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록 : 키르케고르 사상의 중요 개념들 4
- 죄, 반복, 절망, 순간 -
죄 (sin, le péché)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죄’의 의미는 종교적 의미의 죄를 말하는 것으로 도덕적 잘못이나 사회적 범죄 행위의 죄와는 구별된다. 죄는 한 개인이 범한 잘못(도덕적인 타락이나 사회적 범법행위 등)을 가지고 신(절대자) 앞에 나설 때 느끼는 죄의식의 감정을 말한다. 따라서 죄의 개념은 종교를 가지지 않거나 절대자를 가정하지 않는 곳에서는 발생하지 않는 개념이다. 그렇기 때문에 죄의 개념이 가장 분명하고 날카롭게 나타나고 있는 곳은 기독교에서이다. 죄의 개념은 인간에게 고뇌와 불안을 야기하기도 하지만 이것이 또한 인간의 사명을 말해주기도 하며,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우월하다는 징표를 나타내기도 한다. 왜냐하면 진정한 죄의 개념은 한 개별자로 하여금 ‘신(하나님)과의 관계성’ 중에 있음을 자각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잘못을 범하고 이것에 대한 양심의 가책은 누구나가 느낄 수 있겠지만, 양심의 가책이 절대자 앞에선 개별자로서 느끼게 된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잘못이 자아와 절대자와의 그 관계성에 어떤 균열을 일으킨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사회적인 죄는 어떤 의미에서 인간이 가진 근원적인 죄(절대자와의 단절)의 현상적인 표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내면에 있는 죄성(罪性)이 해결된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우연적이거나 상황윤리 때문이 아니라면 ― 사회적인 죄를 범할 여지가 없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종교적인 실존을 가진 자에게 있어서는 이러저러한 잘못이나 죄의 행위가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있는 ‘죄성(罪性)’이 문제가 된다. 다시 말해 절대자와 자아의 관계성에 있어서 올바름과 어긋남만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가장 근본적이 의미의 죄의 개념은 ‘절망에 빠진 상태’인 것이다. 다시 말해 신과 자아와의 관계성에 대해 무감각하거나 이를 외면하거나 혹은 이른 적극적으로 부인하는 상태 그 자체인 것이다. 그래서 키르케고르는 절망에 빠지는 것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부른 것이다. 왜냐하면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육체적인 죽음이란 사실 사소한 것에 불과하고 진정한 죽음이란 오직 죄를 통해서만 주어질 수 있는 영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반복(repetition, la répétition)
사변적이고 논리적인 진리는 이성의 논의가 끝나자말자 바로 주어지지만, 윤리 도덕적이고 실천적인 진리는 단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키르케고르는 ‘윤리도덕적인 사람들이 평생을 노력하여 이룬 것을 학자들은 이성 안에서 단 3분 만에 이루어버린다’라고 풍자적으로 비판하고 있는데, 그것은 ‘습관이 제2의 천성’이라는 말이 있듯이 온유함, 의로움, 자유 등과 같은 윤리적 특성은 끝임 없이 되풀이 하는 과정 속에서만 실제로 확고한 삶의 원리처럼 주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유사하게 과거의 실수로 치명적인 병에 걸린 사람은 병에 걸린 것은 자신의 잘못 때문이지만, 병이 지속한다고 해서 지속적으로 그 잘못을 되풀이 하는 것은 아니다. 반면 어떤 죄 중에 있는 사람은 그 죄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지속적으로 죄의 행위를 되풀이 하는 것과 같다. 가령 범죄행위를 업으로 살아가는 갱단이나 조폭들은 스스로 그 삶에서 벗어나고자 의지하지 않는 한 그 업종에 계속하여 종사하고 있다. 이렇게 ‘벗어나고자 의지하지 않는 것’ 그 자체가 어떤 면에서는 매 순간 스스로 범죄행위 안에 머물고자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즉 그들은 반복하여 죄를 짓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신을 부정하는 사람은 매순간 ‘신의 환상이다’ ‘신은 거짓개념이다’라고 말하지는 않겠지만 그가 그 같은 생각을 가지고 사는 동안 매 순간 반복하여 신을 부정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믿음의 선택에 있어서도 반복이 중요하다. 믿음의 선택은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믿음이 확고하게 나의 삶의 원리처럼 자리하기 위해서는 반복되는 신앙의 고백을 통해 믿음을 끊임없이 새롭게 갱신하는 일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 기독교 신앙인이라는 나의 정체성 자체가 실제로 나의 삶의 원리로 주어지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반복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는 또한 ‘자기-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그 힘과의 관계성을 항상 새롭게 갱신하지 않으면 스스로 자기를 잊어버리거나 상실해 버리는 ‘절망’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믿음을 확고하게 형성한다는 것은 성직자가 중재할 수 없는 개인의 주관적인 열정의 문제이며, 주체적인 선택의 반복만이 있을 뿐이다.
절망 (despair, le désespoir)
절망이란 희망에 반대되는 말이지만, 키르케고르가 이 말을 사용할 때는 ‘구원’에 반대되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그가 ‘절망이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리고 하였을 때, 이 죽음이란 영적인 죽음, 영원한 죽음을 말한다.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있어서 ‘육체적인 죽음’이란 영원한 삶으로 나아가는 관문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육체적인 죽음은 정신의 삶이나 구원의 문제에 비하면 사소한 것이다. 반면 죽음의 문턱에서도 구원에 대한 희망이 없다는 것은 가장 큰 위험이고 가장 큰 어둠이다. 이 상태가 곧 절망의 상태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정신이기 때문에 (정신으로 되어야 하기 때문에) 언젠가는 자신을 근원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힘 (즉, 절대자와의 관계성)을 향해 돌아서야하며, 자신과 이 절대자와의 관계성을 올바르게 정립해 가야만 한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가령 무지에 의해, 심미적 쾌락에 의해, 사회적 유혹에 의해 혹은 책임성의 중압감 때문에 이를 외면하거나 부정하게 된다. 이러한 때에 ‘절망’이 그를 붙잡게 된다. 키르케고르는 절망을 세 가지 종류로 분류하고 있다. 그 하나가 자신이 정신으로 규정되어야 한다는 그 사실 자체에 대해 무감각하여 온통 세상의 일에 몰입되어 있는 상태의 절망이다. 그는 이를 ‘정신이라고 조차도 할 수도 없는 비-본래적인 절망’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두 번째는 ‘자기 자신을 외면하는 경우’의 절망이다. 다시 말해 자신이 정신이며, 정신적으로 규정되어야 하고, 영원성과의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이를 외면하는 경우이다. 대게의 경우 이는 자유가 가져올 ‘영혼의 현기증’ 즉 너무 중대한 것을 스스로 선택하여야하는 부담감 때문이다. 마치 암에 거린 환자가 암이라는 병이 너무나 큰 것이어서 그것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 것과 같은 상태이다. 키르케고르는 이를 소극적인 절망이라 하여 ‘여성적인 절망’으로 규정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보다 적극적인 절망은 영원한 것과의 관계성을 가져야 한다는 이 인간의 운명 그 자체를 부정해버리는 경우이다. 이는 절대자가 규정해 놓은 질서 그 자체를 부정하고 스스로 일종의 ‘작은 신’이 되고자 하는 ‘반항’ 혹은 ‘교만’을 의미하는 가장 적극적인 형태의 ‘절망’이다. 이러한 절망의 대표적인 사례가 ‘신의 종으로 규정된 천사 루시퍼’가 스스로 이를 부정하면서 신과 동등한 존재가 되고자 한 경우이다. 인간의 경우도 신을 존재한다고 긍정하기는 하지만, 신을 증오한다거나, 신 따위는 겁나지 않다거나 혹은 신은 존재하기는 하지만 인간이나 인간이 사는 세계와는 무관한 존재라고 교설을 떠벌이는 이들이 모두 적극적인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다. 키르케고르는 이를 보다 적극적인 절망이라고 하여 ‘남성적인 절망’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와 같은 세 가지 절망은 나 자신 (자아)을 올바르게 형성해 갈 수 없다는 차원에서 그리고 나를 규정함에 있어서 영원성과의 관계성을 외면하거나 부정하고 있다는 차원에서 모두 본래적 의미의 죄 즉, ‘종교적 죄(sin)’에 해당하는 것이다.
순간 (instant, l’instant)
기독교적 진리는 ‘영원성’이라는 시간을 초월하는 개념에서 성립하는 것이기에 일반적인 시간의 개념과는 다른 시간의 관념이 필요하다. 합리주의자나 과학자들은 시간의 동질적인 특성을 고안하고 모든 이에게 동일한 시간의 동질적 특성을 부과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키르케고르는 인간실존에 있어서 특권적이고 필수적인 ‘순간’이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순간은 진리를 깨닫는 순간이며, 영원성과 만나는 결정적인 순간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키르케고르가 고안한 ‘순간의 개념’이다. 사실 그리스적 사유에서는 ‘순간’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진리를 발견하는 ‘순간’은 거의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진리란 이미 영원부터 존재하여왔고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헤겔식의 추상적인 노력에 있어서도 ‘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의 추상화된 역사적 체계 안에서는 모든 구체적, 시간적, 개별적인 경험이 배제되어 있고 그런 후 모든 것이 추상적 개념을 통해 필연적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개별적이고 우연적인 것들로부터 벗어난 필연적이고 보편적인 것만이 중요한 것이다. 반면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신앙인이 진리를 발견하거나 깨닫게 되는 ‘순간’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왜냐하면 이 순간은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키르케고르에게 있어서 영원한 것은 한 개인의 실존에 있어서는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며, 진리를 알게 되는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게 되는 특이한 일이다. 비록 진리가 영원히 존재하였던 것처럼 보여도 한 개별자에게 실제로 존재하게 되는 것은 회심(전향)을 하는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이다. 회심하는 순간 한 개별자의 실존에는 특이한 현상이 일어난다. 그것은 영원성이 지금 이 순간에 나에게 존재하기 시작하였다는 일이다. 인생에서 이보다 더 중요한 사건이 있을 수 있을까? 이 시간적 세계에서 영원성이 (관념적으로가 아닌) 실제로 존재하게 되는 것은 한 개별자의 실존이 영원성과 관계를 가지게 되는 ‘순간’을 통해서이다. 이는 역설적인 진리이다. ‘현재와 영원’이 순간이라는 시간을 통해서 만남을 이루게 된 것이다. 비록 직후에는 지난 일처럼 보이겠지만 그럼에도 그 순간은 결정적인 순간이고 영원으로 가득 차 있는 순간이다. 그래서 키르케고르는 이를 ‘시간의 충만’처럼 고려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적인 문명의 파토스(열정)는 기억(과거)에 집중하지만, 기독교적 문명의 파토스는 순간(영원이 개입하는 현재)에 집중한다’고 생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