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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북한은 매년 8월 28일을 1927년 고(故) 김일성 주석이 결성했다는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의 창립 기념일로서 1991년 2월 1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을 통해 '청년절'로 지정했습니다. 매년 이날에는 체육행사와 문화행사 그리고 정치행사들이 다채롭게 진행되는데, 청년절을 청소년을 위한 북한의 사회주의 명절이라고 하면서 2018년에도 많은 행사가 펼쳤습니다.
<조선중앙통신>은 2018년 8월 29일 청년절을 축하하는 청년·학생들의 무도회가 8월 28일 청년중앙회관 무도회장에서 개최됐다고 보도하면서, 이날 각 도 소재지에서도 청년·학생들의 청년절 경축 무도회가 열렸다고 전했습니다. 그리고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등이 각지 공장, 기업소, 농장, 대학에서 청년·학생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고 덧붙였습니다.
이런 행사 중에서 하나를 소개합니다. <조선중앙통신>은 “청년절 경축 청년중앙예술선전대 공연 《태양을 옹위하는 청춘의 노래》가 28일 청년중앙회관에서 진행되였다. 공연무대에는 대화시 《금방석》, 녀성독창 《복받은 인민의 노래》, 혼성4중창 《인민이 사랑하는 우리 령도자》, 선동과 남성4중창 《사회주의 지키세》 등 다채로운 종목들이 올랐다.
출연자들은 종목들을 통하여 조선청년운동을 승리의 한길로 이끌어오신 위대한 김일성대원수님과 김정일대원수님의 업적과 청년중시사상을 빛내여가시는 경애하는 김정은원수님의 위대성을 칭송”했다고 보도했습니다. 겉으로는 ‘청년 주시’인데 청년절의 속에는 ‘김일성·김정일·김정은’이 있습니다.
남한의 MBC는 8월 28일, 북한 <로동신문>이 ‘청년동맹’의 명절인 청년절을 맞아 경제건설에서 청년들이 선봉에 서야 한다고 강조했고, 1면 사설을 통해 '청년들이 경제건설 대진군의 선봉에서 영웅적 위훈을 창조해가자'는 제목으로 이같이 밝혔다고 보도했습니다. 그리고 <로동신문>은 "수많은 청년이 증산투쟁과 돌격투쟁을 맹렬히 벌여 경제 계획을 앞당겨 완수하는 등 선봉적 역할"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아울러 MBC는 2017년 청년절에는 "청년들은 핵폭탄이 돼라"고 독려했었다고 비교해서 보도했습니다.
청년동맹! 북한은 청년동맹의 효시(嚆矢)는 1926년 김일성이 조직한 '타도제국주의동맹'의 주역들이 1927년 8월 28일에 결성한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해방 후 결성된 '북조선 민주청년동맹', 6.25 전쟁 이후 '조선사회주의로동청년동맹'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김일성 사후인 1996년 1월 19일, 김일성 우상화를 위하여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으로 이름을 변경되었습니다. 2016년 8월에는 김일성-김정일주의청년동맹으로 바꾸면서 '사회주의'의 명칭을 삭제해버렸습니다. 그런데 조선로동당규약 제9장에는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은 조선청년운동의 개척자이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몸소 무어주신 주체적인 청년조직이며 주체혁명 선군혁명의 대를 이어 나갈 당의 정치적 후비대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북한의 ‘과학원 역사연구소’에서 편찬한 <조선통사(하)> ‘1958년 판’을 보면 1927년에 대한 글은 “1927년 1월 한강 연안 운빙(運氷) 노동자 1,000명의 파업, 5월 전북 김제 노동조합원 300여명의 5.1절 기념시위와 동맹 파업, 그리고 대구 조선제지회사 여성노동자 700여명의 집단적 태업투쟁, 9월 경성 용산공작소 영등포공장의 조선인 노동자 100여명의 파업, 10월~12월 함남 영흥 흑연광산 300여명의 파업과 시위” 등이 있는데, 어디에도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에 대한 글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 책에는 “조선노동총연맹은 1927년 9월에 조선노동총연맹과 조선농민총연맹으로 분리”되었다고 기술했습니다. 또한 1925년에 조직되었다는 조선노동당이 1928년에 해산되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에도 관련 글이 전혀 없습니다. 아마 1991년 2월 직전에 최종적으로 만들어낸 픽션인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렇다면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이 조선에 없었다는 얘기?
여기서 문득 한 ’조선청년“이 생각나서 소개합니다. 1927년에 감옥살이를 하고 있었던 청년! 22년이 넘는 기간 동안 옥살이를 하면서도 끝까지 의지를 잃지 않았던 한 의사(義士)의 이야기입니다. 의사 박열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일본인이 세운 학교에 다니는 치욕을 견딜 수 없다며, 학업을 포기하고 고향 문경에 돌아가서 친구들과 함께 태극기와 격문을 살포하는 등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했습니다...의사는 검찰에 기소된 이후, 1923년 10월 24일부터 1925년 6월 6일까지 총 21회에 걸친 신문조사를 받았습니다. 조사과정에서 그는 일왕을 폭살하기 위해 폭탄을 구입하려 했다고 당당히 밝혔습니다.
박열은 조선시대의 관복과, 신랑이 혼례 때 예복으로 입던 사모관대 차림으로 법정에 출정했습니다. 또 재판장은 피고라고 하지 않고 '그편'이라고 부르고 박열은 재판관을 '그대'라고 호칭했습니다. 실제로 일본 재판 사상 전무후무한 사건이었습니다. 일본 정부는 1926년 3월, 박열에게 사형을 선고했으나, 1주일 만에 특별 감형시킨다고 발표했습니다. 사형 판결 후에 그는 미소를 지으며 "재판장, 수고했네. 내 육체야 자네들 마음대로 죽이지만, 내 정신이야 어찌하겠는가"라고 했습니다...무기징역으로 감형된 의사는 독립운동 역사상 최장 기간인 22년이 넘는 옥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에도 대역 사범이라는 이유로 석방되지 못하다가, 그해 10월 27일 44세의 나이가 되어 석방됐습니다. 그 후 6·25전쟁 때, 북한군에 의해 납북되었고, 1974년 1월 17일 생(生)을 마감했습니다. 그는 2017년 6월, 이준익 감독의 영화 <박열>로 환생했습니다.
일본인들은 그를 '최악의 불령선인(不逞鮮人/불온하고 불량한 조선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1927년에도 감옥에 있었던 박열은 김일성이 외쳤던 ‘조선청년’이 아니고, 자랑스럽고 아름다운 한반도의 청년이었습니다. 끝으로 북한 청년들에게 프랑스 자연주의 문학의 태두(泰斗), “목로주점”의 에밀 졸라(1840~1902년)의 말을 전합니다. “청년이여, 청년이여, 항상 정의와 더불어 있어라. 만약 정의의 관념이 그대 속에서 희박하게 되면, 그대는 모든 위험에 빠지게 되리라.”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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