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마을 웅도 (장석률)
서산 대산읍에 웅도라는 섬이 있다. 섬 모양이 잠자는 곰 같아서 웅도라고 하며 그곳 사람들은 곰섬이라고 부른다.
섬이지만 유두교가 있어 자동차로 드나들 수 있는 섬이다.
유두교는 바닷물이 얕은 곳에 돌을 쌓아 만든 길이다.
밀물 때가 되면 유두교는 물에 잠기어 건널 수 없다.
웅도에 사는 사람들은 물때에 맞춰 이 다리를 건너다닌다.
웅도는 깎아지른 듯 한 바위 절벽이 있는 것도 아니고, 깊고 푸른 바다에 파도가 넘실대는 것도 아니다.
웅도를 둘러싼 바다는 물이 빠지면 넓은 갯벌이 드러났다가 한나절이 지나면 바닷물이 갯벌을 덮는다.
대부분 갯벌로 이루어진 바다라서 물고기가 팔딱거리는 수산시장도 없다.
서산을 일컬어 산도 아니고 들도 아닌 비산비야(非山非野)라면, 웅도는 섬도 아니고 육지도 아닌 비도비륙(非島非陸)으로 표현하면 적절할지 모르겠다.
웅도에는 다른 섬에 없는 잔잔한 사람 냄새가 갯고랑마다 숨 쉰다.
순박하고 착한 사람들이 갯벌에 기대어 산다. 갯바닥에 붙어사는 낙지, 조개, 굴 등을 채취하는 것이 그들의 직업이요 천직이다.
말수가 적어 여럿이 모여도 좀처럼 시끄런 모습을 보기 어렵다.
기뻐도 내색하지 않고 겸손하며 슬픈 일을 당해도 발악하지 않고 속으로만 소처럼 운다.
웅도가 좋은 섬인 이유는 단지 그곳에 그들이 살기 때문이다.
1960년대 웅도 사람들의 삶은 거칠고 힘든 나날이었다.
여름 내내 바지락을 채취하여 껍질을 까서 항아리에 조개젓을 담았다.
항아리가 차면 지게에 지고 80리길 서산 읍내 장터로 팔러 나갔다.
어깨에 걸린 지게 끈이 살을 파고들어 뼛속까지 아프지만 지게를 내려놓고 한가롭게 쉴 수 없다.
아침 일찍 웅도에서 출발해서 아무리 부지런히 걸어도 지곡 한티 고개를 넘어 성연에 다다르면 날이 저문다.
허름한 주막집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날 오전이 지나야 읍내 장터에 도착한다.
조개젓 한 동이는 보리쌀 몇 말 사기도 버거울 만큼 싸다.
읍내에 나왔으니 막걸리라도 한 잔 마시면 좋으련만 그마저도 웅도 사람들에겐 버거운 사치 놀음이다.
식구들의 여름 양식 보리쌀을 사서 지게에 지고 다시 웅도로 돌아갔다.
웅도에 땅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토지가 척박하고 거름이나 비료를 주지 못하니 곡식이 제대로 자랄 수가 없다.
보리가 다 커도 겨우 한 뼘 남짓이고 보리 이삭도 풀씨만큼이나 작았다.
농사지을만한 여건이 못 되니 돈이 되던 안 되던 갯벌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웅도 갯벌은 그들의 터전이고 생명 줄이다.
세월은 덧없이 흘러 조개젓 항아리를 지고 다니던 청년은 90세가 되었다.
세상이 바뀌듯 웅도도 바뀌었다.
더 이상 예전의 그 섬이 아니다.
육지 사람들보다 돈벌이도 좋아졌고 자녀들에게 모두 대도시에 집 한 채씩 마련해 줄 정도로 여유가 있다.
갯벌에서 채취하는 해산물은 유통구조가 발달되어 곧바로 수산시장으로 납품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냉동시설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어 보관도 가능하니 제대로 값을 받을 수 있다.
해안 경관이 이색적이라서 관광객도 심심찮게 드나들고 전망 좋은 곳에는 펜션도 여러 채 들어서 있다.
땅값은 자연스럽게 치솟았고 사람들의 주택도 모두 개량하거나 새로 지어 편안하게 살고 있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웅도에도 개발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유두교를 대신하여 교량을 건설할 계획이라고 한다.
유두교는 물때를 맞추지 않으면 건널 수가 없었기 때문에 웅도 사람 입장에서는 교량이 건설되면 살기가 더 편해질 것이다.
십여 년전 웅도에서 할머니와 같이 살던 중학교 1학년 학생이 학교에서 돌아가는 시간을 맞추지 못해 물에 잠기기 시작한 유두교를 건너다가 물에 휩쓸려 떠내려가 사망한 일이 있었다.
유두교의 가슴 아픈 사연 위로 세월을 건너왔지만 머지않은 앞날엔 유두교는 웅도 사람들 추억의 다리로 남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