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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세푸스의 유대 고대사 서문
서문
'유대 고고학[㈜ 지면 관계로 이렇게 간단한 서문을 쓸 수밖에 없기 때문에 역자(1)의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 the Man and the History)(New york, 1929)' 라는 제목의 강의안(Ⅲ~Ⅴ)을 참조한 것.] 또는 일반적으로 '유대고대사'라고 부르는 요세푸스의 대작(magnum Opus)은 그의 초기 작품인 '유대전쟁사'와 여러 면에서 독특한 대조를 보인다. 요세푸스는 젊은 나이에 황제의 많은 후원을 받으며 빠른 속도로 '유대전쟁사'를 썼다. 그는 로마가 무적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여 자기 동족들이 또 다시 반란을 일으키지 않게 하려고 '유대전쟁사'를 썼다. '유대고대사'는 중년에 쓴 역작(力作)이다. 이 책은 모든 문학서적과 특히 역사적 기록의 적(敵)인 도미티안 치하의 압제 아래서 편찬되었다. 이 사실은 흔히 별 것 아닌 것으로 취급해 버리고, 다른 사람들이 요세푸스를 권하고 또 여러 사람들이 도와서 완성할 수 있었다는 사실만 강조되어 왔다. 이 유대고대사의 저작동기는 유대의 고대 문헌과 빛나는 역사를 헬라와 로마 세계에 알려 유대 민족의 위대성을 부각하려는데 있었다.
그러므로 요세푸스는 로마의 정치적 선전 활동과 관계를 청산하고 이때부터는 완전히 유대의 역사가와 변증가로 나선다. 그러나 로마와 연결된 줄을 끊고 보다 더 애국적인 주제를 가지고 글을 쓴다 해도 감정이 상한 동족들은 그가 이기적인 동기로 복권되기를 바란다면서 그의 제안을[㈜ Laqueur, '유대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Der jud, Historiker Flav. Josephus) p.270.] 들어주려 하지 않았다. 요세푸스가 자기 나라의 역사를 쓰려던 계획은 '유대전쟁사'를 쓸 때 이미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고대. 서문. 2(6).] 새로운 계획은 아니다. 요세푸스는 '유대고대사' 서문에서 이 책을 저술하게 된 내력과 동기와 어려움을 흥미있게 기술하고 있다. 그는 이 저술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시작한 것이 아니라, 이 책의 타당성과 필요성에 대한 두 가지 문제를 신중하게 생각하였다. 이러한 출판물이 경건에 도움이 되며 판결에 의해서 공인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이 책의 내용을 헬라어 판으로 냈을 때 일반 대중의 관심을 끌 수 있을 것인가? 요세푸스는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해 만족할 만한 대답을다음에서 찾았다. 톨레미 필라델푸스(Ptolemy Philadephus) 시대에 율법을 알렉산드리아 역본(Alexandrian Version-아마 70인역을 의미하는 것 같다-역자(2)주)으로 만들었는데 그 역본의 기원에 대해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서 두가지 질문의 답을 찾았다.
요세푸스는 톨레미왕과 같이 학문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유대의 고대사를 대중화시킨 대제사장 엘르아살 이후의 영광스럽고도 오래된 이야기를덧붙일 생각이었다. 영감된 성경을 의역하는데 있어서 합법성 문제에 대해 이렇게 언급하면서 요세푸스는 팔레스틴의 랍비학파의 견해와 자신있게 논쟁한다. 팔레스틴에서는 그당시 70인역의 평판이 좋지 못했으며 자카이의 아들 랍비 요하난(R.Johanan ben Zakkai)과 같이 아키바(R. Akiba)가 율법에 울타리를 치고 있었다.
요세푸스는 최근의 전쟁과 티투스의 개선문에 새겨진 조각과 이제 로마의 각 가정에 스며들기 시작한 유대 종교에 의해 로마나그 외의 다른 곳에서 유대나라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있기 때문에 책이 대중화되리라고 바로 파악하고 있었다. [㈜ 아피.2권.39(284).]
요세푸스가 그의 작품의 원조로 삼는 헬라어 성경 이외에, 아직도 팔레스틴계에서는 별로 환영을 받지 못하는 또 하나의 작품이 있다. 요세푸스처럼 동방에서 서방의 수도 로마로 주전 7년에 건너 온 할리카르나수스의 디오니시우스(Dionysius of Hal-icarna년)가 '로마고대사' (@Rwmaikh; !Arcaiologiva)라는 제목으로 방대한 로마 역사를 출판하였는데, 20권으로 구성되었으며헬라어로 썼다. 그후 꼭 1세기만에 요세푸스도 '유대고대사'(!Ioudaikh; !Arciologiva)라는 제목으로 그의 거작을 출판하면서 디오니시우스의 책과 같이 20권으로 출판했다. 그러므로 '유대고대사'가 '로마고대사'의 체제를 따랐다고 하는 것을 의심의 여지가없다. 만일 요세푸스가 '유대전쟁사'를 쓸 때 정복자에게 복종할것을 권했다고 한다면 이제 '유대고대사'를 쓰는 마당에서는 자기민족이 상당한 역사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려 했을 뿐만 아니라 로마의 고대사보다 훨씬 더 오래된 것임을 나타내고자 했을것이다. 디오니시우스는 그의 고대사의 상당 부분을 로마 민족의 고대성과 신비한 역사를 나타내는데 공헌하였다. 요세푸스는"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순수한 신비로 가득찬" [㈜ 고대. 1권. 3(15).] 히브리성경에 근거하여 유대의 역사를 곧바로 창조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작품의 영향에 대해서는 좀 더 상세하게 살펴보아야할 것이다. 모세의 죽음에 대한 설명은 로마 민족의 두 설립자 아이네아스(Aeneas)와 로물루스(Romulus)의[㈜ 고대. 1권. 8:48(326)각주.] 죽음(Passing)에 대한 기록을 생각나게 한다. 또한 디오니시우스로부터 기적적이고 신화적인 성격의 사건들을 설명하면서 되풀이 되는 문구를 인용하여, 독자들에게 자기 자신들의 견해인 것처럼 그러한문구를 사용하여 표현했다. [㈜ 고대. 1권. 3:9 (108) 각주.] 디오니시우스는 그러한 스타일의표본을 제공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요세푸스는 그의 작품 맨 마지막 단락에서[㈜ 고대. 20권. 12:1 (267).] 이 책은 도미티안 통치 제13년 그의 나이 56세, 즉 주후 93-94에 완성했다고 말했다. '유대전쟁사'가 헬라어로 출판된 직후부터 계산해보면 '유대고대사'는 18년후에 출판된 것이다. 결론적인 단락에서 추정해 보면 그의 '자서전'은 '유대고대사'의 부록으로 덧붙인 것으로 보인다. '유대고대사'는 두가지 결론을 포함하고 있는데 원래 결론은(원래 서문이 현대판 서문에 밀린 것 처럼) 뒤로 밀려나 있고 자서전을 첨부하겠다는 제안이 언급된 다른 결론이 먼저 나와있다. [㈜ 고대. 20권. 12:1(259~266).] 자서전은 포티우스(Photius)에 따르면 주후 100년의 일이었던 아그립바 II세의 죽음을 언급하고 있다. [㈜ 자서. 65(359).] 그러므로 '자서전'과 '자서전'이 포함된 증보판은 2세기 초에 나왔으리라고 추정할 수 있다.
'자서전'이나 '아피온 반박문'과 같이 '유대고대사'도 어떤 에바브로디도(Epahroditus)[㈜ 고대. 서문. 2(8)이하, 자서 76(430), 아피.1권 1(1), 2권. 41(296).]라는 사람에게 헌정되었는데, 그는 그의 초기 후원자인 베스파시안 황제와 티투스 황제를 잃고 난 후에 요세푸스가 만난 Maecenas이다. 에바브로디도라는 이름은 생소한 이름은 아니다. 그러나 이 이름을 가진 사람들 중에 기록으로 남아있는 단 두 사람만 고려의 대상이 되는 셈이다. 니이제(Niese)와 다른 사람들은 요세푸스의 후원자가 해방노예(freedman)로 네로왕의 비서였던 에바브로디도와 동일 인물이라고 본다. 에바브로디도는 네로가 죽을 때 끝까지 함께 남아서 네로가 자살하는 것을 도와주었는데, 이 사실은 후에 도미티안이 자신의 생명에 위협을 느낄 때 에바브로디도를 추방하고 살해하는 원인이 되었다. [㈜ Dio Cassius, 1 xvii. 14.] 철학자 에픽테쿠스(Epictecus)는 이에바브로디도가 자유롭게 해준 해방노예였다. 요세푸스가 그의후원자를 설명하면서 "큰 사건에 관련되어 있고 운명의 변화를 겪어야 했던 사람"[㈜ 고대. 서문. (8).]으로 표현하였다. 이 표현은 네로가 죽을 때에 바브로디도가 행했던 역할을 두고 한 말이라고 생각되어진다.그러나 역사가들은 이 에바브로디도를 요세푸스의 후원자로 보지 않는다.
93-94년에 '유대고대사' 초판이 나왔다. 약 95-96년에 에바브로디도가 추방되어 죽는다. 그런데 '자서전' (100년전 이후)과 '아피온 반박문'도 에바브로디도에게 헌정한다는 헌정문이 다시 나타난다. 이 두 책은 니이제가 추정한대로 '유대고대사'의 후대 저작이며 94-95년 이전 작품일 수 없다. 따라서 좀더 신빙성이 있는 요세푸스의 후원자는 수이다스(Suidas)가 언급한 문법학자마르쿠스 메티우스 에바브로디도(Marcus Mettius Ephaphro-ditus)인 것 같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수학(修學)하였고 중년 이후에는 네로 시대에서 네르바 시대까지 로마에서 살았다.그는 로마에서 30,000권의 장서를 모아 도서관을 세우고 높은학식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특히 호머와 헬라 시인들[㈜ Schurer, 'G.J.V.'(4판) i.p.80.각주.]에 대한저술가로 명성이 높았다. 요세푸스는 몇가지 지식을 얻는데 이에바브로디도와 그의 도서관에 신세를 진 것 같다. 특히 '아피온반박문'에 나오는 호머풍의 문제들과 헬라 신화들에 대해서 에바브로디도가 정통하고 있었던 지식에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유대고대사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 지며 둘은 거의 비슷한 분량이다. 둘이 나뉘어지는 경계선은 유대가 포로생활을 마감하는10권 마지막이 된다. 후반부에서 사용한 자료에 대해서는 다음권에서 살펴보려 한다. 전반부는 요세푸스가 성경과 성경의 전통적 해석을 주로 의존하였다. 성경의 순서를 따르는 것을 원칙으로 했으나, 그는 자기 동족들에게 사죄하는 뜻에서[㈜ 고대. 4권. 8:4(196)이하.] 성경을 재정리하고 모세율법을 잘 이해하여 전해 주고 나중의 논문을위하여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왕정 역사에 대해서 그는 열왕기와 역대기를 섞어서 설명하고 있다. 하나도 빠뜨리지 않겠다는그의 약속을 지키려고[㈜ 고대. 서문. 3(17), 10권. 10:6(218).] 그는 자기 민족이 별로 신뢰하지 않는사건도 빠뜨리지 않았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을 빠뜨린 것이 있는데, 금송아지 사건과 첫번째 율법판을 깨뜨린 사건이다. [㈜ 고대. 3권. 5:8(99)각주.]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고대. 3권. 6:4(126)각주.] 유대민족이 동물을 숭배한다는 비난에 대해 다루지 않고 있다. 그는 적어도 두가지의 성경 본문을사용하였다. 하나는 셈족성경-히브리어이건 아랍어이건 그가초기 탈굼에 의존했던 장소들에 대한 표시가 들어있기 때문이다.-이고 다른 하나는 헬라어 성경이다. 그의 가장 권위있는 본문은 히브리어(혹은 아랍어) 본문이었던 것 같다. 헬라어 성경은여기서 조금 사용되었고 그 자신이 직접 거의 대부분을 번역하였다. 그 뒤의 역사서들의 위치는 도치되어 있다. 사무엘상부터마카비 1서까지 그의 본문은 헬라어 성경에 근거하였다. 그리고셈어 본문은 보조적인 자료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되풀이되는 주장은[㈜ 고대. 서문. 3(17), 10권 10:6(218).] 자기는 성경적 설명 이외에 하나도 덧붙이지 않았다고 한다. 역사가 (요세푸스)는사실 1세기의 수집물로 상당한 가치가 있는 미드라쉬(Midrash)를 통합했다. 학가다(Haggadah)나 전설적인 영역에서 성경에첨가된 내용은 모세의 탄생과 유년 시절 이야기[㈜ 고대. 2권. 9:2(205)이하.] 등이다. 랍비문서나 알렉산드리아 문서들에서 부분적인 병행귀절을 찾아볼 수있는 모세의 영도아래 에디오피아를 치러가는 애굽인들의 전쟁[㈜ 고대. 2권. 10:1(238)이하.]에 관한 이야기도 첨가되었다. 이러한 종류의 또다른 첨가된 기록은 주빌리서(the Book Jubilees)에서 인용된 것인지도 모른다.(주전 약100년)[㈜ 고대. 1권. 1;4(41), 2:1(52), 2:3(70)이하, 2권. 9:5(224) (각주포함).] 요세푸스가 '타노미마'(Ta;novmima )라고 부르는 어떤 전통적인 규칙을 따라 율법을 실천적인 면에서 해석한 할라카(Halakah)는 모세의 율법을 상세하게 주석한 것인데 이 책에서[㈜ 고대. 3권. 9:1(224)이하, 4권 8;4(196)이하.] 이러한 류의 해석을 많이 보여준다. 전통적 해석이 서로 다를 경우에 요세푸스는 원칙적으로 바리새파의 해석을 따르는 경향을 나타냈다. 랍비들의 병행구절을 충분히 고찰하기위해서 독자들은 고(故) 데오도레 라이나흐 박사(Dr. The-odore Reinach)가 편집하고 쥴리앙 베이(Julien Weill)가 요세푸스의 불어판 번역본에 주석을 단 귀중한 주석과 주제에 따라분석을 했던 그에 관한 특별한 논문들을 참고해야만 한다. 그 요점(principal point)들은 이 책의 각주에 언급되어 있다.
창조에 대한 설명과 거기에 덧붙인[㈜ 고대. 서문. 4(18-26), 1:1(27-33).] 모세의 찬사는 필로의'천지 창조자에 대하여' (De opificio mundi)를 참조하였음이 분명하고 그 알렉산드리아 작가의 다른 몇 작품들도 알고 있었음이 다른 곳에서[㈜ 'De Abrahamo', i.177, 225과 'De migratione Abrahami' I. 157, "De Iosepho' ii. 41이하. 72.] 나타난다.
요세푸스는 성경 이외에 성경을 지지해 주는 다른 자료들도 가능한 한 무엇이든 인용한다. 바벨론인 베로수스(Berous)는홍수 사건을 증명하는데, 애굽인 마네토(Manetho)는 족장들의수명에 관하여, 베니게인 디우스(Dius)는 바벨탑에 관해, 에베소의 메난데르(Menander)는 후대 성경 역사에 관해, 시빌리네(Sibylline)의 신탁(oracles)은 솔로몬과 히람의 교분에 관하여,두로의 기록(Tyrian records)은 산헤립(Sennacherib)과 느부갓네살(Nebuchadnezzar)에 관하여, 그리고 기타 여러 작가들을 인용하고 있다. 요세푸스의 레파토리는 이 정도에 제한되지않지만 이러한 이름들을 정리하는 것은 다메섹의 니콜라스[㈜ 고대. 1권. 3:6(94), 3:9(107)이하, 7:2(158)이하. 참). 7권. 4:1(101).]가정리한 것을 따르는 정도로 끝냈다. 그는 다른 자료들도 알고 있지만 니콜라스가 쓴 '세계역사' (Universal History)만을 따라 언급하고 있다. '세계 역사'는 후에도 성경시대 이후의 역사에대해 요세푸스가 주로 인용한 자료이다.
역사가인 요세푸스나 그의 동역자들은 때로 이야기를 재미나게 하려고 이방인들의 이야기 형태를 도입하여 자세하게 설명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전쟁 장면은 투키디데스(Thucydides)[㈜ 고대. 4권. 5:2 (92).]의 묘사를, 다른 일화들은 헤로도투스(Herodotus) [㈜ 고대. 4권. 6:8 (134) 각주.]의 기법을모방하였다.
요세푸스가 헬라인 조수(sunergoiv)들에게서 받았던 도움에 대해 다른 곳에서[㈜ 전쟁. 서문, 충분한 설명은 'Josephus the Man and the Historian)' (New York, 1929), 강좌 V를 참조하라.] 언급하고 있다 '유대전쟁사'에는 헬라 조수들에게 받았던 도움을 인정하고 있으며[㈜ 아피. 1권 9(50).] 그 책에서 분명하게 독특한 형태(excellent style)로 나타난다. '유대고대사'에는 그런도움을 받았다는 언급이 없고 형태(Style)가 더욱 한결같지 못하다. 그렇지만 '유대고대사'에도 조수들은 자신들의 흔적을 남겨놓았다. 중요한 조수들 가운데 두 명은 '유대고대사'에 실수로 자신들을 드러냈는데, 자신의 대작에 싫증난 요세푸스는 그 두 사람에게 이 부분의 작문을 맡겼던 것으로 보인다. 15, 16권은 '유대전쟁사'를 쓸 때 고용된 적이 있는 유능한 조수들 중 한 사람의 작품인데 그는 특히 헬라의 시와 소포클레스의 시를 사랑하는교양있는 작가였다 (그래서 역자(1)는 이 조수를 '소포클레안'이라 부른다). 17~19권은 조수(hack)의 타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창의성 없이 투키디데스를 모방하였다. (그래서 그를 '투키디데안'이라 부른다). 이 다섯 권(15~19권)은 이 두 조수들이 실제적으로 거의 모든 작업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1~14권까지의앞부분에서는 이 두 조수는 가끔 요세푸스를 도왔다-투키디데안은 드물게, 소포클레안은 좀 더 자주 도왔다.
(i) '소포클레안' 조수의 수려(秀麗)한 문체는 1~14권까지 여러 부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 서문, 리브가의 청혼(1권 12:1(212)이하), 라헬의 청혼(1권 19:3(285)이하),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하는 장면(2권 4:1(39)이하), 출애굽과 홍해의 통과, 고라의 반역, 발람의 이야기, 모세의 죽음?다른 곳에서는 요세푸스의 원고를 수정하고 편집한 흔적이 나타나는데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그의 손길을 찾아볼 수 있다.
소포클레스를 모방한 것이 15~16권에서 모방한 것만큼 많이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2권. 11:1(254) a[ptesqai bouleu mavtwn (소포클레스, '고대사', 179), 2권. 14:3(300)
kakoi; kakw'" ajpollusqai ('필로크레테스', 1369), 3권. 1:4(15) ta; ejn posi; kaka; (12장 '고대사', 1327), 3권. 5:8 (99) provnoian e[cein periv tino" ('고대사', 283), 3권. 6:6(141)과 3권. 7:5(165) Peroniv" ('트리키니아에', 925), 3권. 11:3 (264) ejxiketeuvein ('오이디푸스 티란누스', 760), 4권. 2:2 (15) qhra'sqai ('아약스', 2), 4권. 8:24 (265) a[moiro' gh'" ('아약스' 1326 이하), 하갈의 추방에 대한 이야기(1권. 12:3(218))는 유리피데스('헤라클레스 퓨렌스',323이하)가 모델이 되었음이 틀림없다. 호머의 시에서는 ejpi; ghvrw" oujdw' (1권. 13:1 (222), '일리아드', XXII.60), pivdaxin ojlivgai" (3권. 1:7(33), '일리아드', XVI. 825), h[clusen (3권. 8:5(203), '오딧세이' XII. 406), w[ete pai'dai" eukyra'nai kai; gunai'ka"
(4권. 6:4(117), '일리아드', V.688). 미디안 여인이 히브리 청년을 유혹하는 이야기는 (4권. 6:7 (131) 이하)는 헤로도투스의 책 (IV. III이하)에 나오는 스구디아인(Scythians)과 아마존인(Amazons)들의 이야기가 모델이 되었다. 헤로도투스의 책(III. 98)에서 pro;" h[ion ajnivsconta라는 구절을 따왔다. (4권. 8:44(305)).
고전 작가들에게서 따온 것 외에도, 이 조수의 두드러진 특징은 자기의 애송시를[㈜ 역자(1)의 'Sophocles and the Perpect Number (Proceedirgs of the Brithis Academy, Vol. XVI)를 보라.] 조금씩 따 넣었는데, 아마도 그는 소포클레스에게서 영향을 받아 삼분법을 좋아했다. 세가지 이유(rea-sons), 세 당(parties), 여러 가지 형태의 세 그룹-이런 표현 방식은 이 조수의 확실한 표지이며 후에 나오는 (고대.6장) 그보다 못한 조수와 확실히 구별된다. 그리고 나중에 언급한 동역자는 중어법을 즐겨쓰고 두 그룹으로 분류하는 것이 특징이다. 세가지 이유는 족장들의 수명에 관한 이야기(고대. 1권. 3:9(106)) 애굽 전역에 재앙이 내렸다는 이야기(2권. 14:1(293)),출애굽 여정(2권. 15:3(322)이하), 히브리인들이 해마다 3번씩절기를 지킨다는 이야기에 나온다(4권. 8:7(203)). 세 당은 율법 수여자에 대한 반대 의견에 나온다(3권. 5:7 (96)이하, 4권. 3:1(36) 이하), 홍해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하는 세가지 대안을 하나님께 적용하였다. (2권. 16:1(337)). 이렇게 분류하는 예가 2권. 7:7(189), 12:4(275), 13:2(283), 15:4(326), 3권.1:5(22), 2:2(45), 5:2(80), 15:3(319), 4권. 2:4(26), 3:2(40), 3;2(48)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ii) '투키디데안' 조수는 유대고대사 17~19에 한해서는 자유롭게 요세푸스를 도와 주었지만 그 앞부분에서는 별로 돕지 못했다. 그는 투키디데스를 표절하고 상투적인 문귀를 썼는데 5개의 문단에서 그의 손길을 느낄 수 있다. 그곳에서 전쟁 상황과 군사적인 문제에 대해 종군 기자로 고용된 사람인 듯 묘사하고있다. 아말렉인(3권. 2:4(53)이하)과의 전투, 아모리인과의 전투(4권. 5;2(87)를 묘사한 것은 바로 그이다. 시민법에서 군법으로 바뀌는 곳에서는 그의 손길이 두 번 나타난다. (3권. 12:4(287)이하, 4권. 8:41(292)이하), 고라 일당이 불에 타는 모습도 그의 작품이다(4권. 3:4(54)이하).
이같은 특징을 알기 때문에 뒷부분 이외의 다른 부분에 나오는 두 조수의 작품을 빼고 나면 요세푸스가 직접 쓴 부분은 얼마나 남는가 하는 문제는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좀 매끄럽지 못한 문단들이 '유대고대사' 1권~14권, 20권, '자서전'에 나오는데, 이것들은 그의 작품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a[rcesqai가 부정사와 함께 구어체로 쓰이는 것처럼 가끔 신약성경에도[㈜ 'Journal of Theological Studies' xxx(1929) p.361에 나오는 '요세푸스의 기록되지 않은 Aramaism'에 대한 논문을 보라.] 자주 나오는 그의 모국어인 아람어 발음의 영향을 추적할 수 있다.
전권처럼 이 헬라어 본문도 니이제(Niese)의 본문을 기본으로 하였다. 그러나 절충하는 입장에서 본문을 가끔 그의 비평장치에서 채용한 것을 인용하기도 했다. 원본은 어떤 한 그룹의 사본에서만 찾을 수는 없다. 니이제(Niese)가 선택한 R.O(M) 그룹이 원칙적으로 월등하다. [㈜ 예, 고대. 1권. 3:3(82), 6:5(148), (R), O만 정확한 숫자를 기록하고 다른 것들은 창세기의 히브리어 본문을 지지한다.] 또 다른 극단적인 입장을 취하는 사본들 -SP-의 지지를 받지 못할 때는 거의 가치가 없다. 그 나머지 본문들은 특징이 섞여있다. 구 라틴어역은 특히 중요하다.
'유대고대사'의 길이는 고대에는 사본들이[㈜ 한때는 네 부분으로 나뉜 적도 있다.(Niese, 1권. p.8).] 양분된다. 이 책의 전반부는 후반부와 권위면에서 다르다. 니이제(Niese)에 의하면 1~10권까지는 오랜 권위를 갖고 있으며 이 책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기되어 있다.
R. Codex Regius Parsinus, 14세기
O. Codesx Oxoniensis(Bodleianus), miscell graec. 186, 15세기
M. Codex Marcianus (Venetus) Gr. 381, 13세기
S. Codex Vindobonensis II. A 19, historicus Graecus 2, 11세기
P. Codex Parisinus Gr. 1419, 11세기
L. Codex Laurentianus, plut. lxix. 20, 14세기
Lat Cassiodours가 순서를 기록한 라틴어 역본. 5 혹은 6세기
Exc. Constantine VII Porphyrogenitus가 순서를 기록한 발췌문. 10세기
E. Zonaras가 사용한 초록(抄錄), 니이제(Niese)는 10 혹은 11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Zon. J. Zonaras의 연대기. 12세기
ed. pr 1544년에 Basel에서 나온 헬라어 본분의 초판(editio princeps)으로 알려지지 않은 사본에서 나온 것이지만 때로는 중요한 권위를 갖기도 한다.
만약 '유대고대사'의 저자가 그의 작품을 쓰는데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다면 그의 번역자들의 도움도 받았다. 특히 요세푸스는 고(故)데오도레 라이나흐 박사가 1,900년에 파리에서 편집하여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전집'으로 출판한 '유대고대사' 1~10 권의 역자인 쥴리앙 베이에게 값진 번역과 특히 그보다 더 값진 각주를 단 것에 대해 감사를 해야 한다. 모세 법전에 대한 요세푸스의 해석과 병행되는 랍비들의 주석을 베이(Weill)가 수집하여 놓은 것은 요세푸스의 이 부분을 공부하는 모든 학생들에게는 필수적이다. 헬라어 본문으로는 베네딕트 니이제의 대작(Berlin, 1887)이외에, 나버(Naber)의 대작(Leipzig, Teubner,1888)도 완전히 참조해야 한다. 위에서 말한 번역 중에 베이의 번역 이후 가장 유용한 것은 하버켐프가 편집한 죤 허드슨의 라틴어 역본(Amsterdam, 1726)이다. 윌리암 휘스톤이 번역하고 실레토(A.R. Shilleto) 목사가 개정한 것(London, 1889)도 때때로 도움을 준다. 역자(1)는 두가지 점에서 도움을 받았던 전문가에게 감사를 표하며 호우스만(A.E.Housman) 교수와 마운더(Maunder) 부인에게 천문학적인 문제(3권. 7:7(182))에 도움을 주셔서 감사들 드린다. 또한 보타니(Botany)에 있는 임페리얼(Imperial) 과학기술대학의 강사인 하우얼트(F. How-erth)씨에게 사리풀(henbane)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해준 것을 감사드린다(3권 7:6(172)).
요세푸스의 유대 고대사 서문
1. 역사가들의 다양한 서술동기
나는 역사를 서술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서술 목적이 한결같이 동일하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서 사람마다 그 서술 목적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어려움을 느낀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문장실력을 과시하여 명성을 얻기 위해서 쓴다. 또 다른 사람들은 후손들의 이해 관계가 연루된 역사적 사건에 대해 그들의 선조들이 저지른 과오를 변명할 목적으로 할 수 없이 쓰게 된다. 뿐만 아니라, 또 어떤 사람들은 그들 자신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어떤 사건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공공의 유익을 위해서 과거의 어두운 역사를 조명하여 역사적 교훈을 제시하기 위해 쓰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역사를 서술하는 이유를 위에서 몇가지 제시하였는데, 이 몇가지 이유 가운데 나의 경우는 마지막 두가지에 해당된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내 자신이 우리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이 벌였던 로마전쟁에 깊은 관심이 있었고, 그 전쟁의 특별한 양상과 결말이 어떠했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유대 전쟁사(the Belllum Judaicum)는 이 책이 나오기 약 20년 전에 출간되었다.] 다른 사람들이 이 사건을 왜곡하여 쓴 것을 보고, 이를 바로잡기 위해 올바른 역사를 써야만 했다. [㈜ 유대전쟁의 초기 역사에 관해서는 전쟁.1권. 1,2 (2,6)를 참고;그리고 요세푸스의 주요 적수인 디베랴의 유스도(Justus of Tiberias)의 후기 작품에 관해서는 자서.65(336)를 참고.]
2. 이 작업에 착수하게 된 기원
이제, 나는 모든 헬라인들이 연구해 볼 만한 가치가 있을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이 작업에 착수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 작품은 히브리 성경으로부터 해석된 유대민족의 고대사와 정체(정치체제)를 포함할 것이기 때문이다.[㈜ 요세푸스는 성경을 자신의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자료로 삼고 있다 ; 그러나 번역가로서의 그의 역할은 한계가 있다. 후기 역사서<삼상(1 Samuel)으로부터 마카비1서(1 maccabees)>와 모세 5경에 있어서의 아주 작은 부분을, 요세푸스는 평이하게 의역(意譯)한 알렉산드리아 헬라어 성경(Alexandrian Greek Bible-70인역)에 크게 의존한다.] 실제로 나는 그 전쟁기사에 관해 쓸 때 처음 의도는 유대인들이 본래 누구였고, 그들이겪었던 운명은 무엇이었으며, 어떤 법률 제정자에 의해 경건과다른 여러 덕목을 실천하도록 가르침을 받아왔으며, 유대인들이로마인들과의 불가피한 이 마지막 전쟁을 수행할 때까지의 과거로부터 지금에 이르는 동안 그들이 치루었던 전쟁은 과연 어떤것이 있었는가 하는 것에 대해 설명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이 작업은 너무나 방대한 분량이 될 것이기 때문에 나는 이 작품을 시작과 결론을 지닌 논문들로 분류했다.
큰 작업에 착수할 때마다 자주 일어나는 일이지만 이 일은 그주제 자체가 광범위 한데다가 우리의 역사를 외국어(헬라어:역자주)로 옮겨야 하는 어려움과, 우리에게 익숙치 않은 언어의어려움 때문에 시간이 흐를수록 지쳐갔고, 작업의 진행속도도늦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를 알기를 희망하는 몇몇사람들은 내가 계속해서 이 작업을 계속해 나갈 것을 권했다. 특히 그 사람들 중에서 나에게 용기를 주었던 사람은 에바브로디도(Epaphroditus)였는데[㈜ 서문을 보라. 요세푸스의 후기 작품인 '유대고대사'(Antiquities), 고대사 부록인 '자서전'(Life), '아피온 반박문' (the Contra Apionem)은 모두 이 후원자에게 헌정되었다.], 그는 모든 지식을 사랑했으며 특별히 역사적인 지식들에 관심이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가 특별히역사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이유는 그 자신이 여러 가지역사적인 큰 사건과 관련되어 있었고, 그러한 사건으로 인해 운명의 변화를 겪어야 했을 뿐만 아니라, 그런 가운데서도 천성적으로 타고난 훌륭한 성품과 덕망있는 방법으로 일관성 있게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나는 항상 가치있고 받아들일 만한 능력을 발휘하도록 자극하는 이 사람의 설득에 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또한 매우 유용한 그런 연구 속에서 수고를 하여 얻는 기쁨보다 나에게 더 영향을 끼친 것은 게으른 나의 성격을 스스로 인정했다는데 대해 부끄러워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 자신을 자극하여 더욱 즐겁게 작업을 계속해 나갔다.
위에서 말한 이런 동기 외에도 내가 크게 영향을 받은 것은 또 다른 사실 때문이었다. 그것은 우리 선조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떠한 것들을 알리기를 원했다는 것과 몇몇 헬라인들이 우리국가의 중대사를 알려고 매우 애를 썼다는 것이다.
3. 초기의 모델-율법서의 헬라어 역본
나는 톨레미(Ptolemies)왕조의 제2대 왕이[㈜ 톨레미 2세(Ptolemy II), "필라델푸스" (Philadelphus) (주전283-245년, E.Bevan).] 지식과 책 수집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매우 열성적인 왕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에게는 우리의 법과 정치체제를 헬라어로 번역시키려는 특별한 야심이 있었다. 그 당시 유대인들 가운데서 다른 어떤사람들에게도 뒤지지 않는 대제사장 엘르아살(Eleazar)도[㈜ 아리스테아스(Aristeas)이야기에 등장하는 명성있는 대제사장.] 위에서 언급한 톨레미 II세가 그 특별한 야심에 참여하는 것을 시기하지 않았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틀림없이 왕의 요구를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우리 민족의 전통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것을 막지 않았다는 사실도 알았다. [㈜ 모세 5경의 헬라역의 기원에 관한 전통적 이야기는 소위 아리스테아스 서신(Letter of Aristeas)에서 언급되었으며, 고대.12권. 2:1-15(11-118)에서 반복되고 있다.] 따라서 나는 우리 대제사장 엘르아살의 관대함을 본받음과 동시에 그왕과 같이 지식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왜냐하면 톨레미 II세는 그 당시 우리의 문서들을 모두 얻지는[㈜ 혹은 "나보다 앞서 확보하는 것." 요세푸스는 자신이 자유롭게 사용하는 70인역에 율법부분 이외에도 덧붙여져 있다는 것을 언급하지 않았다.]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성경 속에는 여러 가지 수많은자료가 수록되어 있었는데 번역가로 알렉산드리아에 파견되었던 사람들은 톨레미 II세에게 단지 율법서만을 전해주었다.
이 성경 속에는 5,000년의 역사가 담겨져 있다. 속에는 수많은 사건들과 수많은 전쟁 지도자들의 위대한 행동, 정치체제의 변이 등이 수록되어 있다.
대체적으로 이 역사를 정돈하는 사람은 우선 모든 사건들이 믿을 수 없을 만큼 기적적으로 성취되었다는 것과, 이 모든 행복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분의 뜻을 따르고 그분의 율법을 깨뜨리지 않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의 율법을 정확하게 준수하지 않고 거역하면, 인간들이 생각하기에 충분히 쓸 수 있는 것도 못쓰는 것으로 바뀌고[㈜ a[pora givnetai ta; povrima(비실제적인 것이 실제적인 것이 되다). 에쉴루스(Asechylus) (P.V. 904) 구절인 a[pora porimo"("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의 역이다. 이 구절은 "부적당한 신화"와의 관련성이 아래에서 비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요세푸스의 양식있는 보조자의 심중에 있을 것이다.] 좋은것도 돌이킬 수 없는 재앙으로 변하고 만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제 나는 이 책을 읽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생각을 고정시키고 우리 입법자(모세)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가치있는 개념을 제공하고 있는지, 또 다른 신들에게서 유행하는 보기 흉한 신화적인 요소가 전혀 없는 하나님의 순결하심을 계속 언급하면서 하나님의 능력에 걸맞는 행위들을 하나님이 하셨다고 주장하는 것들이 사실인지 살펴보시기를 간절히 원한다.아주 오랜 기간을 그것도 까마득히 옛날에 일어났던 사건을 기술하면서 모세가 허구(fiction)로 꾸며낼 가능성도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모세는 2,000년 전에 태어났기 때문에 시인들(헬라-역자(2)주)이 자기 신들의 출생조차도 감히 그렇게 오래전에 태어났다고 말하지 못하는 오래전 사람이다. 하물며 그 당시에 인간의 율법이나 판결같은 것이 어디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이 책을 서술해 나갈 때 우리 성경에 포함된 것만을 시대순에 따라 정확하게 기술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이 작업에 착수하면서 기록에 포함된 것 외에는 어떠한 것도 가감첨삭하지 않을 것을 약속한 바 있기 때문이다. [㈜ 고대. 1권. 서문2 (5). 사실상 요세푸스는 "어떤 기이한 전설". 특히 모세에 관한 전설을 추가했고, 생략해도 좋은 내용을 생략하였다.]
4. 모세는 다른 법률 제정자와 대조되다
하지만 거의 우리의 모든 조직은 우리의 입법자인 모세의 지혜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간략하게라도 미리 모세에 관해서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이 율법과 역사적인 사실에 대해 기술하기로 약속해 놓고 어떻게 이렇게 많은 철학적인 내용들을[㈜ 헬라어 "생리학"은 창조 기사에 있어서 존재의 기원에 관한 조사를 뜻한다. 요세푸스는 특히 창2:7와 관련성이 있는 동일 어근의 동사를 사용한다(고대.1:2(34)).] 포함하고 있는지에 대해의아해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내용을 모세가 매우 필요하다고 간주한 것은, 자신의 행실을 바르게 하고 타인에게 율법을 가르치려고 하는 자는 먼저 하나님의 속성을 깊이 생각하고 하나님이 하신 일을 묵상한 것에 기초하여 모든 일을 최대한으로 본받아야 하며, 인간 속성이 최대한 할 수 있을 만큼 하나님을 따르도록 노력해야 할 것을 강조하려 했기 때문이라는사실을 독자들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그런 이상 없이는 입법자 자신이 바른 마음을 가질 수 없을 것이며 독자들에게 덕목을 권장하도록 글을 쓸 수도 없기 때문이다.
나의 견해로는, 입법자 자신들이 먼저 하나님은 성부이시고 모든 만물의 주시며 모든 것을 알고 계실 뿐만 아니라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행복한 삶을 열어 주시지만, 덕목의 길을 걷지 않는 자들은 피할 수 없는 불행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는 점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세가 이 교훈을 백성들에게 가르쳐주길 원했을 때 모세는 다른 입법자들이 만들었던 방식을 따라그의 율법을 제정하지 않았다. 모세 율법의 원리는 두 사람 사이에서의 계약과 의식에서가 아니라 백성들의 마음이 하나님과 그분이 하신 천지창조에 향하게 하는 것과,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가운데 가장 훌륭한 피조물이라는 것을 설득하는 것에 있었다. [㈜ 이 책과 그 후편에서 요세푸스는 '아피온 반박문'(Contra Apionem)에서 다시 주장했던 작품인 필로(Philo)의 '세계의 창조자에 관하여' (De opificio mundi)를 주장하였다. 필로의 저서는 모세와 다른 입법자들 사이의 유사한 대조로 시작한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법전을 꾸밈없이 설명하였고, 다른 일부는 법전에 신화적 허구를 붙임으로써 군중을 현혹하였다. 모세는 자신의 율법을 사용한 사람들의 마음을 조성하기 위하여 그렇게 한 것도 아니었으며, 무엇을 해야 하며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 지를 당장 규정하지도 않았지만, 창조에 관한 놀랄만한 설명으로 시작하였다(1-3 Cohn-Wendland).] 이 원리가 백성들에게 수용되었기 때문에 모세는 동족을 설득해서 다른 모든 문제들까지도 쉽게 신앙에 복종시킬 수 있었다.
다른 입법자들은 우화를 따르게 하고 그들의 우화에 대해 인간에게 최대로 비난받을 만한 악으로 전가시키고 사악한 인간들에게 그들의 죄에 대한 그럴듯한 변명을 하게끔 하는 반면에, 우리의 입법자 모세는 하나님께서 완전한 덕목을 소유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설명하면서 인간들은 모두 그것을 따르기 위해 힘써야 하며,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믿지 않는 사람들은 가장 혹독한 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가정했다. 그러므로 나는 그런 관점에서 이 작품을 전체적으로 숙독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권능과 인류에 대한 사랑이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없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책에서는 모든 것을 우주의 본성과 연관시키고 있다. [㈜ 우주와 조화를 이루고 있는 율법의 사상은 필로(Philo)로부터 유래한다. "말한 것처럼, 세계의 창조를 포함하고 있는 이야기의 시작은 가장 놀라운 것이다." '세계의 창조자에 관하여' (De op. mundi) 3.] 우리 입법자는 어떤 것들은 현명하게 말하고 있는가 하면 불가사의하게도 말하고, 또 어떤 것들은 어울리는 비유를 들어 말하고 있기도 하지만 여전히 직접적인 설명을 요하는 부분들에 관해서는 명백하고 솔직하게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의 근본원리를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매우 면밀한 철학적 명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나에게 시간을 주신다면 이 작품을 다 쓰고 난후에 철학적 명제를 설명하기 위한 글을 다시 쓰기 시작할 것이다. [㈜ '관습과 원인' (Customs and Causes)(고대.4권. 8:4(198))에 관한 이 예정된 작품은 완성되지 않았지만, 그것에 관한 4권의 책의 언급과 그것의 계획된 내용에 관련되어 고대사에서 드문드문 나타나는 암시는 요세푸스가 구상했고 실제로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 나는 기록되어 있는 것을 찾아 모세가 천지창조에 대해 말한 것을 언급한 후에 본격적인 역사서술 작업에 착수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