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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지파(6) - 갓 지파 / 창 49:19
오늘은 열두지파 여섯 번째 시간으로, 갓 지파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의 성씨가 지파와 같은 개념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성씨는 너무 광범위해서 더 좁게 생각하면, 가문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가문(家門)은 ‘가족 또는 가까운 일가로 이루어진 공동체 또는 그 사회적 지위’입니다. 단일한 성(姓)을 공유하는 혈족과 혼인관계를 통해서, 그 구성원에 포함된 혈족의 일원을 통칭하는 단어입니다. 유사개념으로 종중이란 말을 사용하는데, 가문의 구성원들이 모인 단체를 종중이라고 합니다. 공통의 선조를 두고, 제사나 분묘 보존, 문중 재산 관리 등을 하는 집합체를 말합니다. 종중은 자연발생적인 것이 특징입니다. 역사적, 문화적 배경 없이 인위적으로 만든 단체는 종중이 아닙니다. 대법원은 ‘종중이란 공동선조의 분묘수호와 제사 및, 종원 상호간의 친목 등을 목적으로 하여 구성되는, 자연발생적인 종족집단이므로, 종중의 이러한 목적과 본질에 비추어 볼 때, 공동선조와 성과 본을 같이 하는 후손은, 성별의 구별 없이 성년이 되면, 당연히 그 구성원이 된다고 보는 것이 조리에 합당하다.’고 하였습니다. 호주제 폐지 등 가족법에서 일련의 변화가 일어나고, 남녀평등이 보편적 가치로 정립되면서, ‘남성만 종중원이 된다’는 기존의 판례를 폐기하고, 남녀 모두 종중 구성원이 된다는 것이 대법원의 변경된 입장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가문을 중시하기에 ‘가문의 영광’이라는 영화와 드라마도 제작되었으며, 몇 년 후에는 ‘가문의 영광 리턴즈’라는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고, ‘가문의 영광’을 패러디한 코메디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우리가 가문을 중시하듯이 이스라엘도 지파를 중요시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축복하셨습니다. 창 12:2절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아브라함이 큰 민족을 이루게 될 거라는 축복과 달리, 아브라함이 사라를 통해서 낳은 아들은, 달랑 이삭 한 명이었습니다. 그럼 아들 대에 가서라도 큰 민족을 이루었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아들 이삭이 리브가와 결혼하여 낳은 아들은, 쌍둥이가 전부였습니다. 역시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을 통해서 열두 아들을 낳게 되고, 그들이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드디어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 잘 믿어, 복을 당대에 받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바람과는 달리, 당대에 아닌 다음대에 받을 수도 있습니다. 당대를 어렵게 살다간 그리스도인을 보면서, ‘예수 잘 믿어도 소용없네’ 하고, 쉽게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부모가 복음을 위해 심은 것을, 자식 대에 가서 복을 거둘 수 있습니다. 조부모가 교회를 위해 헌신한 것을, 손자 대에 가서 복을 거둘 수 있습니다. 확실한 것은, 복음을 위해 심은 것은 어디 가지 않고, 교회를 위해 헌신한 것은, 언젠가 거두게 된다는 것입니다.
레아가 첫 아내였지만 신랑에게 사랑받지 못함을 보시고, 레아의 태를 열어주신 것은, 하나님의 돌보심이었습니다. 레아를 향한 하나님의 돌보심의 기간이 짧지 않았습니다. 연달아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를 낳았습니다. 레아가 아들을 낳으면, 얼마간 야곱의 관심을 받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야곱의 관심은 라헬에게 갔습니다. 레아를 통해 네 명의 아들을 얻은 것은 더없이 좋지만, 그럴수록 야곱은 라헬에게 괜한 미안함이 들었습니다. 왜 하나님이 라헬의 태는 열어주시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아이가 없는 라헬은, 스트레스가 장난이 아닙니다. 언니가 네 아들을 낳는 동안, 자기에게는 태기도 없으니, 보통 스트레스 받는 게 아닙니다. 매일매일 쌓여가던 스트레스가, 어느 날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창 30:1절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서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의 언니를 시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남편한테 선을 넘는 심한 말을 하고 만 것입니다.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이건 자기 맘을 좀 알아달라는, 자기편을 좀 들어달라는, 정도의 수준이 아닙니다. 뭐든지 정도껏 해야 하는데, 라헬이 심리적 선이 무너지고 만 것입니다. 라헬이 감정적으로 도발하자, 야곱도 감정적으로 대응했습니다. 2절 ‘야곱이 라헬에게 성을 내어 이르되, 그대를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라헬의 말도 안 되는 투정에, 야곱이 버럭 성을 냈습니다. 라헬은 지금까지 야곱이 이렇게 성을 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라헬은 아차 싶었습니다. 그래서 목소리를 낮추어, 자신이 그동안 고민해왔던 것을, 야곱에게 제안했습니다. 3절 ‘라헬이 이르되, 내 여종 빌하에게로 들어가라. 그가 아들을 낳아 내 무릎에 두리니, 그러면 나도 그로 말미암아 자식을 얻겠노라 하고’ 전에 사라가 써먹었던 수법입니다. 아마 그게 당시 관습이었던 거 같습니다. 야곱은 라헬의 제안을 받고, 약간 고민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아들을 갖고 싶어 하는, 라헬의 절실함을 져버릴 수 없었습니다. 기다리는 리브가에, 기도하는 이삭의 모델을 따랐다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야곱도 라헬도 그 수준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야곱은 라헬의 제안을 따라, 빌하와 동침했고 아들을 얻었습니다. 라헬은 자기가 낳은 것처럼 기뻐하면서, 아들의 이름을 단이라고 지었습니다. 야곱은 빌하와의 사이에서 둘째 아들을 얻었습니다. 라헬은 둘째 아들의 이름을 납달리라고 지었습니다. 라헬은 첫째 아들을 통해서, 아이 낳지 못하는 억울함을 풀었고, 둘째 아들을 통해서, 언니와의 경쟁에서 이겼다고 선포했습니다. 숫자상으로 4:2일 뿐 아니라, 두 아들도 종을 통해서 얻었는데도, 언니와의 경쟁에서 이겼다고 하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빌하가 계속 아들을 낳을 거라는 믿음으로, 미리 선포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빌하를 통해서 아들을 얻는 것은 여기까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 허락하시지 않았습니다.
1. 갓 지파의 기원
레아와 라헬의 출산 경쟁은 더 불이 붙었습니다. 동생의 방법을 언니도 그대로 따라했습니다. 라헬은 아들이 하나도 없을 때 그 방법을 썼습니다. 언니는 네 아들이나 낳았는데, 자기는 하나도 없을 때, 어쩔 수 없어 그 방법을 썼습니다. 그런데 레아는 이미 네 아들이 있는데도, 동생의 방법을 따라했습니다. 경쟁에 눈이 멀어, 언니가 동생만 못한 결정을 했습니다. 9절 ‘레아가 자기의 출산이 멈춤을 보고, 그의 시녀 실바를 데려다가, 야곱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였더니’ 계속해서 아들을 낳을 줄 알았는데, 넷째인 유다를 낳고 출산이 멈췄습니다. 사실 네 아들을 낳은 것만으로도 대단합니다. 라헬에게 4:0으로 멀찌감치 앞서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라헬이 편법을 사용하여, 4:2까지 따라 붙었습니다. 라헬의 추격을 당하자, 레아는 안절부절 조바심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동생의 방법을 그대로 복사했습니다. 야곱은 처신하기 곤란한 상황입니다. 10-11절 ‘레아의 시녀 실바가 야곱에게서 아들을 낳으매, 레아가 이르되 복되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갓이라 하였으며’ 분명히 레아가 제안한 방법이, 라헬이 제안한 방법과 같습니다. 방법만 놓고 보면,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안하는 사람이 처한 상황은 다릅니다. 당시 라헬이 처한 상황과, 지금 레아가 처한 상황이 다릅니다. 하지만 야곱은 그걸 설명하여 이해시킬 수 없다고 판단하고, 레아의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공정성의 시비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사실 라헬은 되고 왜 나는 안 되냐며, 레아가 따지고 들면 야곱이 답하기 곤란합니다. 그러니까 처음에 잘했어야 합니다. 처음에 라헬의 편법을 수용하다보니, 지금에 와서 레아의 방법이 편법인 줄 알지만,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사탄이 우리를 죄악의 수렁으로 끌어들이는 방법이, “이번 한 번만”입니다. “딱 이번 한 번이면 된다”고 유인합니다. 그 한 번에 넘어가고 나면, 야곱처럼 코가 꿰입니다.
야곱이 코가 꿰여 실바에게 들어갔습니다. 실바가 출산이 멈춘 레아를 대신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아들이 갓입니다. 갓은 행운이란 뜻입니다. 같은 여종의 아들이지만, 라헬의 종의 아들과는 달리 이름의 뜻이 좋습니다. 라헬의 종 빌하의 두 아들의 이름은, 판단자라는 뜻을 가진 단과, 경쟁함이라는 뜻을 가진 납달리입니다. 그와 대조적으로, 레아의 여종 실바의 두 아들은 행운이란 뜻을 가진 갓과, 기쁨이란 뜻을 가진 아셀입니다. 라헬은 현재 자기 마음 상태를 아들에게 투영했습니다. 레아는 라헬과는 달리 아들의 장래를 생각했습니다. 레아는 이미 넷째를 낳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셋째까지 낳았는데도, 야곱의 마음이 라헬에게서 돌아오지 않음을 보고, 넷째를 낳고는 마음을 바꿨습니다. 현재 상황에서 하나님을 찬송하기로 했습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을 찬송하기로 마음을 정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라헬이 빌하를 통해 두 아들을 얻게 되니, 마음이 쫓겼습니다. 자기 여종 실바를 들여보내어 아들을 낳고 보니, 한결 마음의 여유를 찾았습니다. “복 되도다.” 여종을 통해 태어난 아들이지만, 그 아들이 복되기를 바랐습니다. 더 나아가 자신을 복된 여인으로 고백했습니다.
레아는 야곱의 첫 아내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복된 여인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하려는 라헬과, 그런 라헬을 편애하는 남편이 못마땅했습니다. 남편 사랑을 자기에게로 돌려보려고, 필사적으로 네 아들을 낳았습니다. 라헬은 그렇게 아들을 갖고 싶어도 갖지 못했는데, 자신은 네 아들을 순풍순풍 낳았습니다. 그때까지도 자신이 얼마나 복된 여인인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자기 여종 실바를 통해 아들을 낳고 나서야, 자신을 발견하고 외쳤습니다. “복 되도다.” 레아는 자존감을 회복한 것입니다. 자신감과 자존감은 다릅니다. 자신감이 다른 사람들의 인정과 외적 목표의 성취로 인해 채워지는 것이라면, 자존감은 스스로 나의 가치를 발견하고 존중해 주는 상태에서 발현됩니다.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지 못한 사람은, 스스로를 함부로 대하게 됩니다. 남을 함부로 대해서도 안 되지만, 자신을 함부로 대하는 것은 더욱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복된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람입니다.
2. 갓에 대한 야곱의 축복
창 49:19절 ‘갓은 군대의 추격을 받으나, 도리어 그 뒤를 추격하리로다.’
야곱은 죽기 전 아들들을 축복했습니다. 갓에 대하여는 용맹한 갓이 될 것을 예언했습니다. 갓은 시므온이나 레위처럼 폭력적이지 않았습니다. 단처럼 호전적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유다처럼 선두에 서지도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갓은 용맹했습니다. 용맹했기에, 후에 요단 동편에 기업을 얻었고, 그 기업을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요단 동편은 약속의 땅 가나안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원래 계획에 없었는데, 얻게 된 땅입니다. 그 땅은 에돔, 모압, 암몬, 아모리 족이 살고 있었던 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목적지는 요단 서편이었기에, 그들에게 지나갈 수 있게 길만 빌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군대를 일으켰고, 이스라엘 백성은 생존을 위해 싸웠습니다. 그래서 얻게 된 땅이 바로 요단 동편입니다. 그리고 그곳에 르우벤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와 함께, 갓 지파가 유업을 얻게 됩니다. 자기들의 땅을 빼앗긴 원주민들은, 땅을 되찾을 기회를 호시탐탐 노렸습니다. 그래서 갓 지파는, 그들 군대의 추격을 받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갓 지파는, 용맹하게 그들과 싸웠고 승리했습니다. 자기 지파에게 주어진 땅을 끝까지 지켜냈습니다.
기독교 교파 중에 구세군(The Salvation Army)이라고 있습니다. 당시 영국 교회는 생명력을 잃어버렸고, 사양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영혼을 향한 열정도,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뜨거움도 없었습니다. 형식적인 그리스도인들, 직업적인 성직자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분연히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를 따르는 일단의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 무리의 지도자가 윌리암 부스(William Booth)이고, 그 무리가 구세군입니다. 그들은 우리는 세상을 구원하는 군대라는 뜻으로 ‘구세군’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부르는 찬송가는 군가였고, 목회자를 사관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전도를 어떻게 이해했는가 하면, 마귀에게 붙잡혀 포로된 영혼들을 이끌어 내는 영적 전투라고 생각했습니다. 구세군이 특별한 신앙을 가진 교파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 모두를 그리스도의 군사에 비유합니다. 딤후 2: 3-4절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몬 1:2절 ‘자매 압비아와 우리와 함께 병사 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노니’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군대의 추격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마귀는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우리의 빈틈을 엿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해야 합니다. 머리에 구원의 투구를 쓰고, 가슴에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허리에 진리의 띠를 띠고, 발에 복음의 신발을 신어야 합니다. 한 손에 믿음의 방패를 들고, 다른 손에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이 모든 것 위에 기도를 더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영적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3. 갓 지파에 대한 모세의 축복
신 33:20-21절 ‘갓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갓을 광대하게 하시는 이에게 찬송을 부를지어다. 갓이 암사자 같이 엎드리고, 팔과 정수리를 찢는도다. 그가 자기를 위하여 먼저 기업을 택하였으니, 곧 입법자의 분깃으로 준비된 것이로다. 그가 백성의 수령들과 함께 와서, 여호와의 공의와 이스라엘과 세우신 법도를 행하도다.’
모세도 죽기 전 열두 지파를 축복했습니다. 모세는 갓 지파를 축복하면서, 하나님을 “갓을 광대하게 하시는 이”로 표현했습니다. 광대하게 하다는, 갓 지파가 광활한 영토를 획득하게 될 거라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갓 지파는 후에 땅을 분배받을 때, 그 어떤 지파보다 넓은 영토를 얻게 됩니다. 모세의 축복 기도를 들었던 여호수아가, 갓 지파에게 땅을 넓게 할당해 준 것이 아닙니다. 여호수아는 제비 뽑기를 통해서 땅을 분배했습니다. 갓 지파는 가나안 정복 이전에, 이미 요단 동편에서 모세에게 땅을 분배 받았습니다. 그 땅이 좋은 땅은 아니었지만, 먼저 기업을 택하였습니다. 모세도 처음에는 오해를 할 뻔했습니다. 그래서 좀 심하게 나무랐습니다. 민 32:6-7절 ‘모세가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에게 이르되, 너희 형제들은 싸우러 가거늘, 너희는 여기 앉아 있고자 하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낙심하게 하여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으로 건너갈 수 없게 하려 하느냐?’ 모세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렇게 오해할 만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자신들도 가나안 정복 전쟁에 참전하겠다고 맹세를 했습니다. 민 32:25-27절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이 모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주의 종들인 우리는 우리 주의 명령대로 행할 것이라. 우리의 어린 아이들과 아내와, 양 떼와 모든 가축은 이곳 길르앗 성읍들에 두고, 종들은 우리 주의 말씀대로 무장하고, 여호와 앞에서 다 건너가서 싸우리이다.’ 모세는 그들의 말을 믿어주었습니다. 민 32:33절 ‘모세가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과 요셉의 아들 므낫세 반 지파에게, 아모리인의 왕 시혼의 나라와 바산 왕 옥의 나라를 주되, 곧 그 땅과 그 경내의 성읍들과, 그 성읍들의 사방 땅을 그들에게 주매’
실제로 갓 지파와 르우벤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는, 요단 동편에 여자들과 아이들만 남겨두고,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을 정복하는데 참전하여 끝까지 싸웠습니다. 당시 상황에서 요단 동편에 가족들과 가축들을 남겨두고, 전쟁하러 가는 것은 보통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그곳 원주민인 에돔, 모압, 암몬, 아모리 족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군대라도 일으키는 날이면, 여인들과 아이들은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나안 정복 전쟁이, 하루 이틀에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몇 년이 걸릴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이들 두 지파 반은 믿음으로 행했습니다. 그들의 믿음대로 하나님이 역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두 지파 반의 남겨진 가족들과 가축들을 안전하게 지켜주셨습니다. 두 지파 반은 모세와의 약속을 지켰고, 모세는 두 지파 반과의 약속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모세가 죽기 전, 갓 지파를 축복할 때, 그 당시의 일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가 자기를 위하여 먼저 기업을 택하였으니, 곧 입법자의 분깃으로 준비된 것이로다.” 갓 지파가 먼저 기업을 택한 것을, 나쁘게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게 입법자의 분깃으로 준비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약속을 지킴으로 신뢰를 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가르쳐줍니다.
4. 갓 지파의 지리적 위치
수 13:24-28절 ‘모세가 갓 지파 곧 갓 자손에게도, 그들의 가족을 따라서 기업을 주었으니, 그들의 지역은 야셀과 길르앗 모든 성읍과, 암몬 자손의 땅 절반 곧 랍바 앞의 아로엘까지와, 헤스본에서 라맛 미스베와 브도님까지와, 마하나임에서 드빌 지역까지와, 골짜기에 있는 벧 하람과 벧니므라와, 숙곳과 사본 곧 헤스본 왕 시혼의 나라의 남은 땅 요단과, 그 강 가에서부터 요단 동쪽 긴네렛 바다의 끝까지라. 이는 갓 자손의 기업으로, 그들의 가족대로 받은 성읍들과 주변 마을들이니라.’
갓 지파가 차지한 땅은, 암몬 족속이 살던 곳입니다. 그 땅은 향유의 주산지로, 애굽에서도 길르앗의 향유를 사기 위해, 상인들이 찾아올 정도였습니다. 갓 지파에 속한 도시 중 랍바가 있습니다. 랍바는 오늘날 요르단의 수도 암만입니다. 랍바는 다윗과 연결됩니다. 삼하 11:1절 ‘그 해가 돌아와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에게 있는 그의 부하들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그들이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쌌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더라.’ 이때 다윗이 충신 우리아의 아내를 범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이미지와는 달리, 어떻게든 자신의 범죄를 은폐하고 무마하려고 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군대가 암몬 자손을 치려고 랍바를 에워싸고 있었는데, 다윗이 요압에게 특별 지시를 내렸습니다. 우리아를 최전선에 보내 죽게 하라는 지시였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치밀한 계획대로, 우리아가 전사한 것으로 꾸몄지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분노의 눈으로 그걸 보고 계셨고, 다윗은 그때부터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갓 지파가 분배 받은 도시 중 마하나임이 있습니다. 마하나임은 우선 야곱과 관련이 있습니다. 창 32:1-2절 ‘야곱이 길을 가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야곱이 이곳에서 하나님의 천사를 만난 후에, 마하나임이라고 지었습니다. 마하나임의 뜻은 두 진영, 또는 두 군대입니다. 두 군대가 야곱 일행을 전후에서, 또는 좌우에서 보호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야곱은 막상 아버지 집으로 출발하기는 했지만, 에서에게 공포를 느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보내주셔서, 야곱을 안심시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군대인 천사의 역할은, 신약성서에도 동일하게 나옵니다. 히 1:14절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 마하나임은 또한 다윗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삼하 17:24절 ‘이에 다윗은 마하나임에 이르고, 압살롬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과 함께 요단을 건너니라.’ 마하나임은 왕정 시대의 중요한 요새였습니다. 다윗은 말년이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셋째 아들 압살롬이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다윗이 얼마나 급했든지, 벗은 발로 울면서 예루살렘을 떠나야 했습니다. 다윗이 요단을 건너 머물며 심신을 회복한 곳이 마하나임입니다. 다윗은 쿠데타가 진압될 때까지 마하나임에 머물다가, 예루살렘으로 복귀했습니다. 다윗에게 마하나님은 하나님의 피난처였던 것입니다.
5. 갓 지파의 상징 보석
출 28:15-21절 ‘너는 판결 흉패를 에봇 짜는 방법으로, 금 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정교하게 짜서 만들되, 길이와 너비가 한 뼘씩 두 겹으로 네모 반듯하게 하고, 그것에 네 줄로 보석을 물리되, 첫 줄은 홍보석 황옥 녹주옥이요, 둘째 줄은 석류석 남보석 홍마노요, 셋째 줄은 호박 백마노 자수정이요, 넷째 줄은 녹보석 호마노 벽옥으로 다 금 테에 물릴지니, 이 보석들은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대로 열둘이라. 보석마다 열두 지파의 한 이름씩 도장을 새기는 법으로 새기고’
갓 지파를 상징하는 보석은, 둘째줄 세 번째에 위치한 홍마노입니다. 홍마노를 영어성경에서는 diamond로 번역했습니다. 다이아몬드의 특징은 강도가 높다는 것입니다. 경도 10으로, 자연산 광물 중 경도가 가장 높은 단단한 광물이며, 오늘날은 보석 중에서도 가장 각광 받고 있습니다. 여성들이 예물로 가장 받고 싶어 하는 보석도, 아마 다이아몬드일 것입니다. 다이아몬드의 명칭은, ‘정복할 수 없다’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 아다마스(adamas)에서 유래하였다고 합니다. 중세 무렵에만 해도, 다이아몬드는 원석으로 주로 사용되고, 보석으로는 루비나 에메랄드 등의 색을 띠는 보석이 더 높이 평가되었습니다. 17세기말 브릴리언트 컷(Brilliant cut) 연마방법이 알려진 후, 보석으로서의 다이아몬드의 가치가 높아졌습니다. 18세기초만 해도, 유럽에 수입되는 다이아몬드는 희소했기 때문에, 법률로 다이아몬드는 왕후귀족만이 소유할 수 있도록 규제했다고 합니다. 다이아몬드는 야곱의 축복을 떠올리게 합니다. 창 49:19절 ‘갓은 군대의 추격을 받으나, 도리어 그 뒤를 추격하리로다.’ 대제사장의 흉패에 붙이는 보석들은 지파를 상징합니다. 지파의 특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홍마노 곧 다이아몬드는 갓 지파 이미지와 딱 어울립니다. 갓 지파는 군대 같이 강인한 지파, 누구도 정복할 수 없는 지파였습니다. 군대의 추격을 받아도, 도리어 그 군대의 뒤를 추격하는 지파였습니다.
오늘날 무기력한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병사로, 십자가의 군병으로 불렀는데, 얼마나 유약한지 모릅니다. 세상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본래 세상이 그리스도인을 감당하지 못해야 하는데, 현실은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찬송가 351장 1절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주의 군사니 앞서 가신 주를 따라갑시다.
우리 대장 예수 기를 가지고 접전하는 곳에 가신 것 보라
믿는 사람들은 주의 군사니 앞서 가신 주를 따라 갑시다
먼저는 내가 주의 군사라는 사실을 망각해서 그렇습니다. 앞서 가신 주를 따라가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자기 대장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잊어서 그렇습니다. 우리 앞엔 대장 예수님이 계십니다. 앞서 가신 예수님만 따라가면, 승리는 보장됩니다. 승리는 내가 누구냐에 달려있지 않고, 내가 예수님을 따르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요즘 새벽기도 때에 야고보서를 설교하고 있는데 약 1:1절에 ‘흩어져 있는 12지파’라는 말이 나옵니다. 약 1:1절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지파에게 문안하노라.’ ‘흩어져 있는 열두지파’는 수리아와 소아시아 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었던, 유대인들을 가리킵니다. 유대인들은 이스라엘과 유다 왕국의 멸망 이후, 온 세계에 흩어져 사는 민족이 되었습니다. 야고보는 스데반의 순교 이후 박해를 피해,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 그리스도인에게, 시련 가운데 있을지라도 더욱 감사하며 기뻐할 것을 종용합니다. 흩어진 사람들 가운데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를 주로 고백한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그 흩어진 유대인 가운데, 예수 믿는 자들이 바로 이 야고보서의 수신자입니다. 그렇다면 이 편지가 지금 우리와는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관계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역시 흩어져 있는 열두지파에 속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열두지파라는 것은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로마서 9장에서 아브라함의 진짜 씨가 누군지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피를 받은 모든 자가 다 아브라함의 씨가 아니라, 약속의 자녀가 아브라함의 씨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육신의 자녀가 아니라, 영적인 하나님의 자녀가 아브라함의 씨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과 동일한 믿음 가운데 있는 자가, 아브라함의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믿음의 성도들은 흩어진 열두지파입니다. 우리는 ‘흩어져 있다’는 표현에 주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이런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냥 우리 믿는 사람들끼리 한 동네를 이루어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마을을 ‘신앙촌’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보다는, 쉽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덜 갈등하고, 잘만 하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모여서 세상과 단절되어 살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으로 흩어져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서 세상의 빛이요,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이 흩어져 있는 열두지파라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심령과 삶이 더욱 온전한 데로 나아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 속에,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의 증거들이, 충만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 안에 살아 있는 꿈틀대는 믿음의 역사가 늘 나타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야곱을 통하여 자녀들이 “후일에 당할 일”을 예언하시면서 각 사람의 분량대로, 곧 그들의 그릇의 크기대로 축복을 하였습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들이 어떤 사람은 저주를 받고, 어떤 사람은 축복을 받은 이유가 그의 분량, 그의 그릇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그 그릇은 야곱의 아들들의 지난 삶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어떤 아들은 정욕으로 더럽혀진 그릇이었고, 어떤 아들들은 잔인함과 살육으로 피 묻은 그릇이었고, 어떤 아들은 방탕함과 정욕으로 얼룩졌으나, 회개함으로서 깨끗해진 그릇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에 맞게 축복과 저주가 주어졌음을 알게 하옵소서. 그렇다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갈보리교회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 어떤 그릇입니까? 하나님께서 주실 큰 복을 담을만한 큰 그릇입니까? 하나님이 주실 놀라운 복을 받을만한 깨끗한 그릇입니까? 주님 앞에서 크고 깨끗한 그릇이 되어, 하나님의 놀라운 복을 받아 누리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