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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목마름을 느낄 때
출애굽기 17:1-7
하나님은 애굽에서 430년 간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애굽을 떠나던 날 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흠 없고 일 년 된 어린 숫양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그 피를 좌우문설주와 인방에 발랐습니다. 하나님은 그날 밤, 애굽에 있던 모든 생명의 첫 것을 다 치셨습니다. 여기저기서 애통하는 절규가 들려왔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양의 피를 바른 자들은 죽음을 보지 않았습니다. 죽음이 그들을 넘어간 것입니다. ‘넘어가다’라는 영어단어는 pass over 인데 이것은 이스라엘의 가장 큰 절기 가운데 하나인 ‘유월절’을 뜻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그들을 죽음의 재앙으로부터 구원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향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거주한지 430년이 끝나던 날, 그들은 수많은 양과 소와 가축들을 거느리고, 값비싼 은금 패물들을 손에 쥔 채 애굽을 빠져 나왔습니다. 그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고, 그들의 입술에도 찬송이 가득했습니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모세가 회상하면서, 마치 ‘여호와의 군대’(출 12:41)와 같았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군대였습니다. 이 세상 그 어떤 민족도, 심지어 최강대국이었던 애굽마저 그들을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다는 아닙니다. 그들이 메마른 광야를 걷고 있을 때 하나님은 그들 앞에서 가셨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이, 밤에는 불기둥이 그들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그들이 홍해 앞에 진을 쳤을 때, 뒤늦게 마음이 바뀐 바로는 잘 훈련된 병거 600대를 보내 그들의 뒤를 좇게 했습니다. 앞에는 홍해바다요, 뒤에는 애굽 병거라는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탄식과 두려움에 떨어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 우리를 이곳까지 인도해 왔느냐”라며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위기의 순간에 당신의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홍해를 가르심으로 이 세상 그 어떤 사람도 걸어보지 못했던 바닷길 한 가운데를 걷게 하신 것입니다.
제가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로움을 말하자면 시간이 모자랄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라의 쓴 물을 단 물로 바꾸셨을 뿐 아니라, 밤에는 메추라기로, 아침에는 만나로 그들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은 아침마다 새로웠고, 그 덕에 그들은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더 생생하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습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저도 가끔씩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러한 경험을 부러워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매일 매 순간마다 저에게 말씀해 주시고, 기적을 베풀어 주신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마 매순간 환희와 감격에 빠져 살지는 않을까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감사과 불평 사이를 오가며 위험한 줄타기를 했습니다. 적어도 제가 보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감사보다는 불평에 익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느비딤에 장막을 친 날, 백성들은 마실 물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오랜 행군 중에 마실 물이 얼마나 절실한 지 우리는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더구나 이스라엘에는 연약한 부녀자와 노인들, 아직 말 못하는 어린 것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드디어 그들의 분노가 한계점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은 한 쪽 구석에 설치된 임시막사에 모여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작은 불평은 눈덩이처럼 커지기 마련입니다. 평소에 나서기로 좋아하던 부녀회장은 흥분된 억양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에요. 생각해 보세요! 지금 어린 것들은 지쳐있고, 그들을 먹일 물이 없다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에요. 이러다가 우리 모두다 광야에서 지쳐 죽는 것 아니에요?”
그러자 옆에 있던 마을 이장이 말합니다.
“맞아요! 가축은 둘째 치고 우리 애들 생각해서라도 당장 모세에게 쫓아갑시다! 그 잘난 지팡이로 물을 만들어 놓던지, 아니면 지금 당장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이야기합시다! 우리가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모세에게 찾아가자고요!”
“맞습니다! 맞아요!”
“모세에게 갑시다!”
여기저기서 불평과 원망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들은 지금 당장이라도 모세의 멱살을 흔들며, 그를 돌로 쳐 죽일 형세였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오늘 본문 1절에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났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인도하신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길을 떠났고, 하나님의 계획하신 길을 걸었으며, 하나님이 말씀하신 곳에 장막을 쳤습니다. 여기에 인간적인 그 어떤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간섭 아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이 르비딤에서 축복을 받았나요? 문제가 다 해결되고, 아무런 걱정 없이 지냈나요?
아닙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실 물의 없음’이라는 결핍의 상황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데 왜 결핍이 오나요?”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모든 것이 풍족하고, 평탄한 길이 보장되는 것 아닌가요?” 모든 것이 다 잘된 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냥 사는 게 누워서 떡 먹기는 식으로 아무 걱정 없이, 문제없이 살면 얼마나 좋겠어요? 저도 그렇게 좀 살고 싶어요. 그런데 우리네 현실은 늘 문제투성이에요. 어려운 미분, 적분 문제보다 훨씬 어렵고 복잡한 문제를 풀어 가는게 인생이에요. 누구나 그래요.
우리들은 하나님을 믿고, 더구나 예수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이에요.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당연히 특별한 권세가 따르지요? 우리가 대통령 아들도 아니고, 삼성 회장 아들도 아니지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대통령보다 크시고, 삼성 회장보다 더 크신 분 아니세요? 그래서 성경에도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고 했잖아요? 권세가 뭐예요? 특권 아니에요? 그래서 우리들이 좋아하는 성구들을 가만히 보세요. 범사가 잘되고, 형통하고, 독을 마셔도 죽지 않고, 불 가운데를 지날 때도 상하지 않고, 환난이나 근심이 없는 복들 아니에요? 그런데 실제 우리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세요! 세상의 믿지 않는 사람들과 별반 다를 게 없어요. 아니 어쩌면 그들보다 더 못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남들은 자식들에게 잘나가는 족집게 과외 시켜준다고 자랑할 때, 우리들은 아이들에게 족집게 과외는 고사하고 참고서 한권도 제대로 사주지 못할 때도 있어요. 남들은 건강을 위해서 무엇을 하고, 무엇을 먹는다고 자랑할 때 우리들은 건강은커녕 하루 12시간, 14시간 일하고도 집에 돌아와 쉬지도 못하고 아이들 뒤치다꺼리하다 자기도 바쁜 삶일 수도 있어요. 그래서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지요? “아! 왜 내 인생은 이 모양, 이 꼴인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데도 왜 내 인생은 왜 이렇게 안 펴지나?” 나도 모르게 우리 입술에 불평이 나와요.
불평이 무서운 이유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맨 처음에는 물이 없어 불평으로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출애굽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로까지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왜 자신들을 애굽에서 데리고 나와서 이곳에서 이런 고생을 시키느냐며 원망했던 것이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표면적으로는 모세에게 원망했지만, 실제적으로는 하나님께 대한 원망이요, 불평이었던 겁니다.
후에 모세는 그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고 불렀습니다. ‘맛사’라는 뜻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였다’는 뜻이고, ‘므리바’라는 뜻은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다’는 뜻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7절)." 하는 것이 바로 시험입니다.
분명 홍해가 갈라지고, 하루도 빠짐없이 만나와 메추라기가 내려지고, 구름기둥, 불기둥이 눈앞에 있을 때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확실히 느껴집니다. 그 때 하나님을 시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런데 조금만 어려움이 오고, 자신의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과연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계신가? 안 계신가?”하며 하나님을 시험합니다. 위험에 처했을 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가?”를 묻기보다, “우리가 하나님 옆에 제대로 있는가?”를 물어야 하는데 그게 우리의 연약한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형편이 좋을 때나, 좋지 않을 때나 변함없이 동행하십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내가 믿지 못하고 걱정하고, 낙담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걱정과 근심은 ‘연약한 신앙’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불신앙’에서부터 표출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다투고, 하나님을 시험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나요? 오늘 본문에는 지도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모세는 자신을 향해 돌을 던질 정도로 엄청난 적대감을 표출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4절). 항상 한 사람의 위대한 중보기도가 한 사회와 민족을 구원하는 법입니다.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자 존 낙스의 말처럼 기도하는 한 사람이 기도하지 않은 한 민족보다 강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너는 백성 앞을 지나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나일 강을 치던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내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5-6절)” 명령하셨습니다.
왜 하나님은 모세에게 반석을 치라고 말씀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 물이 잘 나올 법한 수맥을 알려주신 후에 거기를 치라고 하셨다면 더 가능성 있는 이야기가 될 텐데 말입니다. 왜 하필 반석을 치라고 말씀하셨을까요? 과연 바위를 친다고 물이 나오겠습니까? 이건 전혀 불가능한 이야기에요. 아무리 하나님의 지팡이가 능력이 있다고 한들 어떻게 반석을 쳐서 물이 나오겠어요?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의 상식과 기대를 뛰어 넘는 분이십니다. 지금 하나님은 모세에게 반석을 쳐서 물이 나올 것인데 이것을 네가 믿고 그대로 행하라고 요구하고 계신 겁니다. 어떻게 이것을 믿을 수 있겠어요?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것은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말씀 그대로 순종했다는 겁니다. 모세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그것도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들이 보는데서 그대로 행했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반석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풍족히 먹을 수 있는 생수가 터졌습니다. 할렐루야!
아니, 처음부터 물을 주시지… 그랬다면 처음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도 하지 않고, 더 하나님을 잘 섬겼을 것 아닌가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불평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의 믿음을 모범으로 보여주신 겁니다. “너희들이 가나안에 들어가려면, 나의 약속을 온전히 성취하려면, 모세처럼 믿음을 가져야 돼!” 불평의 원인은 불신앙이었고,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신앙으로 일관한다면 그들은 결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믿음입니다. 인생의 결핍 가운데서도, 생각지 못했던 열악한 상황 가운데서도 넘어지지 말고, 의심하지 말고, 불평하지 말고 끝까지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한 가지 더, 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반석을 치라고 명령하셨을까요? 모세가 쳤던 반석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가 됩니다. 먼 훗날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모세가 반석을 쳤던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습니다.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 10:4).”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셨던 반석의 물은 신령한 음료였고, 모세가 쳤던 반석은 신령한 반석인데, 이 반석은 곧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엄밀히 말하면, 지팡이로 내리쳐야 할 사람들은 원망했던 이스라엘 백성들 아닙니까? 과연 하나님이 나의 삶에 계신가, 아니 계신가? 반신반의하는 우리들이 아닙니까?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대신 매 맞고, 깨어지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생명의 물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대신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인생의 목마름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우리들을 대신해서 스스로 목마름을 경험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내가 목마르다(요 19:28).”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목마름을 겪으셨기에, 그분은 우리에게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 7:37-38).”고 큰 소리로 외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얼마나 좋은 은혜입니까?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입니까? 인생의 목마름으로 고통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는 생수를 주신다는 것이 얼마나,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입니까? 그래서 우리도 사마리아 수가 성 여인처럼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요 4:15).”라고 말해야 합니다.
혹시 여러분은 동화 작가 안데르센을 기억하십니까? 그는 본래 구두 고치는 가난한 아버지와 남의 집에서 빨래하는 어머니의 슬하에서 자랐습니다. 얼마나 가난하던지 그가 태어났을 때에 아기 침대가 없어서 어느 부자가 장례식장에 내다 버린 평상을 개조해서 아기 침대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안데르센의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여서 매일 밤, 술에 취해 돌아와 아들의 뺨을 때리곤 했습니다. 안데르센은 단 한 시간의 문학 수업도 받지 못한 초등학교 중퇴생이었습니다. 그런 환경에서 자랐으면서 어떻게 아름다운 동화를 쓸 수 있었느냐는 질문에 그는 후일 이런 대답을 했답니다. “나는 불편한 환경 속에서도 나에게 베풀어 주신 축복을 붙들기로 했습니다. 비록 아버지가 무서운 때도 많았지만 아버지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기 좋아했고, 초라한 다락방에 누워 상상하기를 즐거워했습니다. 나는 아버지가 여전히 좋은 분이라고 믿었고, 가난한 집을 나의 축복이라고 믿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역경은 나의 축복이었지요. 나는 가난했기에 「성냥팔이 소녀」를 쓸 수 있었고, 내가 못생겼다고 놀림 받았기에 「미운 오리 새끼」를 쓸 수가 있었으니까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광야 길을 걷는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주님의 은혜와 축복을 기억한다면 우리도 원망의 이야기를 사랑의 이야기로 얼마든지 바꿀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지금 여러분은 인생의 목마름으로 인해 고통 가운데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불평의 자리를 떠나, 기도의 자리로 나아오십시오! 부르짖는 기도만이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원망과 불평, 그 기초에는 불신앙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하나님을 시험하여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의심하는 자가 되지 말고, 반석을 치는 것같이 무모해 보이는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기꺼이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십시오! 예수님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냄새나는 나사로를 살리시면서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요 11:40).”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부활하신 주님은 의심하는 도마를 향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의 목마름을 이미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좋은 것으로 채워 주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당해야 할 인생의 모든 질고와 고통을 그분이 대신 져주셨기에 그분은 우리가 인생의 고난 가운데 믿고 따라야 할 참된 주인이 되십니다.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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