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두점검64: 위산의 쉰밥, 상한 국물
위산스님이 한 스님에게 물었다.
“어디에서 오는가?”
“서경(西京)에서 옵니다.”
“그렇다면 서경 주인공의 서신을 가지고 왔는가?”
“감히 함부로 소식을 통하지 못합니다.”
“작가사승(作家師僧)의 천연함이 오히려 있구나.”
“쉰밥, 상한 국은 어떤 사람이 먹습니까?”
“그대라면 먹지 않으리라.”
이 스님이 토하는 시늉을 하였다.
위산스님이 (시자에게) 말했다.
“이 병든 중을 부축해 나가라.”
이 스님이 곧 나갔다.
溈山問僧。甚處來。曰西京來。師曰。還得西京主人公書來麼。曰不敢妄通消息。師曰。作家師僧天然猶在。曰殘羹餿飯誰人喫之。師曰。獨有闍黎不喫。僧作嘔吐勢。師曰。扶出者病僧著。僧便出去。
이 화두를 살피기 어려운 것은 저 스님과 위산선사는 어떤 경계와 안목을 갖추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이 쉬웠다면 어찌 화두로 남았겠는가? 이 화두는 살피는 자에게 많은 갈등을 자아내게 한다.
위산스님이 한 스님에게 물었다.
“어디에서 오는가?”
“서경(西京)에서 옵니다.”
“그렇다면 서경 주인공의 서신을 가지고 왔는가?”
서경(西京)은 곧 장안(長安)을 일컫는다. 장안은 곧 당나라의 수도이다. 당시는 당나라시대였다.
무엇을 서경의 주인공이라고 하는가? 당나라 황제를 일컫는 것인가? 그렇다면 선종(宣宗)황제가 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저 스님은 저 황제의 서신을 가져오는 사신이나 신하와 자격으로 지금 위산에 이른 것이 된다.
위산선사는 지금 묻고 있다.
“그대가 서경에서 왔다면 황제의 서신을 가지고 왔는가?”
그대가 만약 공무를 집행하기 위해 왔다면 먼저 서신을 보여라는 의미가 되겠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이렇게 볼 수도 있다.
“서경에서는 무엇을 주인공이라고 하는가?”
이는 곧 서경에서 가르침을 펼치는 큰 스승은 무엇을 주인공이라고 법문을 하는가?
처음 마주하여 두 가지 뜻을 모두 담아서 물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자 이 스님은 대답하였다.
“감히 함부로 소식을 통하지 못합니다(不敢妄通消息).”
‘함부로(妄)’란 곧 ‘도리에 어긋나다, 터무니없다’는 의미이다. 이는 곧 저 주인공은 말로 설명할 수 없으며 불가사의(不可思議)하다는 것이다. 어째서 말로 설명하지 못하는가? 서경에서 왔다면 당연히 청산유수와 같은 언변이 있을 것인데, 어째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무엇을 불가사의(不可思議)라고 하는가? 혼자서는 잣대와 저울을 가지고서 잴 수 없고 두셋이 모여서는 서로 논쟁하여 따지지 못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어째서 저울질하지 못하는가? 그림으로 그리지 못하기 때문이리라. 어째서 논쟁하지 못하는가? 생하고 멸함, 있음과 없음 등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리라.
이에 위산선사는 말했다.
“작가사승(作家師僧)의 천연함이 오히려 있구나.”
위산선사의 이 말은 매우 살피기 어렵다. 그저 소식을 통하지 못한다고 했을 뿐인데, 무슨 근거로 이러한 말을 토하는 것일까?
저 말을 풀어보면, 그대로 자연스러운 작가사승을 빼닮았다는 것이다. 자연스럽다는 것은 곧 인위적인 조작으로 억지로 말을 짓는 것을 뛰어넘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작가사승이다.
사승(師僧)이란 곧 여러 스님들의 스승을 일컫는 말이다. 무엇을 작가(作家)라고 하는가? 온전한 기틀과 작용을 갖춘 자를 일컫는다. 이른바 비로소 하나의 가문, 가풍을 세울만한 역량이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예컨대 운문종, 조동종, 위앙종, 법안종을 사가(四家)라고 칭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한번은 위산선사께서 (선상에) 앉자, (제자) 앙산스님이 물었다.
“화상에 대해 백년 후에 어떤 사람이 옛 사람의 법과 도에 대해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해야겠습니까?”
“한 차례 죽이고 한 차례 밥이다.”
“면전에 있는 사람이 수긍하지 않을 때는 또한 어떻습니까?”
“작가사승이다.”
앙산스님이 곧 절을 하였다.
“사람을 만나 잘못 거론해서는 안 되리라.”
溈山坐次。仰山問。和尚百年後。有人問先師法道。如何祇對。師曰。一粥一飯。曰前面有人不肯又作麼生。師曰。作家師僧。仰便禮拜。師曰。逢人不得錯舉
여기서 ‘옛 사람’은 곧 위산선사를 가리킨다. ‘면전의 사람이 수긍하지 않을 때는 또한 어떻습니까?’라고 한 것은 그 말을 들은 사람이 그것을 옳다고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는 어떤 사람이겠느냐는 것이다.
옛 사람은 여기에 대해 평하기를, ‘위산은 엄함(嚴)은 있어도 위세(威)가 없고, 앙산은 공손함(恭)은 있어도 예(禮)를 갖춤은 없었다.’라고 하였다.
만약 이 부자의 대화를 꿰뚫을 수 있다면, 어찌 백 천 가지 화두를 마음에 묶어 두리오.
그런데 문제는 서경에서 온 저 스님에게는 정말 작가사승의 역량이 있을까? 아니면 위산선사께서 잘못을 따라 그저 거기에 맞추어 맞장구를 친 것일 뿐인가? 바로 이것을 잘 살펴야 하는 것이다. 위산선사께서는 무슨 근거로 ‘천연한 작가사승’이라고 했을까?
이에 저 스님은 마침내 자신이 간직한 보따리를 조심스럽게 풀었다.
“쉰밥, 상한 국은 어떤 사람이 먹습니까?”
이것은 곧 자신의 공부를 한 구절로 표현한 것이다. 무슨 뜻인가? 만약 저 스님과 같은 길을 밟았다면 틀림없이 알아차릴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 자리에 여전히 지금도 머물고 있다면 어찌 알 것인가? 오직 그 자리를 털어낸 이후에야 비로소 전모를 알아차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저 국물을 마시고 병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자들이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거기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일까? 그것이 병인지조차도 전혀 모른 채로 스스로를 옳다고 여기며 그 자리를 굳게 지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잘 살필 일이다.
“그대라면 먹지 않으리라.”
위산선사는 ‘그대라면’ 먹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도대체 지금 위산선사는 그에게서 어떤 역량을 보았기에 먹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하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앞 구절에 실마리가 있다고 하겠다.
위산선사께서 말한 ‘작가사승(作家師僧)의 천연함’이란 참으로 절후광전(絶後光前)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는 것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위산선사는 말하고 있다.
“만약 그대에게 저 작가사승의 천연함이 있다면, 그대는 저 상한 국물과 쉰밥을 먹지 않았을 것이다.”
그대가 만약 참으로 저 작가사승다운 조건을 갖추었다면, 곧 이러한 안목을 갖추었다면 결국 저 국물과 밥을 먹지 않았을 거라는 것이다. 저 국물은 어떤 국물인가? 저 밥은 어떤 밥인가? 오래도록 앉아서 참구해보기를 바란다.
그러자 이 스님이 토하는 시늉을 하였다.
이미 뱃속 가득히 이 상한 국물과 쉰밥이 부풀어서 목구멍까지 올라오고 있었다. 이것은 곧 그 자리에 머무는 것을 참으로 옳게 여길 뿐 전혀 고개를 돌릴 줄 몰랐다는 것이다.
위산스님이 (시자에게) 말했다.
“이 병든 중을 부축해 나가라.”
이 병든 자를 데리고 어디로 가라는 것인가? 열반당이다. 열반당은 곧 선원에서 병이 든 스님을 치료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찌 하리오. 설령 열반당에 데려간다고 해도 저 스님의 눈을 열기에는 역부족인 것을.
“이 병든 중을 부축해 나가라.”
이것은 곧 저 위산선사께서 법령을 시행해 죄수를 판결한 것이다.
이 스님이 곧 나갔다.
어째서 저 스님은 그저 나갈 줄만 알고 어떻게 하면 병을 치료하는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을까? 아직은 저 소굴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닐까?
예로부터 부처를 찾고 보리·열반을 구하는 병이 가장 치료하기 어렵다고 했다. 처음 문턱에 들어서는 자에게는 요긴하고 친절한 일이 되겠지만, 오래 참구한 자에게는 귀를 막고 입을 틀어막을 일인 것이다.
무엇이 저 스님의 견처인가?
일찍이 그는 서경에서 몸소 왔었다. 그런데 그가 만약 저 국물과 저 밥을 먹지 않았다면 위산선사를 볼 수 있었을까?
여기에 대해 옛 사람은 노래하였다.
이 스님은 귀를 막고 방울을 훔쳤고
운산(雲山)은 잘못을 가지고 잘못에 나아갔다.
만약 푸른 눈 오랑캐였다면
특별히 몸을 한 차례 돌렸으리라. (목암 영)
這僧掩耳偷鈴。雲山將錯就錯。
若是碧眼胡兒。別有反身一著。(木菴永)。
‘귀를 막고 방울을 훔쳤다’는 것은 먼저 스스로에 속고서 상대마저도 속이려고 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운산(雲山)’이라고 한 것은 어록에 따라서는 위산선사가 아닌 운선선사의 일화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잘못을 가지고 잘못에 나아갔다는 것은 오직 상대방의 말만을 근거로 하여 대답을 지었다는 것이다.
끝으로 한 자 적는다.
예나 지금이나 허다한 자들이
상한 국물에 쉰밥을 탐닉한다.
죽 먹고 밥 먹음을 긍정치 않음이여
꼬리원숭이는 장단을 맞추고
촌 늙은이는 삼단의 선반 위에서 춤춘다.
고림선원에서 취산 합장
첫댓글 여나지금이나 허다한 자들이 상한국물에 쉰밥을 탐닉한다
죽먹고 밥 먹음을 긍정치 않음이여
(합장)
죽 먹고 밥 먹음을 긍정치 않음이여 ㅡ합장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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