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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불이의 공전보(共戰譜)
소설《신·인간혁명》과 함께 걷는다
제11회 오이타②
△고난을 참고 견딘 동지와 ‘황성의 달’을 합창했다.(1981년12월12일, 오카성터)
<기고> 영원히 ‘승리의 함성’이 울려 퍼지는
사제(師弟)의 오이타
오이타총현장 지부 아키노부 / 오이타총현부인부장 가와노 도요코
‘가장 괴로워한 동지들 곁으로 달려가자! 한 사람 한사람과 굳게 악수한다는 마음으로 모든 혼을 담아, 생명 근저에서부터 격려하자!’
2018년 1월 9일, 소설 《신·인간혁명》 제30권(하) ‘승리의 함성’에 써주신 문장에 오이타 동지의 환희가 폭발했습니다. 1981년 12월 8일, 13년 반 만에 시작된 오이타 지도의 모습이 그려졌기 때문입니다.
이후, 이케다 선생님은 22회에 걸쳐 ‘사제의 오이타’에서 새긴 공전보의 원점을 연재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오로지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자고 결의했습니다. 일본제일의 홍교확대를 달성하고 정의로운 대화도 더욱 크게 넓힐 수 있었습니다.
제1차 종문사건 당시, ‘북쪽의 아키타, 남쪽의 오이타’라고 할 정도로 오이타는 악랄한 승려들이 광포의 조직을 유린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오이타 지도로 신시대의 새벽을 알렸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오이타에 머무는 동안 남자부를 비롯한 청년부 중에서 학회를 떠난 사람은 거의 없다는 보고를 듣고 “오이타의 청년은 잘 견뎠다! 승리했다!” “청년이 일어설 때가 왔다.”며 기뻐하셨습니다.
그리고 1981년 12월 10일, “광포수행에 대한 ‘책임’과 ‘염원’ ‘의탁한다’는 의의를 담았습니다.” 하고 말씀하시며 청년의 영원한 지침이라고 할 수 있는 ‘청년이여 21세기 광포의 산을 등반하라’라는 장편시를 전격적으로 발표해 주셨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오이타 지도 마지막 날에 “여러분의 행복이 내 승리입니다.” 하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로부터 10년 뒤, 종문과 맞서 싸운 투쟁에서 승리하고 맞이한 ‘오이타레인보우음악제’에서 선생님은 회합장소에 있는 ‘승리의 종’을 드높이 쳐서 울리고 대승리를 선언하셨습니다.
올해는 회장 취임 60주년, 오이타지부 결성 60주년을 맞이합니다.
“승리에는 환희가 있다. 전진하는 활력이 넘친다. 새로운 승리를 가져오는 가장 큰 요인은 승리에 있다.
‘승리, 승리, 승리’ - 이것이 창가의 행진이다.”(제30권<하> 승리의 함성)라는 지도대로 모든 투쟁에 승리하고, 사제(師弟)의 오이타가 세운 서원을 완수해 영원히 ‘승리의 함성’을 울리겠습니다.
괴로워한 사람이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
다케타의 오카성터로
신이치는 이튿날 11일에도 오이타평화회관을 찾아오는 동지들을 격려하고, 기념이 될 휘호를 쓰며 격려의 손을 멈추지 않았다.
오후에는 오이타 시내에 있는 개인회관을 방문하고, 저녁에는 오이타평화회관에서 개최한 자유근행회에 참석했다.
12일, 신이치는 버스를 타고 오이타현 서남부에 있는 다케타시로 갔다. 다케타는 오이타현에서도 가장 악승들의 모략으로 고통받은 땅이기도 했다.
오카성터 주차장에 도착하자 “선생님!” 하고 외치며 동지 몇 명이 달려왔다.
“고맙습니다! 민중의 대영응인 여러분을 만나러 왔습니다!”
잇달아 악수를 나누자 벗의 눈에 눈물이 가득했다. 그것은 악승들의 무도한 처사를 꿋꿋이 견디며, 투쟁하여 승리한 벗이 흘리는 기쁨의 눈물이었다.
신이치는 주차장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현지 멤버들과 간담하고, 성터 중심부에서 기다리는 동지를 격려하기 위해 현지간부 대표 두 사람과 함께 차에 탔다.
차 안에서 어느 간부가 신이치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희는 호법(護法)을 위해 진력하겠노라며 온 힘을 다해 사찰의 주지를 지원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 그들은 승속화합(僧俗和合)을 말했지만, 손바닥을 뒤집듯이 학회를 비판하고 공격해왔습니다. 그리고 뒤에서 학회를 그만두라고 동지들을 부추졌습니다….” “인간이 할 짓이 아닙니다.”
신이치는 나이가 지긋한 장년부 간부에게 웃는 얼굴로 말했다.
“아버님께 고생을 많이 시켰습니다. 잘 버텨내셨습니다. 다케타를 훌륭하게 일으켜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숙이자 장년부 간부는 흐느껴 울었다.
신이치는 차에서 내려 걷기 시작했다. 성터 중심부로 가는 길에 남자부원 십여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신이치는 한 사람 한사람과 악수를 나누고 격려의 말을 건넸다.
시가 노리후미 씨(분고이케다권 부권장)는 이때 선생님과 만난 사람 중 한 사람이다.
“이케다 선생님은 우리 청년부를 격려해 주신 뒤 함께 성터 중심부로 가셨습니다. 돌계단을 오르는 도중에 뒤에서 걸어가는 우리 쪽을 돌아보며 ‘나를 따라 오세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목소리는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당시 함께 활동에 힘쓴 사람들이 악승들에게 속아 학회를 떠났다. 다케타의 벗은 분함과 분노를 느꼈지만 스승을 구도하며 투쟁했다.
선생님과 만난 이후, 동지들은 고난에 지지 않고 계속 전진했다. 지금은 전망이 좋은 장소에 훌륭한 회관이 세워져 있다. 지역공헌을 위해 분투하는 동지들의 활약으로 학회에 대한 이해는 전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진척되었다.
시가 씨는 감개무량한 심정을 담아 이렇게 말했다.
“그날 선생님은 ‘절대로 퇴전하면 안 됩니다. 고생한 사람이 행복해질 권리가 있습니다.’ 하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다케다의 동지들은 선생님과 세운 서원을 가슴에 품고 분발했습니다.
하회의 우인장(友人葬)도 정착되어 신심하기 좋은 환경이 되었습니다. 지금 무슨 일이 있으면 오카성터에 올라가 그날의 결의를 떠올리며 새롭게 출발합니다.”
자, 출발이다! 함께 떠나자
21세기의 저 봉우리로!
황성의 달
성터 중심부에는 300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신이치가 도착하자 환호성이 일고 큰 박수가 터졌다.
“여러분을 만나러 왔습니다. 존귀하고, 보배와 같은 동지와 함께 21세기를 향해 출발하기 위해 왔습니다. 그럼 함께 기념촬영을 합시다. 광선유포의 역사에 길이 남을, 다케다 여러분의 대승리를 기념하는 사진입니다.”
촬영이 끝나자 신이치는 이렇게 제안했다.
“모처럼 오카성터에 왔으니 모두 함께 ‘황성의 달’을 부릅시다!”
소설에는 스승의 진심이 씌어 있다.
“장마(障魔)의 폭풍우를 참고 견디면서 광포에 매진한 존귀한 불자들은 긍지 드높게 가슴을 활짝 펴고서 붉게 상기된 얼굴로 열창했다. 신이치도 함께 노래를 부르면서 마음속으로 외쳤다.
‘여러분은 승리했다! 창가의 투장으로서 광포의 정의성(正義城)을 끝까지 잘 지켜냈다. 자, 출발이다! 함께 떠나자. 21세기의 저 봉우리로!’
당시 모인 사람들 중에는 할머니에게 안긴 두살쯤 되는 남자 아이도 있었다. 그 아이는 지금 청년부 리더로 분투하고 있다.”
신이치는 주차장으로 돌아와 구마모토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그는 버스 창가에서 열심히 두 손을 흔들었다. 버스가 커브 길에서 반대편으로 향하자 신이치도 동지가 보이는 쪽으로 이동해 손을 계속 흔들었다.
이날의 모습은 14일자 <세이코신문> 2면과 3면에 걸쳐 크게 실렸다. 기념사진을 두 페이지에 걸쳐 싣는 것은 이례적이었다. 사진이 반으로 나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한 사람 한사람의 얼굴이 잘 보이도록 만들어, 개가(凱歌)를 울리는 듯한 느낌의 지면이 됐다.
또 “씩씩한 오이타 다케타의 동지여 장수하기를, 다복하기를” “오카싱터에서 ‘황성의 달’을 대합창” “‘눈물’과 ‘분함’을 꿋꿋이 견딘 300명과 함께”라는 타이틀이 약동했다.
14일, 그 지면을 본 오이타의 동지는 기쁨이 폭발했다.
“그 기념사진은, 거센 바람을 타고 넘어 창가사제가 21세기를 향해 광선유포의 장정(長征)을 맹세하는 한폭의 ‘명화’였다.”(제30권(하> ‘승리의 함성’)
4박 5일간의 오이타 지도에서는 많은 동지가 집에서 창제를 하며 무사고와 대성공을 기원했다. 누구보다도 존귀한 이 ‘음지의 영웅’이 있었기에 오이타에 사제의 원점을 새길 수 있었다는 사실을 여기에 분명하게 써두고자 한다.
당시 오이타현의 서기장을 지낸 야마모토 다케시 씨(주임부회장, 규슈 총주사)는 선생님의 오이타 방문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힘주어 말했다.
“제1차 종문사건이 한창일 때 동지들은 어강(御講)에서 주간지 등을 근거로 악의에 찬 학회비판을 되풀이하는 종문 승려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선생님이 오이타에서 보여주신 행동은 ‘오로지 괴로움을 겪어온 학회원을 반드시 끝까지 지킨다.’는 마음으로 일관되었습니다. 힘들고 괴로운 상황이 이어지던 오이타의 동지에게 선생님의 격려는 미래로 가는 활로를 열어 회망을 제시하고 암운을 떨쳐낼 수 있었습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케다 선생님을 모신 일 자체제가 오이타의 승리를 알리는 선언이었습니다.”
다케타에서 돌아오는 길에 야마모토 씨는 4박 5일간의 오이타 지도를 돌이켜보자 ‘이 감동을 형태로 남기고 싶다.’는 마음이 불끈 솟아올랐다.
‘격려할 수 있는 사람이 더 있는지, 아직 할 수 있는 일은 없는지, 무엇이든 사양하지 말고 말해주세요.’라고 말씀하신 스승이 펼친 격려투쟁. 분한 마음을 참고 견딘 동지가 선생님을 맞이했을 때 흘린 기쁨의 눈물. 선생님이 청년에게 선물한 장편시를 생명에 새기며 열심히 듣는 젊은 벗의 눈동자. - 그날 저녁 오이타평화회관으로 돌아온 야마모토 씨는 펜을 들어 단숨에 써내려갔다. 정신을 차려보니 날이 밝았다.
야마모토 씨는 선생님에게 보여드리고 싶어 팩스로 선생님이 계신 구마모토에 원고를 보내고 서둘러 구마모토로 갔다. 회관에 도착하니 선생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읽어보았습니다!” 하고 말씀하시는 선생님의 손에 야마모토 씨가 보낸 원고가 들려 있었다.
그 원고는 12월 17일자 <세이코신문>에 실렸다.
‘드디어 우리는 승리했다’는 타이틀이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야마모토 씨는 “종문사건 그리고 ‘반전공세의 오이타 지도’로 저희는 ‘사제’야말로 모든 근본정신이고 행동의 규범이어야 한다는 점을 생명에 새겼습니다.” 하고 강조했다.
학회 조직은 소위 말하는 피라미드가 아니다. 광선유포의 스승을 중심으로 동심원을 넓혀가야 한다. 조직을 운영하기 위한 역직의 상하는 있어도 모두 동등하게 존귀한 불자(佛子)이다. ‘광포의 제자’에 위아래는 없다.
선생님은 동지 한 사람 한사람과 사제의 유대를 맺고자 거듭 격려하고 격려하셨다. 그러한 스승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하여 눈앞의 한 사람을 철저히 지킨다. 거기에 사제정신은 맥동한다. 더 나아가서는 학회를 지키고 발전시키는 초석이 구축된다.
난을 이겨내고 비약해 온 것이
창가의 역사다
완벽하게 승리했다!
1992년 2월, 이케다 선생님은 10년 만에 오이타를 방문해, 3월 1일에 개최된 ‘신세기총회’ ‘레인보우음악제’에 참석했다.
선생님은 소설 《신·인간혁명》의 마지막 장 제30권(하)의 ‘서원’에서 제2차 종문사건 당시 미동조차 하지 않은 오이타의 동지를 칭찬하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썼다.
“모두가 종문 승려들의 음험한 본질도, 학회 공격의 비열한 수법도 꿰뚫어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어서에 비추어 ‘드디어 제육천(第六天)의 마왕이 다투어 일어났다! 질 수는 없다.’고 깊이 자각했다.
제1차 종문사건을 타고 넘은 동지들은 ‘단연코 창가학회와 함께 광선유포를 위해 나아가겠다!’는 결의도, 신심에 대한 확신도 더욱 확고해졌다.
성훈에는 ‘자기편보다도 강적(强敵)이 사람을 잘되게 하느니라’(어서 917)라고 씌어 있다. 난(難)을 불러일으켜 난과 맞서 싸우고, 난을 이겨냄으로써 크게 비약해 온 것이 창가학회의 자랑스러운 역사다.”
선생님은 총회에서 한 스피치에서 맨 처음 이렇게 말했다.
“그리운 오이타 여러분을 꼭 만나고 싶다는 바람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선언했다.
“오이타는 완전히 승리했다!”
“완벽하게 승리했다!”
그것은 혹독한 겨울을 용감하게 이겨낸 오이타에 승리의 봄이 도래했음을 알리는 사자후(師子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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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