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투쟁어린 글쓰기가 엿보여서 공감하며 재미있게 읽었다. 누구나 글을 쓸 수 있지만 좋은 글을 쓰기는 힘들다. 날마다 고민하는 내 모습은 아직은 제대로 된 글을 쓰지 못하고 고민만 하고 있다.
글은 공적인 글이라고 했는데 민낯을 드러내는, 아랫도리를 벗고 서 있는 기분, 이런 생각들을 벗어던져야 된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글쓰기가 쉽지 않다. 글쓰기의 조건으로는 다독, 다상량, 다작의 조건이 아직은 부족한 것 같다. 빈 문서를 열어놓고 내 생각의 나래를 펼쳐야하는데 갑자기 머릿속이 하얗게 백지가 되어버린다. 무엇에 대해서 쓸것인지, 이 글을 왜 써야 하는지, 이 글이 읽는 사람에게 어떤 도움과 감동을 줄 것인지 떠오르지 않는다. 정답은 알고 있지만 그 정답을 실천하기가 어렵다. 세상에는 지식도 풍부하고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이 또 얼마나 많은지. 내 글은 아직 어린아이 수준 같아서 누구에게 선 듯 내보이기가 부끄럽다.
‘이 글을 통해 나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나만 쓸 수 있는 글은 어떤 것이 있을까,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라 자꾸만 설명하려고 드는 습관도 고쳐야 한다.
“봉합된 우정보다 드러난 적대가 낫다”는 니체의 까칠한 말처럼 지금 당장은 불쾌하고 불편해도 적절한 자극이 없으면 자기 글을 냉철하게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정답이다. 그런데 아직도 두렵다. 다시는 글을 쓰기 힘들 것 같은 마음 약한 부끄러운 내 모습이기도 하다.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은 ‘거의 다’ 좋은 책을 읽었다니 잔잔한 위로가 되어주고 보듬어 줄 수 있는 글을 써보고 싶다.
나는 왜 쓰는가
내가 누구인지 묻지 말고 내가 계속 같은 사람인지도 묻지 마라.
아마도 나와 비슷한 한 사람 이상의 사람들이
아무런 얼굴도 갖지 않기 위해 쓰는 게 분명하다. -미셸 푸코-
이렇게 계속 살아도 괜찮은 걸까, 정말 나쁜 엄마인가,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는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다만 내가 나를 설명할 말들을 찾고 싶었다. 나를 이해할 언어를 갖고 싶었다. 뒤척임으로 썼다. 쓸 때라야 나로 살 수 있었다. 산다는 것은 언어를 갖는 일이며,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하이데거의 말을 기억했다.(p.16)
글쓰기는 삶을 이해하기 위한 수공업으로 부단한 연마가 필요하다. 자기 안의 솟구치는 그것에 대해 알아채는 감각, 자기 욕망과 권리를 표현할 수 있는 논리적이고 감성적 역량, 세상을 읽어 나가는 지식과 시선 등을 갖춰 나가는 것이다(p.43)
글쓰는 일이 작가나 전문가에게 주어지는 소수의 권력이 아니라 자기 삶을 돌아보고 사람답게 살려는 사람이 선택하는 최소한의 권리이길 바란다.(p.44)
글쓰기는 ‘나’와 ‘삶’의 한계를 흔드는 일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삶’은 하루하루 똑같은 일상의 지루한 반복이다. 기쁨과 슬픔을 자아냈던 대소사의 나열은 삶의 극히 일부분이다(p.53) 삶이란 ‘타자에게 빚진 ‘삶’의 줄임말이고 나의 경험이란 나를 아는 모든 나와 나를 모르는 모든 나의 합작품‘인 것이다. 누구도 삶의 사적 소유를 주장할 수 없다는 사실과 경험의 코뮨적 구성 원리를 인식한다면, ’경험의 고갈‘이라는 난감한 사태는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닐까.(p.54)
내가 쓴 글이 곧 나다 스피노자는 “진리탐구를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을 발견하기 위한 별도의 방법이 필요하지 않으며, 두 번째 방법의 탐구를 위해 세 번째 방법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이런 식으로는 아무런 인식에도 이를지 못한다.”고 말했다.(p.57)
일단 내 앞에 있는 조잡한 도구로 시작하라. 망치로 삽을 만들면 삽으로 사과나무를 심고 사과 열매를 팔면 책을 살 수 있다. 시작을 해야 능력의 확장이 일어난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일단 쓸 것, 써야 쓴다. 자기가 보고 듣고 느낀 문장을 쓰고 그걸 다듬어서 문단을 만들고 그 문단의 힘으로 한 페이지 글을 완성할 수 있다. 문장 하나를 쓰기 위해서 영감을 기다리고 지적 자극을 위해 벤야민을 읽고 벤야민을 읽다 보면 마르크스가 궁금하고 마르크스를 공부하려면 『자본론』을 펴야 하고.......무능력에서 출발하면 글은 영원히 쓸 수 없다.(p.57)
글쓰기 초기과정은 ‘질’보다 ‘양’이다. 일본 메이지대 문학부 교수 사이토 다카시는 『원고지 10장을 쓰는 힘』이라는 책에서 “질보다는 양”이 문장력 향상의 지름길이라고 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원고지 열 장을 쓰는 생활습관을 기르라는 것인데, 그렇게 하면 좋은 글을 쓸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적어도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 백지 공포는 사라지지 않을까 싶다. 자기가 말하려는 내용을 완벽하게 써내야 한다는 부담을 버리고 글을 써내려가면 그 관정에서 좋은 생각을 얻을 수 있다.(p.58)
내가 쓴 글이 곧 나다. 부족해(보여)도 지금 자기 모습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내고 인정한다는 점에서, 실패하면서 조금씩 나아진다는 점에서 나는 글쓰기가 좋다. 쓰면서 실망하고 그래도 다시 쓰는 그 부단한 과정은 사는 것과 꼭 닮았다. 김수영의 시 『애정지둔愛情遲鈍』에 나오는 대로 “생활무한”이고 글쓰기도 무한이다.(p.58)
애정지둔(愛情遲鈍) 김수영 -"굼뜨고 어리석으며 둔한 사랑"
조용한 시절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대신 사랑이 생기었다 굵다란 사랑 누가 있어 나를 본다면은 이것은 확실히 우스운 이야깃거리다 다리 밑에 물이 흐르고 나의 시절은 좁다
사랑은 고독이라고 내가 나에게 재긍정 하는 것이 또한 우스운 일일 것이다 조용한 시절 대신 나의 백골이 생기었다 생활의 백골 누가 있어 나를 본다면 이것은 확실히 무서운 이야깃거리다 다리 밑에 물이 마르고 나의 몸도 없어지고 나의 그림자도 달아난다 나는 나에게 대답할 것이 없어져도 쓸쓸하지 않았다. 생활무한(生活無限)
고난돌기(苦難突起)
백골의복(白骨衣服)
삼복염천거래(三伏炎天去來)
나의 시절은 태양 속에 나의 사랑도 태양 속에 일식(日蝕)을 하고 첩첩이 무서운 주야(晝夜) 애정은 나뭇잎처럼 기어코 떨어졌으면서 나의 손 우에서 신음한다 가야만 하는 사람의 이별을 기다리는 것처럼 생활은 열도(熱度)를 측량할 수 없고 나의 노래는 물방울처럼 땅속으로 향하여 들어갈 것 애정지둔(愛情遲鈍) -시집[나도 너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민음사, 2018.
고통 쓰기, 혼란과 초과의 자리
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이성복
“작가는 가슴에 구멍이 난 사람이다. 그 구멍을 언어로 메운다.”
행복한 사람은 같은 이유로 행복하고 불행한 사람은 저마다의 이유로 그렇다는 안나 카레니나의 법칙도 있듯이, 무수한 불행의 이유가 있어 문학이 (p.59) 인류와 함께 생존하는지 모를 일이다. 혼자 쓰고 혼자 읽고 혼자 덮는 것은 일기다. 글쓰기가 아니다. 비밀이 한 사람에게라도 발언할 때 생겨나는 것이듯 글쓰기라는 것에는 어차피 ‘공적’ 글쓰기라는 괄호가 쳐 있다. 그래서 글쓰기는 곧 남들에게 보여지는 삶, 해석당하는 삶에 대한 두려움을 벗어버리는 일이다. 하지만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말라고 다그치듯 말할 수도 없다. 몸에 들러붙은 그것이 쉬이 떨어진다면 왜 고민이겠는가. 고통이란 원래 사회적 의미망에서 생겨난다. 타인의 시선이 감옥이 되어버린 상태인 것이다.(p.60)
또 한 가지 명심할 것은, ‘과도한 주인공 의식’을 글쓰기에서 버려야 한다. 사람들은 생각만큼 남의 문제에 신경 쓰지 않는다.(p.61)
글쓰기는 용기다. 솔직할 수 있는 용기. 소설가 김연수는 글 쓰는 일이 “아랫도리 벗고 남들 앞에서 서는 것”이라는 재미있는 표현을 썼는데, 용기가 충만해서 글을 쓸 수 있다는 게 아니라 글을 써내는 과정에서 문제에 직면하면서 용기가 솟아난다는 말일 것이다. (p.63)
삶에 관대해질 것, 상황에 솔직해질 것, 묘사에 구체적일 것, 결국 같은 이야기다.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는 게 삶이다. 뭐라도 있는 양 살지만 삶의 실체는 보잘 것 없고 시시하다. 그것을 인정하고 상세히 쓰다보면 솔직할 수 있다.(p.63)
고통의 글쓰기는 투쟁의 글쓰기다. 타인의 시선이 만들어놓은 자아라는 환영과의 투쟁이고, 쓸 수 있는 가능성과 쓸 수 없는 가능성 사이의 투쟁이고, 매 순간 혼란과 초과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말들을 취사선택하는 투쟁이다......(중략) “글쓰기는 치유의 능력도 가지고 있다고 했는데 저의 경우는 잊고 있던 기억들을 끄집어내어 쓰면서 그것이 즐겁지 않은 기억일 때는 그때의 감정이 오롯이 느껴져서 힘들더라고요. 상처를 건드린다고나 할까?”(p.64)
철학자 니체의 말대로 고통은 해석이다. 우리는 고통 그 자체를 앓는 게 아니라 해석된 고통을 앓는다.(성폭행을 당했으니) 여자 인생 끝이라는 해석, 여자가 행실이 부주의해서 생긴 일이라는 해석, 치욕스러운 일이니 입을 다물라는 해석 등등 난무하는 말들의 장대비까지 맞는다. 그런데 우리에게 책이라는 우산이 생겼다. 책 안에서 더 사려 깊은 말들과 다양한 해석과 입장을 접하면서 우리는 이 고통이 도대체 어디서 오는지, 왜 나를 아프게 하는지 더 침착하게 생각하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p.72)
자신의 아픔으로 꽉 찼던 자아에 타인의 아픔을 들여놓게 된 것은 덤으로 얻은 고마운 선물이다. 우리 품은 넓어졌다. 자아가 확장되면 상대적으로 고통은 줄어들게 마련이니 일석이조다.(p.73)
우리는 책과 사람, 그리고 글쓰기라는 이전에는 없던 세 친구가 생겼다. 인생이라는 책에서 한 페이지만 찢어낼 수 없다고 하던가. 그렇다면 품고 가야 하는 것. 아픈 채로, 불편한 대로 안고 같이 살아갈 힘이 길러졌다. 삶이 다소 견딜 만해진 것이다.(p.74)
불행처럼 우리를 자극하는 책들
책을 읽는 것이 아니다 행간에 머무르고 거주하는 것이다. -발터 벤야민-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은 ‘거의 다’ 좋은 책을 읽었다. 읽기와 쓰기는 다른 행위지만 내용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읽기가 밑거름이 되어 쓰기가 잎을 틔운다. 책을 읽어야 세상을 보는 관점이 넓어지고 사람을 이해하는 눈을 키운다. 세상은 어떤 것이구나 통찰을 얻는다. 모국어의 선용과 조탁, 표현력을 배운다. 좋은 문체에 대한 감을 잡는 것인데, 총체적으로 글을 보는 ‘안목’이 생기는 것이다.(p.82)
“우리는 불행처럼 우리를 자극하는 책들, 다시 말해 우리에게 아주 깊이 상처를 남기는 책이 필요하다. 이런 책들은 우리가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사람의 죽음처럼 느껴지고, 사람들로부터 격리되어 숲으로 추방되는 것처럼 느껴지고, 심지어 자살처럼 느껴질 것이다. 책은 우리 내면에 얼어 있는 바다를 내리치는 도끼 같은 것이어야만 한다. 나는 이렇게 믿고 있다.” -카프카의 말(p.83)
카를 마르크스의 “화폐는 욕구와 대상, 인간의 생활과 생활 수단 사이의 뚜쟁이다.” 화페가 ‘지불수단’에서 일상을 장악하는 ‘신의 지위’가 되었음(p.84-85)
말들의 풍경 즐기기 누군가 내게 물었다. 시를 쓰는 힘은 도대체 어떤 거냐고. 나는 대답했다. 이 세계에 속하지 않을 수 있다는 안도감이 힘이라고.
이 세계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이 세계에서 자신 있게 살아 갈 수 있는 꽤 괜찮은 일이 시를 쓰는 일이라고. -김 소 연-
우연한 계기에 읽고서 며칠 밤 설친 시집이고, 언제 꺼내 읽어도 늘 새 책 같은 느낌을 주는 무한 리필 시집인데, (p.88) 시인이 공들여 고르고 삭히고 매만진 언어를 나누면서 학인들은 타인의 말을 깊게 들이마시고(p.89)어떤 생각이나 어떤 사물을 고정된 틀에서 해방시켜 바라보는 윤리적인 시선을 갖게 되는 것이다. (p.90)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이고, 시는 패배자의 기록”-이장욱 시인 (p.92)
쓸모 _ 없음의 시적 체험 시란 금방 부서지기 쉬운 질그릇인데도, 우리는 그것으로 무엇인가를 떠 마신다. -황지우- 문학평론가 김현이 말한 문학의 ‘쓸모 _ 없음’의 ‘쓸모 _ 있음’ “확실히 문학은 이제 권력에의 지름길이 아니며, 그런 의미에서 문학은 써먹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문학은 그 써먹지 못한다는 것을 써먹고 있다. 문학을 함으로써 우리는 서유럽의 한 위대한 지성이 탄식했듯 배고픈 사람 하나 구하지 못하며, 물론 출세하지도, 큰돈을 벌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유용한 것은 대체로 그것이 유용하다는 것 때문에 인간을 억압한다. .......그러나 문학은 유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학교에서 일터에서 가정에서 성장하는 동안 쓸모를 세뇌당한다. 쓸모 있는 사람이 되자. 쓸모의 척도는 물론 화폐다.
내 앎이, 내 삶이 교환가치가 있는가. 잉여가치를 낳는가. 제도교육은 남보다 교환가치가 있는 인간, 곧 임금 노동자가 되기 위한 혹독한 훈육 과정이다. 한 개인이 자본주의 사회의 부품으로 맞춰지면서 본성은 찌그러지고 감각은 조야해진다.
이성복 시인의 시구대로 “모두가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는 상태로 일상이 굴러간다. 그런데 유용하지 않아서 억압하지도 않는 시, 이 시대에 쓸모없다고 취급받는 시, 언어들의 낯선 조합으로 정신을 교란시키는 시, 가장 간소한 물성을 가진 시를 통과하며 학인들은 자신에게 가해진 억압을 자각한다.(p.95)
“앎에 대한 열정이 지식의 획득만 보장할 뿐 어떤 식으로든, 그리고 되도록 아는 자의 일탈을 확실히 해주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눈만 돌리면 들어오는 광고가 정보를 제공해주는 단순한 중개자가 아니라 우리 시대의 이데올로기가 되었다는 건 누구나 안다. 그래도 먹고사는 건 바쁘고 문화생활은 해야겠으니 가까운 데에, 익숙한 것에 손이 간다. 영화는 흥행 영화로 책은 베스트셀러로,
『어린왕자』에 나오는 여우가 일찍이 일침을 가했다. “사람들은 이제 시간이 없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게 되었어. 상점에 가서 다 만들어진 물건들을 사는 거야. 하지만 친구를 파는 상점은 없으니까 사람들은 이제 친구가 없어.”(p.106)
합평, 역지사지의 신체 변용
산다는 것은 타인의 견해를 가지고 코바늘뜨기를 하는 것이다. -페르난두 페소아-
글쓰기 비법으로 흔히 삼다원칙을 말한다. 다독, 다작, 다상량.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라. 이 세 가지 과정의 앙상블이 ‘합평’이다. 책 보고 글 써서 토론하기, 합평은 글쓰기 수업을 하루로 치면 오후 2시의 태양에 해당한다. 가장 뜨거운 시간이다. 매주 두세 명의 학인이 자기 글을 소리 내어 읽는다. ‘읽는 주체’가 되어 자기 글을 말하고 동시에 듣는다. 자기 객관화의 시간이다.
“봉합된 우정보다 드러난 적대가 낫다”는 까칠한 니체의 말을 빌려 우정의 비평을 권한다. 파국과 혼돈을 초래할 위험을 무릅쓴 진실 말하기, 당장 불쾌하고 불편해도 적절한 자극이 없으면 자기 글을 냉철하게 볼 수 없다. 합평을 통해 우리는 배운다.(p.109)
아우슈비츠 생존자인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 “아우슈비츠를 세운 건 괴물이 아니라 학문과 예술을 사랑한 보통의 독일인이었다. 그러므로 아우슈비츠는 언제 어디서나 생겨날 수 있다, 때로 우리 집도 아우슈비츠가 된다. 왜 그래야 하느냐고 따지는 아이에게 ‘엄마 방식을 따르지 않으려면 딴 데 가서 살아’라고 말하는 나. ‘이곳에 이유 같은 건 없어’라고 말하는 수용소 감독자의 말과 똑같지 않은가.”(p.110)
->역지사지의 신체변용이라고 생각.
사유 연마하기
- 자명한 것에 물음 던지기 오 나의 육체여, 나로 하여금 항상 물음을 던지는 인간이 되게 하소서. -프란츠 파농-
“우리는 늘 어떤 시대, 어떤 지역, 어떤 사회 집단에 속해 있으며 그 조건이 우리의 견해나 느끼고 생각하는 방식을 기본적으로 결정한다. 따라서 우리는 생각만큼 자유롭거나 주체적으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경우 자기가 속한 사회 집단이 수용한 것만을 선택적으로 ‘보거나, 느끼거나,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집단이 무의식적으로 배제하고 있는 것은 애초부터 우리의 시야에 들어올 일이 없고, 우리의 감수성과 부딪치거나 우리가 하는 사색의 주체가 될 일도 없다.” 일본 철학자 우치다 다쓰루가 ‘구조주의’를 설명하면서 하는 말이다. 우리는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자율적인 주체라고 믿고 있지만 사실 그 자유나 자율성은 상당히 제한적이라는 이야기다.(p.115)
예를 들면 가난은 불행하다는 믿음, 가난은 도와야 한다는 믿음이 오늘날 우리 도덕의 큰 줄기를 형성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을 돕는다고 밥 굶는 사람이 줄어들까. 세상에 불쌍한 사람은 늘어만 가는데 그런 것들에 점점 무감각하고 무기력해져가는 현실에 하숨만 쉬던 내게 “동정은 이 세상의 고통을 증대시킨다”는 니체의 발언이 천둥처럼 다가왔다.
“동정은 쾌락을 포함하고 우월함을 적게나마 맛보게 하는 감정으로서, 자살의 해독제가 된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잊게 해주고 우리의 마음을 충만하게 해주며 공포와 무감각을 쫒아버리고 말을 하게 하고(p.116) 탄식하게 하며 행위를 하도록 자극한다.
동정에는 무언가 고양하고 우월감을 주는 점이 있다.” ->동정의 수혜자는 불쌍한 사람이 아니라 동정하는 자 자신이다. “봉사를 하고 오면 그래도 나는 행복하다는 생각이 든다”며 “크고 작은 불평불만이 싹 없어진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장애아 시설에 다녀오면 우리 아이는 공부는 좀 못해도 사지가 멀쩡해서 다행이라며 위안받는 식이다.
이것을 니체는 “동정적인 행위에 세련된 자기방어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보다 강력한 사람, 돕는 사람으로 나타날 수 있을 때, 박수갈채를 받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을 때, 불행에 빠진 사람들과는 반대로 우리가 얼마나 행복한지를 느끼기를 원할 때, 혹은 불행에 빠진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권태에서 벗어나기를 바랄 때,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보는 것을 피하지 않기를 결심한다.”
니체는 오늘날처럼 “동정적인 사람들을 선한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은(p.117) 어떤 시대를 지배하는 도덕적 유행일 뿐이라고 말한다. 정희진의 말대로 “여성주의뿐만 아니라 기존의 지배 규범, ‘상식’에 도전하는 모든 새로운 언어는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 삶을 의미있게 만들고, 지지해준다.”
그래서 니체는 “추락할 것이 두려워 경직된 듯 서 있을 게 아니라 도덕을 넘어 떠다니며 유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좋은 글은 질문한다. 선량한 시민, 좋은 엄마, 착한 학생이 되라고 말하기 전에 그 정의를 묻는다. 좋은 엄마는 누가 결정하는가, 누구의 입장에서 좋음인가, 가족의 화평인가, 한 여성의 행복인가, 때로 도덕은 가족, 학교 등 현실의 제도를 보호하는 값싼 장치에 불과하다. 일상의 평균치만을 관성적으로 고집하며 살아가는 순치된 개인을 길러낸다.
하지만 평균적인 삶도 정해진 도덕률도 없다. 천개의 삶이 있다면 도덕도 천 개여야 한다. 자기의 좋음을 각자 질문하면서 스스로 자신을 정의할 수 있는 힘을 갖는 게 중요하다. 작가는 그것을 촉발해야 한다. 삶에 존재하는 무수한 “차이를 보편으로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로부터 기존의 보편을 끊임없이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글이 생명력을 갖는다. 내가 쓴 글이 숨 막히는 세상에 청량한 바람 한 줄기 위안이 되는 것도 좋지만, 사막을 옥토로 만들 물음의 씨앗을 품고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질문하는 글’은 ‘생성하는 삶’으로 이어진다.(p.118) 왜라고 묻는 글, 자신을 다양한 존재로 개방하도록 등 떠미는 글, 도덕 위에서 춤추도록 깨달음의 오르가슴을 선사하는 글, 모든 글(책)의 최종 목적은 ‘갈등’이다. 그리고 진정한 감동은 신체가 바뀌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이다.(p.119)
자기 입장 드러내기
첫 번째 판단을 버려라. 그것은 시대가 네 몸을 통해 판단한 것이다. -니체-
전태일 평전을 읽고 느낀 여러사람의 서평 비교해보기 얼마나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가
사유의 가치는 사유가 친숙한 것의 연속성과 얼마만큼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가를 통해 가늠된다. -아도르노-
<파란대문>의 김기덕 “창녀와 여대생은 둘 다 똑같은 여자이고, 존중되어야 할 삶의 개체다. 그렇다면 둘 사이에 필요한 것은 수평적인 이해일 뿐, 창녀가 어느 날 창녀를 벗어나기를 원하거나 여대생이 어느 날 창녀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디앤 아버스의 자전적 영화<퍼>
디앤 아버스는 왜소증, 거인, 다모증 등 기형인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사진을 찍은 작가로 유명하다. 이처럼 영화감독, 사진가 등 예술가는 기성의 관념, 도덕, 규범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뒤집으며 기존의 가치 체계를 흔드는 사람이다. 파란대문이나 퍼처럼 좋은 작품은 물음을 던진다. 자기 시대가 떠받드는 가치 체계에 커다란 물음표를 던져서 자기 삶을, 주변 사람을, 이 세계를 낯설게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p.127)
어떤 각도에서 어떤 문제를 다루는가, 고유의 관점과 해석 능력이 중요하다. 그래서 작가는 뛰어난 관찰자여야 한다. 기자는 쓰레기통에서도 특종을 건져낸다는 말도 있다. 작가든 기자든 글 쓰는 사람에게는 평범한 대상에서 비범한 (p.128)
그 무엇을 찾아내는 안목, 모두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을 비틀어 보고 뒤집어 생각하는 훈련이 요구된다. 에세이, 칼럼, 논문 등 모든 글에는 하나의 메시지, 하나의 질문이 담겨 있어야 한다. 문제의식이 없는 글은 요란한 빈수레와 다름없다. 글이란 또 다른 생각(글)을 불러오는 대화와 소통 수단이어야 한다.....중략 그러니 글쓰기 전에 스스로를 설득해야 한다. ‘이 글을 통해 나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관습적 해석에 저항하는 글을 재미있게 쓰자.’(p.129)
나만 쓸 수 있는 글을 쓰자
아무렇게나 끄적거리고 시를 토하며 ‘이것이 나다’라고 외칠 수 있는 어떤 영역, 한 점을 찾아 헤맵니다. 제가 그저 하찮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저 자신에게 증명하기 위해서....... -체사레 파베세-
자기 색깔을 보여주는 것은 창작자의 임무이다.
박완서의 글은 김훈이 흉내 낼 수 없다. 문학평론가 김현은 “나는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썼을 뿐이며, 남들도 다 쓸 수 있는 것을 삼갔을 뿐이다.” 이 세상에는 나보다 학식이 높은 사람, 문장력이 탁월한 사람, 감각이 섬세한 사람, 지구력이 강한 사람 등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많고도 많다. 그런 생각을 하면 기운이 빠진다. 이미 훌륭한 글이 넘치므로 나는 글을 써야 할 이유가 없다.(p.131)
어떤 주제에 대해 글을 쓰라고 하면 모범답안처럼 특정한 해석이 쏟아진다. 대다수가 자신의 생각을 쓰기보다 무난한 모범답안을 제시한다. 어디선가 들어본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글이 “안전하다”고 여긴다. 그 불안함, 두려움의 근원이 무얼까. 모난 돌이 되고 싶지 않은 마음일 수 있다. 그러나 글쓰기는 둥그스름한 돌에서 모난 돌로 자신을 깎고 벼리는 일이다, 더 섬세하고 더 고유하게 감각을 다듬어야 한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단지 해묵은 것을 새롭게 보는 시각이 있을 뿐이다. 사실은 없다.
해석된 사실만이 존재한다. 내가 만약 어떤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괴롭히는 대상이 없어져서가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나의 태도가 달라졌기 때문이다.(p.132)
사건이 지나간 자리 관찰하기
이것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예민성’, 무언가 관심의 흐름 안으로 헤엄쳐 들어왔을 때 그것에 대해 떠올린 것을 얼마나 꼼꼼하게 옮겨 적을 수 있느냐의 문제다. -수전 손택-
글에는 적어도 세 가지 중 하나는 담겨야 한다. 인식적 가치, 정서적 가치, 미적 가치. 곧 새로운 지식을 주거나 사유의 지평을 넓혀주거나 감정을 건드리거나, 발표자의 글은 영화 산업 관련 종사자의 열악한 노동 조건을 보여준 르포르타주도 아니고, 그 일에 대한 오랜 열망을 품은 이가 직접 경험하고 나서의 보람을 고백한 산문도 아니다.(p.135)
여럿이 읽어야 하는 책, 니체<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의 작품을 읽은 뒤 나는 그림으로 표현될 수 있는 이상하고 알 수 없고 외로운 수많은 것들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 조르조 데 키리코-
소제목 ‘죽음의 설교자들에게’
“삶은 한낱 노역과 불안이라는 둥 삶을 무겁게 만드는 온갖 말을 퍼뜨리면서도 그 한낱 고난의 연속에 불과한 생을 끝내지도 않고 달라붙어 있다”(p.139)
니체의 글은 위험하다. 자신의 건강에 따라, 체험에 따라, 욕망에 따라 다르게 들리고 다르게 보인다. 내가 회복기의 환자가 되었을 때는 이런 문장에 꽂혔다.(p.140)
“고뇌하는 모든 것은 살기를 원한다.” 아, 이거였구나 싶었다. 나는 사로잡혔다. 정확한 뜻과 내용을 파악할 수는 없지만 니체의 말들이 거대한 초록색 그물처럼 몸을 덮쳤다.p.140)
니체 철학에 등장하는 초인, 곧 위버멘쉬는 ‘자기 자신을 넘어감’이라는 뜻의 독일어다. 나는 위버멘쉬를 ‘자기초극의 운동성’으로 이해한다. 어떤 완벽한 인격체라는 뜻이 아니라 삶에 대한 호기심으로 시도와 모험을 행하는 자가 채택하는 삶의 원리와 태도가 위버멘쉬라고. 기존의 도덕, 관습, 통념, 제도에 대한 ‘위대한 경멸’을 촉구하는 언설들로 가득하다. 낡은 습속, 헛된 열망, 오랜 집착 같은 내 것이 아닌 판단들을 모조리 태우라는 것이다.(p.141)
“나는 격류 앞에 있는 난간이다. 누구든 잡을 수만 있다면 나를 잡아도 좋다! 그러나 나 너희들을 위한 지팡이는 아니다.”(p.142) “인간은 행복조차 배워야 하는 짐승”이라고 니체는 말했다. 무작정 행복만 원하지. 정작 어떤 삶이 행복한 삶인지에 대한 물음은 없다는 것이다.
랭보의 시구에도 비슷한 구절이 있다. “행복은 나의 숙명, 나의 회한, 나의 벌레였다.” 행복이 무엇인지 묻지 않고 행복만을 바랄 때 벌레처럼 삶을 파먹는다는 이야기가 아닐까.(p.143)
니체의 이웃사랑 비판도 수업에서 쟁점이 되었다. 니체에게 ‘이웃사랑’은 편협한 자기애의 표출이다. 나를 가꾸기보다 이웃을 돕는 일이 더 표 나고 쉬운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p.144)
끊어쳐라. 단문을 써라, 간결한 문장을 써라, 한 문장에 한 가지 사실만 담아라. 일문일사. 거의 같은 의미, 다른 표현이다.(p.149)
단문 쓰기는 글쓰기의 기본기다.
주어와 동사는 연인이다. 가까이 있게 하라, 는 말이 있다. 문장이 길수록 주술관계가 어긋나기 쉽다. 문장이 간소해야 내용이 한눈에 들어온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다 들어갔는지, 빠진 부분은 무엇인지, 부연할 요소는 무엇인지 잘 알 수 있다.
『대통령의 글쓰기』 노무현대통령이 당부했다는 연설문의 원칙에는 단문 쓰기가 강조되어 있었다.
“한 문장 안에서는 한 가지 사실만을 언급해주게 헷갈리네.” “문장은 자를 수 있으면 최대한 잘라서 단문으로 써주게. 탁탁 치고 가야 힘이 있네.” “짧고 간결하게 쓰게. 군더더기야말로 글쓰기의 최대 적이네.”(p.151)
글쓰는 신체로 : 베껴 쓰기 문장
깊숙이에는 프로이트나 라캉이 말하는 ‘언어의 환각’ 같은 그 무엇이 있다. -롤랑 바르트-
-이외수 :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아름답지 않은 것에 사랑을 느끼는 법이 없다. 모든 사랑은 아름다움으로부터 출발한다.
-수전 손택 : 아름다움에 압도되는 능력은 놀라울 정도로 억센 것이라, 아무리 무자비하게 정신을 흩뜨리는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겨낸다.
-조지 오웰『나는 왜 쓰는가』 : 지난 10년을 통틀어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일이었다.(p.154)
-도스토예프스키 : 인간의 사는 힘은 강하다. 인간은 모든 것에 익숙해질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인간에 대한 가장 훌륭한 정의라고 생각한다. 베껴쓰기는 무엇보다 엉덩이의 힘을 키운다. 글쓰기는 정신적인 영역이면서 육체적인 노동이다. 베껴쓰는 동안은 책상에 앉아 있으니 (p.155)
책상과 한 몸이 되어 무엇을 생산해내는 기쁨 체험에 익숙해질 수 있다. 그렇게 모은 글, 금쌀처럼 귀한 나의 일용할 양식을 담은 노트를 가방에 넣고 다닌다.....노트를 훑는다. 화분에 물을 주듯이 그것들에 눈길을 붓는다. .....매일매일 조금씩의 위력은 참으로 크다. 신체에 각인된 그 문장, 단어, 금언, 감각, 뉘앙스, 느낌, 향기, 리듬, 파장이 글을 쓸때면 슬며시 되살아남을 느낀다. 영감을 주고 논지를 잡아준다. 단어 하나 표현 하나 살짝 비틀어 재활용하는 것만으로 밋밋한 글에 활기가 돈다.
베껴 쓰기는 그러니까 기타리스트가 되기 위해 록 역사상 최고의 기타리스트로 꼽히는 지미 핸드릭스의 연주법을 따라 해보는 것과 같다. 철학자 김영민은 모방의 필요성 및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말함. “모방은 물듦이다. 진정한 모방의 힘은 충실하고 충실해서 마침내 그 모방을 뚫어내는 길 속에 있다. 그러나 착실하게 모방의 길을 걸어 보지 못한 자라면 냉소마저 허영일 뿐이다. 가령 프로이트에 충실한 라캉의 생산성이 그러하고, 라캉에 충실한 지젝의 생산성이 그러하지 않던가.”(p.156)
마음에 걸리는 일 쓰기 : 모티브 찾기
당시에는 지긋지긋했지만 이제 그 기억은 내 마음이 뜯어먹기 좋아하는 좋은 풀밭이 되었다. -조지 오웰 -
추상에서 구체로 : 글의 내용
이제부터 인생이 무어냐고 묻거든 허튼 삶 삽질하는 힘이라고 말해줘 _고 정 희-
‘설명하지 말고 보여주어라’는 내러티브 제1원칙에 해당하는 말이다. 추상에서 구체로 갈 수 있는 좋은 팁이다. 전태일은 이렇게 썼다. “아버지께서 매일 폭음을 하시고, 방세를 못 준 어머니께서는 안타까워하시고, 동생은 방학책 값, 밀린 기성회비 떄문에 학교에 한 가겠다고 아침마다 울면서 어머니의 지친 마음을 괴롭힐 땐, 나는 하루가 또 돌아온다는 것이 무서웠다.” ->울림이 크다. 특히 마지막 문장으로 아름다워진다. 나는 고통스럽다거나 나는 살기 싫다고 쓰지 않고 하루가 또 돌아온다는 것이 무섭다고 썼다. 자기 몫의 고통 값을 정확하고 고유하게 표현했다는 점에서 미문이다.(p.162)
내 글이 누구에게 도움을 줄까 : 글의 위치성
몸을 가진 것들은 걸린다 걸려본 발이 길을 알리라 _이원-
‘이 책이 누구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이 물음을 던져보면 출판 여부의 판단이 쉽다고 했다. 매 순간 나도 고민한다. 내가 쓰는 글의 포지셔닝은 무엇인가, 관계 맺고 살아가는 삶을 위한 감응의 글쓰기다.(p.165)
내 글이 누구에게 가닿길 바라는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먼저 걸어가고 느낀 자로서 무슨 이야기를 건넬까. 그런 물음에 대한 응답 장치가 사진 한 장 붙여놓고 글을 쓰는 일이다. 좋은 사연을 들려주고 좋은 음악을 틀어주는 디제이처럼 글쓰기도 나와 닮은 영혼에 말 걸고 위로를 건네는 일이다.(p.166)
별자리적 글쓰기 : 글의 구성 예술작품은 하나의 감각 존재이며, 다른 그 무엇도 아니다. 그것은 그 스스로 존재한다. -들뢰즈 . 가타리- “글쓰기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건축적 글쓰기. 건축에는 먼저 설계도가 있다. 그 설계도에 맞추어서 건축자재들의 수집되어 맞추어지면 집이 된다. 또 하나는 별자리적 글쓰기. 별들은 저마다 홀로 빛나며 흩어져 있다. 그 별들 사이에 먼 눈으로 금을 그으면 별자리는 태어난다. 흩어져 빛나는 별들 그대로, 그러나 나만이 알고 있는 금긋기를 통해서 별들 사이에서 태어나는 그 어떤 조형. 명멸하는 먼 별들이 없으면 나의 금긋기도 없다. 나의 금긋기가 없으면 별들의 별자리도 없다. 내가 생각하는 글쓰기는 이런 글쓰기가 아닐까. 그러나 별보다 더 멀어서 아득하기만 한 글쓰기.” (김진영, 철학자)(p.167)
벤야민의 글쓰기 “좋은 산문을 쓰는 작업에는 세 단계가 있다. 구성을 생각하는 음악적 단계, 조립하는 건축적 단계, 그리고 마지막으로 짜 맞추는 직물적 단계다.” 음악이나 건축물이나 직물처럼, 글짓기도 삶의 쓰임을 위한 창작행위다.(p.169)
더 잘 쓸 수도, 더 못 쓸수도 없다 : 힘 빼기
글을 쓴다는 것은 시간의 부재의 매혹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모리스 불랑쇼-
이성복 시인의 『남해 금산』 글이란 본디 자기 능력보다 더 잘 쓸 수도 없고 더 못 쓸수도 없다고 했다. 글쓰는 사람은 보는 관점이 달라야 한다며 무슨 조감도 같은 그림을 칠판에 그렸다. 나는 시인의 말을, 글을 쓰다가 막힐 때마다 유용하게 되새김질했다. 특히 “나보다 더 잘 쓸 수도 없고 더 못 쓸 수도 없다”는 말은 잘 쓰고 싶은 욕심에 눈앞이 흐려져서 문장이 한 줄도 나아가지 못할 때 특효약이다. ‘신의 한 수’ 같은 문장들로 이뤄진 글은 갈망의 산물이 아니라 습작의 결과다. 글쓰기 역시 어깨의 힘을 빼고 나의 말로 꾸밈없이, 한 문장씩 정직하고 정확하게 써내려가는 게 중요하다는 점에서 골프 치는 법과 닮았다.(p.171)
글은 삶의 거울이다 : 끝맺기
가던 길 나는 좋아 한 뽄새로 가노라 _한설아-
삶이란 누군가의 노동에 빚지고 살아가는 것이구나 싶고, “나를 힘들게 하는 게 나를 철들게 한다더니 살림이 그렇다”(p.173)
잘 뿌린 깨소금이 화룡점정이 되기도 하지만 음식 고유이 향과 질감을 해치기도 한다. 글도 마찬가지다. 깨소금을 치듯 글도 기어코 ‘교훈’으로 마무리하는 사람이 있다. 오늘 하루도 참 알차게 보냈다. 오늘도 참 재미 있었다 같은 ‘그림일기형’ 엔딩 처리인데 글이 식상해지는 지름길이다. 기껏 자기 경험과 생각에 근거해 잘 써놓고 교훈적인 이야기로 마무리하면 글이 평범해진다. 이 마무리도 습관이다.(p.174)
좋은 르포르타주 참고도서/ 김진숙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지도위원 / <소금꽃 나무> 글은 삶의 거울이다.
글은 삶을 배반하지 않는다. 그것이 글 쓰는 사람에게는 좌절의 지점이기도 하고 희망의 근거이기도 하다.(p.176)
노동 르포 : 조지 오웰 , 그 혹독한 내려감
음지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진실을 말하는 자이다. -파울 첼란-
기사는 신속하지만 딱딱하고 소설은 아름답지만 허무했다. 비문학에도 순문학에도 온전히 마음 붙이지 못하던 참인데 르포르타주에서 문학의 가능성을 보았다. 르포르타주는 기록이라는 뜻의 불어다. 현장, 사람, 기록, 이것은 늘 내 가슴을 뛰게 하는 세 가지가 아닌가.(p.180)
접시 닦이, 노숙, 부랑자 생활 등을 자처했던 조지 오웰은 “글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글의 주제, 곧 마땅히 표현해야 될 바를 표현하는 일인데 그건 경험하지 않으면 실상을 드러낼 수 없다”고 단언했다.
일단 현장에서 써야 한다는 것, 동의한다, 오웰은 또한 표현의 방식과 스타일 등 넓은 의미의 작품성은 그다음에 따라오며 그건 고통스러운 반복 작업과 훈련을 통해 이루어야 한다고 충고했다고 한다. 동의한다. 현장에서 보고 느끼고 말한다는 것, 현장으로 내려갔기에 잘 쓴게 아니라 충실한 경험에서, 곧 삶에 밀착한 경험에서 좋은 글이 나온 것이다.
‘삶이 쓰게 하라’는 것.
작가의 윤리와 책무에 헌신하고 글로 생산하는 작가에게 존경이 솟는다. 그래서 나는 글이 힘을 잃고 지리멸렬해진다고 느낄 때 조지 오웰을 읽는다. 그의 맵시와 유머와 기품이 어우러진 문장을 부러워하며 ‘혹독한 내려감’에 존경을 보낸다. (p.183)
사람을 이해하는 시간, 인터뷰 ‘이해’란 타인 안으로 들어가 그의 내면과 만나고, 영혼을 훤히 들여다보는 일이 아니라, 타인의 몸 바깥에서 선 자신의 무지를 겸손하게 인정하고, 그 차이를 통렬하게 실감해나가는 과정일지 몰랐다. -김애란- “자기만의 길을 가는 이는 누구와도 만나지 않는다”고 니체는 말했다. 사람들은 거의 비슷하지만 모두 다르게 살아가고 있다.(p.184)
인터뷰는 마주하기다. 온몸이 귀가 되어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그 이야기를 나의 언어로 번역하고 정리하는 일이다. 글 공부가 곧 사람 공부라고 할 때 인터뷰는 두 가지를 아우르는 최고의 방법이다.(p.185)
인터뷰는 사려 깊은 대화다 관계란 기억의 교환이다 다른 사람에게 평범한 기억밖에는 만들어 줄 수 없는 사람은 ‘그 사람’이 될 수 없으며, 자신의 기억을 갖지 못하는 인간은 다른 사람의 기억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황현산- 인터뷰는 짧은 연애다. 두세 시간 정도 진행되는 그 시간이 데이트처럼 설레고 긴장된다. 인터뷰도 한 사람의 우주로 들어가는 행위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감전되고 화학반응을 일으키며 감각이 달라지는 뜨거운 일다.(p.188)
휴먼 스토리를 쓰고자 한다면 그 사람의 신발을 사훌 이상 신어보라는 말이 있는데 일정기간 그의 처지에서 생각하고 그와 함께 생활해보아야만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다. “자세히 보아야 이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라는 시구처럼 주의를 흩뜨리지 않을 때 이야기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진정한 발견은 새로운 풍경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하지 않나. 사람풍경도 마찬가지다. 사람을 바라보는 나의 귀가 얼마나 열렸는지, 사람의 이야기를 받아내는 내 마음의 토양이 어떠한지에 따라 채집할 수 있는 말과 피워낼 수 있는 글은 얼마든지 달라진다. 위대한 사랑이 대상을 창조하듯이 좋은 인터뷰어도 인터뷰이를 아름답게 창조한다.(p.1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