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 발 아래의 여인 / 시 126:1-6, 요 12:1-3
성서에 보면 여섯명의 마리아가 나온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요한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막달라 마리아, 베다니 마리아, 또 한 사람 마리아가 나온다. 본분의 마리아는 마르다의 자매로서 나사로의 누나인 듯하다. 요 11:5절에 보면 ‘마르다, 마리아 나사오’의 순서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그녀는 세 형제 중의 둘째인 것 같다. 마리아는 성서에 세 번 기록되어 있는데 마르다와 항상 함께 기록되어 있다. 아무리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성품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두 사람은 상당히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또한 예수님께서도 두 사람 모두 사랑하셨다.
1. 마리아는 말씀을 잘 경청하는 여인이었다.
눅 10:39절을 보면 마리아는 예수님 발 아래에서 말씀을 열심히 경청하던 여인이다. 눅 10장에 나오는 마리아의 모습은 충분히 그 여인의 성품을 잘 묘사하고 있다. 마리아는 말씀에 대한 열정이 넘치는 여인이었으며 동시에 사색적인 인물이었다. 눅 10:38절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다시 말하면 베다니에 있는 이 집은 마르다의 집이다. 또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잔치가 벌어졌다는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의 기록을 보면 마르다의 남편이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이었을 것이라고 추측을 할 수도 있다. 마리아는 언니 집에서 함께 살던 동생이었다. 성서를 보면 ‘발 아래에서’라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은 겸솜한 태도를 표현한다. 아마 예수님 무릎 앞에 바짝 다가가서 예수님의 말씀에 빠져 있는 마리아의 모습인 것 같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성격이 서로 달랐다. 누가 옳고 그르다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은 성격상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동양적인 전통 속에서는 마르다보다는 마리아가 더 좋은 여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마르다도 참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만약 예수님 주위에 마리아와 같은 사람만 있었다면 아마 예수님께서는 베다니에 들어가셨을 때 항상 시장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을 잘 들어주는 마리아와 음식을 잘 장만하는 마르다가 있었기 때문에 베다니를 참 좋아하셨을 것이다. 사람의 성격은 나쁘다 또는 좋다는 식으로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서로 다를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성격이 좋아서 그를 사용하신 것이 아니다. 성서를 자세히 보면 바울은 성격이 급하고 지나치게 강하며 관용하지 못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성격은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하는데 절대적인 요소가 되었다.
마리아가 열심히 말씀을 들었다는 것은 아주 귀하다. 성서 곳곳에 보면 듣는 것에 대한 강조가 많이 나온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는 말씀도 있다. 들음에서 믿음이 나기 때문에 열심히 말씀을 듣던 마리아가 열심히 일하던 마르다보다 신앙의 진보가 더 빨랐을 것이다. 삼상 15장에 보면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고 말씀한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제사를 좋아한다. 숫양의 기름을 귀하게 받으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듣는 것과 순종하는 것이 이것보다 더 낫다고 하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신앙의 경중을 보시기 때문이다. 잘 듣는 사람이 나가서 일도 잘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잘 듣는 학생이 공부도 잘한다. 고등학교 때 생물 선생님이 첫 시간에 이런 말씀을 하셨다. 생물 공부는 집에 가서 하지 마라. 수업시간에 잘 듣기만 해도 충분하다. 우리의 믿음은 듣는데서부터 비롯된다. 구원의 기초가 무엇인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라고 말씀한다. 말씀을 잘 듣는 것이 구원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듣는 것을 소홀히 생각하는 사람은 사회에서 절대로 큰 일을 할 수 없다. 말씀을 듣지 못하고 또한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그 말씀 자체가 화가 된다. 성서는 ‘내 말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는’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이것은 말씀은 들었지만 마음에는 생명의 양식이 없다는 것이다. 말씀을 듣고 바로 깨닫지 못하면 오히려 많은 사람들에게 방해만 준다. 히브리 사람에게는 ‘반쯤 침몰한 배가 완전히 침몰한 배보다 방해가 된다’라는 재미있는 얘기가 있다. 반쯤 침몰된 배는 지나가는 다른 배에게 많은 방해가 되며 피해가 된다. 우리는 분명히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 말씀을 들어도 깨닫는 귀가 있어야 하며, 그 말씀에 바로 서게 될 때에 비로소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줄 수 있다.
마리아는 최선과 차선을 구분할 줄 아는 여인이었다. 다시 말하면 그녀는 제일 좋은 것을 선택할 줄 알았다. 예수님께서는 ‘더 좋은 것을 선택했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고 마리아에게 말씀한다. 예수님의 말씀은 마르다의 일이 필요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참으로 더 중요한 것은 말씀을 듣는 일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덜 중요한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길 때가 많다. 세상의 삶이 그러하다. 예수님께서 ‘먹고 사는 것, 물질의 문제가 다 필요없다’라고 씀슴하셨나? 그렇지 않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신다. 먼저 해야 할 것과 뒤에 해야 할 것을 혼동해서는 안된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 모든 것이 무엇인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어디에서 살까?’ 하는 우리의 의식주 문제이다. 우리의 입는 문제, 먹는 문제는 우리가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게 되면 후속적으로 다 주시겠다는 말씀이다. 세상의 사람들은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지 않고 먼저 입는 문제, 먹는 문제, 사는 문제에 너무 집착하다 보니까 그 나라와 의를 잃어버리고 만다. 지혜가 무엇인가? 지혜는 이러한 순서를 바르게 알고 있는 것이다. 솔로몬은 지혜의 왕이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내가 무엇을 줄까?’ 하고 물으셨을 때 솔로몬은 지혜를 구했다. 하나님은 솔로몬이 지혜를 구하는 것을 보고 ‘지혜와 더불어 부귀와 영화와 장수를 주시겠다‘라고 하셨다. 우리는 먼저 구할 것을 구할 줄 알아야 한다.
2. 마리아는 슬픔이 큰 여인이었다.
요한복음의 내용을 보면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리를 듣고 급히 나아가 예수님을 맞이한 여인은 바로 마르다였다. 마르다는 동네 어귀까지 나가서 예수님을 보자마자 ‘주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내 오리바가 죽지 않았겠나이다’라고 말했다.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린 마르다의 심정 표현인가? ‘예수님께서 오시지 않았기 때문에 내 오라비가 죽었습니다’ 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예수님을 급히 맞이했다. 그러나 마리아는 집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마리아는 동네뿐만 아니라 집 밖에도 나오지 않고 집안에 있었다. 그리고 예수님과 마르다가 부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집에 들어왔을 때 마르다가 마리아에게 ‘예수님이 너를 부르신다’라고 말한다, 그제서야 마리아는 급히 예수님께로 나갔다. 그리고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주께거 여기에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마리아는 주님께 나아갈 때마다 주님 발 앞에 엎드리는 것이 습관인 것 같다.
성서를 보면 마르다는 한번도 주님 발 앞에 엎드렸다는 기록이 없다. 이것이 두 사람의 성품의 차이점이다. 성서를 보면 마르다보다 더욱 내성적인 성격을 소유한 마리아의 슬픔이 더 컸다. 너무나 슬퍼서 마르다같이 뛰어나가지도 못하고 집안에서 슬퍼하고 있는 마리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큰 일을 했다. 요 11장에 보면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31절),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그를 믿었으나’(45절)라고 말씀한다. 동네에 많은 사람들이 위로하러 왔다고 하지 않고 마리아를 위로하러 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본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말씀을 보면 마르다보다 마리아가 동네 사람들에게 더 많은 동정을 받았던 것 같다. 마리아는 효과적인 전도자였다. 왜냐하면 마리아의 심령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마리아를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베푸셨다. 이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그러므로 슬픔이 큰 여인이 은혜와 동정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도 많이 받는 것이다.
3. 요 12장을 통해서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마리아를 보기 바란다.
마 26장과 눅 14장에는 기름부은 여인에 대한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마리아’라는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반면에 요한복음에서는 ‘마리아’라고 지명하고 있다. 눅 7장에 보면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서 죄 많은 여인이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눈물과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기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그 장면과 상당히 흡사한 모습이다. 어떤 사람들은 바로 그 죄 많은 여인과 마리아가 같은 사람이 아닌가 하고 말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다른 여인과 사건으로 본다. 마르다는 여전히 부엌에서 일하고 있었고,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다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었다. 그 양은 ‘순전한 나드 한 근’이라고 했다. 그것은 상당히 비싼 향유였다. 그때에 가룟 유다는 ‘이것을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라고 말한다, 한 데나리온은 그 당시 장정 한명이 하루종일 일한 품삯이다. 그렇다면 삼백 데나리온이란 300명이 일해야 받는 돈이다. 아니면 한사람이 300일동안 일해야 받을 수 있는 돈이다. 이러한 큰 돈을 그녀는 예수님의 발에 부었다.
본문을 보면 아주 중요한 사실이 있다. 제자들은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사건을 통해서 마리아의 그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를 칭찬하신다. 요 13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다. 그런데 그때에 베드로는 예수님께 ‘어떻게 선생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길 수 있습니까? 제 발을 씻기지 마십시오’라고 말을 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렇다면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하시자 ‘그렇다면 내 몸도 다 씻어주십시오’라고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몸을 씻은 사람은 발만 씻으면 된다’라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발을 씻기는 일을 베드로는 이해하지 못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발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 세족식을 한 것이 아니다. 요 13:15절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목적이 나와 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서로 사랑하며 섬기라는 교훈을 말씀하기 위해서 스승인 선생님으로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다 씻어 주시는 본을 보이셨다. 그런데 마리아는 향유를 가지고 예수님의 발을 씻고 있다. 마리아는 이미 예수님의 가르침을 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에 마리아는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하고 있었다. 남성들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여성인 마리아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깨닫고 행하는 여인이었다.
두 번째로 중요한 의미는 가룟 유다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지 아니하였느냐’라고 말할 때에 예수님께서는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라고 말씀하셨다. 바꾸어 말하면 지금 마리아는 예수님의 장례식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성서를 보면 예수님은 수난의 예고를 세 번이나 하셨다. 예수님께서 처음 수난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에 베드로는 예수님,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라고 했다. 예수님께서 수난에 대해서 말씀하셨지만 베드로까지도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했다. 다시 말하면 아직도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는 마음이 없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은 악령이 들린 아이를 고쳐주시고 갈릴리를 지나가시면서 수난의 예고를 하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올라가시면서 수난의 예고를 하신다. 그런데 그때마다 제자들의 태도가 어떠했나? 예수님이 세번이나 수난에 대한 예고를 하심에도 불구하고 야고보와 요한은 자리 다툼을 한다. 남자인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마리아는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한 여인이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의 관습으로는 여자들은 남자들이 밥 먹는 곳에 함께 있지 못했다. 남자들이 식사하는 곳에 들어가는 것은 실례였다고 한다. 그런데 마리아는 그 곳에 들어갔다. 더구나 여자가 많은 남자 앞에서 머리를 푸는 것은 이혼 사유가 되며 큰 잘못을 행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모든 행동을 받아주시고 오히려 칭찬까지 하셨다.
마지막으로 마 26:13절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라고 말씀한다. 복음이 온 천하에 전파되면서 마리아의 행한 일도 온 천하에 전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도 이런 말씀을 한 적이 없다. 바로 이 여인 마리아에게만 이 얘기를 하셨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했고 또한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했다.
이 말씀을 통해서 마리아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즐겨하는 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예수님의 교훈과 죽으심을 미리 알고 준비하는 사람이 되어서 예수님께 위로가 되며, 또한 예수님 발 앞에 날마다 기름을 붓는 정성을 다하는 귀한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1997-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