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태복음의 말씀(47) : 애굽에는 예수가 있었다
마태복음 2:13-18
'저희가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 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말씀하신바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2020년 감사할 일이 뭐가 있을까 생각해봅니다. 하지만 이 글을 한번 잘 생각해보시면서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아이가 부모인 당신에게 대들고 심술을 부린다면, 그건 아이가 거리에서 방황하지 않고 집에 잘 있다는 뜻입니다.
내야 할 세금이 있다면, 그건 내가 살만하다는 뜻입니다. 옷이 몸에 조금 낀다면, 그건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닦아야 할 유리창과 고쳐야 할 하수구가 있다면, 그건 나에게 집이 있다는 뜻입니다. 정부에 대한 불평과 불만을 하는 소리가 있다면, 그것은 내 국가가 있고 언론의 자유가 있다는 뜻입니다.
지하철과 버스에서 누군가 떠드는 소리가 자꾸 거슬린다면, 그건 내가 듣고 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온 몸이 뻐근하고 피곤하다면, 그건 내가 열심히 일했다는 뜻이고 이른 아침 시끄러운 자명종 소리에 깼다면, 그건 내가 살아 있다는 뜻입니다.
돌아보면 감사하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코로나로 전혀 감사할 것이 없을 것 같지만 여러분 한 해를 돌아보면 모든 것이 감사한 일일 것입니다.
2020년을 마무리하는 한 달, 한 해를 돌아보며 감사요 은혜로 정리하는 한 해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태복음의 말씀 47번째 '애굽에는 예수가 있었다' 라는 제목으로 함께 말씀을 나눠보고자 합니다.
저는 위인들의 약력을 보는 것을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위인전 자서전 맨 뒤에 보면 위인들의 삶을 압축해서 축약해서 한 줄씩 약력으로 나오는 것이 있습니다. 그 약력을 쭉 읽고서 그 위인는 어떤 삶을 살았는지 보고 위인전 또는 자서전을 읽는 것이죠.
그런데 대부분의 위인들이 약력에 보면 특이한 이력이 하나 둘 씩 꼭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특이한 이력을 잘 살펴서 읽어보고 그 자서전 또는 위인전을 읽을 때 특이한 이력이 있는 삶을 살았을 때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해하면서 그 자서전 위인전을 읽곤 했습니다.
예를 들면 처칠의 약력을 보면 이렇습니다. 1874년 영국에서 태어났구요, 샌드허스트 사관학교에 입학해서 남아프리카 보어 전쟁의 포로가 되기도 했습니다. 1900년에는 하원의원에 당선됐고 1939년에 2차 세계대전 발발 때 해군장관이 되었다가 1년 후에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1953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고 1965년에 세상에 떠났다 라고 약력이 나옵니다. 리더십을 가지고 나라 일을 하면서 살았던 처칠이기에 그의 약력에 어떤 공부를 하고 어떻게 나라 일에 발을 들이게 되었는지 어떻게 정치를 했고 그는 어떤 당에 있었고 또 어떤 정책을 폈는지가 약력에 나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처칠의 약력 가운데 한 가지 특이한 것이 있습니다. 그가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라는 것입니다. 세계 전쟁이 끝났으니 노벨평화상 정도 받는 것이 이해가 될 수 있겠는데 노벨문학상을 받았습니다.
그것도 정치만 해 온 사람이 평생 글을 쓰는 사람도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하는 데, 그런 사람도 받기 힘든 노벨문학상을 처칠이 받은 것은 매우 특이한 이력이지요.
저는 그 부분을 더욱더 염두에 두고서 처칠의 자서전 처칠의 삶을 읽어 보았습니다. 특이하죠. 처칠은 정치인이니까 국가와 역사 외교와 정치와 같은 것에 능력이 있을 것이라 생각이 드는데 노벨문학상은 그에게 필력과 작문력이 있었다 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실제로 더 자세히 살펴보면 처칠은 어린 시절 독서를 많이 하는 독서광이었습니다. 그래서 문학적 재능이 뛰어났다고 이야기합니다.
사립학교 입학시험에서도 시험은 잘 못봐서 낙제를 하게 되었는데 영문학 점수가 하도 높아서 그 점수 때문에 합격을 했다 라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그리고 사관학교 이후에 장교로 전쟁에 나갔을 때도 앞에서 말씀드린 그 약력에서 남아프리카 보어 전쟁 참전을 하게 되는데 그때 장교로 참전을 하는 동시에 종군기자의 역할도 같이 겸직했습니다.
그래서 처칠은 전세계가 격동을 겪었던 20세기초의 엄청난 역사적 사건과 사고 전쟁에 대한 기록들을 많이 남겨놓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때문에 그것을 가지고 자서전을 만들었고 그 자서전이 잘 쓰여져서 노벨 문학상까지 받게 된 것이죠.
그래도 특이하지요. 전쟁의 소용돌이에 속에 정치적인 기록만 있을 것 같은 처칠이 문학적 족적을 남긴 사람이었다는 것은 매우 특별한 이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근에는 미국의 아주 공을 잘 던지는 투수가 있습니다. 클레이튼 커쇼 라고 하는 LA 다저스의 선수입니다. 그는 미국 프로야구계에서요 최고의 투수 상이라 하는 싸이언 상을 3번이나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팀은 올해 우승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연봉이 3100만 달러 우리 돈으로 하면 350억원에 상당합니다. 1년에 받는 돈이 그렇습니다. 우리나라 전체 기업을 순위로 매기면 152 위에 해당하는 기업의 매출액과 이 클레이튼 커쇼가 1년 안에 버는 돈이 동일합니다.
그런데 그의 약력을 보면 한 가지 특이한 것이 있습니다. 이는 온통 야구를 위해서 산 선수인데 이 커쇼는 2010년에 7년간 교제한 여자 친구와 결혼을 합니다. 그리고 신혼여행을 가는데 아프리카 잠비아 라는 나라로 신혼여행을 떠납니다.
보통 이런 대스타 아주 유명하고 돈도 많이 버는 운동선수들은 결혼식에 피로연 신혼여행을 보면 너무나 화려하다 못해 사치하고 부티가 철철 넘치는 이벤트로 진행하게 되는데 이 커쇼와 그 아내 앨런 메스는 신혼여행을 잠비아 라는 곳에 가서 단기선교를 합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커쇼는 비시즌 야구를 하지 않는 시즌에는 반드시 잠비아에 가서 단기선교 활동을 합니다. 또한 자신이 사는 LA 자신의 고향인 달라스에서도 계속 신앙의 기준으로 구제와 봉사 사역을 하게 되지요.
줄곧 야구만 하거나 그 야구로 성공해서 모든 부와 사치를 누리는 이력만 있을 것 같은데 커쇼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온갖 부를 누리는 사람들과는 전혀 달라 보이는 것이지요.
그는 우리 교회에서 하는 단기선교를 가서 아프리카의 에이즈 환자를 돕는 사역을 합니다. 그의 약력에는 반드시 잠비아 라는 나라가 항상 따라 붙습니다. 야구 선수로서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이력이지만 그에게는 항상 이 특이한 이력이 늘 쫓아다닙니다.
만약에 예수님도 이렇게 짧은 약력으로 기록한다면 그의 이력 속에는 공생애에 관련된 기록이 나올 것입니다. 30세에 공생애를 시작하고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복음전파를 시작하시고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첫 번째 이적을 보여주셨습니다.
갈릴리 산상에서 산상수훈을 하시고 가버나움에서 병자를 고치시고 오병이어 사건을 하시고 등등 그 약력이 기록될 텐데 예수님도 그 가운데 특이한 이력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오늘 말씀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어린 시절 그 예수님께서 예수님은 유대인이니 이스라엘과 유다 근처에서 사실 것이다 라는 생각이 드는데, 오늘 말씀의 제목대로 그 예수님이 애굽에 사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다와 이스라엘 땅에 먼저 부름을 받은 자로서 그의 말과 행동에 특별히 이스라엘 사람들과 유다의 사람들에게 정당성과 권위를 받으려면 유다 땅에서 태어나서 그 땅에서 먹고 자라야 했습니다.
그 말과 그 지역 그 나라와 그 민족에 대한 생각과 사고를 잘 꿰뚫어볼 수 있는 경험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어쩌면 그런 정당성 권위를 얻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어린 시절 애굽에서 살았던 적이 있다. 애굽에는 예수님이 있었었다 라는 것은 분명히 예수님에게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부정적인 요인이 된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기록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선지 다른 복음서에는 그 기사가 나와 있지 않지요.
혹시 그런 의도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드는데, 이 마태복음의 기자는 그에 대해서 가감 없이 역사적 사실 그대로를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 팩트에 대해서 영적으로 매우 깊은 묵상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 예수님이 애굽에 있었다는 것을 이렇게 가감없이 기록하고 있을까? 이에 대해서는 예수님의 이력 가운데 애굽에는 예수가 있었다 라는 이 기록을 마태복음은 왜 그대로 기록하고 있을까?
그렇다면 그 의미는 무엇인지 두 가지를 지금의 우리의 신앙의 상황에 비추어서 함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그 첫 번째는 객관식의 인생 대신에 주관식의 인생을 살라는 신앙을 가르쳐주기 위함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객관식의 인생을 살았다면 이제 주관식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한국인 최초로 미국 하원의원이 되신 김창준 의원님이 학교에 방문하셨습니다.
전교생 모두가 강당에 모여서 온갖 인종 차별을 이겨내시고 미국 하원의원에 한국인 최초로 미국의 국회의원이 되신 그분의 강연을 듣게 되었습니다. 역시 미국식으로 연설의 중간중간에 센스있는 조크도 하시고 유머도 하시면서 굉장히 재밌게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더불어 그분의 강연 주제가 그때 한국 학생들 고등학생 특별히 대학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아주 중요한 비젼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더 넓은 세계를 보라 앞에 있는 것만 보지 말고 더 높이 더 멀리 보는 그런 학생들이 되라 라는 연설이었습니다. 굉장히 감명 깊어서 그 가운데 거의 30년이 지난 연설이지만 세월을 불구하고 제 기억에 남는 이야기였습니다.
대학만 바라보지 마라 더 넓은 세계를 보고 공부하라는 이야기였습니다. 아직도 그 때 그 김창준 의원이 이야기 한 연설의 주제가 제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보통 사람이 아닌 미국의 하원의원이시고 정말 행복한 사람인데 꼭 대학에 가야 한다 학벌을 좋게 만들어라 이렇게 이야기할 줄 알았는데 그 반대로 얘기하신 것이 제게는 더 감명이 깊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좋은 강연을 듣고 교실로 돌아온 저를 비롯해 함께 했던 우리 반 친구들의 모습 속에 저는 조금 다른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분명히 대학이 전부가 아니라 더 넓고 더 큰 세상을 품으라는 연설을 들었는데 그 뜨거운 관심을 가지고 교실로 온 아이들은 저를 포함해서 모든 친구들은 다시 차갑고 냉정한 현실에 돌아와서 문제집을 펴보고 대학을 가기 위해서 공부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가 객관식 인생에 여전히 빠져 있구나. 객관식 인생을 벗어나지 못하는구나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1번, 명문대 2번, 비 명문대 둘 중에 하나 또는 서울 안에 있는 대학, 서울 밖에 있는 대학 그 테두리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 고등학교 시절을 저는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더 넓게 본다면 1번, 명문대 2번 인서울 대학 3번 지방 대학 4번, 전문대 5번, 취업 6번, 백수 4지선다 5지선다 6지선다 객관식 문제 보기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인생을 사는 것이 우리 인간의 삶이구나 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 인생이 그런 4지선다 6지선다 그런 보기들로 다 설명될 수 있겠습니까?
또 어떤 보기를 선택할지라도 그 선택된 보기가 어떤 다른 보기보다 못하거나 모자란 것이 될 수 없는 것인데 지금 우리의 인생은 반드시 1번 만을 선택하고 정답이라고 이야기하는 삶을 살아가고 그렇지 못하면 실패한 인생이 된다 라는 것입니다.
그게 인간의 삶이구나 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평가할지 모르겠지만 교회 만큼은 그래서는 안 되지요. 교회에서 1번이 정답이라고 이야기하면 저는 교회도 문을 닫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찌되었던 예수님은 분명히 그런 객관식의 인생 속에서 전혀 다른 인생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계십니다.
정답이 되는 보기의 삶을 살고자 하신다면 예루살렘이나 유대 회당이 있는 좋은 동네에서 랍비와 지도자들을 자주 만날 수 있는 예루살렘의 근처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하는데,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요셉과 마리아 예수님의 육신의 부모는 맹자의 어머니처럼 맹모 삼천지교를 하고 싶었는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은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4지선다 보기에서 가장 아래에 있는 곳 정답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애굽이라는 동네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셨습니다. 그냥 예수님의 인생을 4지선다 5지선다 객관식의 인생으로 본다면 그저 예수님은 삶이 오답인 것이죠.
정답하고는 먼 인생을 사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네 인생은 객관식이 아닙니다.
세상을 이렇게 객관식의 인생처럼 틀에 맞춰 살도록 만들고 그 안에서 정답을 많이 맞춘 사람에게 더 좋은 것을 주고 더 높은 것으로 허락하고 더 많은 혜택을 주려고 하지만, 기독교의 신앙은 그렇지 않습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우리의 신앙은 객관식이 아니라 주관식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관식의 삶 주관식의 인생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어떤 삶을 살더라도 설명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인생의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왜, 이런 선택을 하게 되었습니까? 옳다 그러다가 아니라, 왜 이 선택의 삶을 살고, 왜 이 길을 가게 되었습니까?
그 의미가 무엇입니까를 이야기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가령 대학에 떨어졌습니다 사업에 실패했습니다 인간관계를 잘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대학에 못 가고 사업에 실패하고 인간관계 실패했으니 인생은 끝이고 인생을 실패했다 라는 식의 정답과 오답 흑과 백 흑백의 논리로 평가하는 삶이 아니라 우리의 진짜 인생은 왜 실패했는가? 왜 잘 안 되었는가? 그 이유가 무엇일까?
신이 있다면 하나님이 있다면 왜 내게 시련을 주셨는가? 다른 교회를 어떻게 찾을 것인가 다른 곳에 길이 있는 것일까 끊임없이 묻고 찾고 이야기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진짜 우리네 인생이라는 것이죠.
바로 그것이 주관식의 인생이라는 것이고 신앙은 바로 그런 주관식의 인생을 믿음 안에 더욱더 바르게 인도하는 것이 기독교의 신앙입니다.
예수님의 인생에서 애굽은 세상 기준으로 보면 오답입니다. 그런 객관식의 평가가 아니라 왜 예수님이 애굽에 가셨을까? 예수님의 공생애에 그것은 어떤 영향을 주게 되었을까? 그런 예수님의 행적은 지금 이 말씀을 읽는 나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나에게 애굽은 무엇일까? 어딜까 등등 바로 그런 말씀에 접근이 객관식 인생으로 우리를 내몰려고 하는 이 현대 시대 속에서 더 주관식 인생을 깨닫게하는 말씀입니다.
어느 초등학교에서 '고치다' 라는 뜻을 가지고 짧은 예문을 만들라는 주관식 문제를 냈습니다. 한 학생이 이렇게 답을 했습니다. '선생님이 이쁜 이유는 성형으로 얼굴을 고쳤기 때문이다'
재밌죠 객관식이라면 이런 재미 이런 유머 자유로운 사고 자유로운 표현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무튼 이에 대해 선생님도 이것이 주관식이기 때문에 그 답에 코멘트를 달아줬습니다. 이렇게 달아줬습니다.
설마 나를 얘기하는 거니? 선생님이 예쁘다고 하는 건 이거는 맞는 얘기야. 성형으로 얼굴을 고쳤다는 건 요건 아니다. 이렇게 선생님이 그 답에 코멘트를 첨삭을 해줬습니다. 재밌죠?
주관식문제에 대해 그에 대한 채점을 할 때만 나올 수 있는 소통과 대화입니다. 저는 우리의 인생에 우리 신앙의 삶이 하나님 앞에 이런 주관식의 인생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기도할 때 객관식으로 합니까? 하나님 1번 기도합니다 2번 기도합니다. 그렇게 기도하십니까? 아니잖아요. 저희 기도는 주관식입니다.
그러면 그에 대한 첨삭도 내가 1번으로 해 줄게, 2번으로 해 줄게 라는 식으로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오늘 선생님이 하셨던 것처럼 그렇게 첨삭해 주시겠죠.
인생의 문제가 있을 때마다 기도하고 말씀을 가운데로 답을 찾고 주님께 나가면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답을 주시는데, 앞에 있는 선생님처럼 첨삭해 주시고 코멘트도 달아주시고 잘하면 잘했다 칭찬하는 멘트를 적어주실 것입니다.
저희가 잘못하면 야 이건 잘못됐다 그곳에 메모도 해 주시고 그 기도 가운데 때로는 부분 점수도 주시고 잘 했으면 그것에 대한 첨삭의 내용도 응답으로 주시고 그런 주관식의 인생 그것이 신앙 아니겠습니까? 그게 기도이구요.
저와 여러분이 마지막 때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께서 1번 넌 잘 살았고 2번 넌 잘못 살았어. 둘 중에 하나 객관식의 답으로 우리를 심판하실까요?
물론 믿거나 말거나 이지만 많은 분들이 죽음을 경험할때 자신의 인생이 하나의 영화처럼 파노라마의 영상처럼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무엇을 잘못하고 무엇을 잘 했는지를 보게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꼭 그렇게 될지 안 될지는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 앞에 우리가 섰을 때 내가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긴 주관식의 답안지 처럼 작성하는 마음으로 하나님한테 모든 것을 설명하고 이야기하게 될 것입니다.
그 심판대 앞에서 서기 전에 우리의 지금 살아가는 인생 속에 저와 여러분이 기도하는 것이 주관식과 같은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애굽에 계셨다는 사실은 바로 그렇게 주관식 답안을 작성하듯이 우리네 인생을 풀어내는 영성이 우리의 신앙 가운데 필요함을 깨닫게 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삶이든 그때마다 왜 어떻게 무엇을 위해 내가 이렇게 살아왔는지를 늘 묵상하는 신앙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때 우리 주님도 항상 여러분에게 그 주관식의 기도 가운데 주관식의 신앙 가운데 우리에게 첨삭하시고 메모해 주시고 응답해주시는 것으로 우리와 동행 주시리라 믿습니다.
두 번째는 남 탓하는 사람 대신에 책임지는 신앙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애굽에는 예수가 있었다 라는 이 말씀은 저와 여러분에게 남 탓하는 신앙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책임지는 신앙의 삶을 산다는 것을 깨닫는 말씀이라는 것이지요.
저는 인간이 죄인으로 살아가는 중요한 부분 중에 하나가 영적인 자기 망상에 빠져있기 때문에 죄인의 삶을 살아 간다고 생각합니다. 영적인 자기 망상은 두 가지로 얘기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자기가 하나님이 된 것처럼 살아가는 교만의 망상에 빠져 있는 것, 두 번째는 자기는 하나님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인형에 불과하고 노예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피해 망상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처음에는 열심히 기도합니다. 신앙대로 믿음대로 말씀대로 기도한 대로 목회자의 조언도 많이 듣고 주변의 중보기도 대로 그 들은 대로 따라서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사업이 좀 잘 되면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은 대부분의 성도님들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교만해져 있습니다.
처음에 그 겸손했던 모습은 사라지고 마치 자기가 잘 해서 된 것처럼 해서 말씀드린 자기가 하나님이 된양, 교만의 영이 자리잡아 자기 망상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다 갑자기 사업이 어려워지고 망하기 직전까지 가게 되면 기도하는 척 하면서 무슨 기도합니까? 원망하고 저주하는 기도를 하죠. 하나님 하나님 이렇게 만들었죠?
이미 하나님이 계획 가운데 이렇게 실패하게 만드셨고 시련과 고난을 주시려고 이렇게 하신 거 아닙니까? 자신이 가지고 있는 피해의식을 하나님께 돌릴려고 합니다. 그리고 끝내 피해망상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 것이 성경을 읽을 때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운명 때문에 운명적으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짊어져야 하는 것 때문에 가롯 유다가 죄를 뒤집어썼다 라고 우리 인간들은 생각합니다.
하나님 일 때문에 한 사람의 운명이 피해를 보았다 라는 것이지요. 바로 그렇게 영적인 자기 망상에 빠진 착각을 하고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오늘 말씀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이 애굽에 가시게 된 사건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애굽의 가시게 된 이유는 헤롯 왕이 새로운 왕이 유다 땅에 왔다 라는 이야기를 듣고 화가 나서 분노해서 두려움을 분노를 표출해서 두 살 아래 아기들을 학살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그때 예수와 그의 가족이 애굽으로 가게 됩니다. 여기서도 우리 인간의 영적인 피해망상에 나타납니다. 예수님 때문에 아기 예수를 살리려고 하나님이 헤롯의 마음을 분노하게 해서 두 살 아래 아이들을 다 학살하게 내버려 두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만 애굽으로 피난가게 해서 살게 해주셨다고 그렇게 말한다는 거지요.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잘 들어보면 그럴싸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럼 두 살 아래 아이들을 진짜로 죽인 왕은 아무 죄가 없습니까? 하나님이 다 죄를 주신 겁니까? 3년 동안 동고동락하며 자신이 스승으로 모셨던 그 예수님을 배신하고 배반한 가롯유다는 전혀 죄가 없는 것입니까?
진짜 살인한 이 인간들은 죄가 없고 그런 상황을 만든 하나님만 죄가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죄인으로 우리를 이 땅에 보내셨으니 하나님이 죄이고 하나님이 다 죄값을 받으셔야죠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이지만 실제로 우리 인간이 저와 여러분이 그런 생각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잘 되면 내 탓이고 잘못되면 남 탓 저 사람 탓 세상 탓 끝내는 하나님을 탓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애굽에 있게 된 것은 하나님 때문이 아닙니다. 인간의 죄, 특별히 한 인간인 헤롯의 죄악 때문에 그의 분노 그의 두려움 그의 살의 때문에 예수님이 애굽에 가셨던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이 굳이 애굽으로 가실 필요가 있으셨을까요?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헤롯이 곧 한 인간의 죄악 때문에 가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 길은 엄청나게 험악한 길입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도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없으면 갈 수 없는 광야와 사막의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아기 예수는 태어나자 마자 그 길을 수 일을 걸어서 갔습니다.
그러면 아기만 그 고통을 겪었습니까? 막 아기를 낳은 마리아는 산후 조리도 제대로 못했는데 그 길을 걸었습니다. 그 책임이 아기 예수님 때문이라고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낸 하나님 때문이라고 말해야 됩니까?
그리곤 헤롯의 책임은 다 빼버리죠. 그러고 싶습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은 왜 그럴까요? 그것이 우리 인간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책임지지 않으려고 하고 영적인 피해 망상에 빠져 쟤 때문에 세상 때문에 하나님 때문에 하며 살아가는 죄인된 우리 인간의 모습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애굽에 계신 것은 헤롯 때문입니다. 한 인간의 죄악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이나 하나님이 만드신 운명의 삶 때문이 아니지요.
저와 여러분 한 인간의 교만 이기심 살인까지 생각하는 분노와 화 때문에 우리 예수님은 애굽에 가시는 것입니다. 애굽에는 예수가 있었다 라는 그 이유는 저와 여러분 때문입니다. 남 탓 하지 마십시오. 진짜 신앙은 내가 책임지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고백하는 것입니다.
설교 할 때마다 조는 성도님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목사님이 그 조는 성도님을 찾아가서 졸지 마십시오. 농담반 진담반으로 얘기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성도가 이렇게 얘기합니다. 졸음 귀신이 자꾸 저를 졸게 합니다.
그 얘기를 듣고 이 목사님이 화가 났습니다. 자신의 죄를 왜 귀신에게 넘깁니까? 졸음 귀신이 어디 있습니까? 정신 바짝 차리고 설교 듣고 예배 드리십시오.
귀신한테 다 떠넘기죠. 세상에게 다 떠넘기고, 끝내는 하나님께 다 떠넘깁니다. 죄만 지면 저와 여러분이 이렇게 얘기하죠. 귀신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세상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조상 때문에 그렇게 됐습니다.
왜 기독교가 무당의 종교가 되어야 됩니까? 왜 귀신에게 죄를 떠넘깁니까? 여러분이 지은 죕니다.
회교 국가인 인도네시아에서는 종교국이라고 이슬람에는 종교국이 따로 있습니다. 그 종교국에서 여자들의 미니스커트 짧은 치마 입는 것을 금지시켰습니다. 왜냐면 남자들이 성폭행을 하는데 여성의 옷 때문에 짧은 치마 때문에 성욕이 올라가서 성폭행을 한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그래서 이슬람이 잘못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문화로 받아들이라고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뭔지 아십니까?
한국도 다르지 않습니다. 한국에서 여론조사를 했습니다. 남성들이 성폭행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남자의 55% 가 여자에 행실과 옷차림 때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여자들도 40%가 그렇게 대답했습니다.
자신이 잘못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성폭행을 저질렀는데, 그 죄인이 자기 죄는 없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죠. 가해자는 죄를 묻지 않고 피해자에게 죄를 묻습니다. 남 탓하는 것이죠.
살인을 했습니다. 저 사람이 나를 째려 봐서 내가 때리고 싶은 얼굴로 생겨서 내가 그 사람을 때리다가 우발적으로 죽이게 됐습니다. 그러면 중벌을 받지 않습니다.
사람을 죽였는데 한 사람은 인생이 끝났고 그 사람의 가정은 파탄이 났는데 피해자는 모든 것이 다 끝났는데 가해자는 중벌을 받지 않습니다. 이게 세상입니다.
마지막 한 가지 스데반과 같은 마음으로 우리 연동교회의 아픈 곳에 대한 말씀을 한 가지 드리고자 합니다. 몇 년 전에 우리 교회는 양쪽으로 갈라져 분열과 갈등의 아픔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잘 정리가 돼서 마무리가 되었지요.
그런데 제가 느끼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습니다. 그때 그 상처와 아픔에 어느 누구도 내 탓이오 라고 얘기하신 분이 없습니다. 분명히 그때는 교회가 양쪽으로 갈라져서 서로 상처주고 불편한 마음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많이 가라앉았지요. 다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그 원인을 찾아 올라가고 또 올라가 보면 모두 하나님의 탓이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쪽 사람을 그렇게 세우셔서 하나님이 그쪽 사람들에게 그런 마음을 주셔서 하나님이 그 쪽 사람들은 그렇게 불러일으켜서 이렇게 교회가 되었다.
자기 탓 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다 남 탓이요 그쪽 탓이오 최종적으로 하나님 탓이라고 돌리더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여러분 지금이라도 내 탓이오 라고 얘기하라고 말씀 드리는 거 아닙니다. 여러분이 골방에서 이제 그렇게 기도하시면 됩니다. 하나님 제 탓이었습니다.
저 때문에 주님이 십자가 지시고 주님이 애굽의 가신 것이고 제 부족한 탓에 교회가 어려워졌고 한국 교회가 시련을 겪고 이 나라가 고난을 겪습니다. 이제 그렇게 기도하십시오. 그렇게 신앙을 고백할 때 반드시 하나님께서 진정한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리라 저는 믿습니다.
대림절 두 번째 주간입니다. 예수가 애굽으로 떠나셨던 그 아픔의 역사를 오늘 말씀 가운데 깨닫고 예수님 만을 소망하는 한 주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