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에도 정희대비와 원상들은 왕이 죽은 바로 그날 일사천리로 덕종(의경세자, 예종의 형)의 둘째 아들인 자산군(者山君)을 왕으로 지목하고 즉위식까지 마쳤으니, 그가 바로 조선의 9대 왕인 성종이다. 왕위 계승 서열로만 따지자면 자산군은 왕이 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우선 예종과 안순왕후 사이에서 낳은 원자(제안대군)가 있었다. 원자가 너무 어려서 안 된다면, 그다음 계승 순위는 의경세자의 큰아들인 월산군(月山君)이 되어야 옳았다. 그런데도 정희대비는 자산군을 왕으로 지목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제 원자가 바야흐로 어리고, 또 월산군은 어려서부터 병에 걸렸으며, 홀로 자산군이 비록 어리기는 하나 세조께서 일찍이 그 도량을 칭찬해 태조에 비하는 데 이르렀으니, 그로 하여금 주상을 삼는 것이 어떠하냐? - 《예종실록》 권 8, 예종 1년 11월 28일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자산군은 다름 아닌 당대의 권력자 한명회의 사위였다. 그래서 이를 한명회와 정희대비의 정치적 결탁으로 보는 시선이 많았고, 때문에 예종 독살설이 대두되기도 했다. 그러나 수렴청정을 하고 있는 정희대비와 훈신 세력의 좌장 한명회가 왕의 뒤에서 권력을 쥐고 있는 이상 이러한 의혹은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했다.
조선의 8대 임금 예종에게는 아들이 둘 있었다.
장남인 인성대군, 차남인 제안대군.
이중 인성대군은 3살 때 일찍 죽어서 원래대로면 제안대군이 예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야 했을 것.
그런데 또 예종이 20세의 나이로 급사.
예종이 승하했을 때 제안대군의 나이는 4살에 불과.
왕위를 물려받기에는 너무 어렸기에 (단종의 예도 있고) 당시 왕실의 웃어른이었던 정희왕후는 제안대군 대신 그의 사촌인 자을산군을 왕위에 올리는데 바로 성종.
여하튼 성종이 왕이 되니 제안대군의 입지가 참 애매해진다. 예종의 직계인 만큼 그는 성종 이상의 정통성을 지니고 있었고 언제 왕이 되도 이상하지 않은 위치에 있었다.
이런 인물이 제 명에 살기란 하늘에 별따기처럼 힘든 일.
예를 들어 훗날 광해군은 영창대군을 죽였고, 소현세자의 아들들 역시 삼형제 중 둘이 유배지에서 죽었다.
본인들이 왕위를 원치 않는다 해도 주변에서 무슨 바람을 넣을지 모를 일이니까.
심지어 제안대군의 정통성은 이들과는 비교를 불허할 정도였으니.
그럼에도 제안대군은 천수를 누릴 수 있었다.
아무도 제안대군이 왕위에 오를 거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는 당대에 바보로 유명했다.
제안대군의 어리석음에 대한 일화가 몇 가지 더 나오는데, 거지를 보고 “쌀이 없으면 꿀떡의 찌꺼기를 먹으면 될 것이다.”
했다든가, 무소뿔로 된 허리띠를 선물 받은 뒤 그걸 찬 채로 왕에게 달려가서 “이 띠를 신에게 하사하소서.”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재밌는 건 이렇게 바보스런 모습을 자주 보인 제안대군이 정작 복잡한 유교 예법을 따라야 할 때는 틀림이 없었다는 것.
게다가 둘째 부인 박씨를 내치려던 조작 사건은 어설프긴 했으나 단순히 바보가 계획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평.
더군다나 연산군의 악녀로 이름 높은 장녹수는 원래 제안대군의 종으로 제안대군이 직접 연산군에게 바치므로.
덕분에 제안대군은 서슬퍼런 연산군 시대에도 아무런 화를 입지 않고 무사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제안대군이 사실은 바보가 아니라, 멍청한 척을 해서 목숨을 보존하려 한 것 아니었을까란 설이 지배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