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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
경주지역 조선시대 문화유산의 대표적인 유적으로 향교와 서원, 서당, 정자 등이 있다. 유교문화의 상징물이다. 경주지역의 유교문화 상징물은 강동면과 안강읍 지역에 집중돼 있다. 경주 430여 개소의 유교문화유적 중 강동면에 82, 안강읍 지역에 50개소가 분포하고 있다. 두 개 읍면에 132개소가 집중돼 거의 30%를 훌쩍 넘어서는 수치다.
경주 읍면지역별 정자와 서당의 분포에서도 157개소 중 강동 34, 안강 22개소를 합하면 2개 지역에 56개소로 집계돼 35%를 넘어선다. 외동읍과 내남, 양북면에도 다른 지역에 비해 눈에 띄게 많다.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양동마을이 강동면과 안강읍 지역에 걸쳐 형성된 영향이 크다. 특히 감포 등의 해안지역에는 유교문화를 교육하는 서원과 서당 같은 유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서원은 또 서원에 이르기 전에 상징적인 출입문으로 실제 문이 달려 있지 않은 홍살문을 세우고 주변에 하마비나 하마석을 두었다. 이어 정문인 외문을 설치하고, 일부 서원에는 루(樓)를 세워 외문을 겸하기도 했다. 서원에 따라 외문을 지나 서원 경내로 들어서면 그 앞에 루가 있는 경우도 있다. 루가 외문과 강학공간 사이에 위치해 기능적으로 경계를 짓도록 했다.
옥산서원의 무변루와 서악서원의 영귀루가 대표적다. 루를 지나면 유생들의 강당과 재사가 있는 강학공간이 나온다. 강학공간은 강당, 동재와 서재로 이루어졌다. 동재와 서재는 원생들이 생활하며 독서하는 곳으로 동재는 강당에서 왼쪽에 있으며 서재보다 선임들이 이용하는 공간이다. 강학공간 뒤에는 사당 일곽이 있는 제향공간으로 형성되어 있다.
사당은 선현의 위패를 모시고 봄가을로 제향을 올리는 곳이다. 서원은 앞에서 거론하지 않은 복잡한 건물들이 다양한 용도로 지어진 곳이 많았다. 계속해서 경주의 서원을 찾아 역사기행을 이어간다.
❚서악서원
서악서원은 설총과 김유신, 최치원을 봉향하는 서원으로 1561년 서악동 615번지 일대에 건립됐다. 경상북도 기념물 제19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무열왕릉과 이웃해 경주의 대표적인 역사문화관광자원으로 찾는 발길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경주부윤 이정이 명종 16년에 김유신 장군을 기리기 위해 사당을 세우면서 서원으로 발전됐다. 경주지역 선비들이 설총과 최치원의 위패도 같이 모실 것을 건의해 퇴계 이황의 의견을 들어 함께 배향하게 됐다. 이황은 ‘서악정사’(西岳精舍)라 명명하고 직접 글씨를 써서 현판으로 달았다.
서악정사는 임진왜란 때 완전히 불에 탔다. 선조 33년 1600년에 경주부윤 이시발이 일부 중수하고 1602년 묘우가 신축됐다. 광해군 2년 1610년 경주부윤 최기가 강당과 재실 등을 중창했다. 인조 원년 1623년에 경주부윤과 선비들의 상소로 조정으로부터 서악서원으로 사액 받았다. 서악서원 편액은 당대의 이름난 서예가 원진해가 썼다. 강당은 시습당, 재사는 절차헌, 문루는 영귀루, 외삼문은 도동문으로 이름지었다. 서악서원은 유학을 강론하면서 경주의 학풍을 이어가는 중심이 됐다.
서악서원은 옥산서원과 함께 외문을 지나 문루, 동서재, 강당과 다양한 목적의 건물에 이어 내문을 지나 사당까지 우리나라 서원의 전통 양식을 그대로 갖추고 있는 보기 드문 문화유적으로 보존되고 있다. 서악서원에서는 매년 2월과 8월에 향사를 올린다. 유물로 문집 몇 권이 전해지고 있다. 신라시대의 초석과 석조물, 석탑재 등이 놓여 있어 서원의 위치가 신라시대 절터였거나 인근의 절터에서 옮겨온 것으로 짐작된다.
서악서원은 임금으로부터 편액을 받은 사액서원이라는 점과 조선시대 서원의 전통적인 건축구조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것 외에도 봉향하는 인물의 특별함으로 유명하다. 일반서원이 학문적으로 크게 성취한 인물을 배향하는데 서악서원은 가장 먼저 신라 삼국통일의 주역 김유신 장군, 문인이 아닌 무인을 기리기 위해 사당을 세웠다. 이어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아들이자 강수, 최치원과 함께 ‘신라삼대문장’으로 손꼽히는 설총을 모셨다. 또 열두살의 나이에 당나라로 건너가 열여덟에 빈공과에 급제해 천하에 명문장으로 이름을 떨치고 신라로 돌아와서도 ‘시무십여조’를 짓는 등 눈에 띄는 글을 남긴 최치원을 함께 배향하고 있어 유명하다.
서악서원은 경주지역의 일반적인 서원과 다르게 늘 사람들이 붐비는 편이다. 향사를 올리는 외에도 문학행사와 소규모 행사들이 수시로 진행된다. 특히 전통문화체험행사가 다양하게 진행되면서 조선시대 문화와 현대문화가 접목되는 곳으로 널리 알려지고 있다. 신라문화원이 서악서원 주변에서 선비문화 체험과 함께 숙박을 통한 다양한 전통문화 체험행사를 진행해 인근도시는 물론 수도권 단체와 중앙부처 공무원들도 체험행사 장소로 활용하고 있다.
❚용산서원
용산서원은 내남면 이조리 659번지 경주 남산자락에 1699년 건립돼 경상북도 기념물 제88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의병으로 일어나 크게 활약해 벼슬길에 올랐던 최진립 장군을 배향하고 있다. 경주에서 서악서원, 옥산서원과 함께 사액서원으로 임금에게 인정을 받은 전국 47개 서원에 포함된다.
서악서원에서는 매년 2월과 8월에 향사를 올린다. 유물로 문집 몇 권이 전해지고 있다. 신라시대의 초석과 석조물, 석탑재 등이 놓여 있어 서원의 위치가 신라시대 절터였거나 인근의 절터에서 옮겨온 것으로 짐작된다.
서악서원은 임금으로부터 편액을 받은 사액서원이라는 점과 조선시대 서원의 전통적인 건축구조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것 외에도 봉향하는 인물의 특별함으로 유명하다. 일반서원이 학문적으로 크게 성취한 인물을 배향하는데 서악서원은 가장 먼저 신라 삼국통일의 주역 김유신 장군, 문인이 아닌 무인을 기리기 위해 사당을 세웠다. 이어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아들이자 강수, 최치원과 함께 ‘신라삼대문장’으로 손꼽히는 설총을 모셨다. 또 열두살의 나이에 당나라로 건너가 열여덟에 빈공과에 급제해 천하에 명문장으로 이름을 떨치고 신라로 돌아와서도 ‘시무십여조’를 짓는 등 눈에 띄는 글을 남긴 최치원을 함께 배향하고 있어 유명하다.
서악서원은 경주지역의 일반적인 서원과 다르게 늘 사람들이 붐비는 편이다. 향사를 올리는 외에도 문학행사와 소규모 행사들이 수시로 진행된다. 특히 전통문화체험행사가 다양하게 진행되면서 조선시대 문화와 현대문화가 접목되는 곳으로 널리 알려지고 있다. 신라문화원이 서악서원 주변에서 선비문화 체험과 함께 숙박을 통한 다양한 전통문화 체험행사를 진행해 인근도시는 물론 수도권 단체와 중앙부처 공무원들도 체험행사 장소로 활용하고 있다.
❚용산서원
용산서원은 내남면 이조리 659번지 경주 남산자락에 1699년 건립돼 경상북도 기념물 제88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의병으로 일어나 크게 활약해 벼슬길에 올랐던 최진립 장군을 배향하고 있다. 경주에서 서악서원, 옥산서원과 함께 사액서원으로 임금에게 인정을 받은 전국 47개 서원에 포함된다.
서악서원에서는 매년 2월과 8월에 향사를 올린다. 유물로 문집 몇 권이 전해지고 있다. 신라시대의 초석과 석조물, 석탑재 등이 놓여 있어 서원의 위치가 신라시대 절터였거나 인근의 절터에서 옮겨온 것으로 짐작된다.
서악서원은 임금으로부터 편액을 받은 사액서원이라는 점과 조선시대 서원의 전통적인 건축구조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것 외에도 봉향하는 인물의 특별함으로 유명하다. 일반서원이 학문적으로 크게 성취한 인물을 배향하는데 서악서원은 가장 먼저 신라 삼국통일의 주역 김유신 장군, 문인이 아닌 무인을 기리기 위해 사당을 세웠다. 이어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아들이자 강수, 최치원과 함께 ‘신라삼대문장’으로 손꼽히는 설총을 모셨다. 또 열두살의 나이에 당나라로 건너가 열여덟에 빈공과에 급제해 천하에 명문장으로 이름을 떨치고 신라로 돌아와서도 ‘시무십여조’를 짓는 등 눈에 띄는 글을 남긴 최치원을 함께 배향하고 있어 유명하다.
서악서원은 경주지역의 일반적인 서원과 다르게 늘 사람들이 붐비는 편이다. 향사를 올리는 외에도 문학행사와 소규모 행사들이 수시로 진행된다. 특히 전통문화체험행사가 다양하게 진행되면서 조선시대 문화와 현대문화가 접목되는 곳으로 널리 알려지고 있다. 신라문화원이 서악서원 주변에서 선비문화 체험과 함께 숙박을 통한 다양한 전통문화 체험행사를 진행해 인근도시는 물론 수도권 단체와 중앙부처 공무원들도 체험행사 장소로 활용하고 있다.
❚용산서원
용산서원은 내남면 이조리 659번지 경주 남산자락에 1699년 건립돼 경상북도 기념물 제88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의병으로 일어나 크게 활약해 벼슬길에 올랐던 최진립 장군을 배향하고 있다. 경주에서 서악서원, 옥산서원과 함께 사액서원으로 임금에게 인정을 받은 전국 47개 서원에 포함된다.
최진립 장군은 현곡면 구미동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글 읽기를 좋아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최봉천, 동생 육의당 최계종 등과 의병을 일으켰다. 언양에서 올라오는 왜병들을 지형지물을 이용한 전략으로 크게 무찔렀다. 경주읍성 수복에도 많은 역할을 했다. 노곡전투에서는 김호 장군과 함께 적을 무찌르고, 권복시, 손엽, 권사민 등과 영천성 복성전투에도 참여해 성과를 올렸다. 1597년 왜병들이 서생포에 주둔하고 있을 때 공은 결사대를 조직해 적을 유인해 싸우는 등 몸을 아끼지 않고 왜적을 물리치는데 공을 세웠다.
선조 31년 서무원종공신 2등에 녹선돼 벼슬길에 올라 도총도사, 경원부사, 통정대부를 거쳐 인조 원년 가덕 첨사에 임명됐다. 전라수사, 공조참판 겸 부총관에 재수되었다가 벼슬을 사양하는 글을 올려 4년만에 임금의 허가를 받았다. 인조 12년에 다시 전라 우수사로 나갔다가 공주영장에 임명됐다.
1636년 청나라 군사가 쳐들어 와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가 적에게 포위됐다. 이때 충청도 감사 정세규가 최진립 장군이 늙었음을 말하자 “지금 임금의 욕됨이 그 얼마인데 감히 신하로서 삶을 도모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늙었다고 군사를 맡기지 않는다면 나 혼자라도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이라며 말을 달려 전장터로 진격했다. 적의 위세가 사나워 아군은 무너졌지만 끝내 곧게 서서 활을 당기며 적과 대항하다 몸에 고슴도치처럼 화살이 꽂혀 전사했다. 최 장군의 나이 예순아홉이었다.
인조 15년에 자헌대부 병조판서에 증직되고, 인조 18년 정려가 세워졌다. 효종은 시호 ‘정무공’을 내렸다. 숙종 12년 경원에 충렬사가 세워졌고, 숙종 25년 1699년 용산서원이 창건됐다. ‘숭렬사우’라는 사액이 내려와 경주의 서악서원, 옥산서원과 함께 3대 사액서원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영조 16년 용산서원 신도비가 ‘정무공 최선생 정려비’로 서원의 남서쪽에 세워져 신도비각이 지금도 우뚝 서있다. 용산서원은 옥산서원, 서악서원과 함께 조선시대 유적을 찾아가는 역사기행에 빠져서는 안될 중요한 사적지로 손꼽힌다.
❚단구서원
단구서원은 강동면 단구리 1068번지 1983년 건립돼 이세기, 이청, 이종윤을 봉향한다. 단구리에 사는 후손들이 이종윤공을 추모하기 위해 보원정을 건립했다. 서악서원이나 옥산서원처럼 전통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지는 않다. 규모도 적은 편이다. 강당이 ‘ㄱ’자 형태로 덩그렇게 지어져 있고 동남쪽에 사당이 세워져 있다.
철종 13년에 신광면 냉수리에 모현사(慕賢祠) 사당을 지어 향사를 지냈으나 고종 5년에 훼철되어 1927년 경주 단구리에 모현서당을 건립하면서 모현사를 같이 세워 향사를 올렸다. 1983년 단구서원으로 승호해 창건했다. 송암 이세기는 본관이 경주다. 고려 충렬왕 때 문장에 능하고 밀직부사, 대제학, 동지춘추관사 겸 검교정승을 역임했다. 국당 이청은 이세기의 큰아들이다. 충렬왕 때 국자시에 장원 급제해 원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고, 정당문학, 첨의참리, 문하시랑, 동평장사, 예문고대제학 등을 역임했다.
송와 이종윤은 이청의 5세손이다. 경주에서 태어나 세조 7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문과에 급제했다. 예조좌랑을 거쳐 정랑에 승진했다. 사헌부 헌납, 사헌부장령, 봉상시부정 등을 역임했다. 제주목사로 부임해 임기를 만료하고 돌아오려는데 백성들이 나라에 유임을 청하여 연임돼 근무하다 제주관아에서 명을 다했다.
❚직천서원
직천서원은 안강읍 대동리 345번지 1979년에 세워져 정사진 의병장 위패를 모신다. 정사진은 여러 고을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하면서 문천회맹에 참가했다. 1711년 영천 직천에 직천서원을 건립하고 공을 봉향했지만 고종 때 전국적인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됐다.
1939년 영천 임고면 우향동에 직천서당을 건립해 숭모의 예를 올렸으나 지속하지 못했다. 1979년 경주 안강읍에 서원을 지어 직천서원 이름을 그대로 사용해 공의 위패를 모시고 향사를 올리고 있다.
❚귀산서원
귀산서원은 현곡면 하구리 164번지 마을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정조 10년 귀산사 사당을 설립하고 양경공 서유(徐愈)를 배향했다. 1848년 경상도 유림의 결의에 따라 귀산사를 귀산서원으로 승호하고 양경공 9세손 귀봉 서일원(徐一元)을 추향했다. 송암 이세기는 본관이 경주다. 고려 충렬왕 때 문장에 능하고 밀직부사, 대제학, 동지춘추관사 겸 검교정승을 역임했다. 국당 이청은 이세기의 큰아들이다.
충렬왕 때 국자시에 장원 급제해 원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고, 정당문학, 첨의참리, 문하시랑, 동평장사, 예문고대제학 등을 역임했다. 송와 이종윤은 이청의 5세손이다. 경주에서 태어나 세조 7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문과에 급제했다. 예조좌랑을 거쳐 정랑에 승진했다. 사헌부 헌납, 사헌부장령, 봉상시부정 등을 역임했다. 제주목사로 부임해 임기를 만료하고 돌아오려는데 백성들이 나라에 유임을 청하여 연임돼 근무하다 제주관아에서 명을 다했다.
❚직천서원
직천서원은 안강읍 대동리 345번지 1979년에 세워져 정사진 의병장 위패를 모신다. 정사진은 여러 고을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하면서 문천회맹에 참가했다. 1711년 영천 직천에 직천서원을 건립하고 공을 봉향했지만 고종 때 전국적인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됐다.
1939년 영천 임고면 우향동에 직천서당을 건립해 숭모의 예를 올렸으나 지속하지 못했다. 1979년 경주 안강읍에 서원을 지어 직천서원 이름을 그대로 사용해 공의 위패를 모시고 향사를 올리고 있다.
❚귀산서원
귀산서원은 현곡면 하구리 164번지 마을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정조 10년 귀산사 사당을 설립하고 양경공 서유(徐愈)를 배향했다. 1848년 경상도 유림의 결의에 따라 귀산사를 귀산서원으로 승호하고 양경공 9세손 귀봉 서일원(徐一元)을 추향했다.
고종 5년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경주 유림과 양경공 후손들의 정성에 의해 2005년에 복원되었다. 이후 양경공의 10대조인 정민공 서희와 양경공의 8세손인 모암 서사적의 위패를 추향해 지금은 4위를 봉안하고 있다.
양경공은 약관에 이미 사마시에 합격하고 문과에 급제했다. 경기도 이천에서 출생해 정종 원년에 판결사에 오르고, 정종 2년 태종을 책립하는데 공을 세웠다. 2차 왕자의 난으로 불리기도 하는 박포의 난을 이방원 등과 같이 평정했다. 공은 쉰네 살 때 예조판서에 올랐고, 쉰여섯 살에 사망했다. 사후에 자헌대부 예조판서 증직과 양경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세종은 헌릉 비음에 그의 작명을 쓰게 하고 선조는 그 후손들이 영원히 신주를 옮기지 않고 모시도록 부조묘(不?廟)의 명을 내렸다. 숙종과 정조 때에도 후손들을 찾아 보살피도록 유지를 내렸다.
❚나산서원
나산서원은 양남면 나산리 555번지에 1936년 건립돼 김문기 위패를 모시고 있다. 경주 해안지역에 유일하게 설립된 서원이다. 월성원자력본부에서 서북쪽으로 바라보이는 거리에 위치해 사당에서는 바다가 보인다. 승용차가 들어갈 수 없는 마을안길을 따라 걸어야 하는 마을 깊숙한 곳에 지어져 찾아가기가 쉽지 않다.
본래 1780년에 사당 나산사를 설립하고 김문기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다가 용장사 매월당 영당으로 옮겨져 매월당 영정과 같이 봉안되었다. 나산사는 고종 7년 전국의 서원들이 헐릴 때 철폐됐다. 1936년 나산사를 지었고, 1999년 묘우를 복원했다. 김문기는 27세에 문과 급제해 예문관 검열을 비롯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단종 때 형조참판을 역임하고, 계유정난이 일어나자 수양대군의 반대파 입장에 섰다. 세조가 공을 공조판서 겸 삼군도진무로 명했지만 거절하고, 단종 복위를 위해 성삼문, 하위지 등과 거사를 도모하다 김질의 밀고로 잡혀 고문 끝에 순절했다.
공의 후손들은 상주에 전입해 3대에 걸쳐 관노생활을 했다. 증손 김제학이 영동으로 옮겨 살다가 경주 동해 나산으로 이사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영조 7년 공의 직위가 복관되고, 정조 2년 시호 충의(忠毅)가 내려지면서 좌찬성에 증직됐다.
2010년 나산서당을 나산서원으로 이름을 높여 현판을 달고 매년 3월 향사를 올리고 있다. 월성원전과 양남의 주상절리군을 찾는 길에 나산서원을 찾아보는 것도 역사기행에 하나의 기쁨이 될 듯하다.
첫댓글 서악서원과 용산서원은 왕이 내린 편액으로 유명하다.
서월 철폐령에도 버티었던 서악서원
조선시대의 얼이 깃든 자랑스런 문화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