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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집
최순희
문명의 혜택이 사람들에게 때로는 안개 같은 혼돈을 안겨주기도 한다.
공두식은 벌써 술이 거나하게 취했다. 옆에서 두식아 한 잔만 더 받아. 야, 내 술도 받아야지. 공두식 그만 마셔. 취했다니까, 하는 친구들 잔소리가 들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기분이 좋다. 오늘은 정말 기분 좋은 날이다. 일 년에 6월, 12월 두 번 모이는 초등학교 동창 모임인데 오늘이 12월 27일이니 내일 모레면 싫으나 좋으나 한 살 더 먹어 일흔일곱이 된다. 언제 그렇게 배 터지게 나이를 먹었을꼬. 다들 술기운이 올라 굵은 주름이 팬 얼굴들이 불그레하다. 초등동창이라 체면 차릴 것도 없고 눈치 볼일도 없다. 본디 애주가인 그는 친구들이 권하는 술을 사양 않고 받았다. 늙은 동창 녀석들이 오늘은 그의 옆으로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두식아, 네 오늘 너무 많이 마신다. 나이 앞에 장사 없다고 안 하더나.”
“걱정을 말거라. 내가 요까짓 술에 못 이길까. 나 공두식이야.”
“그래. 공두식 장하다. 오늘 우리 친구들 밥값 술값까지 니가 다 내고 참 고맙다.”
“친구들이 이리 좋아하면 이담에 또 밥 사지 뭐.”
“니 얼마를 보상 받았노? 못해도 10억 아니 한 20억? 우~와 짜아씩 부자네. 얼매나 좋겠노. 뭐라 뭐라 캐도 늙으면 돈이 젤이다 아이가.”
“야 공두식, 요즘 말하는 보이스 피싱이라 카든가 그런 거 조심해라. 냉장고에 돈 넣어두라 카믄 퍼뜩 경찰에 신고하고, 얼매나 무서운 세상이고.”
“우짜든지 조심하는 게 좋을 끼다. 아는 사람이 더 무섭다 안 카더나.”
“자식들 모아놓고 보란 듯이 큰돈 앵기며 부모 체면도 서고 어깨가 좍 폈겠다!”
“두식아, 자식들한테 얼마씩 주었노? 일억, 이억 아님 삼억? 아이고 배야!”
“이제껏 내가 해 준 게 하나도 없었거든. 이번에 애들 허리 좀 펴게 해주었다. 그라고 니들 몰라서 그러지 수자원 새끼들 얼매나 짜다고. 몇 년간 질질 끌고서 시세 반의반, 그 반의반도 안 주더라. 내 참 억울하고 더러바서. 내 논밭을 그냥 현시세로 팔면 평당 이삼백은 서로 사려고 대갈빡 터질 건데, 100억도 넘제. 하믄, 장장 사십 년을 자연녹지라 카믄서 저거들 맘대로 꽁꽁 묶어 놨다 신도시 한다고 날로 처먹었제. 그냥 애들 손에 들린 사탕 채가듯 뺏은 거여. 세상에 정부공시가격도 안 되게 쳐주는 데가 어디 있겠노 말이다. 내가 살펴보니 7년 전 공시가로 계산한 거여. 그기 말이가 똥이가! 내사 쌍욕이 절로 나오더라니까. 날도둑놈 심보인 거라. 이젠 나도 낼모레 팔순을 바라보니 농사짓기가 여북 힘들어야지. 그래서 억울해도 처분했다. 참말로 일이 힘에 부치더라니까. 자식들 말대로 한번 편안하게 살아보고 싶기도 하고. 우리 마누라가 허름한 주택에서 겨울이며 덜덜 떨며 사는 게 신물 난다고 엔간히 잔소리해야지. 아파트, 아파트 노래를 불러서 새 아파트 사서 이사도 했다.”
“요즘같이 눈 밝은 세상에 그렇게 억지로 수용할 수 없을 터인데 그러냐?”
“말도 마라. 억울해서 끝까지 못 비킨다는 사람도 있다. 그 돈 받아 다른 데 가서 농사지을 땅 사기는 애당초 글렀제. 몰려가서 데모도 했다니까. 사람 사는 집값은 그래도 좀 쳐주더라. 이사비도 주고 이주택지도 정해주고.”
염색한 머리카락 사이로 흰머리가 삐져나오고 얼굴에 자글자글 주름이 진 여자 동창들도 눈빛을 반짝이며 부러워하는 기색들이 역력하다.
“이주택지는 팔아도 피가 많다던데 팔았냐? 어디 아파트로 이사했어?”
“몇 평이야? 몇억 주고 샀어? 인테리어 쥑이는 새 아파트, 정말 좋겠다야!”
“야 공두식, 죽으나 사나 논밭 안 팔아 묵고 흙에 살더니 니가 노복이 터졌다!”
“새끼들한테도 아파트 한 채씩은 안겼겠네. 얼매나 기분 좋을꼬!”
“두식아, 그래도 새끼들 다 주지 말고 노후자금 넉넉하게 남겨두었지. 빈털터리 동창 만나면 술도 한잔 사주고. 우리 담에는 공두식 동창회장 시키자 고만.”
친구들이 손뼉을 치고 난리들이다. 공두식은 오늘 동창회서 20여 명 동창 밥값을 내고 2차 술값도 내었다. 처음에는 모였다 하면 쉰 명도 넘던 동창들이었는데 병들어 죽고, 아파서 집안에 들앉는가 하면 요양원과 요양병원 간 친구들도 있어 이젠 많아야 한 스무 명 남짓이다. 그가 초등학교 동창회에 이런 거금을 선심 쓴 것은 생전 처음이요 또 마지막이 될 것이다. 그간 동창회비야 냈지만, 친구들 밥과 술을 얻어는 먹어도 한 번도 낸 적이 없었기에 오늘 동창회에 찬조하기로 지난여름 수용보상금 받았을 적에 아내에게 사정하여 일금 백만 원을 떼놓았었다. 그는 그간 친구들에게 얻어먹은 빚을 갚은 것 같아 마음이 홀가분했다. 이차를 끝내고 집에 가는 친구는 가고 다들 우르르 노래방으로 몰려갔다. 할머니가 된 여자 동창들이 마이크를 제일 먼저 그의 손에 쥐여 주며 선곡하라고 난리다. 전에는 노래 부르란 말도 없었는데 말이다. 아, 이런 맛에 돈을 쓰는구나! 이렇게 우쭐해지는 기분은 처음이다. 카아- 돈이 좋긴 좋네! 기분이 좋아선지 목청도 트이고 큰소리가 나왔다. 희한하게 몇천 평 논밭 있을 때보다 은행에 몇억 대 현금 있는 게 더 기분이 난다. 은행을 가도 바로 직원들이 깍듯하게 지점장실로 모시고 커피나 차를 금방 내온다. 삼 남매 자식들도 근래 부쩍 자주 들린다. 자신이 좋아하는 생선회며 고기와 간식들을 사 오고 따뜻한 겨울옷들도 사다 입혀주었다.
“까짓 오늘 노래방도 내가 쏜다. 친구들아 많이 마시고 많이 놀거라!”
박수가 터지고 우우 환호성이 올랐다. 그가 제일 먼저 이별의 부산정거장을 부르고 돌아와요 부산항은 합창했다. 다들 일어나 디스코 춤판이 벌였다. 도우미 아줌마가 소주 맥주 음료수 갖다 나르기도 바쁘다. 전화가 왔다. 마누라다. 잠깐만 하고 시끄러운 노래방을 나와 밖에서 전화를 받았다.
“당신들 아직도 동창회하고 있소? 맙소사 시간이 몇 신데. 좀 일찍 다니지.”
“노래방 왔다니까. 여기서 조금 놀다 간다니까. 몸살은 좀 나은 거여?”
“낫기는, 이젠 늙어서 약발도 안 받고 시방도 정신이 가물가물허요. 약 먹으려고 억지로 눈떠보니 사람이 없기에 전화했소. 보약도 아닌 술 엔간히 마시고 택시 타고 오시구려. 117동 1604호, 117동 1604호 잊지 말고 잘 찾아오시오. 나 원 그 나이에 여즉 놀고 있으니 일흔도 넘은 할배 할매들이 한창인가베.”
아내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다. 날도 춥고 이사도 겸해 감기몸살이 오지게 든 모양이다. 한평생 소처럼 억척스레 일한 아내였는데 요즘은 전과 달리 자주 드러눕는다. 일 년 중 김장이나 설과 추석 명절, 세 번 조상제사를 지내고 나면 꼭 아프다. 병원에 다니고 링거를 맞고도 열흘은 넘게 약을 먹어야 겨우 보시 시 일어나니 말이다. 제사음식도 간단히 하라고 해도 끙끙대면서도 장만하여 떡과 나물 생선 부침개 등을 마을회관에 푸짐하게 차려가서 동네 사람들 대접해야 직성이다. 자식들 김장이나 반찬도 그만해주라고 해도 마이동풍이다. 옛날에는 이백 포기도 넘게 하였지만 이젠 적게 해도 50포기 김장하여 자식들 나누어주고 철 따라 밑반찬과 온갖 장아찌들을 담아서 퍼주어야 하는 마누라 성미를 누가 말리누. 근래 마누라는 자고 나면 얼굴에 검버섯이 몇 개씩이나 생긴다고 거울만 보면 한숨이다. 그가 봐도 마누라 얼굴에 저승꽃이 부쩍 많아진 듯하다. 옛날에 선크림도 안 바르고 논밭을 다녀선지 부부가 얼굴에 유난히 검버섯이 많다. 이젠 손등에까지 거뭇거뭇 피었다. 마누라는 피부과에 가서 얼굴의 점과 검버섯 빼겠다고 벼르고 있잖은가. 사무관으로 퇴직한 동창회장 박정수가 같은 방향 친구 둘을 태우고 자진해서 그의 아파트까지 차를 태워주었다. 밤에 보아도 불빛 휘황한 상가며 산처럼 높은 건물이 끝도 없이 이어진 대단지아파트라 친구들도 놀란 모양이다.
“와 여기 완전 대단지아파트네. 분양가도 피도 엄청 세다는 말은 들었어도 와보진 않았는데 대단해!”
“상가도 대단하네. 사람 팔자 모른다고 한평생 땅만 파던 자네가 큰 부자 되었구나.”
“요즘 큰 아파트 거의 외국 이름 붙인다더니 오면서 보니 상가 간판이고 아파트 이름이고 죄다 영어로 돼 있네. 누가 그러더라. 시부모들 못 찾아오게 하려고 그런다나 어쩐다나 원.”
“설마?”
“영어 이름, 영어 간판 커다랗게 붙여야 잘난 줄 알지. 도가 지나쳐. 우수한 우리 한글 무시하며 막 화가 난다니까.”
박정수가 내려서 악수를 하며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공두식 오늘 큰일 했어, 고맙다. 술에 취했는데 괜찮겠니? 자네 아파트 앞인 것 같아. 잘 찾아 들어가라. 고맙다. 친구야. 우리는 간다.”
“야! 우리 집에 가자. 니들 다 자고 가도 되거든. 방들이 엄청 넓거든. 그래도 간다고, 친구들이 잘 가라 빠이빠이!”
친구들이 차를 돌려 나가고서 그도 집으로 가려고 하자 다리가 비틀했다. 스팀이 잘된 차 안에 있다 내려서 그런지 으스스하고 걸음이 비틀했다. 바람이 제법 매몰차게 지나갔다.
이곳 신도시 신축아파트로 이사 온 지 이제 한 일주일 되었나. 지난달부터 입주가 시작되어 천오백세 대 단지여서 낮에는 들고나는 이삿짐 차들로 아파트가 어수선하지. 나 원,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더라. 지상에 차가 없는 아파트라 공원처럼 꾸며져 조경도 근사하고 쉼터 벤치며 애들 수영장 분수대 배드민턴장이 있고, 지하에 거대한 주차장 말고도 헬스장 골프연습장 요가실 작은 도서관 독서실 등 아무튼 입주민 편의시설도 잘 갖춰졌다고 딸애가 자랑했지. 많아도 내가 이용할 게 뭐 있으라구. 딸애는 헬스장 댕기라고 했지만 글쎄. 그래 집에 가자. 뭐 실내 인테리어가 품격 있게 잘 되었고 붙박이들도 많아 정리하기 좋다는 내 집에 가자. 우리 집이지. 아니 우리 아파트지. 넓은 거실에는 황소 털 색깔 기다란 가죽 소파도 있고 주방에는 6인용 큼직한 식탁도 들였지. 방한이 잘되어 보일러를 안 켜도 주택보단 열 배 따시다고 마누라가 그러제. 한평생 바깥바람만 쉬어 온 나야 갑갑하지만, 안식구 좋다니 좋은 거지 뭐. 정남향이라 대형 베란다 유리문으로 햇빛이 소나기처럼 쏟아져 들어와 온종일 따스하니 밤에만 잠깐 보일러 돌리지. 마누라가 주야장천 노래하던 아파트 아닌가. 이사하기 한 달 전부터 마누라는 딸내미와 작당을 해서 시내 가구점은 다 돌아다니며 소파, 침대, 식탁, 양문형 냉장고 김치냉장고 드림 세탁기를 미리 사 두었지. 세탁기 들어오면서 빨래건조기도 슬쩍 따라서 오더구먼.
“보소 내 생전 처음으로 돈 쓰는 재미가 아주 솔솔허요. 애들 혼수 마련해 줄 때처럼.”
늙은 마누라가 아주 신바람이 났어. 못난 남편 만나 사느라고 고생도 일도 엄청나게 했으니 수용보상금 절반은 마누라 몫이지. 그래 마누라 통장에 3억 넣어주니 기운이 펄펄 난다더니만 이사하고 주문한 새살림 들이느라 바쁘게 설치더니 엊그제부터 심한 몸살이 나서 오늘은 일어나지도 못하고 뻗어 있었제. 보소, 늙어선지 돈 쓰기도 이젠 힘이 들구려. 하고 객쩍은 소리까지 했제. 사람은 다 늙었는데 뭔 새살림 구색 갖춘다고 힘을 쓰는지 내사 모르겠다만. 돈이 뭐 일이백 들까. 거금 천만 원도 더 들었지. 내가 돈 많이 쓴다고 큰소리 낼까 봐 모녀가 입 맞추어 물건대금 반으로 뚝 잘라 부르는 것 알고도 모르는 척 넘기는 거지 뭐. 마누라 원대로 하라고. 사십여 년 안방에 있던 자개농 버리고 온 것이 마누라는 못내 섭섭해하였지. 마누라가 그 장롱 얼마나 좋아했는지 누구보다 내가 잘 아니까.
사는 형편이 구차하여 늦장가를 든 이듬해 살림 밑천 첫딸 우리 진숙이 낳고 연년생 큰아들 진수 얻었지. 없는 살림인데도 살맛이 났지. 이태 지나 진호 태어나고 어찌나 좋던지 말도 못 했제. 고물고물 강아지 새끼 같은 내 자식들 보기만 해도 배가 불렀으니까. 내 어깻죽지는 엄청 무거워도 새끼들 안 굶기고 험하게 안 입히려고 깜깜한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빡세게 일하였지. 내사 품앗이 놉일 가리지 않고 다 했어. 내 새끼 입에 밥 들어가는 것보다 더 보기 좋은 그림이 이 세상 어디 있던가. 참말로 땅 한 평이라도 더 늘이려고 소같이 일만 했는데 우리 마누라 그때부터 살살 세간 욕심을 부리더마. 장롱은커녕 찬장도 없이 시작한 소꿉살림이라 못질한 벽에 옷가지 주렁주렁 걸어놓고 살았는데, 어느 날부터 밥도 안 묵고 물도 안 마시고 장롱 사내라고 드러누워 사람 환장하게 했제. 엄마 엄마 하며 달라붙어 우는 새끼들 차마 볼 수 없어 내가 살찐 암소 한 마리 팔아 기똥차게 자개가 잘 박힌 10자짜리 장롱과 삼층장을 방 천장 뜯어 높여서 들였을 때 마누라는 자다가도 일어나 그걸 쓰다듬으며. ‘보소, 나 죽을 때까지 쓸 장롱이니 이거 비싸다고 구박하지마소.’ 하고 오금까지 박았지. 우리 마누라 우리 일 틈틈이 남의 일, 모내기 김매기 대파 모종 등 기를 쓰고 하더니 동네에서 제일 먼저 다리 달린 텔레비전 들였지. 저녁만 되면 애 어른 없이 그거 보려고 우리 집으로 몰려들 와 할 수 없이 마루에 텔레비전 내어놓고 마당에 멍석을 깔아 보았지. 사람들이 슬레이트 지붕 위에 세워진 안테나 보고 부러워들 했으니까.
옛날에 처음 냉장고 사서 들여놓고도 우리 새끼들 신기해서 문 열어보고 또 열어보고 난리가 났제. 학교 갔다 뛰어와서 냉장고 문 열어 얼굴 디밀어 넣고 시원타고 좋아했었지. 내사 여름철에 음식 안 상하는 게 희한하더마. 그렇게 산 냉장고를 애들이 얼음과자 만들어 먹던 냉장고를 그때는 여름에만 돌리고 겨울에는 꺼버렸지. 전기요금 아낀다고 흐음. 신청하고 일 년도 넘게 기다렸다가 검은색 전화기가 집에 달리던 날은 내가 더 좋아했는데 여편네가 처음에는 자랑한다고 이웃에 전화 빌려주고 인심 쓰더니 두 달도 못가서 전화 요금 많이 나온다고 구시렁거렸지. 하여튼 우리 마누라는 목표가 생기면 내 귀에 딱지가 앉도록 노래를 불러댔지. 세탁기! 세탁기! 나중에는 지겹고 귀찮아서 가만있으면 얼른 물건들이고는 입이 귀에 걸렸다니까. 세탁기, 김치냉장고는 바쁜 와중에도 언제나 반짝반짝 윤이 나게 닦았지. 자개장과 삼층장은 사람들이 보며 새것 같다고 했으니까. 벼루고 벼루에서 비싼 물건 하나씩 장만할 때마다 마누라가 얼마나 좋아하던지 몰라. 토마토 하우스에서 종일 일 해도 일할 기운이 나고 행복하다고 했으니까. 훗날 딸아이 결혼 시키면서 전기제품 몽땅 사주고는 한 말이 있었제.
“보소, 저 애들은 부모가 몽땅 사주어 새 가전제품 집에 들여 좋기는 하겠지만, 벼루고 벼루에서 하나하나 장만한 우리만큼 행복을 느끼지는 못할 것이요.”
비싼 가전제품 하나들이면 징그럽게 오래 썼지. 이사도 안 하고 처음 그 자리에 붙박이로 있었으니까. 이삼십 년은 예사로 썼지. 고장이 나서 부르면 교체할 부품이 잘 없다카데.
이번 새 아파트 이사에 구닥다리 헌 살림들이라 별로 가져올 게 없었어. 딸애는 다 버리고 엄마 아버지 몸만 나오라고 하다 내 눈총을 받았지만. 마누라는 아끼던 자개농과 삼층장을 아파트에 갖고 간다고 고집을 부렸지만, 애들이 하나같이 새집 버린다고 반대들을 하니, 결국 10자짜리 자개농은 버리고 삼층장은 우리 따라 아파트로 왔지 뭐. 큰 간장 단지며 즐비하던 항아리들이 눈에 밟혔지. 한평생 농사지은 집이라 농기구는 좀 많은가. 하나같이 내 손때 묻은 경운기며 이앙기, 고압분무기 물 푸는 모터 등 넓은 창고에는 농기구로 그득하지. 비닐이며 포대며 그물이며 좀 많은가. 옛날에 쓰던 쟁기며 지게 채 어레미 연장들도 한쪽에 주르르 걸려있어 애들이 농기구박물관 차려도 되겠다고 했으니까. 아, 1톤 트럭 내 애마 털털이! 십오 년 동안 소같이 부린 내 차, 날 많이 도와주었고 돈도 수태 벌어 주었제. 완전 농산물 짐차였던 털털이가 지난가을에 떠나갔지. 어찌나 일을 시켰던지 완전 똥차가 되었지만 그래도 나는 그 차가 든든한 친구처럼 내 걱정 다 받아주고 내 신경질 다 받아주고 내 발이 아닌 한 몸이 되어 살았는데 내 논밭 수용되자 저도 할 일 없다는 걸 알았는지 자주자주 탈이 나드니 지난겨울 초입 아침에 시동을 걸자 크렁크렁 이상한 소리를 내더니 그만 숨이 가버렸지. 폐차장 보내는 털털이 운전대를 잡고 남몰래 눈물을 쏟았구먼. 운전석이야 짐칸이야 타월로 깨끗이 닦고 쓸어서 궁둥이 몇 번이나 두드려주고 보냈지. 아직도 그 털털이만 눈에 선하다니까. 이백 평 넘는 내 집 마당 어디고 쭈욱 갖다 대면 제 자리였는데, 방문만 열어도 마루에 서서도 젤 먼저 띄는 게 파란색 털털이였는데.
우리 할무이 적부터 살았던 집이라 백 년이 넘은 촌집이 엄청 헐었지. 자연녹지에 묶여서 새로 짓지도 못하고 조금씩 고쳐가며 살았는데 여름날 감나무 살구나무 그늘 평상에 누우면 낮잠이 절로 오고 겨울에 장작불이나 좀 넣으면 구들방이 뜨끈뜨끈 얼마나 좋은데. 그러나 헌 집이라 벽으로 황소바람이 쑹쑹 들어와 마누라가 추워서 못 살겠다고 뼛골이 쑤신다고 지천하다 지난해부터 김장하고는 딸내미 아파트에 지내다 설에 왔으니 옮겨야지 뭐. 내사 전기매트만 있어도 얼마든지 살겠던데 여자들은 춥다고 별나게 엄살하대. 하기야 토마토 하우스야 대파작물이야 고추 들깨 콩 농사 한평생 짓느라고 등이 다 굽어지고 무릎연골 다 닳아 내년 따스한 봄날에 유명한 병원에서 관절 수술하기로 예약해 두었지. 무릎관절 수술하며 방바닥 앉는 생활하기 불편하다 해서 이참에 사는 침대, 내가 유명메이커 젤 좋은 침대 사라고 하자 마누라가 영감밖에 없소 하며 활짝 웃었지. 아파트가 뭐가 그리 좋다고 만날 아파트, 아파트 노래하면서 언제 새 아파트에 한 번 살겠냐고 바가지를 긁던 마누라 소원도 풀어주었으니 이젠 내 할 일은 다 한 것인가. 애들 말대로 나도 좀 편하게 살아보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정말 농사일 손 떼고 손에 흙 안 묻히고 살 수 있을지 모르겠네.
에잇 추워라. 이놈의 날씨가 갑자기 왜 이리 춥지? 내일모레면 금년도 다 가는데, 올해는 참 일이 많기도 했다. 한평생 농사짓던 내 땅이 몇 년을 질질 끌어오다 울며 겨자 먹기로 수용합의서에 도장을 꽉 찍어주었지만 암만 생각해도 날도둑놈한테 뺏긴 것 같아 섭섭한 생각이 든다니까. 세상천지 시골도 아니고 대도시 평지 땅을 평당 백만 원도 안 주고 수용하다니. 자연녹지만 풀리면 몇백만 원은 받고도 남을 금싸라기 땅인데 아이고 아까워라. 어어, 날이 제법 맵네. 밤공기에 뒷머리만 조금 남고 머리숱이 홀랑 빠져버린 대머리가 썰렁하니 시리다. 아 참 오리털 파카에 모자가 달렸다고 막내가 말한 걸 잊어구마. 모자 덮어써야지. 히히 대번에 대머리가 따시네. 그래도 춥다 추워. 어서 집에 들어가야지. 내일모레면 금년도 다 간다. 또 한 살 나이를 먹는구나. 먹기 싫어도 먹는 게 나이 이닌가베. 쉽다, 쉽다 해도 나이 먹는 것보다 쉬운 게 뭐가 있을꼬? 연애도 한 번 못 해보고 중매로 장가간 게 오래전 일 같지 않은데, 연년생 새끼들 고물고물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일흔일곱이나 먹었으니, 낼모레면 여든일세. 그 많은 나이 언제 어디로 다 먹었을꼬?
여기가 아파트로 들어가는 문이지. 어, 대형 유리문이라 그런지 꿈쩍도 안 하네. 다시 밀어보자. 요지부동이네! 내가 술이 많이 취했나. 정신을 차리자. 다시 현관문을 팍 밀었으나 그대로다. 염병하고 자빠졌네. 문은 자고로 열라고 있는 거지 지랄하고 안 열리는가. 안 열리는 문이 대체 무슨 문이고? 발로 차버릴까. 에잇, 아이고 발이 아프네. 발가락이 더 아프네. 잘못 찾았나? 저만치 나가서 동수를 보려고 고개를 치켜들고 살펴봐도 너무 높아 동수가 보이지 않는다. 제기랄, 다리가 비틀거리네. 더 뒤로 나가보자. 저기 뭐꼬? 116이라고 적혀 있제. 우리 집은, 우리 집은 117동 1604호지. 내가 술이 좀 됐기로 집주소도 모를까. 이쪽이 아니고 저쪽으로 가보자. 그런데 이 널럴한 아파트에 우째 사람 새끼도 개새끼도 안 보이누. 몇 시야? 아, 시계가 두 시가 넘었네. 내가 동창회서 너무 놀았네. 아니 기분이 좋아서 과음한 게야. 그래도 집은 바로 찾아가야지. 다리가 자꾸 휘적휘적하네. 아아, 저기가 117동이야. 가만있자, 여기 아파트는 대문에 자동 키가 있다고 했지. 그게 몇 번이라고 하더라. 아차차, 우리 부부가 현관문을 들고 날 때마다 비밀번호 누르기 번잡다고 큰애가 새끼손가락보다 가느다란 플라스틱을 우리에게 하나씩 주면서 대문 저어기 동그란 곳에 갖다 대면 문이 저절로 열린다고 했지. 큰애가 우리 집에도 현관문 자동키를 달아주었지. 찾아보자 어, 그게 어디 갔나? 없네. 집에서 안 갖고 나왔나. 동창회서 어울려 놀다 잃어버렸나. 바지 주머니 방한복 안주머니 바깥 주머니를 다 뒤져도 열쇠라고 하던 그 조그만 플라스틱 쪼가리는 보이지 않네. 아참, 집에 전화하면 되는데 내가 깜빡 잊고 있구나. 오늘 내가 술이 좀 과하게 취하긴 했구나. 새집에 새 가구 들이느라 몸살이 난 마누라가 좀 나아서 일어났는지 모르겠다. 죽이나 밥이나 뭘 좀 먹었는지 원. 핸드폰은 어디 있냐? 호주머니가 많이 달린 오리털 방한복 안주머니에 있네. 가죽 지갑에 얌전히 들어있다. 옛날 폴더 폰이 아니고 딸애가 선물한 최신스마트폰이라고 사진도 잘 찍히고 이놈은 찾으며 모르는 게 없는 똑똑한 놈이라고 했겠다. 그럼 우리 집도 찾아주겠네. 그런데 집에 전화하려니 이놈의 핸드폰이 꿈쩍하지를 않누? 화면이 열려야지. 이제껏 사용하던 폴더 폰이 백번 낫지 이게 뭐람. 딸애가 집에서 열 번 스무 번 설명하며 가르쳐준 스마트폰인데 왜 안 되지. 그때는 잘 되었는데. 딸애가 우리 아버지 엄청 잘한다고 칭찬까지 했는데 왜 이렇게 화면이 꼼짝을 않지? 누구에게 물어보려 해도 주위에 인간이 있어야 묻지. 문득 떠오르는 게 있다.
“아버지, 아버지는 술을 좋아하시니 잘못하며 핸드폰 잊기 쉬우니 비밀번호 저장해둘게요. 안 그럼 나중에 찾으며 주운 사람이 마구 써버려 전화비 엄청 나올지도 모르니까. 아버지 이렇게, 이렇게 갈지자로 먼저 그으면 열리거든. 알겠지요. 항상 이렇게 먼저 긋고 아니 열고 아빠 해봐, 응 잘 하시네 가로로 죽 긋고 사선으로 긋고 오른쪽으로 죽 그으면 되거든. 아빠 해봐. 잘하시네. 그리고 여기 우리 식구 차례대로 올렸거든. 전화번호 안 봐도 돼. 1번 엄마, 2번 나, 3번 진수, 4번 진호 5번 우리 집 전화야. 이렇게 차례대로 그냥 터치로 누르면 전화가 연결돼요. 자 나한테로 전화해봐. 2번 터치, 저것 봐, 바로 내 폰 울리잖아. 1번 엄마한테 해 봐봐. 엄마 폰 울리잖아. 잘되지. 일일이 전화번호 숫자 안 눌러도 바로 된다니까. 참 쉽지요. 전환번호에 아빠 친구들이랑 아는 사람 다 넣어줄게. 이름만 치면 전화번호가 뜨거든. 알았지 아버지?”
그래 비밀번혼가 뭔가 해보자. 쭈그리고 앉아 시린 검지 끝으로 줄긋기를 해도 와 안 열리누? 미치겠네. 딸애 앞에서는 분명히 잘 하였는데. 손이 곱아 떨려서 잘 안 되나. 너무 추워 까딱하면 한기 들겠네. 별도 없는 캄캄한 하늘이더니 부슬부슬 싸락눈이 내리기 시작하네. 어디로 가지? 잠시 어디 가 있지? 아 지하주차장이 있었지. 지하주차장은 따뜻할 거야. 주차장에서 바로 엘리베이터 타고 집으로 올라가면 되는 것을 깜빡 잊었네. 내가 옛날부터 공부도 못하고 머리가 나빴제. 어휴! 아파트 몇 바퀴를 돌고 돌아 겨우 주차장 입구를 찾았는데 와 이리 쥐 죽은 듯 조용하누. 차들이 로터리 친 밭고랑모양 가지런하게도 줄 섰네. 저런, 불빛이 짐승의 눈빛 같네. 그런데 무슨 놈의 지하주차장이 이리도 넓을꼬. 학교 운동장보다 더 넓어. 이놈의 아파트는 사람 새끼는 잘 보이지 않고 차만 보이네. 차만 사는 동네인가. 머리가 빙글빙글 어지러워. 어디가 어딘지 도통 알 수가 있어야지. 검고 흰 차들이 마치 사람처럼 즐비하게 뻗어있는 것 같으니 헛것이 보이나? 이 나이에 무섬증이 드나. 내 차는 어딨누? 아차차 내가 우리 털털이를 찾고 있구나. 운전대랑 짐칸을 깨끗이 닦고 쓸어서 폐차장 보내놓고 내가 이런다. 큰아들이 골라준 자가용은 인물이 반지르르한 까만색 르노삼성 SM 5이지. 르노하고는 아직 정이 덜 들었제. 어째 십오 년 세월 함께한 털털이만 할까. 르노는 어디에 놔두었게? 우리 라인 쪽에 주차했을 텐데, 차 번호가 몇 번이더라? 어째 가물가물하다. 전에 트럭은 길이나 마당이나 아무 데나 세우면 됐지. 집안 어디서도 파란색 트럭이 보였으니까. 그때가 편하고 젤 좋았어. 이 넓은 주차장서 어떻게 우리 차를 찾을꼬. 차도 안 보이고 기가 차네. 안 되겠다 내일 마누라하고 내려와 찾으면 금방 찾지. 지가 가면 아디로 갔을라구. 술이 다 깬다. 내가 왜 이러고 있지. 지하주차장에서 엘리베이터로 바로 올라가는 117동을 찾아야 해. 117, 1604호, 아이구 겨우 3.4 입구를 찾았네. 휴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러나 지하 엘리베이터 입구에서 또다시 낙망하고 말았다. 굳게 닫힌 자동유리문이 꿈쩍하지를 않았다. 자동문에 온갖 숫자를 다 넣어 눌러봐도 닫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유리문을 뚜드렸다. 얼마나 심하게 유리를 쳤는지 손바닥에 피가 터졌다. 억울하고 분해서 울음이 나왔지만 속으로 삼켰다.
마누라 말 듣고 이런 복잡한 곳으로 이사와 된통 헷갈리네. 전에 그 집은 눈감고도 술이 떡이 되어도 저절로 발이 자동으로 찾아가는 내 집 아니던가. 어쭈, 사람 못 들어가게 막으면 짐승 들어가라고 하는 짓인가? 이놈의 아파트 확 불 질러버려야 해!
그는 비틀비틀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참 아파트 관리실이 있다고 했지. 관리실을 찾기 시작했다. 이사하고 입주에 딸린 일은 아내가 다 처리하였기에 그는 아파트 관리실에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곳이다. 휘적휘적 겨우 찾아간 곳에는 불이 꺼지고 캄캄하였다. 경비실을 찾았다. 경비실에 불빛은 있는데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순찰 중이라는 팻말이 그의 눈에 들어올 리 없다. 에잇 재수 없는 날! 눈이 점점 많이 내리고 있다. 첫눈치고는 많이 온다. 그의 오리털외투에도 하얗게 눈이 쌓였다. 그는 비틀비틀 다시 117, 117을 찾아 헤맸다. 그러나 이젠 어디가 어딘지도 알 수 없었다. 추위가 전신을 파고들었다. 한기까지 들어 덜덜 떨렸다. 전화를 집에 전화해야 해! 마누라가 기다리고 있는데, 몸살로 많이 아픈 마누라가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데, 늦게 왔다고 잔소리깨나 할 거야. 큰일이다. 그런데 내가 오늘 어디를 갔지? 어디를 갔다 나 혼자 이렇게 헤매고 있는 거야? 모르겠다. 아무런 생각이 안 나네. 나 혼자 왜 이렇게 오돌오돌 떨고 있는 게지? 어, 내 머리가 돌이 되었나. 도무지 생각이 안 나네. 주머니를 다 뒤져 답답이 그 물건을 꺼내었다. 꽁꽁 언 손으로 열 번 백 번 줄긋기하였다. 아무리 줄긋기를 하여도 대답이 없는 장난감에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그것을 힘껏 내던져버렸다. 장난감은 시멘트 바닥에 던져져 와삭 소리가 났다. 속이 다 시원했다. 이젠 공짜로 줘도 저런 건 안 해! 손안에 쏙 들어오는 폴더 폰이 딱이지. 여기가 대체 어디야? 일어나서 가야지. 우리 집으로 가야 해. 늙은 마누라한테 잔소리 엄청 듣고 식겁하게 생겼다니까. 그런데 내 몸이 와 꼼짝을 않누? 누가 발을 붙잡고 있네. 놔! 놔란 말이야! 제기랄! 빌어먹을, 이 새끼야 내 손에 죽을래? 새끼가 정말 죽고 싶어 안달이네. 나도 이젠 못 참아, 머리 뚜껑이 열렸다니까. 이리 와! 이리 나오란 말이여! 왜 나를 잡느냐 말이여? 개새끼, 놔 놓으란 말이여! 개새끼가 지랄하고 자빠졌네!
115동 아파트 앞 잔디마당 나무 아래 늙은 사내가 죽어있었다. 간밤에 내린 흰 눈이 따뜻한 이불처럼 사내를 덮어주고 있었다. 115동 앞에는 최신형 스마트폰 한 개가 깨어져 있었다. 미명의 새벽을 가르는 경찰차와 구급차 왱왱거리는 소리가 아파트 사람들을 불안하게 깨웠다.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입주한 지 일주일 된 117동 1604호 남자라고 하였다.
남자의 아내가 실신하여 119 구급차에 먼저 실려 나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