계시하고(고전12:3), 또한 새로 태어난 영혼에게 더 밝은 빛을 비추어 하나님을 온전히 알도록 이끈다. 우리는 성령께서 허락하는 만큼 하나님을, 그리스도를 알 수 있다.
ⅲ. 성령의 감동의 증거는 여러 가지로 나타나지만, 가장 확실한 것은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 중심의 마음으로 단장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배는 나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달래기 위한, 나의 축복을 위한, 나의 재미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예배드릴 때 우리가 마음의 안정과 평안과 기쁨, 그리고 기타 축복들을 얻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예배의 우선적 목표는 아니다. 예배는 본래 하나님의 것이다.
ⅳ. 이블린 언더힐은 1928년에 영국 국교회(성공회)의 성직자 총회에 “우리는 의식적ㆍ무의식적으로 하나님에게가 아니라 인간에게로 눈을 돌리는 종교로 전락해 가고 있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사실 오늘날에 이르러 많은 교회의 예배가 더욱 더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인간 중심으로 되어 가는 경향이 있다.
ⅴ. 우리는 소비지향적ㆍ실용주의적ㆍ자기중심적인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우리 중심으로 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예배도 형식적ㆍ의식적ㆍ물질적ㆍ오락적이며, 쇼(show)적 요소가 점차 많아지고 있다. 성경적 메시지와 십자가 영성보다 인간적인 감성으로 치우지고 있다. 더 많이 자극하고 더 많이 흥분시키기 위한 각종 음악과 영상과 율동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중이다. 성령의 불이 아닌 다른 불 옆에 서서 불을 쬐며 따뜻하게 기운을 북돋우는 방법을 도입하고 있다. 감정적인 흥분을 성령 충만으로 착각한다. 그래서 한 목회자는 “경건하게 예배를 드리는 시대는 끝났다”고 말하기도 한다.
ⅵ. 풍선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은 풍선 속에 공기 대신 공기보다 가벼운 수소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께 올라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 안에 우리를 무겁게 하는 온갖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생각들을 빼어 내버리고 오직 그리스도 중심적인 생각을 다시 채워 넣어야 한다. 육신적이고 세상적인 동기에서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예배가 주는 깊은 평안과 기쁨과 감동을 결코 맛볼 수 없다.
b. ‘영적인 사람’의 특징.(토저)
ⅰ. 행복해지려는 것보다 거룩하고자 한다.
성경은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1:15)고 말씀한다. 존 웨슬리는 “정말 어떻게 해야 거룩해질 수 있을까를 생각지도 않으면서 예배드리거나 기도하거나 다른 신앙행위를 하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의심스럽다”고 말한다.
ⅱ. 하나님과 동일한 시각을 가진다.
성경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고 말씀한다. 영적인 사람은 하나님께서 옳다고 하시는 것을 옳게 여기고, 그르다고 하시는 것을 그르게 여긴다.
ⅲ. 자기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고자 한다.
예수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고 말씀하신다. 많은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따름으로 오는 환난과 어려움을 피하려고만 생각한다. 영적인 사람은 그 결과를 환하게 알면서도 기쁜 마음으로 순종의 십자가를 진다.
(2) 진정으로
‘진정으로’란 말은 헬라어로 ‘엔 알레데이아(en aletheia)’이다. 이 단어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① ‘올바른 교리, 참된 가르침, 진리’의 뜻
ㆍ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바로 안다.
ㆍ하나님 말씀을 예배의 중심으로 한다.
ㆍ성찬식을 병행한다.
a.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바로 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6:6)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6:3)
ⅰ. 참된 예배를 위해서는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시며, 어떤 일을 하셨는지, 그리고 우리에게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를 알아야 한다. 예배에 참석했다고 해서 모두 다 예배를 드렸다고 할 수 없다. 하나님의 존재와 말씀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서 어떻게 참 예배를 드릴 수 있겠는가?
ⅱ.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드릴 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충분히 묵상하며 거기에 계시는 참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한다. 자칫 우리는 자신의 상상으로 만든 ‘가상의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우리는 오직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구체적이고 바른 지식을 얻을 수 있으며, 또한 순종함으로써 체험적 앎에 이를 수 있다.
b. 하나님 말씀을 예배의 중심으로 한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호4:6)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2:11,29)
ⅰ.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예배드려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원하는 예배를 드려서는 안 된다. “네가 원하는 방식대로 예배하라”는 것은 마귀의 속임수다. ‘가인’은 자기 방식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자기 눈에 좋아 보이는 대로 예배드렸다가 하나님께로부터 거절당했다. 물론 예배 형식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다소 변화될 수 있다. 그러나 예배의 내용만큼은 커다란 바위처럼 흔들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ⅱ.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창조된 존재이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인간에게 자신의 뜻을 알리신다. 성경은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2:11,29)라고 말씀한다. 따라서 종교개혁자들은 구교의 ‘미사(성찬식) 중심’의 의식적 예배를 ‘말씀 중심’의 예배로 개혁하였다.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인간에게 매개하는 것은 ‘성례전’ 자체가 아니라 말씀”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 선포로서의 설교가 예배의 중심이 된다.
ⅲ. 말씀 선포는 인간의 생각이나 의도가 아닌 성경 중심적이어야 한다. 로버트 슐러는 교회의 신자들이 줄어들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죄를 지적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슐러의 영향으로 가급적 죄에 대한 설교는 하지 않고 위로와 격려와 축복만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은혜로운 목회’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교회는 누구나 가면 기분 좋은 곳으로 바뀌고 있다. 말씀은 인간의 선호를 따라 가감(加減)해서 선포되어서는 안 된다. 위로와 격려와 축복의 말씀과 함께 책망과 경고의 말씀도 있는 그대로 선포되어야 한다.
c. 성찬식을 병행한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행2:42)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행2:46)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행20:7)
(a) 종교개혁자들은 성찬식을 결코 예배에서 제외하지 않았다.
ⅰ. 그들은 성찬식을 ‘보이는 말씀(visible words)’이라 하여 예배의 중요한 요소로 강조하였다. 개혁자들은 말씀과 성례전(성찬식)을 병행함으로써 보다 온전한 예배, 곧 ‘보고, 듣고, 그리고 모든 이가 참여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했다.
ⅱ.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성만찬은 우리를 예수님과 한 몸이 되게 하며, 또한 그의 실체의 동참자가 됨으로 모든 축복을 누리게 한다”고 말한다. 성만찬은 예배자들이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체험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소속감과 정체성을 느끼고 인식하는 통로이다. 성만찬은 예배드릴 때 예수님과 특별한 만남의 기회이다.
ⅲ. 하지만 ‘떡과 잔’ 자체에 결코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성만찬은 우리를 예수께 인도하는 보조수단이다. 성만찬이 말씀 전파와 분리된다면 그 기능은 끝난다. 성만찬이 우리에게 능력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은혜를 믿음으로 떡과 잔에 참여해야 하며, 또한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시며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도록 구해야 한다.
(b) 주께서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다.
ⅰ. 성경에는 ‘기념하라’는 말씀이 세 번 나오는데 모두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 구약성경은, 이스라엘 자손이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바르고 그 고기를 먹음으로서 구원받은 사건을 강조하며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에 지킬지니라”(출12:14)라고 말씀한다. 한편 신약성경은 예수님의 유월절 성찬식을 상기시키며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고전11:23-26)라고 말씀한다. 또한 주님은 지상에 계실 때 옥합을 깨뜨린 마리아를 가리키며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막14:3-9)고 말씀하셨다. 이 모든 말씀의 초점은 성찬식으로 집약된다.
ⅱ. 그러므로 초대교회는 성찬식을 매주일 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행2:42과 행2:46과 행20:7 등의 말씀이 그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기독교회, 특히 한국교회는 개혁자들의 의도와는 달리 성만찬을 예배의 중요한 요소로 생각하지 않는다. 따라서 성도들은 ‘참여하는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단지 관람자나 청취자로서만 참석하는 예배를 드리고 있다.
(c) 회개로 준비해야 한다.
ⅰ. 성만찬에 참여하는 자는 사전에 참된 회개로 준비해야 한다. 성경은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찌니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고전11:27-30)라고 말씀한다.
ⅱ.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171문
“성찬의 성례를 받고자 하는 자들은 성찬에 참여하기 전에 어떠한 준비를 해야 합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신들의 죄와 부족을, 자신들의 지식, 믿음, 회개, 하나님과 형제들에게 대한 사랑, 모든 사람에게 대한 용서와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욕망, 자신들의 새로운 순종을 검토함으로써, 그리고 깊은 명상과 간절한 기도로 성찬의 은혜들의 실행을 새롭게 함으로써 준비를 해야 합니다.”
② ‘진실함, 순수함, 정직함, 참됨’의 뜻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로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16:7)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대하16:9)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3:5)
ⅰ. 사람들은 예배드릴 때에 장소, 교파, 예배형식, 교회건물 등 비본질적인 것에 관심을 갖는다. 하지만 예수님은 예배자가 하나님 앞에 나올 때에 오직 자기 마음의 ‘진실함’에 관심을 가질 것을 요구하신다. ‘진실함’이란 ‘주님께 마음을 집중시키고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자신의 죄를 있는 그대로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고 그 분께 모든 것을 의탁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우리는 비록 성경의 교리와 예배에 대한 성경적인 방법을 바로 알고 바른 고백의 말을 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진실한 회개와 믿음 없이는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ⅱ. 물론 예배의 형식도 중요하다. 내용이란 어떤 형식에 담기느냐에 따라 그 정체성이 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경계하는 것은 내용보다 형식에 더 큰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개신교의 예배형식은 로마가톨릭교회와 비교할 때 매우 단순하다. 그것은 예배에서 인위적인 요소를 제거함으로 오직 하나님께만 마음을 집중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다음은 장성의 ‘시와 말씀’ 중에 나오는 글이다. “어느 날 너무도 적게 모인 집회에서 누가 왔나 뒤를 돌아보았더니 성령님의 호통소리가 들렸다. ‘이놈아 너만 오면 다 온 거야.’// 그 날 너무나 예리한 말씀 앞에 생각나는 사람 있어 그리로 눈길을 주는데 주님의 일깨움이 들렸다. ‘얘야 나는 너만 은혜 받으면 됐다.’”
ⅲ. 오늘날 미국 교회는 96% 가량의 신자가 교회에 나와서 의자만 따뜻하게 해주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르노와르라고 하는 화가에게 한 사람이 찾아왔다. 그의 손이 불구인 것을 보고서 “그런 손으로 어떻게 그림을 그릴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르노와르는 “그림은 손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그리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하고는 그 손에다가 붓을 붙잡아 매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스 출신인 가수 나나 무스쿠리는 “위대한 가수를 만드는 건 목소리가 아니라 심장입니다. 눈물을 잃으면 가수는 끝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고 말했다. 지휘자이자 작곡가인 레너드 번스타인(1918-1990)은 리허설 때 땀을 뻘뻘 흘리며 단원들에게 “더, 더 가슴으로 연주하세요. 이 음악은 당신의 모든 것을 바칠 가치가 있습니다”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과연 우리는 르노와르가 그림을 그리듯, 나나 무스쿠리가 노래하듯, 레너드 번스타인이 연주하듯 예배를 드리는가?
(3) 믿음으로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니 그 믿음으로 오히려 말하니라”(히11:4)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생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지니라”(레1:1-2)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10:1, 9-14)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믿음으로’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공로를 믿음으로, 또한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찾는 자에게 응답하심을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다.
① 인간의 범죄 이전
에덴동산 시절에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죄로 인한 장벽이 없었다. 하나님은 동산 안을 거니시고, 아담은 그 소리를 들을 정도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가 다정하고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따라서 에덴동산에서의 원초적인 예배는 매우 자연스러웠으며,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대면하여 드리는 예배였다고 할 수 있다.
② 인간의 범죄 이후
ⅰ.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이 자신에게 나올 수 있도록 새로운 길을 열어 놓으셨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에게 짐승을 희생시켜 가죽옷을 입히심으로 인간의 죄와 수치를 가리도록 하심으로 관계를 회복하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3:21) 짐승의 희생은 피 흘림을 통한 속죄를 의미하며,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은 이제 대속의 제물을 통해서만 가능하게 되었다.
ⅱ. 가인의 중대한 잘못은 짐승을 속죄의 제물로 드리지 않은 것이었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신다는 사실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는 자기 식대로 하나님을 찬미하고 예배드리면 된다고 생각했다. 또한 가인은 자신의 죄를 가볍게 생각했다. “별 것 아니야.” 따라서 그는 속죄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반면에 아벨은 하나님께 나아갈 때 자신의 죄를 가장 먼저 다루었다. 그래서 그는 짐승을 속죄의 제물로 드리면서 나아갔다. 하나님께서는 아벨과 함께 그의 예배를 열납하셨다. 아벨 이후 노아 역시 홍수 후에 단을 쌓고 번제를 드렸으며, 아브라함도 가는 곳마다 희생의 단을 쌓았다. 이삭과 야곱도 단을 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
③ 모세 이후
ⅰ.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억압받던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시고 시내산에서 모세를 불러 그 백성과의 만남을 위한 구체적인 규례를 계시하셨는데 그것은 바로 성막제도와 제사제도이다. 제사란 희생의 제물을 드림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의식을 의미한다. 인간은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으며 다만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계시의 말씀을 따라서만 나아갈 수 있다.
ⅱ. 구약시대의 예배의식인 제사법은 장차 오실 예수님의 그림자이다. 예수님은 구약시대의 제사법의 원형이시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심은 모형을 폐하고 실체를 나타내시기 위함이다. 이제 예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 구약의 예배의식은 그 목적을 다 달성하였다. 예수님은 짐승의 희생이 아닌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모든 인간의 속죄를 단번에 완전히 이루셨다. 이로써 우리는 짐승의 희생을 더 이상 드릴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분의 피로 말미암아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히4:16).
④ 예수 그리스도 이후
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다. 성경은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하고 말씀한다. 우리도 누구로부터 불신 당하고 의심 당할 때 가장 큰 슬픔을 느낀다. 인격과 인격의 관계는 믿음의 관계일 때 가장 아름답다.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믿음의 관계를 원하신다.
ⅱ. 이를 위해 하나님은 먼저 인간을 믿으셨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관리 책임을 인간에게 모두 맡기셨다. 또한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하여 하나님을 떠났을 때에도 인간을 믿으셨다. 하나님은 인간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대하며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어 희생의 제물이 되게 하셨다. 앞으로 하나님은 새 하늘 새 땅이라는 놀라운 세계를 준비하여 우리에게 맡기려 하신다. 이처럼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믿음은 집요하고 헌신적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신뢰를 보내신다.
ⅲ. 믿음은 믿음으로 응답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도를, 그리고 언약의 말씀들을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믿는다는 것은 ‘아는 것’과 ‘맡기고 따르는 것’까지 포함한다. 비행기에 대해 알고만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몸을 맡기고 의탁할 때 비로소 목적지까지 갈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자신의 삶을 주님과 그 말씀에 맡기는 모험을 해야 한다. 하나님은 그러한 믿음을 기뻐하시고 의로 여기신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 믿음은 탯줄과 같다. 어머니의 모든 것은 탯줄을 통하여 아기에게 전달되듯, 하나님의 모든 것도 믿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된다.
(4) 기쁨으로
“백성이 즐거이 드림으로 기뻐하였으니 곧 저희가 성심으로 여호와께 즐거이 드림이며 다윗 왕도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니라”(대상29:9)
“비록…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3:17-18)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요17:4)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계19:7)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
① 조건 없이 기뻐할 수 있어야 한다.
ⅰ.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때 기뻐하는 것은 당연한 반응이다. 이 기쁨은 상대방의 조건과 배경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로 인한 것이다. 만약 우리가 어떤 조건 때문에 그(그녀)를 기뻐한다면 그것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진정한 연인 사이는 보고 있어도 그냥 보고 싶은 심정이다.
ⅱ. 우리는 오로지 하나님 한 분만으로 기뻐할 수 있어야 하고, 나아가서 내게 있는 것을 그분께 드림으로 더욱 기뻐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엇을 받기보다는 줄 때 오히려 그 기쁨이 배가됨을 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처절한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을 위해 드리는 마지막 기도에서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요17:13)라고 하셨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내 기쁨’의 정체는 오직 하나님 한 분과 그 분께 드리는 헌신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ⅲ. 어떤 사람은 단지 의무적ㆍ습관적으로 예배드리며, 주님 앞에 나와도 별로 기쁘지 않다고 한다. 왜일까? 그것은 아직도 그가 하나님의 가치를 발견하지 못했거나, 하나님보다 자신과 세상에 더 큰 가치를 두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신자의 기쁨은 세상의 기쁨과는 다르다. 세상 사람들은 환경에 따라 기뻐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지만 신자의 기쁨은 세상이나 환경에 따라 오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솟아나는 절대적인 기쁨이다. 그것은 보배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함으로 오는 기쁨이다. 이 기쁨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기뻐하면 하나님도 기뻐하신다는 것이다.
ⅳ. 우리는 과감히 인식의 전환을 할 필요가 있다. 과연 무엇이 가장 가치 있는 존재인가? 하나님인가, 세상인가? 만약 우리가 이성적 사유로나 마음으로 주님을 가장 가치 있는 존재로 평가한다면 우리는 당연히 주님 한 분만으로 기뻐할 수 있어야 한다. 이 같은 기쁨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이요 축복이다. 시편기자는 “주의 궁전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84:10)라고 노래했다.
ⅴ. 영국의 재상이었던 글레드 스톤은 “나에게 예배석은 대영제국의 수상석보다 더 존귀하다”고 말했다. 그에게 있어서 가장 고상한 가치는 항상 하나님이었다. 그는 수상의 자리라 할지라도 하나님과 비교할 때는 배설물과 같이 여겼다. 테레사는 “기쁨은 기도요, 힘이요, 영혼을 사로잡을 수 있는 사랑의 그물이다”라고 말했다. 우리의 마음에 기쁨이 있으면 뜨겁게 사랑하며 살 수 있다. 기쁨이 충만하면 그 자체로 행복이며 무엇이든지 다 해 낼 수 있다. 기쁨을 가진 신자는 복음을 선전하는 이동 광고판이요 그리스도의 산 증인이다.
② 어떻게 주님을 기뻐할 것인가?
ⅰ. 우리는 전인적으로 곧 ‘몸’과 ‘마음’을 다 동원하여 기뻐할 수 있다. 보통 환히 웃는 얼굴이나 가벼운 콧노래 등이 기쁨에 따르는 것은 기본적인 반응이며, 기쁨이 클수록 그 표현 또한 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아가서 기쁨은 전인격적으로 표현될 때 우리를 더 큰 기쁨 속으로 들어가게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기쁨이 가득한 곳이다. 성령은 기쁨의 영이시다(습3:17, 눅10:21, 살전1:16).
ⅱ. 기쁨은 건강에도 양약(良藥)으로 작용한다. 웃음은 우리 몸의 650개의 근육 중 253개의 근육을 움직이게 하고, 뇌에서 엔돌핀 등의 물질이 나와 스트레스 대응능력을 높여주고, 부교감신경을 자극시켜 심장을 천천히 뛰게 해 몸을 편안하게 해주고, 혈압이 떨어지고, 심장 박동수는 증가하여 혈액순환은 좋아지고, 세포는 더 많은 산소와 영양분을 공급받으며, 인체는 면역성이 높아진다고 한다.
ⅲ. 하지만 현대의 많은 신자들은 이 기쁨을 오해하여 놀이나 오락거리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예배에 재미있고 오락적이고 쇼(show)적인 요소를 첨가함으로 이 기쁨을 충족시키려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얻은 즐거움은 육적이며 피상적이고, 지적으로 빈약하고, 영적으로 감동이 없고, 비본질적이고, 천박하고 값싸며, 하나님의 음성에 대해서 귀를 기울이지 않게 한다.
ⅳ. 참 신자의 기쁨이란 ‘예수님의 기쁨’이다. 그것은 영적인 기쁨이요, 하나님을 아는 기쁨이요, 진리로 인한 기쁨이요, 희생과 헌신과 순종과 고난과 자기부인의 기쁨이요, 경건과 거룩의 기쁨이요, 주님과 성도들과 하나 됨의 기쁨이다.
(5) 감사함으로
“우리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대상29:13-14)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시50:23)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시95:2)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시100:4)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136:1-)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8)
ㆍ감사는 인간의 도리이다.
ㆍ감사는 표현되어야 한다.
ㆍ감사는 그 자체로 보상이며 축복이다.
ㆍ감사의 비결은 자족이다.
① 감사는 인간의 도리이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을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사1:3)
ⅰ. 감사는 하나님의 뜻이며, 은혜를 베푼 자와 은혜를 받은 자 사이의 마땅한 관계이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지 아니한 것이 없다.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존하여 존재하며,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도 하나님의 기적에 의해 존재한다. 따라서 감사는 인간의 기본적 덕목이다. 따라서 예배에 있어서 감사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ⅱ. 구약의 성도들은 성전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큰 감사였다. 시편기자는 “할렐루야 내가 정직한 자의 회와 공회 중에서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시111:1)고 고백한다. ‘전심으로’의 감사란 무조건적ㆍ전천후적ㆍ절대적인 감사를 의미한다. 한편 신약에서도 예수님은 감사를 강조하셨다. 예수님은 열 명의 문둥병자를 고쳐주셨다. 하지만 주님께로 와서 사례하는 자는 한 명뿐이었다. 주님께서는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눅17:17)며 나머지 사람들을 찾으셨다.
ⅲ. 본 훼퍼는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은 간단하게 구별이 된다. 그것은 기독교인은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다. 원망과 불평을 하는 것은 세상 사람이요, 오로지 감사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인의 표식이다”라고 말했다. 마르틴 루터는 “악인은 ‘없는 것’을 생각하며 불평하고, 선한 사람은 ‘있는 것’을 생각하며 감사한다”고 말했다.
ⅳ. 맹장 수술을 하면 간절히 기다리는 것이 가스다. 가스가 안 나오면 재수술을 받아야 된다. 방귀, 허구헛날 방귀뀌지만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지 모르고 산다. 환난, 고통, 역경이 사람의 생각을 깊게 만들고 감사하게 만든다. 감사도 불평도 습관이다. 쌀 한 톨을 만들려면 일곱 근의 땀을 흘려야 한다는 뜻의 일미칠근(一米七斤)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가 무심코 흘리고 또 소비하는 쌀 한 톨이라도 그 쌀을 위해 땀 흘린 수많은 손길들을 기억하며 감사하라는 뜻이다.
ⅴ. 괴테는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인간은 감사할 줄 모르는 인간”이라고 했다. 고마워할 줄 모르고 은혜를 잊어버리는 사람은 단단히 병든 사람이다. 맹인ㆍ벙어리ㆍ귀머거리인 헬렌 켈러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말할 수 있는 입을 가지고서 감사라는 말을 할 줄 모르고,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서 아름다움을 볼 줄 모르고,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지고서 복된 말을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했다. 감사치 않는 것은 배은망덕한 죄요, 자신을 짐승 이하로 추락시키는 것이 된다. 짐승들에게도 은혜를 갚는 보은의 정이 있다고 한다.
② 감사는 표현되어야 한다.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예물을 가지고 그 앞에 들어갈지어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대상16:29)
ⅰ. 감사의 정체는 ‘은혜에 대해 빚진 마음’과 ‘내게 있는 가장 귀한 것으로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이다. 하지만 감사는 마음에만 머물러 있을 때는 비 없는 구름과 같아서 무익하다. 감사는 나타나는 행동이며 표현하는 행위이다. 감사는 받는 것이 아니라 드리는 것이다. 감사는 고백, 노래, 헌물과 헌금, 서원 등 겉으로 표현될 때 비로소 가치가 있다.
ⅱ. 아벨은 양의 첫 새끼를 하나님께 드렸고, 하나님은 아벨과 그 제물을 열납하셨다(창4:4). 첫 것을 드림은 예배자의 정성을 나타낸다. 첫 것은 가장 소중하고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하고 초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출13:2)고 말씀하셨다.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가고, 마음이 있는 곳에 재물이 간다. 시간이든, 돈이든, 몸이든 무엇이든 내게 있는 최상의 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바울은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2:7)고 말씀한다. 이 말씀은 “말로만 하지 말고, 나타낼 수 있는 모든 것으로 넉넉하게, 힘껏 하라”는 뜻이다.
ⅲ. 형식적으로, 인색함으로, 계산적인 마음으로 하는 감사는 무의미하다. 한국교회는 감사헌금의 명목은 많은데, 정작 성도들에게 감사의 마음은 없다는 비판이 있다. 하나님은 중심(中心)을 보신다. 구약의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하나님께 드렸으나, 하나님께서는 가인과 그 제물을 열납하지 않으셨다(창4:5). 신약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재산을 팔아 헌금을 드렸으나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는 베드로의 책망을 듣고 죽었다(행5:1-6).
ⅳ. 성경은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9:7), “너는 너의 추수한 것과 너의 짜낸 즙을 드리기에 더디게 말찌며”(출22:29),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 하냐 이제 그것을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너희가 이 같이 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여호와의 말이니라”(말1:8,13)고 말씀한다.
③ 감사의 비결은 자족이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빌4:11)
“지족(知足)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에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6:6-8)
ⅰ. 감사의 비결은 자족(自足)에 있다. 자족은 관점의 문제이다. 똑 같은 물 반 컵을 놓고 A는 “반 컵이나 남았네”라며 감사했는데, B는 “반 컵밖에 안 남았네. 누가 내 반 컵을 먹었느냐”며 원망했다. 대개의 사람들은 모자람의 축복을 알지 못한다.
ⅱ. 유대인들의 속담에 “이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은 누구인가? 모든 사람에게 늘 배우는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누구인가? 자기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은 누구인가? 자기가 가진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이다”는 말이 있다. 자족은 감사를 낳는다. 자족의 나무에 감사의 꽃이 피고, 감사의 꽃에서 행복의 열매가 열린다. 감사는 더 큰 감사를 불러온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딤전4:4)라고 말씀한다. ‘버릴 것이 없다’는 말씀은 좋은 일과 나쁜 일 등 모든 것이 다 유익하게 된다는 뜻이다.
ⅲ. 반면에 기복(祈福)신앙은 자족할 수가 없다. 기복신앙은 중요한 것을 구하지 않고 덜 중요한 것을 더 구하는 신앙행위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를 소유하려는 마음은 별로 없고,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선물만을 더 추구한다. 기복신앙의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감정과 행동에 기복이 심하다. 원하는 것을 받으면 기뻐하고 활력적으로 되지만, 받지 못하면 우울해하고 소침해진다.
둘째, 감사가 별로 없고 불평과 원망을 많이 한다.
셋째, 큰 환난을 당하면 믿음생활을 포기한다. 환난을 당하면서까지 신앙생활을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넷째, 작은 복을 취하고 큰 복을 놓친다.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놓치고 있다.
ⅳ. 전도자 디엘 무디는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많아서 “하나님, 제발 그만 하십시오. 이제 넘치나이다”라고 말했다. 이에 비해 우리의 기도의 손에는 항상 청구서가 많이 들려 있다. 어떤 부인이 한 아이에게 사과를 주었다. 아이는 “고맙습니다”는 인사도 없이 얼른 받았다. 아이의 어머니가 아이에게 “얘야 다른 분이 사과를 줄 때는 뭐라고 해야 되지?” 하자 아이는 잠깐 생각하더니 “껍질을 벗겨주세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감사를 잃어버린 아이의 모습에서 바로 오늘 우리의 기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간구보다 감사가 많아야 좋은 기도이다. 우리는 감사의 기준을 세상적인 기준에서 성경적 기준으로 바꿀 때 비로소 우리 안에서 활화산 같이 터져 나오는 감사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주님은 내게 너무나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나에게 한 가지만 더 주시옵소서. 감사의 마음을.”
④ 감사는 그 자체로 보상이며 축복이다.
ⅰ. 우리가 사용하는 말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단어는 ‘감사’이다. 감사는 아무리 많이 하거나 들어도 싫지 않다. 사람은 감사하는 만큼 행복해진다. 행복해서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며 살기 때문에 행복해진다. 따라서 참된 감사는 그 자체로써 이미 보상을 받는다. 그것은 ‘행복’이라는 보상으로 채워진다. 감사할 줄 모르면 행복도 없다. 감사하지 않는 사람은 자칫 자신을 허무주의의 수렁으로, 절망의 구렁텅이로, 자기 연민으로, 자신만의 고립된 공간 속으로, 침울함으로, 마침내 죽음으로 치닫게 만든다.
ⅱ. 최강식은 2005.1 히말라야 촐라체봉을 등정하고 하산하던 중 발을 헛디뎌 크레바스에 빠졌으나 선배 박정헌의 자일에 매달려 목숨을 구했다. 이때 입은 동상으로 최씨는 왼손 엄지손가락을 빼곤 19개의 손가락과 발가락을 잃었다. 그러나 호리병 같은 크레바스에 빠져 올려다본 하늘은 최강식의 인생관을 바꿔 놓았다. 산악인에게 바위를 움켜잡는 손마디는 얼마나 중요한가. 그 손마디를 잃고, 발가락을 잃어 걷는 게 힘든 데, 그는 “사고 이후에 인생이 행복하게 바뀌었습니다. 죽지 않고 살았다는 그 자체가 감사하기 때문입니다”라는 말에 이어 “하루를 충실하게 살자. 내일 죽을 수도 있으니까”라고 말한다.
(6) 두려움으로
① 가져야 할 두려움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창28:16-17)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우매”(출3:6)
“나는 미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욥40:4)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6:4-5)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3)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후7:1)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1:17)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눅12:5)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10:28)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막4:41)
두려움은 하나님이 주신 본능 중의 하나이다. 그 목적은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고, 또한 인간의 영혼과 육체를 위험에서 보존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가져야 두려움은 어떠한 것인가?
a.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경외감이다.
ⅰ. 경외감은 일종의 두려움이다. 이것은 잘못을 범함으로 인한 두려움이라든가, 혹은 노예가 상전 앞에서 굽실거리는 두려움이라든가, 혹은 누가 나를 해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라든가, 혹은 임박한 멸망에 대한 두려움이라든가, 혹은 금요일에 검은 고양이를 볼 때 느끼는 미신적인 두려움도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놀람과 경이와 존경과 감탄’이 충만한 상태를 의미한다. 이것은 완전한 인격과 압도하는 힘과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신비를 가진 분과 마주칠 때 생기는 두려움이다.
ⅱ.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존재하는 도덕적ㆍ질적 차이는 너무나 커서 사람과 자연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보다 훨씬 더 크다.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과는 너무도 달라서 그 앞에 서면 한 없는 왜소와 무능과 무기력과 불완전과 총체적인 허무를 느끼며, 동시에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이 같은 두려움은 인간이 하나님을 대할 때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사람이 너무 기쁘고 감격스럽고 놀라면 떨리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이 같은 떨림은 마땅하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시2:11)
ⅲ.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거룩한 경이감에 사로잡혀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 모세는 하나님이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셨을 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얼굴을 가리는 것뿐이었다. 야곱은 벧엘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하고 두려움을 고백했다. 욥은 하나님의 현존을 체험하고 자신의 입을 가렸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위엄을 목격하고 자신에게 ‘화’를 선언했다. 요한은 교회들 사이에 거니시는 예수님을 뵈었을 때 엎드려서 죽은 사람처럼 되었다. 베드로는 예수님더러 떠나달라고 요청했다(눅5:2-9). 그는 예수님에게서 단순한 권능 이상의 것을 감지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성을 인지하였으며, 인간 이상의 ‘타자성’에 직면하자 두려움을 느꼈다.
ⅳ. 성경은 “여호와를 경외함이 너의 보배니라”(사33:6)고 말씀한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은 경건한 두려움이요, 마음을 치유하는 두려움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느끼는 수준 높은 행복감이며, 그분이 계시지 않으면 차라리 죽음을 택할 정도로 그분을 반기고 기뻐하는 일이다. 경건한 두려움의 조성은 감미로운 오르간 소리나 아름답게 디자인 된 창문을 통해서 들어오는 햇살로도, 혹은 기획된 예배나 계산된 예배 인도자의 ‘멘트’로도, 혹은 무의미한 의식을 아무리 다양하게 시행해도 생겨나지 않는다. 이런 이교적인 것들 앞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참 두려움이 아니다. 그것은 미신적인 두려움에 지나지 않는다. 경건한 두려움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만 만들어진다.
b.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서 오는 두려움이다.
ⅰ.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무한히 커지면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된다. 이것은 내가 성령을 근심케 하고 하나님을 실망시키지 않을까 하는 데서 오는 두려움이며, 또한 하나님께 좀 더 친밀하게 다가가지 못하고 혹시나 멀어지지는 않을까 하는 데서 오는 두려움이다.
ⅱ. 그러나 많은 신자들은 하나님보다 세상이나 사람을 더 두려워한다. 그것은 하나님보다 세상과 사람과 자신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 주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22:37)고 명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은 전부가 아닌 것에 대해서는 결코 만족하지 않으신다.
c.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다.
ⅰ. 나무는 자신의 역사를 나이테를 통해 제 몸 속에 기록한다. 나이테는 동심원으로 되어 있는데 그 문양이 나무마다 다 다르다. 식물학자들은 나이테의 문양을 보고 나무가 지금까지 어떤 환경에서 살았으며 어떤 일을 겪었는가를 다 읽어낸다. 나무를 세로로 잘랐을 때 드러나는 결의 무늬들도 나이테와 같다. 그 결은 나무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ⅱ. 우리 인생도 그와 같을 것이다. 심판의 날 우리 모든 행적은 만인의 주시(注視) 가운데 다 드러날 것이며, 자신의 믿음생활에 대한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물론 믿는 자들은 죄 용서를 받은 신분이므로 형벌의 심판이 아니라 상급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그 의가 영원히 있으리로다”(시112:1)
② 버려야 할 두려움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벗었음으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3:10)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15:1)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 하신지라”(창16:24)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출14:13)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왕상17:13)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저와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왕하6:16)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욥3:25)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29:25)
“그들의 두려워하는 것을 너희는 두려워말며 놀라지 말고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로 너희의 두려워하며 놀랄 자를 삼으라”(사8:12-13)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출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43:1)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여늘 나여늘 너는 어떤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 같이 될 인자를 두려워하느냐”(사51:12)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열방의 길을 배우지 말라 열방인은 하늘의 징조를 두려워하거니와 너희는 그것을 두려워 말라 열방의 규례는 헛된 것이라 그 위하는 것은 삼림에서 벤 나무요 공장의 손이 도끼로 만든 것이라 그들이 은과 금으로 그것에 꾸미고 못과 장도리로 그것을 든든히 하여 요동치 않게 하나니 그것이 잘린 기둥 같아서 말도 못하며 걸어다니지도 못하므로 사람에게 메임을 입느니라 그것이 화를 주거나 복을 주지 못하나니 너희는 두려워 말라 하셨느니라”(렘10:2-5)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 말라 너희는 참새보다 귀하니라”(마10:30-31)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마14:2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딤후1:7)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며 그가 오른 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계1:17-18)
a. 두려움의 정체
ⅰ. 인간은 타락 후 두려움의 대상이 달라졌다. 인간은 두려워할 이를 두려워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을 두려워한다. 이것은 두려움의 왜곡이다. 이 같은 두려움의 원인은 불신앙에서 비롯된다. 곧, 그 근저에는 “내가 하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는 의식이 깔려 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나서 첫 번째 보인 반응은 두려움이었다. 그들은 “벗었음으로 두려워하여”라고 말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첫 말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두려움의 원인이 ‘벌거벗음’ 때문이라는 변명은 반쪽 진실이며 정직하지 못하다. 그들의 두려움의 근본적인 원인은 ‘불신앙’이었다. 불신앙은 불순종을 낳았고, 불순종은 두려움을 낳았던 것이다. 두려움은 불신앙의 다른 이름이다. 따라서 인생의 두려움은 하나님을 슬프게 한다.
ⅱ. 타락한 인간에게 두려움은 고질병이다. 심리학자들은 인간이 태어나서 최초로 경험하는 감정이 두려움이라고 한다. 곧,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두려움, 큰 소리에 대한 두려움, 버림받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자라나면서 두려움의 폭이 점차 넓어진다.
ⅲ. 오늘날 사람들에게 “당신은 무엇이 불안하고 두려운가?”라는 질문을 던져보면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사고나 질병, 죽음, 인간관계, 실직이나 실패, 새로운 시도 혹은 변화’ 등 저마다 가지각색의 이야기를 한다. 이 같은 두려움은 누구에게나 어느 시대나 있었던 것이지만 현 사회는 그것이 극대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불확실성과 위험이 늘어나고, 이에 비례하여 인간의 불안과 두려움도 함께 커진다. 두려움은 누구나 숨기고 싶어 하지만 누구나 가지고 있는 우리 삶의 일부다.
b. 두려움의 파괴력
두려움은 믿음생활의 가장 큰 원수이며, 인생의 발목을 잡는 덫이다. 두려움은 생존에 필수 요소이지만, 성공에는 장애요소이다. 두려움은 엄청난 파괴력을 발휘한다. 두려움의 결과는 비참하다.
(a) 두려움은 불의와 타협하게 하고 죄를 범하게 한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두려움 때문에 애굽 사람들에게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으며, 바로로 하여금 자신의 아내를 취하는 죄를 짓게 만들었다.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고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원컨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존하겠노라”(창12:11-13) 뿐만 아니라 그는 이방인으로부터 “네가 어찌하여 그를 누이라고 하여 나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 18-20)는 책망을 들어야 했다.
(b) 두려움은 할 일을 못하게 하고, 개인의 성숙을 막는다.
ⅰ.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땅인 가나안의 접경지역에서 40일 간 정탐을 마치고 돌아온 정탐꾼 12명 중 10명으로부터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다. 그들은 대장부들이고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다. 우리는 이길 수 없다”는 절망적인 보고를 받았다. 이 같은 보고를 받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극도의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밤새도록 부르짖으며 곡하였다.
ⅱ. 그들의 두려움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들의 안목은 수평적인 수준에 있었다. 그들의 눈은 위를 보지 못하였다. 그들은 적들의 강함과 자신들의 약함을 불 줄 알았으나 위에 계신 하나님을 믿지 못하였다. 그들은 결국 두려움 때문에 망하였다. 그들은 곧바로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리고 광야에서 40년 동안 방황하며 광야에서 죽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다. 두려움은 하고 싶은 마음을 움츠러들게 하며 기를 꺾는다. 두려움은 인생에서 가질 수 있는 다양한 선택의 폭을 제한한다. 두려움은 만날 수 있는 사람, 도전할 수 있는 일, 맛볼 수 있는 즐거움의 폭을 좁힌다.
(c) 두려움은 두려워하는 대로 되는 속성이 있다.
ⅰ. 욥은 “너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욥3:25)라고 탄식했다. 아브라함이 애굽에 머물 때, 그는 두려워하던 대로 아내를 바로 왕에게 빼앗기는 일을 당했다. 성경은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취하여 들인지라”(창12:15)고 말씀한다.
ⅱ. 사실 두려움을 모르는 병사는 전투에서 별 쓸모가 없다. 금방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려움에 떠는 병사 역시 별 쓸모가 없다. 결코 승리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운동선수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으면 자기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게임에 패한다. 쥐들은 고양이 앞에서 얼어붙어 도망가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잡혀 먹혀버린다. 위대한 스승에게 검을 다루는 법을 배우는 순례자의 큰 적은 자신의 한 손이라고 한다. 자신을 해치는 것은 적이 아니라 검을 쥔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다. 무서운 적은 언제나 자기 안에 있다.(파울로 코엘료) 두려워하면 ‘게임 끝’이다.
ⅲ. 한때 우리나라에서 바둑을 제일 잘 두는 사람은 이창호였다. 당시 중국 기사들은 이창호만 만나면 번번이 패했다. 다 이겨 놓은 바둑도 마지막에 가서 실수를 해서 패했다. 왜? 이창호 공포증 때문이었다. 이창호를 두려워하다 보니 그 앞에서 실수가 나오고, 그래서 패했던 것이다.
(d) 두려움은 건강을 해친다.
ⅰ. 세균에 의한 병보다도 두려움이 원인이 되어서 병이 나는 경우가 더 많다. 예컨대 두려움으로 인한 긴장은 위액 분비와 소화를 방해하고, 심장이 뛰고, 혈압은 높아지고, 당뇨병이 생기기 쉽다고 한다.
ⅱ. 의사의 말이 환자에게 두려움이나 절망감 등 부정적인 감정을 유발하여 아무런 의학적 이유 없이 환자에게 해를 입히는 현상을 ‘노시보 효과(nocebo effect)’라고 한다. 수천 명 환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노시보 효과’ 실험에서 25% 환자가 피로, 우울증, 성기능 장애 따위의 부작용을 나타냈다고 한다. “나는 상처를 입을 것이다”는 뜻을 지닌 라틴어 ‘노시보’는 역시 라틴어에서 유래한 플라시보(placebo)와 정반대가 되는 개념이다. 플라시보, 곧 위약(僞藥)은 환자를 안심시키기 위해 주는 가짜 약이다. 위약의 투여에 의한 심리 효과로 환자의 용태가 실제로 좋아지는 현상을 플라시보 효과라 한다. 플라시보 효과는 인체가 스스로 치유하는 능력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e) 두려움은 전염성이 강하여 큰 비극을 불러온다.
‘노시보 효과’에도 전염성이 있다. 1998년 11월 미국 고등학교의 한 교사가 휘발유 비슷한 냄새를 맡고 두통, 호흡장애, 현기증을 호소했다. 학교는 문을 닫았으나 교사와 학생 100여명이 비슷한 증상으로 병원 응급실을 찾았다. 하지만 질환의 원인을 밝혀낼 수 없었다. 단지 친구가 아픈 것을 본 뒤에 그런 증상이 나타났다는 결론을 얻었을 뿐이다. 어빙 커시는 대학생들에게 맑은 공기를 흡입시킨 뒤에 두통이나 메스꺼움을 일으키는 독소가 함유되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실험 대상자의 절반에게서 그와 같은 증상이 실제로 나타났다. ‘집단 심인성 질환’을 일으킨 것이다.
c. 두려움의 극복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10:28)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벧전3:14)
ⅰ.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취임사(1933년)에서 대공황에 찌든 국민을 향해 “나는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이라고는 두려움 그 자체뿐이라는 굳은 신념을 작고 있다”고 했다. 버트란트 러셀은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 할 대상은 외부의 그 무엇이 아니라 두려움 그 자체다. 하지만 두려움은 노력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새가 머리 위로 지나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는 것처럼 두려움이 생각 속에 문득문득 일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새가 머리 위에 둥지를 틀고 사는 것은 막을 수 있는 것처럼 두려움이 내 생각 속에 계속 자리 잡는 것은 막을 수 있다.
ⅱ. 일반적인 두려움 퇴치법은 그 방법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는다. 곧, 사고방식의 갱신을 강조한다. 곧, 인생이란 위협으로 가득 차 있지만 “두렵긴 하지만 해볼 테야”라며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ⅲ. 한편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만을 두려워하고, 의(義)를 추구하는 삶을 살 것을 명한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마6:33-34),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주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라”(벧전5:7) 이것만이 우리가 세상의 모든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이다.
ⅳ. 우리에게 요구되는 믿음은 “자신의 가장 아끼는 것을 상실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은 언제나 더 좋은 것을 준비해 놓고 계신다. 맨 밑바닥까지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은 내가 혼자 힘으로 할 수 없는 그곳에서 대신 일하신다”이다.
(7) 헌신함으로
“만방의 족속들아 영광과 권능을 여호와께 돌릴찌어다 여호와께 돌릴찌어다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찌어다 예물을 가지고 그 궁정에 들어갈찌어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찌어다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찌어다”(시96:7-9)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요12:3)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16:20)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2:10)
ⅰ. 성경에는 ‘기념하라’는 말씀이 모두 세 번 나온다. ‘이스라엘 백성의 유월절 어린양 사건’과 ‘예수님의 유월절 성찬식’, 그리고 ‘마리아의 옥합 사건’이다. 옥합을 깨뜨리고 값진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마리아의 행동은 예수님을 감동시켰다. 주님은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라고 칭찬하시며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막14:3-9)고 말씀하셨다.
ⅱ. 대개의 사람들은 무엇을 받으려고 주님 앞에 나온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예배에 참여하는 주된 목적이 음악으로부터 무엇을 얻으려 하고, 설교에서 무엇을 얻으려 하고, 또는 기도를 통하여 어떤 복을 받으려 한다면 우선순위가 바뀐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께 먼저 나 자신을 드리기 위한 것이지 그분으로부터 무엇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다. 물론 우리는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은총을 받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자의 근본 자세는 헌신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앞에 선 신자의 마땅한 자세는 자신의 옥합을 깨뜨리는 것이다. 하워드 헨드릭스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바칠 목숨이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 가장 안타까운 일이다”라고 말했다.
ⅲ. 사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자신을 소멸시켜도 여한이 없는 헌신의 대상을 발견하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그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강조하는 인생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이름은 인생의 최고의 헌신의 대상이다. 우리는 흔히 건강이 제일이라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그보다 더 상위의 가치가 육체를 투자할 만한 헌신의 대상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우리의 육체는 가장 아름다워지고 위대해질 수 있다. 육체의 위대함은 단순히 건강하다던가, 혹은 7등신ㆍ8등신의 몸매를 유지하는 데 있지 아니하다. 자신의 소멸도 달게 참으며 헌신의 대상을 향해 긴장하고 집중해 나아가는 순간 우리의 몸은 그 가치를 나타낸다. 특히 그 대상이 하나님일 때 우리는 비로소 영혼의 배부름(만족)과 함께 삶의 진정한 자유(세상을 이김)를 누릴 수 있다. 이것은 주님께서 가신 길이기도 하다.
ⅳ. 종교개혁자 존 칼빈(깔뱅, 1509-1564)이 제네바에서 목회할 때 옷소매에 새긴 문장(紋章)은 심장을 들고 있는 오른손을 내미는 문양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이런 글귀가 있었다. “나의 심장을 주님께 드립니다. 즉시 그리고 진심으로!” 이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리고 싶어 하는 하나님의 사람 칼빈의 전존재적인 갈망의 표현이었다. 사실 칼빈은 당시 자기를 추방한 제네바로 되돌아가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님을 돌이켜 생각하며 주님께 제물로 바쳐지듯 내 마음을 드립니다”라고 동역자 파렐에게 편지하고, 다시 그 어려운 개혁의 현장인 제네바로 돌아갔다.(장신소식 제34호/김중은)
ⅴ. 영문법에서 1인칭은 ‘나’, 2인칭은 ‘당신’, 3인칭은 ‘그’다. 그러기에 모든 의식구조가 ‘나’ 위주요, 내 가족 위주가 된다. 그러나 신앙의 문법은 다르다. 1인칭이 ‘그’ 곧 하나님이며, 2인칭은 ‘당신’이며, 3인칭이 ‘나’와 ‘우리들’이 된다. 믿음생활의 우선순위는 ‘하나님→이웃→나’이다. 이는 신자의 삶은 항상 헌신의 위치에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모든 일을 나로부터 시작하면 내 안에 있는 탐욕이 흘러나와 성령님의 활동을 방해하지만, 반대로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면 내 안에 계시는 성령님의 자유로운 활동으로 인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다.
(8) 순종의 삶의 결단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12:13-14)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고 어린 양으로 제사 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으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여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나도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며 그 무서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 없으며 내가 말하여도 그들이 청종하지 않고 오직 나의 목전에 악을 행하며 나의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였음이라”(사66:2-4)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삼상16:22-23)
“여호와께 경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가는 유다인아 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곳에 거하게 하리라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뢰하는도다 너희가 도적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좇으면서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적의 굴혈로 보이느냐 보라 나 여호와가 그것을 보았노라…그런즉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그들을 위하여 부르짖어 구하지 말라 내게 간구하지 말라 내가 너를 듣지 아니하리라”(렘7:2-16)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희생에 번제물을 아울러 그 고기를 먹으라 대저 내가 너희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에 번제나 희생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며 명하지 아니하고 오직 내가 이것으로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나의 명한 모든 길로 행하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나 그들이 청종치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자기의 악한 꾀와 강퍅한 대로 행하여 그 등을 내게로 향하고 그 얼굴을 향치 아니하였으며 너희 열조가 애굽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내 종 선지자들을 너희에게 보내었으되 부지런히 보내었으나 너희가 나를 청종치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목을 굳게 하여 너희 열조보다 악을 더 행하였느니라”(렘7:21-26)
“너희 몸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① ‘산 제사’
ⅰ.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당연히 그 말씀을 떨림으로 듣고 기꺼이 따른다. 성경은 “여호와의 말씀을 인하여 떠는 자들아 그 말씀을 들을지어다”(사66:5),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으로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무릇…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사66:2)라고 말씀한다.
ⅱ. 그러므로 예배의 ‘끝’은 순종의 삶의 ‘시작’으로 이어져야 한다. 예배와 삶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은 예배의 연장이다. 우리는 항상 예배를 드리는 한편, 예배하듯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은 예배의 정신이 한 주간의 생활 속에 지속되도록 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을 향한 예배인 셈이다. 따라서 우리는 “나는 교회에 하나님을 예배하러 간다”고 말할 뿐 아니라, 마찬가지로 “나는 공장에, 상점에, 사무실에, 학교에, 밭에, 논에 하나님을 예배하러 간다”고 말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삶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성경은 이 같은 삶을 ‘산 제사’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이것은 마치 번제를 드리는 것처럼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로 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ⅲ. 하나님은, 모든 성도들이 삶의 현장에서, 일 가운데서 ‘산제사’를 드림으로 자기를 예배하기를 원하신다. 그것이 올바른 예배이고,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이다. 만약 한 주간의 생활 속에 예배가 이어지지 않는다면 주일의 예배 또한 참 예배가 되지 못한다. 예수님의 이름을 수 천 번 반복할지라도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예배와 삶을 분리시켜 이중적인 삶을 사는 종교인을 원치 않으시기 때문이다.
ⅳ. 구약시대에 유대인들은 제물을 형식적으로 바칠 뿐 그들의 삶은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그들의 제사는 우상을 섬기는 이방인의 제사와 같이 정죄되었다. 사무엘은 순종 없는 제사를 드리는 사울 왕을 향해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삼상16:22)고 책망했다. 사실 구약의 제사의 목적은 무엇인가? 번제는 하나님께 순종을, 화목제는 순종하는 백성과 하나님 사이의 친교를, 속죄제는 죄에 대한 용서와 화해를 목적으로 드리는 제사이다. 따라서 그러한 제사들이 회개와 순종과 신실한 희생의 삶을 수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우상숭배요 미신행위가 되는 것이다.
② 아브라함의 순종
ⅰ. 믿음과 순종의 대표적 인물은 아브라함이다(창22장). 그는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는 말씀을 받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떠났다. 아브라함은 순종하는 일에 지체하지 않았다. 어떤 일은 그 즉시 행동하지 않으면 영영 기회를 놓친다. 시편기자는 “내가 주의 계명 지키기에 신속히 하고 지체치 아니하였나이다”(시119:60)고 고백한다.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와도 의논하지 않았다. 어떤 길은 혼자 고독하게 걷지 않으면 안 된다. 아브라함의 순종도 놀랍지만 이삭의 순종도 놀랍다. 번제에 쓸 나무를 지고 산을 오르고, 결박되어 제단 나무 위에 드러눕는 이삭의 모습은, 먼 훗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산을 오르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방불케 한다.
ⅱ. 아브라함이 산 위에서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급하게 부르시며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알았노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순종’을 하나님에 대한 ‘경외’로 인정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순종의 사람 아브라함을 위해서 수풀에 수양을 준비해 두셨고, 아브라함은 그 수양을 잡아 제사를 드렸다. 그리고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여호와께서 준비하신다)라고 불렀다. 순종하는 자에게는 ‘여호와 이레’의 복이 따른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순종하는 순간, 거기서부터 일하신다.
ⅲ. 오늘날 선데이 크리스천(Sunday Christian)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 현상은 우려할 만하다. 그들은 일주일 중에 하루, 그것도 예배시간에만 하나님을 찾고 그 외에는 하나님과 상관없이 산다. “주시옵소서”에만 익숙해 있고 “순종하겠습니다”에는 인색하다. 신자들의 이중성, 곧 교회에서의 모습과 세상에서의 삶의 모습이 다름은 진정한 예배의 결핍에서 비롯된다.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우리의 뜻대로 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예배는 그 자체로 끝나지 않고 실천하는 짐이 따른다. 그러나 그 짐은 사랑으로 지는 것이기에 무겁지 않고 가볍다. 한 소년이 작은 소년을 업고 힘겹게 걷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얘, 너에게 매우 무거운 짐이겠구나!”고 했다. 그때 소년은 “이 아이는 짐이 아니라 나의 사랑하는 동생입니다”고 대답했다.
첫댓글 <‘웃음 7, 눈물 3’의 비율로 배합하면 대박>
좋은 지적!!
예수님에겐 그런 비율이 없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