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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궁리 유적 유적명 : 익산 왕궁리유적(사적 제 408호, 1998. 9. 11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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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탑 주변에서는 '왕궁사', '관궁사', '대관사관', '대관궁사'라는 글자가 적힌 통일신라 시대 명문 기와가 여럿 출토 되었다.
유적지 내에는 왕궁 건물터와 금당(金堂) 등의 사찰 건물터가 여럿 남아 있다.
왕궁리 유적에는 마한의 기준(箕準) 도읍설, 백제무왕의 천도설, 후백제 견훤의 도읍설 등
다양한 견해가 얽혀 있는데, 최근의 연구로 백제 궁성의 구조와 기능 등 역사 속 비밀이
하나 둘씩 밝혀지고 있어 왕궁리 유적의 실체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지평이 열리고 있다.
사찰 유적 중 국보로 지정된 왕궁리 5층석탑(국보 제289호)은 조형미가 뛰어나 백제 석탑의 특징을 잘 나타낸다.
왕궁리5층석탑은 기단부의 석재가 벌어지고 탑신부가 북측으로 기울어져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탑의 붕괴를 방지하기 위해 기단부를 흙으로 덮어놓아 한때 기단을 토단으로
만든 특이한 형태의 탑으로 생각하기도 했었다.
왕궁리5층석탑은 미륵사지 석탑을 본떠서 만든 백제계 석탑이다.
높이가 9미터인 이 석탑은 단층 기단, 얇고 넓은 옥개석, 3단 옥개 받침 등이 특징적이다.
1965~1966년에 해체.복원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여러 유물이 발견되었다.
제 1층 옥개석 중앙과 기단에서는 금강경판 19장, 금동제 사리함, 사리병 같은
사리장 엄구(국보 제123호)가, 석탑 밑에서는 가로 16.8미터, 세로12.7미터인 건물 기초가 발견되었다.
왕궁리5층석탑의 양식적인 측면을 살펴볼 때 백제 계통의 탑이라는 주장의 근거는 기단부와 탑신부에
조각된 우주(모서리 기둥)가 미륵사지석탑에서 볼 수 있는 민흘림 흔적이 남아 있다.
결국 왕궁리5층석탑은 미륵사지석탑에서 보이는 백제 석탑의 특징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989년부터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 의해 전면적인 발굴조사 과정에서는
탑 하부 조사가 이루어져 석탑 이전에 목탑이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기단부 윗면에 품(品)자형으로 뚫린 3개의 구멍 중 동쪽에서는 광배와 대좌를 갖추고 있는
금동불상 1구와 불교의식 때 흔들어 소리를 내던 청동방울 1개가 나왔다.
또 북쪽 구멍에서는 철편과 향나무가 출토되었고 서쪽에서는 흙만 채워져 있었다고 한다.
1층 탑신부에서 발견된 사리장엄은 외관상 우리나라 석탑의 사리장엄 내용상 큰 변화를 볼 수 있다.
유리사리병에는 석가모니의 진신사라와 관련되고 금은제금강경판은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한 불경으로 법신사리다.
따라서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구하기 어려웠던 국내에서는 왕궁리5층석탑에서 처음으로 진신사리에서 법신사리로
변화되는 과정을 볼 수 있다. 특히, 왕궁리5층석탑의 사리장엄이 발견 된지
50여년이 지났지만 유물의 연대와 석탑의 연대에 대한 의견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고 있다.
왕궁리5층석탑의 형태가 우리나라 석탑의 시원형태인 미륵사지석탑의 흔적이 남아 있고 미륵서지석탑
사리호의 문양기법과 왕궁리5층석탑 사리내함의 문양이 동일하다고 하여 백제시대 석탑으로 보자는
의견도 제기되었으며, 금은제금강경판의 글자체 분석을 통해 중국육조시대의 서체와 동일하여 백제시대로 주장하고 있다.
반면에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석탑 하부에 목탑 흔적이 있다는 사실로서 정황상 왕궁에서 목탑,
다시 석탑으로의 개축이 단 기간 내에 이루어지기 어려울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 초기의 탑일 것이라는
의견과 기단부에서 발견된 금동 불상의 연대로 보아 통일신라 말 또는 고려 초기의 탑이라는 의견도 무시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백제 왕궁에서 사찰로의 변화 시기와 계기에 대해서는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백제말기를 전후하여
왕궁의 중요 건물을 철거하고 그 위에 다시 사찰을 조성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사찰은 탑과 금당, 강당이 일직선상에 배치된 1탑식 가람배치를 이루고 있으며,
이 중심선이 남측 궁의 담장에 연결된 중문의 중심선과 같은 선상에 위치하고 있다.
석탑의 하부에서는 목탑의 기초부인 판축층이 확인되었고 이 판축층 아래에서 또 다른 건물지의 흔적이 보이고
있어서 백제 왕궁과 관련된 건물지일 가능성도 고려할 수 있을것으로 보인다.
강당지도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기단석재와 초석이 대부분 제거된 상태이며, 강당지 아래에서
유리와 동의 제련과 관련이 있는 공방지 흔적이 조사되었다. 왕궁리 유적 내 사찰의 건립연대에 대한 정확한
자료는 없지만 사찰명기와, 막새기와, 평기와, 토기류 등으로 보면 중심연대는 통일신라기로 추정된다.
대형 건물터전경
강당터 전경
금당터 뒤에 있는 강당터는 승려들이 설법과 강연을 하던 건물터이다.강당터 남쪽 약 10미터 지점에서 계단 흔적이 세 군데 발견된것으로 미루어,
이 자리에는 지금 강당터가 있던 시기보다 더 앞선 시기에도 강당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근처에는 부정형의 공방 폐기지도 발견되었다.
와적기단 건물터
전경
이 건물터는 백제의 독특한 건축 기법 중 하나인 와적기단이 있는 건물과 그 밖의 건물들이 있던 자리이다.
와적기단은 기단 외부에 기와를 쌓아 장식하는 기법으로, 사비시대에 부여와 익산 지역에서 유행하다가 일본에까지 전파되었다.
와적기단 건물터는 백제건축기술과 그 전개 양상을 밝혀낼 수 있는 학술적 가치가 높은 유구이다.
부여 군수리 사지에서도 와적기단건물터가 발견되었다.
건물터
오른쪽의 남북으로 길게 놓여 있는 건물터에는 둥근 형태의 적심이 1.5미터 내지 2.8미터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다.
앞쪽의 건물터는 한 건물내에 너비 약 3미터, 길이 약 5미터 크기의 두 개의 방을 가진 구조이다.
이런 구조는 뒤편에 있는 와적기단 건물터를 비롯하여 익산 미륵사지, 부여 능산리사지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어 백제 고대 건축양식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기와가마터
남측궁궐담장
왕궁리 5층석탑
전북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산 80-1
063-859-57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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