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오는 소리 / 최미숙
9월 들어 아침에 눈 뜨면 기온을 확인하는 게 일상이 되었다. 숨이 턱턱 막힐 만큼 무덥고 답답한 날씨에서 언제쯤 벗어나게 될지 궁금해서다. 추석인데도 30도를 웃도는 폭염이 계속될 뿐 아니라 열대야까지 견딜 수 없을 정도다. 요즈음은 에어컨이 구세주다.
아무리 불경기고 물가가 올라 살기 팍팍하다고 해도 명절은 명절인가 보다. 대형 마트에는 추석을 쇠려는 사람으로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인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싱싱한 생선을 구하려고 아침 일찍 재래시장을 찾았는데, 이제는 그것도 귀찮아 한꺼번에 이것저것 살 수 있는 마트로 다닌다. 올해는 추석 장 구경도 할 겸 한번 들러 볼까 했는데 내리꽂는 뙤약볕에 나서기가 무서워 그냥 포기했다.
그래도 명절인데 딸이 오면 같이 먹으려고 과일(사과, 배, 포도, 복숭아)과 소고기, 갈비, 대하를 준비했다. 큰아들 내외는 추석에는 처갓집에 가고, 설날은 우리 집으로 온다. 먼 곳(제주도, 순천)을 두 군데나 왔다 갔다 하면 힘들다는 남편의 배려다. 딸은 일요일 오후 2시 케이티엑스(KTX)로 온다고 했다. 큰아들 식구는 없지만 풍요로운 식탁이 될 것 같았다.
일요일 아침, 남편이 목이 컬컬하다며 아무래도 코로나에 걸린 것 같다고 했다. 시댁으로 큰집 식구들까지 다 모이는데 결과를 알고 움직여야 할 것 같았다. 하필 추석 연휴와 이어지는 일요일이라 대부분 병원이 쉬는데 난감했다. 일하다 말고 넣어 뒀던 자가 진단 키트를 꺼냈다. 그런데 모두 유효 기간이 지나 가장 중요한 진단 용액이 다 증발해 쓸모가 없게 됐다. 병원을 찾으려고 인터넷을 검색하니 응급 의료 포털 이-젠(E-Gen)이라는 사이트가 뜬다. 추석에 아프지 말라는 구호가 괜한 말이 아니었다. 뉴스에서 그렇게 떠들 때는 남의 일이라고만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다. 가족이 모이기 전에 증상이 나타나 차라리 다행이다.
내과 한 곳과 의료원 응급실이 문을 열었다. 전화했더니 내과는 손님이 많아 오후에나 진료 가능하고, 의료원은 응급실 진료비 가산 제도가 적용돼 비싸다고 안내한다. 남편에게 점심 먹고 차분히 내과로 가라고 하니 불안한지 옷을 챙겨입고 나선다. 한참 후에 확진이 됐다는 문자를 보내왔다. 열차를 타려고 준비하던 딸에게 소식을 알리고, 막내도 친구 집으로 보냈다. 진료비가 10만 원이 넘었다고 했다. 말로만 듣던 의료 대란 때문에 더 많은 돈을 썼다.
남편의 확진으로 나도 발이 묶였다. 날도 더운데 뜨거운 불 앞에서 일하지 않아도 돼 간만에 몸이 편한 추석이 됐다. 하지만 집안 행사에 매번 혼자 모든 일을 맡아 하는 둘째 형님에게는 미안했다.
명절이라 식구들로 북적거려야 할 집이 절간처럼 조용하다. 나는 큰방, 남편은 건넛방을 차지하고 각자 할 일을 한다.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인 8월 19일, 나도 이미 두 번째 확진이 됐던 터라 남편과 밥 먹는 시간도 달리하고 얼굴 마주치는 것도 피했다. 추석 연휴가 그야말로 휴식 시간이 됐다.
추석 당일, 해가 지고 나면 산들바람이라도 있을까 싶어 혼자 밖으로 나갔다. 역시나 바람 한 점 없이 따뜻한 공기만이 온몸을 감싼다. 운동하는 사람조차 보이지 않고 주변이 조용하다. 조금 걸으니 머리카락 사이사이까지 온통 땀으로 범벅이다. 그나마 구름에 숨어 살짝 살짝 얼굴을 내민 보름달과 숨바꼭질 하다 보니 비로소 명절 기분이 난다. 지난 금요일 아파트 주변을 걷다 상현달(반달)을 확인하고 닷새 만에 꽉 찰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는데 내 기우였다. 자연의 신비다.
연휴 마지막 날인 오늘도 여전히 30도를 웃도는 날씨가 사람을 처지게 한다. 아직은 여름이 떠나기 싫다고 몸부림을 치지만, 자연의 이치는 거스를 수 없으리라. 쩌렁쩌렁하게 울어 대던 매미 대신 어느새 귀뚜라미 소리가 풀숲에 퍼지고, 밤송이며 도토리가 바닥에 뒹구는 것을 보니 쏟아지는 햇빛 사이로 멀리서 가을이 오는 소리가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