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벨로라도 성베드로성당에서 순례자를
맞이해주시는 예수님상
2024. 4. 24
시편64장에서 72장까지!
(시편 64,6)
바다를 마른땅으로 바꾸시어
맨발로 건너갔다네. 거기서
우리는 그분 안에서 기뻐하네.
묵상ㅡ
오랫만에 등장한다.
모세와 여호수아가
심심하면 힘주어 했던
말, '주 하느님께서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는
너희를 파라오의
손에서 구출하여
바다를 마른땅으로
바꿔주시어 건너가게
해주셨다. 그런 주님의
위대하심을 잊지 마라'
시편에서 들으니 느낌이
남다르고 참신하다.
모세와 여호수아는
문어체 비슷한 구어체로
말했다면 여기선 상당히
시적인 애틋함이 드러난다.
바다를 마른땅으로 바꿔서
맨발로 건너갔다네.
크!!!! 그 엄청난 사건들을
직면하고 생사의 기로에서
죽었다 살아난 적이 한두번이
아닌데, 이런 감수성이 어디에
숨어있다가 입만열면, 악기만
들면 마구 뿜어나오는 건지.
바다의 질척한 개흙이 아닌
마른땅이라 함은, 주님의
섬세한 배려를 강조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질척거리는 땅이라면
신발이 파묻혀 뛰지도
못했을 터. 그리고
맨발로 건너갔다네.
여기서 다윗은 마른땅을
건넌 맨발의 정서를
표현해주는 센스를
발휘한다. 대박이다.
요즘 한창인 맨발걷기가
생각나는 거, 너무
세속적인건지 말해주세요.
신발신고 걸을때와
맨발로 걸을때의 차이는
천지차이다. 신발신고
걷기는 다리에서부터
열이 나면서 몸전체로
퍼져나가 땀도 나고
기분도 흡족해지는
반면 맨발걷기는 더도
덜도말고 완전 지름길이다.
발바닥 맨살에 닿는 흙과
땅의 기운이 촉각으로
바로 느껴지면서 그 발의
혈점들과 연결된 몸 곳곳의
뼈와 근육. 각 장기의
세포속까지 빠르게 자극되어
내 몸이 지금 이렇게
살아있었구나. 거기가 좀
안좋았었구나. 몸은 이렇게
미세한 한부분으로부터 시작,
에너지가 다 연결되었구나
하는 자각을 할수 있다는거다.
백성들이 긴박한 상황에서
맨발로 바다를 건넜다면,
분명 두려움과 불안,
공포감 등 극적인 감정과
'내가 과연 살아남을 있을까.
모세의 말을 들은게
맞는걸까' 하는 사고와
생각의 범주에만 갇히지
않고, 발바닥의 자극을
느끼는 동시에 자신의
존재와 몸의 근원적인
연결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의미화를 해봤다.
죽고사는 문제가 코앞인데
무슨 그럴 정신이
있었겠냐고 할수도
있지만 아님 말고,
그러거나 말거나다.
다윗의 시적 감수성이
나의 감수성을
지긋이 자극했다는 것이
묵상포인트니까.
그래서 맨발로 건너서 어디로?
(시편66,12)
당신께서는 저희를
넓은 곳으로 이끌어
내셨습니다.
오케이. 좁은 길이
아닌 넓은 곳, 주님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보호하고 지켜주시는
곳, 든든한 리더 모세와
아론, 여호수아가
정치하는 바른 나라,
내가 일군 땅도 아닌데
여러 지역의 땅을
상속재산으로 거져
나눠주시는곳, 그리고
십계명을 받아,
좀 더 책임감있는
성숙한 신앙인으로
양육되는 곳,
바로 광야길의 하늘나라,
주님이 세우시고
책임져주시는 곳,
넓은 곳이었던 거다.
(시편 69,33)
가난한 이들이 이를 보고 즐거워하리라.
하느님을 찾는 이들아, 너희 마음 기운 차려라.
그리하여 약하고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마저
하느님을 찾아, 기운을 차리게
되는 그런 나라에 오기까지
여정이 담겨있다.
우리가 사는 지상의
하늘나라 역시 그런
삶이라는것,
가끔은 맨발로 마른땅을
건너는 지름길의 영성을 기억하면서
용기를 내보면 좋을듯하다.
다윗이 쓴 시편은
구절마다 탄성을
지르게 되는 일이
빈번해진다.
다시 읽는 시편의
즐거움이 크다.
이리 감칠만 나는
성경통독 여정을
잘 이끌어주시는 분들에게
다시금 감사한 마음이다.
첫댓글 생생한 사진정보와
묵상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