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년전 3월의 첫 날, 이곳 서대문 형무소에는 조선 독립만세를 외친 3천여명의 조선사람들이 갇힙니다. 그러나, 미쳐 가두지 못한 이들이 있습니다. 저마다 품고 있던 나라의 독립 그리고 사람의 독립을 바라는 마음입니다. 이 이야기는 만세를 부른 그날부터서 영원히 기억해야할 역사가 될 어떤 독립운동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순재/EBS 다큐프라임: 우리 모두 독립운동의 역사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제가 12살 소년 때 1945년 8월 15일, 일제 패망으로 나라를 되찾은 감격으로 전국 방방곳곳에서 울려퍼진 독립만세 소리를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하와이에 있는 아주 작은 애국단체가 독립을 위해서 활동한 역사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저희는 바로 그곳을 찾아 여러분에게 알리고자 합니다.
프롤로그: 하와이 애국단을 찾아서
하와이, 이 세 글자를 들으면 떠오르는 풍경이 있고 마음은 절로 설렙니다. 열대의 푸른 바다, 꿈 같은 휴가를 생각하기 때문이죠. 허지만 오늘 저와 여러분이 만나게 될 하와이는 다릅니다. 백년전 일제로부터 독립을 꿈꾼 한 사람에게 하와이는 꿈을 이루기 위해 기댈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 한 사람은 白凡 金九 선생, 김구 선생의 자서전인 白凡逸志는 그 자체로 독립운동의 역사입니다. 특히 백범일지의 하권은 미주 각지에 흩어져 산 동포들이 당시 임시정부에 보낸 정상에 관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가운데 낯선 단체의 이름 하나가 또렷이 기록됩니다. 바로 하와이 愛國團입니다. 1930년대 상하이에 있던 임시 정부의 형편은 상당히 어려웠습니다. 당시에 곤궁함은 백범일지에도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죠. 기댈 곳은 해외 동포들, 특히 노동자로 살면서도 나라의 독립을 소망했던 미주지역의 동포였습니다. 우리 임시정부가 기댈 곳은 만주 러시아 일본 미국 등지에서 살고 있는 우리 해외 동포들이었습니다. 김구 선생은 바로 붓을 들었습니다. 임시정부의 각박한 사정을 알리기 위해서 였죠. 그러던 어느 날 우리 독립운동 역사에 한 획이 될 아주 반가운 편지 한 장이 멀리 하와이에서 날라옵니다.
김구 선생 앞으로 편지를 보낸 사람은 임성우 선생, 하와이 안창호, 임성우 등 제씨(諸氏)가 편지로 묻기를 그리고 그 임성우 선생이 바로 하와이 애국단원입니다. 하와이 애국단, 이 단체는 1932년 2월 14일 임시정부에 특무활동을 지원하기 위해서 하와이에서 살고 있는 우리 한국 사람들이 세운 비밀조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조직에 참여한 8명 중 그 공적을 인정받은 인물은 임성우(1889~1970/건국훈장 독립장) 선생과 현도명(1883~1968/독립훈장 애족장) 선생 등 단 두분 뿐입니다. 이 분들 외에 나머지 여섯분들에 대해서는 이름만 겨우 알려졌을뿐 그 어떤 기록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김예준, 김경옥, 김태정, 김성옥, 김형기, 김기순 이들은 누구일까요?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한인들이 하와이 땅을 처음 밟은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1902년 1월, 미국 최초의 이민자 121명 가운데 102명이 호놀룰루에 도착합니다. 그 후 약 7천명의 한인이 하와이로 이주해 오고 이주한 대부분은 노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와이에 흩어져 있던 30여개 사탕수수 농장으로 향하였고 그곳은 그대로 먹고 살기 위한 일터가 되었죠. 하와이 애국단원의 흔적을 찾기 위한 첫 여정도 바로 이 시기부터 시작해 보려합니다.
그리스도 연합감리교회/미국 하와이주 호놀룰루:
이순재/EBS 다큐프라임: 안녕하십니까?
이덕희/하와이 한인이민연구소장: 안녕하십니까?
하와이로 향하는 배 안에서 이민자들은 그들의 이름과 나이, 결혼여부 등을 적어야 했습니다. 오늘 만난 이덕희 소장은 그 명단을 일일이 살펴 모두 7415명의 한인 명단을 작성한 연구자입니다.(하와이 한인이민 역사박물관 소장)
이순재: 선생님이 정리하신 이민자 명단과 출입국 기록에 임성우 선생과 현도명 선생은 알려져 있고 그 외 여섯 분은…김기순씨는 36세 1905년도에 오셨네요. 그 다음에 김성옥씨는 김성옥씨 중 한 분은 36세, 결혼을 하신 분인데 1904년에 들어오셨고요. 그 다음에 김예준씨 지금 말씀 하신 분들은 다 명단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시기는 오셨습니다. 명단 중에는 동명이인도 적지 않았습니다. 김예준씨는 결혼을 했는데 혼자 와요. 다행히 성별과 나이 등 함께 기록된 정보가 있어서 오차의 범위를 좁혀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주한 반가운 이륻들—현도명(Hyen, Do Myeng 22, married), 김예준 (Kim, Yer Choon 23, married), 김성옥 (Kim, Sung Ok 30, widower), 김태정 (Kim, Tai Chung 28, widower), 김경옥 (Kim, Kyeng Ok 20, married), 김형기 (Kim, Hyeng Ki 18, single), 김기순 (Kim, Hyeng Ki 18, single)—하와이 애국단원들 이민자 이름입니다.
이덕희: 애국단원이라는 거는 1935~1940년 경에 생겼다고 그러는데, 정확하게 그게 호놀룰루 시내에서 생긴 게 아니라 와히아와 (Wahiawa)라고 그때는 시골이었죠. 이 섬의 시골이었는데 그야말로 마을 사람들이 합쳐서 만들었다고 합니다. 호놀룰루 시내에서 만든게 아니었기 때문에 그때 당시에 신문에 그 사람들의 이름이 한번도 나오지를 않습니다.
이순재: 그러나 명단 그 이상의 흔적은 찾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단서 하나를 얻었죠. 와히아와에, 하와이애국단원이 살았다는 바로 그 마을입니다.
와히아와 올리브가(街)/미국 하와이주-처음에는 큰 올리브 나무가 있어 올리브로 이름을 붙였다는 거리(Olive ave.), 이곳은 1907년에 세워진 아주 오래된 교회 하나가 있습니다. 와히아와에 도착해 가장 큰 교회를 찾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나고 자란 땅을 떠나서 타국으로 온 사람에게 외로움을 덜고 살길을 찾는 사람에게 예나 지금이나 절실한 곳입니다. 한인이민 첫 10년 동안 하와이 곳곳에 세워진 예배당은 39곳, 사람들은 교회에서 한글과 영어를 배우고 타향살이의 고단함을 나눴습니다. 세월과 함께 희미해진 옛 일, 그 자취를 밝히는 일을 어떤 사람은 삶의 목표로 삼기도 합니다. 김창환 원로목사가 바로 그런 분입니다.
이순재: 안녕하십니까? 이순재입니다.
김창환/올리브 연합감리교회 원로목사: 뵙게 돼서 아주 반갑습니다. 텔레비전에서만 뵙다가 실제로 뵈니까 정말 반갑습니다.
김창환 목사는 지난 1968년, 우리 말 예배가 필요한 한인들을 위해 이곳에 처음 부임합니다. 교회와 관련된 오랜 역사를 아는 유일한 분이죠. 1934년도 태어나셨네요. 제가 34년생 이거든요. 34년생이세요? 저도 34년생입니다. 그러세요? 여기 두 사람만큼 나이 들어 교회의 긴 역사를 대신 말해주고 있는 오랜 사진과 문서들, 김창환 목사가 그 동안 마을 곳곳을 다니며 직접 모은 것들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안에 두번째 단서가 있습니다.
김창환: 사실 이 안을 보시면 더 옛날 사람들이 적혀 있는데,
이순재: 생명록(生命錄), 基督敎朝鮮監理會敎籍簿 WAHIAWA KOREAN M.E. CHURCH Members’ Family Record Korean Methodist Church, 교인의 생년월일과 사망기록 그리고 가계도까지 관련된 정보를 꼼꼼하게 적은 자료집입니다. 한인이민 1세대들의 삶과 죽음의 기록, 이게 다 옛날 기법이네요. 여기에 우리가 찾는 이름이 있었습니다. 아, 여기 김경옥 선생이 계시네 현도명, 임성우, 김경옥, 김기순, 그리고 김예준 이들의 활동을 당시 마을 사람들은 알고 있었을까요
김창환: 애국단 이라는 이름은 들어보지를 못했어요. 그런데 아까 그 당시에 임시정부에서 자금이 핃요하다 하면 여기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희생적으로 다 도우셨을 겁니다. 하와이 애국단에 대한 기억 대신에 김창환 목사가 꺼내든 건 독립공채, 독립공채가 백불 짜리도 있었고, 오백불 짜리도 있었고 천불 짜리도 있었어요. 상당히 큰 돈이에요. 그럼요. 지금으로 치면 몇백만불 되는 거죠. 아마, 3.1운동 이후 바로 임시정부에 자금이 필요할 때 보냈을 거예요.
이순재: 쪼갤 것도 없는 살림이지만 따로 떼어 모아야 했던 돈, 그 흔적은 지금 까지도 발견됩니다.
와히아와 올리브가(街)/미국 하와이주
온 가족이 이사를 간 후 지금은 비어 있는 집, 이곳도 예외는 아닙니다. 어, 이 상자, 이 가족은 무엇을 두고 간 걸까요? 이게 메리 정(Mary Chung) 할머니의 서류상자예요. 며느리가 이 집을 팔고 얼마 전에 이사 갈 때 이걸 그냥 버리고 갔어요.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보면 쓰레기 처럼 다 쌓여 있어요. 그 쓰레기 같은 데서 뒤져서 지금 교회에 진열해 놓은 것이 그렇게 나온 거예요. 두고 간 상자 안에는 낡은 종이뭉치들로 가득합니다. 별의 별 것이 다 있네. 대한 독립의연금을 제1차로 낸 영수증이에요. 이거는 10원(불) 25전, 10원(불)이면 그 당시 사탕수수 농장의 월급이 한 달에 15불 이었는데 여자분 월급의 반 이상 돼요, 대한 독립의연금 증서, 고된 노동의 댓가로 받은 거의 모든 품삯을 이 마을 사람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내놓았습니다. 돈도 많이 내셨어~ 이 할머니, 뭘 잡숩고 살았는지 모르겠어, 돈 이렇게 다 내고 말이야, 할머니가 남기고 간 흔적은 그래서 독립을 위한 간절한 마음인 동시에 그 시기에 한인들의 고된 세월입니다.
하와이 플랜테이션 빌리지/미국 하와이주
놀랍게도 그 많던 사탕수수 농장은 지금의 하와이에선 찾아 보기 어렵습니다. 한인들의 일터도 세탁소로, 목공소로, 수리점으로 하나 둘 바뀌어 갔습니다. 사실, 여기가 전부 사탕수수 밭이었는데, 아마 요즘에 취향이 변하고 용도도 변하니까 이건 기념으로 조금 남겨 놓은 거 같은데(Hawaii’s Plantation Village), 사실 보기가 힘듭니다. 그런데, 야 사탕수수가 이렇게 굵고 키도 엄청나게 크네~사탕수수 굵기가 정말 강하고 억세네~ 얼마나 힘들었을까~ 삶터가 변하고 일터가 변해도 독립운동 자금을 모우는 일만은 멈추지 않은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를 우리는 이제 오래된 사진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습니다.
누우아누 추모공원/미국 하와이주 호놀룰루(NUUANU Memorial Park & Mortuary) 2233 NUUANU Avenue)
누우아누 추모공원, 초기 이민 한인들이 묻혀 있는 곳입니다. 와히아와 마을의 한인 1세대들도 대부분 이곳에 잠들어 있습니다. 하와이 애국단원들의 묘지도 여기에 있을 거라는 소식에 낯 익은 이름들을 찾아봅니다. 여기가 현도명 선생 묘지구나 IN LOVING MEMORY DO MYUNG HYUN “always in our hearts” FEB 24 1883~MAY 28 1968, 하와이 애국단원 중 임성우 선생과 함께 건국훈장을 받은 미주 독립운동가입니다. 그리고 현도명 선생의 묘지와 멀지 않은 곳에서 또 한 분의 반가운 이름을 발견합니다. 여기 ‘김예준’ 이라고 한글로 쓰셨네. 영어로는 ‘요준(Yo Choon)’ 이라고 되어 있는데~ Beloved Father And Grandfather YO CHOON KIM Aug 5 1881~Mar 7 1970, 하와이에 도착하신 게 1904년 이때 23세 였으니까 그러면 1904년에서 23세를 빼면 1881년 맞네~ 영어 철자는 좀 이상하지만 김예준 선생이 맞네~ 이름 뿐이던 하와이 애국단원과 처음으로 마주하는 순간입니다. 1970년에 돌아가셨으니까~70년도면 뭐 우리야 한창 젊었을 때 이니까 그 전에 와서 뵈었으면 찾아 뵐 수도 있었겠지~김예준 선생이 세상을 떠나고 약 50년이 흘렀습니다. 이 시간은 우리가 무관심으로 흘려 보낸 시간입니다. 그리고 그 분의 이름 앞에 작은 꽃 한 송이 놓기 까지 왜 많은 시간이 걸렸을까요. 이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한 저의 여정이 너무 늦은 것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묘지를 다녀온 후, 이렇다할 흔적을 찾지 못하고 며칠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김창환 목사님 한테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제가 오늘 기쁜 소식 알려드릴려고 전화했습니다. 네, 네, 하와이 애국단의 김예준 선생의 아들을 찾았습니다. 아이구, 그러십니까? 김창환 원로목사에게서 김예준 선생의 아들을 찾았다는 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그 아들은 바로 김영호씨, (김영호/하와이 애국단원/김예준 선생의 장남), 처음 모습을 드러낸 그는 웬지 어리둥절한 표정입니다.
기자: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김영호/하와이 애국단원 김예준 선생의 장남: 별 말씀을요. 저는 김예준의 장남입니다.
한국독립당 하와이지부 간부(1937년)였던 임성우, 현도명 선생은 당시 올리브교회 교인이었습니다. 김예준 선생도 마찬가지였죠. 50년 전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한국에서 찾아오다니~ 아들은 오래전 사진을 찾아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애써 떠올려봅니다. 오, 여기에요. 여기! 정말 오래 됐어요. 수십년 전이에요. 아버지가 웃고 계신가요? 그런 것 같애요. 웃고 계신 것 같네요. 아주 드문 일이에요. 아버지는 잘 웃는 분이 아니었어요. 아버지께는 정말 말 대답할 수 없었어요. 굉장히 옛날 사람이죠. 아버지는 엄격하고 인색하고 냉정했답니다. 김영호씨가 어리둥절 했던 건 그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독립운동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그 아버지가 임시정부를 도운 하와이 애국단원 이라고 합니다.
김영호: 깜짝 놀라서 제 딸 한테 이야기 했어요. “내 아버지가 한국의 독립운동가셨대, 이게 믿어지니?” 라고요.
곧 바로 아버지의 물건을 살펴 봤지만은 독립운동의 흔적은 없었습니다.
김영호: 무슨 영화 같았어요. 모든 예전 사진들을 찾으려 다섯 상자나 뒤졌는데 아무것도 찾지 못했어요.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사람의 일인 줄로 알았습니다.
김영호: 그래서 은행에 갔죠. 출생증명서까지 찾아봤어요. 출생증명서에 따르면 제가 태어날 당시에 저희 아버지는 미군 기지의 세탁소 일을 하셨어요.
김영호 씨의 어린 시절은 풍족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새벽부터 밤까지 미군부대에서 쏟아져나오는 군복에 파묻혀 살았죠. 세탁업으로 버는 돈은 먹고 살기도 빠듯했습니다. 그렇게 인색하고 구두쇠 같았던 저희 아버지가 독립운동 자금을 한국에 보내셨다는 걸 절대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 집에서 출발할 때 “어머니 교회에 다녀 올게요 한국에서 온 사람들과 얘기를 나눠 봐야겠어요. 자세한 것을 다녀와서 말씀드릴게요” 라고 돌아가신 어머니 사진 옆에 앉아서 말씀드렸죠.
올리브 연합감리교회/미국 하와이주 와히아와
이순재: 전 또 다시 와히아와 교회를 찾았습니다. 아주 오랫 만에 특별한 분들이 한 자리에 모이기 때문인데요. 안녕하십니까?
김창환: 이 사람이 김예준 선생의 장남입니다.
바로 와히아와 독립운동의 아들, 딸들 그리고 그들과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한인 2세들입니다. 예상치 못한 환대에 오히려 제가 특별한 손님이 된 순간, 아버지, 어머니의 나라 에서 이제야 찾아온 손님을 그들은 반갑고 따뜻하게 맞아 주었습니다.
이순재: 제 나이가 우리 김 목사님과 같습니다. 여든 넷, 84세입니다. 그래서 실례되지만 우리 선배님들의 현재 춘추가 어떻게 되시는 지요.
이능주(1930년생)/하와이 교민2세: 이제 여든 여덟입니다.
현종호(1925년생)/하와이 애국단원 현도명 둘째 아들: 내 나이는 구십 몇살이더라 기억이 잘 안나네요.
현월계(1927년생)/하와이 애국단원 현도명 맏딸: 1927년생인 저는 이분의 여동생이고요. 저기 제 여동생이 있어요.
현월영(1933년생)/하와이 애국단원 현도명 막내딸: 저는 1933년에 태어났으니까 85살이에요.
이순재: 누님이시네
현월영: 내가 누나니까 내 말 잘 듣는게 좋을 거예요.
김영호(1932년생)/하와이 애국단원 김예준 맏아들: 저는 1932년 4월 26일에 태어났어요. 86살이에요.
전영희(1927년생)/애국지사 박신애 둘째딸: 저는 1927년생이니까 91세예요.
전영실(1932년생)/애국지사 박신애 막내딸: 1932년 4월 11일이에요. 여기서는 아기네요.
이순재: 다들 정정하시고 건강하십니다.
김창환: 그런데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이 분들이 교회 바로 앞 건물들에 다 같이 살았어요. 여러분 모두 올리브 거리의 교회 건너편에 함께 살았었죠. 여러분 모두 이웃 사촌이었죠.
일동: 맞아요.
한인 2세들에게 교회는 학교이자 놀이터였고 아버지 어머니들에게는 조국의 소식을 나누는 사랑방이었습니다. 밤늦게까지 일하느라 볼 수 없는 아버지를 아이들은 교회에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순재: 어머니, 아버님들이 여기 처음 오셔서 어떤 생활을 하셨는지 또 그 당시에 자녀들로서 어떤 느낌이 드셨는지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현월영: 모든 남자가 나무 아래 앉아서 정치토론을 하고 있었어요. 기억들 나지? 그래서 아버지를 찾으려면 교회에 가서 나무 밑을 보면 되었지요. 종종 싸우시기도 했죠. 틀림없이 소주를 들고 계셨겠죠.
이순재: 전영희씨가 처음 부모님에 대한 말문을 엽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박신애 (1889~1979) 선생, 애국부인회의 대표이기도 했던 박신애 선생은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을 모아 임시정부를 지원했습니다.
전영희: 어머니는 임시정부의 모금을 도우셨죠. 모금을 해서 당시 상하이에 계셨던 김구 선생에게 보냈죠. 당시 하와이에는 모금한 돈을 한국으로 보냈던 사람들이 여럿 있었어요.
그리고 한인 2세들은 와히아와 하와이 애국단원인 그들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능주/하와이 교민2세: 매우 적극적이었어요. 그 당시 한국인들 모두가 그랬어요. 저는 그들이 자랑스럽습니다. 올리브교회 교인 8명이 하와이 애국단에 참여했다는 사실이 참 자랑스럽습니다. 김예준 선생이 한국의 독립을 지원했던 일에 참여했었다고 해도 별로 놀랍지 않을 거에요. 돈이라든지 많은 것들을 관리하는 중요한 분으로 알고 있었거든요
이순재: 처음 들어보는 아버지의 이야기에 김영호 씨가 문득 한 장면을 떠올립니다.
김영호: 아버지는 항상 돈이 많았어요. 침대 매트리스 안에 돈이 많았었죠. 나가서 사람들을 만나고 오면 돈을 그 안에 넣어두셨죠. 우리는 그 침대를 만질 수가 없었어요. 침대 정리도 아버지께서 직접 하셨죠. 제가 봤던 모든 돈이 다…저는 용돈을 벌기 위해 일해야 했어요. 이야기를 듣고 나니 아버지가 왜 항상 그렇게 많은 돈을 가지고 있었고 침대 매트리스 아래에 많은 돈이 있었는지 이해할 수가 있어요.
이순재: 김예준 선생의 역할은 무사히 임시정부에 전달되기 전까지 독립운동 자금을 관리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수소문 끝에 재미교민단체 주관 신문인 국민보에서도 하와이 애국단의 활동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10년전에 하와이 애국단으로 설립된 한국 독립당은 일본의 침략에 대항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을 지원하는 임무를 맡아왔다-국민보-태평양 주보. 1942년 5월 13일자-
김예준-김원용 등 제씨로부터 130원의 특연을 받은 것-한국 독립당 제4회 전체 위원회 <국민보> 1945년 4월 18일자
기사에는 김예준 선생의 이름과 그가 임시정부를 위해 한 일, 그렇게 모인 자금이 어떻게 쓰였는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재정보고 작금 양년 월례금과 특연양 종합금 4,761원 43전에서 김구 선생에게 300원을 송금하였다-한국 독립당 하와이 지부 연회 <국민보> 1944년 6월 14일자-
세상에 처음 드러나는 하와이 애국단의 흔적입니다. 하와이 애국단의 임성우 선생이 임시정부에 보낸 돈은 모두 천달러, 이 돈은 김구 선생이 간절히 하고 싶었던 바로 큰 일을 위해 쓰입니다.
-마침 그때 하와이에서 명목을 정한 돈 몇 백 달러가 왔다
나는 그 돈을 받아서 거지 차림의 옷과 전대 속에
감추고 걸식생활을 계속했다.
그러니 나의 남루한 옷 속에 천여원의 돈이
있다는 것을 나 말고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히로히토 일왕에게 수류탄을 던진 이봉창(1900~1932) 의사의 의거, 그리고 윤봉길(1908~1932) 의사의 의거가 그것입니다. 일본 전승기념식장을 향해 던진 윤봉길 의사의 폭탄은 한국 독립운동의 역사를 바꾸었습니다. 하와이 애국단이 없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역사, 김예준 선생은 아들에게 왜 조금의 내색도 비치지 않았을까요. 저는 그것이 궁금했습니다.
현월계: 그 시절에는 매우 비밀스러웠고 매우 민감한 사안이었어요. 내가 한국에 독립운동 자금을 보냈다고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시절이었어요. 그런 얘기를 할 수가 없었어요.
김창환: (하와이) 한국사회가 대립이 되어 있어서 자금 지원을 공개적으로 할 환경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야기 하네요.
와히아와에는 아픈 상처가 있습니다. 당시 하와이에는 이승만의 독립노선을 지지하는 동지회, 그리고 박용만의 독립운동을 지지하는 국민회가 대립하고 있었죠. 두 단체의 대립은 심각했습니다. 독립운동을 감시하던 한국인 밀정에 의해 일본 외무성에 보고될 정도였죠.
이능주/하와이 교민2세: 여러 단체가 있었어요. 동지회와 국민회, 이 두 단체는 항상 서로 싸웠어요. 이승만은 하와이 한인사회를 나눴어요. 이승만은 한인 사회를 통제하길 원했지만 완전히 통제하지는 못했어요. 와히아와는 그를 힘들게 한 지역이었고 그게 분열을 일으켰어요.
모두 국민회 소속이었던 와히아와의 사람들, 저항할 수 없는 역사의 파도 앞에서 그들의 한 일은 조금씩 잊히게 됩니다.
현월영씨댁/미국 하와이주 호놀룰루: 하와이 애국단원이며 독립 유공자로 추서된 현도명 선생의 막내딸, 현월영씨,
현월영: 제 아버지 현도명, 그리고 저예요. 귀엽죠?
그녀의 아버지는 일제 패망 4년전인 1941년 까지 독립 자금을 냈습니다.
현월영: 저희 어머니는 아버지가 많은 돈을 독립운동에 기부했다고 말씀하셨어요. 어머니는 종종 아버지에게 짜증을 내셨어요. 가족도 좀 생각하라고요. 이곳의 한국인들은 언제나 일제 강점 하에 조국을 지원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어요. 그들이 임시정부를 어떻게 생각했든 간에 자금을 보냈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어요.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지만 조국은 그들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현월영: 아버지는 다시는 모국으로 돌아가실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독립운동을 지지한 모두가 인정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누군가는 안다는 것, 그게 중요하죠. 잊히지 않는다는 거니까요.
평생 독립운동을 도왔던 와히아와의 사람들, 그들은 왜 조국에 돌아갈 수 없었을까요? 이 사실은 하와이 애국단의 이야기가 지금에서야 조명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미주 독립운동의 출발점이자 열기가 가장 뜨거웠던 하와이지만 그 역사는 반쪽 자리입니다. 나머지 반쪽이 묻히고 잊힌 이유, 이제 그 답을 들을 때입니다.
최영호/하와이대 역사학과 명예교수: 아이고, 반갑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이순재: 서울에서 온 이순재입니다. 죄송합니다. 생년월일이 어떻게 되십니까?
최영호: 저는 87세, 1931년 양띠,
이순재: 31년생이시군요. 예, 제가 34년생이니까 세 살 아래입니다. 앞으로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최영호: 하하하, (앞으로) 후배입니다. 반갑습니다.
한인 이민사와 독립운동사에 정통한 하와이대 최영호 명예교수, 반쪽 짜리 독립운동사를 역사학자는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요?
이순재: 하와이 애국단 중에 몇 분은 정부로부터 서훈을 받으면서 업적이 인정되었는데 많은 분들이 빠져 있더라구요.
최영호: 첫째는 일본이 한국을 점령한 이후부터 하와이의 한국 독립운동에 대해서 철저한 감시를 했습니다. 밀정을 동원하고 일본 영사관 직원들을 동원해서 한국 사람들에 대한 감시를 아주 철저하게 했습니다.
상하이 임시정부에 자금을 대준 한인들의 행적-----------
하와이에 거주하는 조선인 불령단체(不逞團體)는 소위 상해임시정부의 수립에 호응하여 주로 자금 단체로서 활동해 왔는데----(중략)-----출처: 친일단체와 반일단관계(조선독립운동)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
그들이 속한 단체의 계보까지도 일제의 감시의 대상이었던 엄혹한 시절, 하와이 애국단이었던 임성우 선생도 예외는 아니어서 더욱 몸을 감출 수 밖에 없었죠. 하와이 애국단이 잊힌 이유는 그뿐만이 아닙니다.
최영호: 그 당시에 내가 가장 가슴 아팠던 게 옛날에 사탕수수 농장 노무자로 여기에 온 사람들이 해방되었으니까 그들의 가장 큰 소원이 자기 고향에 한번 가보고 싶은 것 아니겠어요. 이제 갈 수 있는 기회인데 그걸 못갔다고요. 왜냐하면 여기에 있는 영사관이 여권과 비자를 주지 않았어요.
하와이 이민 1세 절반이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이유를 노교수는 어렵게 이야기 합니다.
최영호: 미국에서 독립운동에 가장 공이 큰 사람은 아무리 봐도 이승만 이상은 없어요. 근데, 이승만 그는 약점이 많아요. 너무 많아요, 내가 보기에는.
이승만 박사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국민회에 대한 차별은 더욱 심해집니다. 국민회(박용만)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고국방문은 허락되지 않았죠. 초대 정부가 하와이 한인들의 절반을 외면한 이유를 최영호 교수는 어렵게 알게 됩니다.
최영호: 이승만의 충복으로 여기 왔다던 사람이 총영사 오00씨, 내가 개인적으로 알아요. 그 사람에게 내가 몇번 물었다고, 자기는 “국민회 사람들에게 여권 안준 적 없다. 쭉 부인했다고, 마지막에 나한테 얘기를 했어요. 자기가 국민회 사람들에게 고국행 비자를 주지 못한 이유가 그때 샌프란시스코 총영사로 나가 있던 사람이 여기서 이승만 밑에 있던 사람이에요. 그 사람의 눈치를 안 볼 수가 없었대요. “내가 그런(국민회) 사람들한테 비자를 주게되면 이 사람의 노여움이 자기 한테 올텐데 그걸 한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런 식으로 내게 고백을 했어요.
노선이 달랐던 박용만(1881~1928) 선생과의 주도권 다툼, 하와이 독립운동사의 상처가 되고만 두 사람의 반목이 최영호 교수는 안타깝기만 합니다.
최영호: 박용만의 생각은 ‘우리가 독립하기 위해서는 일본과 무장투쟁을 해야 하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군사력을 키워야겠다’ 이승만의 주장은 우리가 독립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교육-외교를 중심으로 해야겠다’ 그러니까 이게 철학적인 독립운동 방법에 대한 차이에요. 그 당시에는 우리가 사실 이 문제를 가지고 서로 막 죽이겠다고 싸움을 했지만 사실 이게 다 필요한 거잖아요.
이순재: 다 필요한 것이죠. 갈등하고 갈라져서 우리가 힘과 역량을 분산시키는 아쉬움이 지금도 남아 있는데 사실 하와이에서도 그 일이 벌어진 겁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 정부수립 이후에 반이승만쪽 인사들이 불이익을 많이 당한 이유가 바로 그겁니까?
최영호: 그렇죠, 그렇게 되는 거죠.
노교수의 고백이 내내 머리 속을 맴돕니다. 그의 고백은 서로 반목하는 역사가 더 이상 되풀이 되지 않길 바라는 간절한 당부이기도 합니다. 하와이의 아픈 역사가 묻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그 때와 다른가. 김영호씨가 아버지 김예준 선생이 묻힌 묘역을 찾았습니다. 잊고 살았던 시간이 너무 길었던 걸까요. 아버지의 묘지를 도무지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기억을 더듬어가며 한참을 헤매던 그 때 아들은 아버지를 만납니다. 김예준 BELOVED FATHER AND GRANDFATHER YO CHOON KIM Aug 5, 1881~Mar 7, 1970
김영호: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만큼 나이 들어서야 아버질 찾게 됐습니다. 그리고 이 큰절은 이제야 알게 된 아버지의 삶에 늦게 올리는 존경의 큰 절입니다.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아버지.
그토록 엄격했고 그토록 인색했던 아버지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 숨을 죽이며 자금을 모았던 독립운동가,
김영호: 아버지가 왜 제게 아무 말씀을 안해 주셨는지 이해가 안돼요. 저한테는 말씀해 주셨어야죠.
늙은 아들은 결심합니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이제 자손 들에게 전하기로 말입니다.
김영호 씨 자택/미국 하와이주 호놀룰루
김예준 선생과 하와이 애국단의 이야기는 영호씨의 자녀들에게도 놀라운 것입니다. 그들이 알고 있던 가족의 역사는 할아버지가 운영했던 세탁소 이야기가 전부였으니까요. 이제 이 세탁소는 김예준 선생이 독립운동을 위해 헌신하신 역사적인 장소가 되었습니다.
로린 제이김/김영호씨 아들: 이런 이야기를 듣고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로린 엘렌김/김영호씨 딸: 맞아요. 연구를 좀 해야할 것 같아요.
로린 제이김: 이제야 우리 가족에 대해 배웠어요. 놀라워요. 믿기 어려워요. 난 우리가 그냥 이곳에 이사와서 일을 구하고 대학에 간 거라고 생각했어.
할아버지가 그냥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고 세탁소를 운영한 줄로만 알았지, 그게 여러 비밀스러운 삶이었는지 몰랐지, 영화에나 나올법한 이야기네요. 이제 에이든, 아빠, 로라 고모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의 아버지…모든 것이 역사를 통해 내려오는구나.
지금 김영호씨의 가족의 역사가 새로 쓰이고 있습니다.
김영호: 이제 껏 평생 아버지에 대해 알았던 것보다 더요. 정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이렇게 관심을 가져 주셔서요. 그리고 아버지가 알려지지 않은 한국의 독립운동가 중 한 명이었다는 것을 보여 주셔서요.
이제 우리는 여덟 분의 하와이 애국단원 중 임성우 선생, 현도명 선생 그리고 김예준 선생의 독립운동 역사까지도 분명히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잊혀진 채 묻혀져 있는 나머지 다섯 분의 독립운동 역사도 분명히 찾아내서 세상에 알려야 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몫이라고 말입니다. 끝. (EBS 다큐프라임 1135회 “하와이 애국단을 찾아서”에서 정리).
① 1930년대 하와이 호놀룰루 와히아와 마을 한인들은 상해 임시정부 김구 선생에게 독립 자금을 보냈다. 그 자금은 윤봉길(1908~1932), 이봉창(1900~1932) 의거에 사용되었다. 하와이 애국단원의 지원이 없었다면 한국 독립운동사에 윤봉길과 이봉창 의사의 역사가 기록될 수 없었다. 이 내용이 백범일지 하권에 나온다고 한다.
② 그런데, 당시 하와이에서는 이승만의 동지회와 박용만의 국민회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는데 하와이 와히아와 한인들은 모두 국민회를 지지하였다고 한다. 이런 갈등은 일본 외무성에도 보고되었다고. 이승만은 하와이 한인 사회를 통제하길 원했지만 하와이 와히아와 마을사람들이 이승만에게 고통을 주었다고, 그렇게 독립운동의 열기로 뜨거웠던 하와이에는 아픈 상처가 있다.
③ 이제 해방이 되었다. 미국에서 독립운동에 가장 공이 큰 사람은 아무리 봐도 이승만 이상은 없다. 근데, 이승만 그는 약점이 많다. 큰 틀에서 볼 때 약점이 너무 많았다. 이승만이 대한민국 초대정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이승만 측은 국민회를 지지한 하와이 한인들의 고국방문을 총영사를 통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절반을 넘은 하와이 한인교포들이 50년 동안 고국 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하와이에서 죽어갔다, 저항할 수 없는 역사의 파도 앞에 그들이 한 일은 조금씩 잊히게 되었다.
④ 옛날에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노무자로 일했던 사람들은 해방되었으니까 그들의 가장 큰 소원은 자기 고향에 한번 갈 수 있는 기회인데 이승만 정부 시절 하와이 총영사는 그들에게 여권과 비자를 내주지 않았다, 그래서 하와이는 반쪽 짜리 독립운동사가 되었다,
⑤ 근래에 와서 숨겨진 미발굴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는 과정에 하와이 애국단원들이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보낸 기록을 발견하여 8명중 3명이 정부로부터 서훈을 받았다고, 현도명(1883~1968), 임성우(1889~1970), 김예준(1881~1970)씨는 독립운동 자금을 보낸 흔적이 국민보에 기록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지금 미국 하와이주 호놀룰루 누우아누 추모공원(NUUANU Memorial Park & Mortuary) 2233 NUUANU Avenue)에 묻혀 있다. 그들이 세상을 떠난지 약 50년이 흘렀다.
⑥ 김예준 선생은 아들, 김영호(현재 86세)씨에게 그의 독립자금 지원내용을 전혀 알리지 않았다. 그것이 궁금했다. 그 시절에는 그게 매우 비밀스러웠고 매우 민감한 사안이었다. 하와이 한인사회가 대립이 되어 있어서 자금 지원을 공개적으로 할 환경이 아니었다. 내가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보냈다고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시절이었다. 그런 얘기를 할 수가 없었다.
⑦ 이승만(1875~1965)과 박용만(1881~1928)의 주도권 다툼, 하와이 독립운동사의 상처가 되고만 두 사람의 주장은, 박용만은 무장투쟁 독립론을, 이승만은 교육-외교 독립론을 주장하였는데, 이건 철학적인 독립운동 방법에 대한 차이로서, 그 당시에는 우리가 너무 미성숙하여 사실 이 문제를 가지고 서로 막 죽이겠다고 싸움을 했지만 사실 이게 다 필요한 거였다. 결국 우리 정부수립 이후 반이승만쪽 인사들은 불이익을 많이 당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우리는 이제 성숙해져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