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골프, 언제까지 '한국계' 따질건가
미국여자프로골프 투어 소식을 전하는 국내 방식은 미국과 많이 다르다.
남자 골프 인기가 압도적인 미국에서 여자 골프가 크게 취급되는 경우는 드물다. 최근 몇 년을 따져도 2013년 박인비가 메이저 대회 3연속 우승을 했을 때와 리디아 고가 각종 최연소 기록을 세웠을 때 외에는 짧게 대회 소식만 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최근 미국 선수가 가뭄에 콩 나듯 우승하는 탓도 클 것이다. 미국 현지에서 여자 골프 뉴스를 보다가 그날 우승한 한국 선수보다 미셸 위가 화면에 더 많이 잡혀 어리둥절했던 경험도 있다. 1998년 박세리의 감동적인 US여자오픈 우승 이후 정상급 선수들이 줄을 이어 나오면서 여자 골프는 한국에서 인기 종목이 됐다. 나라마다 스포츠에 대한 선호가 다른 건 당연하다. 그런데 참 한국적이라는 생각이 드는 특이한 현상이 있다. '한국계(系)'라는 이름으로 승수를 계산하는 방식이다.
올해만 해도 11개 대회에서 10개 대회를 한국계가 우승했다는 식으로 따진다. 한국 선수들이 거둔 5승에 뉴질랜드 교포 리디아 고의 2승, 한국인 어머니를 둔 노무라 하루의 2승, 호주 교포 이민지의 1승을 더한 것이다. 세계의 시선으로 따지면 한국 5승, 뉴질랜드 2승, 일본 2승, 호주 1승, 미국 1승이라고 하면 될 걸 한국계 10승이라고 한다. LPGA투어 한국인 100승에도 펄 신, 미셸 위, 크리스티나 김 등이 거둔 승수를 포함했다가 나중에 한국 국적 선수만 별도로 100승을 따진 적이 있을 정도로 이런 현상은 유별나다. 미디어와 골프계가 이런 혼선을 부추기고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팬도 적지 않다.
LPGA투어 홈페이지나 외국 언론이 리디아 고를 언급할 때 '한국에서 태어난'이라는 표현을 자주 쓰기는 한다. 그래도 당연히 뉴질랜드에 방점을 둔다. 한 여자 골프대회에 갔다가 넉살 좋은 뉴질랜드인을 만났다. 원주민 마오리족의 전통 춤 하카를 추어 보이고는 기자에게 여자 골프 세계 1위 리디아 고를 아느냐고 물었다. 그는 "리디아는 한국에서 수입한 키위"라며 "이제는 뉴질랜드의 아이돌이 됐다"고 했다.
핏줄이 같은 교포 선수에게 친근감이 들고 그들의 선전에 어깨를 으쓱대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한국 기업도 그런 정서를 감안해 교포 선수를 후원한다. 이들의 부모들이 세리 키즈를 키운 한국 부모들처럼 박세리 성공 모델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는 공통점도 있다. 하지만 이 선수들은 새로운 기회를 찾아 그 나라를 찾아가 그 나라 환경과 시스템의 도움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런데도 한국계 승수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은 점점 다인종·다문화 시대로 가는 시대 조류에 맞지 않고, 외국인 시선에서 볼 때 지나치게 혈연을 강조하는 폐쇄 사회로 비칠 우려도 있다.
몇 해 전 미셸 위가 미국 대표로 얼굴에 광고 성조기를 그리고 나오자 생경하게 느꼈다고 한 이가 많았다. 미셸 위를 한국계라고 강조하다 보니 사실상 한국 선수라는 생각을 하게 됐고 그래서 배신감을 느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한국 남자 골퍼 가운데 세계 랭킹이 가장 높은 안병훈의 아버지는 한국인, 어머니는 중국인이다. 여자 골프 셈법으로 따지면 안병훈이 우승할 때마다 중국도 1승씩 계산해야 하는가. 조선일보, 민학수, 2016.05.06.
라니에리 감독에게 배우는 리더십
`신문 1면에는 말세의 징조가 가득하지만 스포츠면에는 인류의 영광이 펼쳐져 있다`라는 말이 있다. 지난 3일 창단 132년 만에 0.02%의 확률을 뒤집고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챔피언이 된 레스터시티야말로 이에 어울리기에 모자람이 없다.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하부 리그에서 뛰다가 잉글랜드 대표팀 공격수가 된 제이미 바디부터 프랑스 빈민가 출신 알제리 청년에서 `올해의 선수`로 변신한 리야드 마레즈, 169㎝의 작은 키 때문에 번번이 프로팀 입단에 실패했지만 기어코 최고의 미드필더가 된 은골로 캉테까지 사연 많은 선수들로 이뤄진 외인구단의 이야기는 영화만큼 흥미롭다. 하지만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 `축구 미생`들을 `여우 군단`으로 묶어낸 클라우디오 라니에리 감독을 빼고 레스터시티의 우승을 설명할 길이 없다. 이번 시즌 레스터시티를 맡은 라니에리 감독은 30년 동안 15개 프로팀을 맡은 노장이지만 우승 경력은 일천했다. 더구나 지난 시즌을 14위로 마친 레스터시티는 각종 스캔들 등 악재에 휩싸인 상황. 그러나 라니에리 감독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팀을 재건했다. 그가 훈련장에서 자주 한 말은 종이 울리는 소리를 따라한 "딜리딩 딜리동(dilly-ding, dilly-dong)". 문제를 스스로 찾아보라는 의미다. 선수들은 토론을 벌이며 실력을 키웠다. 팀 내부에 자율성을 부여한 그는 외부에서는 선수들을 옹호했다. 익숙지 않은 1위 자리에 선수들이 압박감을 느끼지 않느냐는 질문에는 "압박감을 느끼는 것은 훨씬 많은 이적료를 쓴 경쟁팀"이라며 부담을 덜어주고, "매 경기 서로를 위해 싸운 선수들은 챔피언 자격이 있다"고 치켜세우는 식이다. 이처럼 자신을 믿어주는 리더를 만나자 선수들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지난 시즌 강등을 걱정하던 팀은 마침내 명문 구단들을 누르고 챔피언이 됐다. 라니에리 감독의 리더십은 인재를 마음껏 영입할 수 없는 조직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을 마음대로 골라 데려올 수 있는 조직이 어디 그리 흔할까. 누구나 풍족한 예산과 다양한 선택지를 누릴 수는 없다. 오히려 리더십이 필요한 것은 이런 상황이다. 겸손하고 유쾌한 태도로 구성원을 존중하는 리더와 함께하는 조직의 성공이 그라운드 위에서만 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