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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1) 총령은 과연 어디인가?
이제 우리의 <파미르답사기>는 실크로드의 최대 관문인 파미르고원1)의 분수령에 해당되는 총령2)만을 앞에 남겨두고 있다. 그럼으로 도대체 '총령'이란 정확하게 어떤 산의, 어떤 고개를 가리키는 것인가? 라는 핵심적인 의문을 먼저 정리해 둘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총령에 대한 정보는 대부분 애매모호하다. 심지어는 '총령=파미르' 로 인식되고 있을 정도인데, 사실 이는 지금껏 총령이 어느 고갯길을 가리키는지 깔끔하게 답변해준 자료가 없었기 때문에 비롯된 상황이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총령이 정확이 어디냐?" 고 묻는 다면 필자는 "총령은 한 곳이 아니고 여러 곳이다." 라고 대답할 것이다. 말하자면 파미르고원을 어떤 루트로 넘느냐에 따라 넘는 사람마다 ‘총령의 좌표’는 달라질 수가 있다는 이야기이다.
먼저 인류 문화사상 처음으로 이 고개를 넘으며 기록을 남긴 5세기 초의 법현율사의 경우부터 살펴보자. 법현이 넘은 총령은 과연 어디일까?
이곳에서[갈차국(竭叉國)] 서쪽으로 북천축국으로 향해 한 달을 가서 마침내 ‘총령’을 넘을 수가 있었다. ‘총령’에는 겨울이나 여름이나 눈이 쌓여 있었고 또한 독룡(毒龍)3)이 있어서 만약 그것이 진노하게 되면 혹독한 바람과 눈비가 몰아쳐 모래와 자갈이 마구 날리므로 이를 만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온전할 수가 없다.
법현은 천축에서 돌아올 때는 바닷길을 택하였기에, 갈 때만 파미르를 넘었는데, 그는 전통적인 '서역남로'의 호탄을 경유하여 타쉬쿠르간에서 총령으로 올라갔다. 구체적인 그의 루트를 추적해보면 총령 다음에 타력(陀歷)4)이란 곳과 인더스 강에 대한 기록이 이어지는 것으로 보아서는 그의 루트는 <#9-3 와칸남로>의 와흐지르 고갯길을 넘어 와칸주랑으로 들어간 뒤 부로길 마을 근처에서 좌회전하여 힌두쿠시 산맥을 넘는 <#9-4 다르코트 고갯길)를 택해 인더스계곡의 옛 소발율국. 길깃트로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그럼으로 법현의 총령은 바로 ‘와흐지르(瓦赫吉爾, Wakhjir Pass, 4,923m)’ 고갯길이 확실하다. 이 고개에 대하여는 부연설명이 필요함으로, 이 글의 후반부에 자세한 것을 밝히기로 하고, 우선 다음 타자로 바통을 넘긴다.
▼ 파미르 횡단 지도
▼ 와흐지르 계곡
▼ 와흐지르의 고갯길을 지켰던 옛 망루
▼ 와흐지르의 고갯길의 엣 대상숙소
법현 다음으로 파미르를 넘은 6세기의 송운과 혜생의 루트는 좀 이색적이다. 송운일행의 길은 대체로 법현처럼 전통적인 대상로인 <#9-3 와칸남로>를 통해 총령을 넘어 와칸주랑으로 나아갔지만, 돌연히 행로가 앞뒤가 맞지 않게 된다. 무슨 일인가하면,「송운행기」의 순서상으로는 송운이 현 아프간 북쪽의 에프탈(Ephthal)5)까지 갔다가 다시 동쪽으로 우회하여 총령을 다시 동서로 횡단했다는 식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이 여행기를, 지도를 앞에 두고 꼼꼼히 대조해가면서 읽어 보면, 어쩐지 송운일행은 와칸주랑 부근에서 두 방향으로 나누어서 위(魏)나라의 사신(使臣)인 송운은 그대로 남로를 따라 서쪽으로 직진하여 아프간 발흐로 나아갔다가 후에 다시 스와트계곡의 오장국(烏場國), 현 우디야나(Udyana)로 돌아 온 것으로 보이고, 한편 순수한 구법승 혜생은 송운과 헤어져 와칸계곡의 길림 길 부로길 마을에서 좌회전하여 전통적인 천축로(天竺路)인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발화국(鉢和國)6), 길깃트를 경유하여 우디야나로 먼저 들어가 있다가 후에 송운과 다시 합류했을 것으로 보인다.7) 이에 대한 원문을 우선 읽어보자.
8월초에 한반타국 경계로 들어가 서쪽으로 간 지 엿새 되어 ‘총령산’에 올랐다. 다서 서쪽으로 사흘 가서 ‘발화국’으로 들어갔다. 높은 산과 깊은 골짜기, 험준한 길은 변함이 없었다. 국왕이 머무는 산은 그대로 성이 되었다. 이 나라의 남쪽 경계에 커다란 설산이 있는데 아침에는 녹았다가 저녁이 되면 다시 얼어서 멀리서 보면 마치 옥봉과 같았다.
한반타국은 현 중국 신강자치구 서쪽 중심지이며 현재 파키스탄으로 넘어가는 카람코람하이웨이[KKHy]8)의 시발점으로 유명한 타쉬쿠르간(塔什庫爾干,Tashkurghan)9)이고 발화성은 역시 카람코람하이웨이의 파키스탄 거점인 길깃트이니 ‘그들의 총령’ 역시 와흐지르 고개가 확실하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이 구절에서 길깃트의 남쪽 설산, 아마도 카라코람 연봉을 은봉(銀峯) 옥봉(玉峯)으로 묘사한 대목은 참으로 시적이다.
▼ 송운의 행로
그럼 위에서 살펴본 대로, 법현이나 송운일행처럼, 과거 천수백 년 동안 수많은 순례승들과 대상들이 모두 ‘와칸남로’ 만을 통해 천축으로, 서역으로 그리고 중원으로 넘나 다녔을까? 하는 질문이 자연스레 제기된다.
많은 실크로드의 갈레길 중에서 가장 짧고 덜 험준하고 위험부담이 비교적 적은 길이 바로 <총서 부록 #9-3번인 ‘와칸남로’>라는 사실은 보편적 장보이다. 그렇기에 자연스레 이용빈도가 가장 많은 루트가 바로 남로라는 결론은 쉽게 내릴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이 루트에는 일찍부터 대상의 무리들이 삼삼오오 줄을 이었고 그 틈새에 섞이어 5세기 법현율사를 비롯하여 6세기 송운일행 같은 유, 무명의 ‘초기’의 입축구법승들도 넘나들게 되었다. 여기서 ‘초기’를 강조함은 ‘후기’의 총령은 다른 고갯길로 그 기능이 대체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9-2번 ‘와칸북로’>를 말하는 것이다. 사실 이 질문을 즉석에서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다. 왜냐면 고전의 원전이나 현대의 국내, 외적인 자료들이 하나 같이 고개 이름을 꼭 집어서 밝히지 못하고 천 수백 년 동안이나 그냥 막연히 “총령을 넘어서”라는 식으로 판에 박힌 애매모호한 대답으로 얼버무려왔기 때문이다.
필자도 오랫동안 실크로드를 총서를 번역하면서 수많은 지도를 참조하여 이른바 <파미르 횡단도>를 수십 장이나 고처가면서 그려 보기 전까지는 이 문제는 자신이 없었을 정도로 아주 어려운 난제이기는 했다.
결론적으로 남로를 다시 한 번 정리해보자. 랑가르 마을 앞에서 갈라지는 갈레길에서 동쪽에서 흘러내려오는 넓은 와칸천을 거슬러 올라가는 계곡길을 따라 와칸주랑 속으로 깊숙이 올라가면 아프간령 와칸계곡의 중심 마을인 ‘사르하드 이 부로길(Sarhad-e-Broghil)’에 도착하게 된다. 바로 이 마을이 앞에서 이야기한 바 있는, 고선지장군의 격전지인 그 유명한 연운보(連雲堡) 요새 인근의 마을인데, 여기서 남쪽에 솟아 있는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인도로 내려가는 전통적인 천축로(天竺路)10)가 갈라진다.
다시 부로길 마을에서 계속 동쪽으로 길을 재촉하면 부지군바드(Buzi Gunbad) 근처에서 하천은 두 갈레로 갈라지는데, 그 한 쪽은 와칸천의 발원지인 콰라질가(Qarajilgha or Chaqmaqtin Lake)호수로 올라가고 또 한 갈레는 와흐지르 천(川)을 따라, 이 시내의 발원지인 파미르고원의 분수령에 해당되는 와흐지르 고개의 빙하지대로 올라간다. 마침내 숨 가쁘게 정상으로 기어오르면 그곳에 해발 4,923m의 와흐지르[瓦赫吉爾, Wakhjir Pass, 4,923m]고개라는 낡고 녹쓴 표지판이 보일 것이다. 바로 사리콜 산맥(Sar-i-kol Range, 色勒库尔)11)의 또 하나의 분수령이다. 어찌 보면 대표적인 ‘총령’이라 부를 수 있는 고개이다.
과거 천수백여 년 동안, 말잔등에 비단 꿈을 가득 싣고 수많은 대상들과 구법승들이 말방울, 낙타방울을 울리며 넘나다녔을 이 고갯길에 진짜 ‘야생 파[野蔥]’가 자라는지는 확인할 방법은 없다. 그러나 ‘파 마루턱’ 이라는 우리말식 이름으로부터 총령(蔥嶺)이라는 한문식 명칭이 붙여졌다는 믿거나 말거나 식의, 마치 설화 같은 이야기는 지금도 바람결에 들려오고 있다.
이 고갯길을 남나든 사람이 어찌 한 두 명이겠느냐마는, 그래도 이름 몇 자 기억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기존의 구분으로는 중세 베네치아의 여행가 마르코 폴로가 파미르를 넘은 루트가 이 남로로 알려졌으나, 필자의 견해로는 그의 루트는 북로에 해당된다고 생각되기에 다음 장에서 살펴보기로 하고 다음 타자에게 바통을 넘긴다.
근대에 들어와서 첫 발길을 남긴 이는 뜻밖에도 예수회 선교사였다. 베네딕트 고즈(Benedict Goëz)는 1602~1606사이에 선교를 목적으로 와칸주랑을 가로질러 중국으로 들어갔고, 다음으로 19세기에는 영국과 러시아의 ‘파워게임’ 시절인 1868년 인도의 측량기사들이, 1874년에는 영국의 대위 고든경(T.E. Gordon)이 아무다리아의 발원지를 찾아서 조르쿨호수를 탐험하고 수채화 한 장을 그린 다음 이 고갯길을 넘나들었다.
1891년에는 탐험가 영허스밴드(Francis Younghusband)가, 그리고 1906년 5월에는 둔황학의 비조인 아우렐 스타인(Aurel Stein)이 중앙아시아 탐험을 위하여 백 마리의 노새를 데리고 이 고개를 넘어갔고, 1947년에는 틸만(H.W.Tilman)이 피날레를 장식하면서 고개를 넘었다.12)
▼ 둔황학의 개척자 아우렐 스타인의 탐험대
▼ 아프간 카불에 잠들어 있는, 아우렐 스타인의 묘소
그 뒤 1895년에는 영국과 러시아의 승인에 의해 아프간과 중국 간의 국경선이 정해졌지만 두 나라는 1963년까지 모두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인적이 완전히 끊긴지 1백 년 동안 와흐지르 고개는 잊혀 갔고 현재는 옛 도로의 흔적마저 사라진 상태라고 하는데, 이는 국경을 마주 대하고 있는 중국과 아프간의 관계악화가 그 원인으로 꼽힌다. 그래서인지 현 상황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시절인연만을 기다릴 뿐…
한편 ‘와칸북로’에서의 총령은 [#9-2의 사리코람(Sarikoram,5,558m) 고갯길로 비정된다. 이 루트는 와칸주랑의 분기점인 랑가르(Lyangar) 마을 인근에서 와칸천을 따라가는 남로와 갈라진다. 그 다음 파미르천의 동북쪽 계곡길을 따라 아프간과 경계를 이루며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 대용지인 조르쿨 호수를 돌아 ‘대 파미르고원’을 횡단하여 사리콜(Sar-i-kol)산맥의 분수령을 넘어 타클라마칸 사막으로 나아가는 루트를 가리킨다.
이 북로는 이미 먼저 번 <고선지루트 1만리>편에서 살펴본바 있듯이, 7-8세기 당시 실크로드의 주요 통로였던 와칸남로 대신에 일종의 우회도로로 개발된 성격이 있는 루트이다. 말하자면 남로 상의 요새들의 상황에 따라서, 비록 민간인 신분의 대상들이나 입축구법승이라 하더라도 좀 더 안전한 루트가 필요했기에 개척된 루트라는 의미이다. 아마도 그런 이유로 당시의 순례승인 현장법사와 혜초사문 등은 남로 대신 북로를 이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기타 갈레길인 <9-1, 4, 5, 6번> 도 아마도 이런 유사한 지정학적 상황에 따라 새로운 루트가 개발되었을 것으로 비정되지만….
남로와 쌍벽을 이루었던 북로를 이용하여 총령을 넘은 구법승이 어찌 한 두 명이겠냐 마는, 현재 확인된 기록상으로 현장과 혜초뿐이다. 그런데 그들 역시 총령의 정확한 좌표와 이름을 찍어주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이다. 다만 그들이 파미르천, 즉 조르쿨 호수에서 출발하여 바로 총령을 넘어 석두성이 있는 타쉬쿠르간으로 갔다는 사실만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현장법사가 총령을 넘은 구절은 그렇게 간단하다. 하기야 현장의 구절대로 오직 얼음과 눈뿐인 해발 5천m의 고산지대에서 아마도 산소결핍으로, 영양실조로 고산병에 걸린 채, 다만 얼어 죽지 않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걸음을 옮기며 5백리 길을 걸어갔을 것이니 제 아무리 천하의 기록광(記錄狂)이라는 현장법사라도 무엇을 기록할 수 있었겠는가?
이 파미라천으로부터 ‘동남쪽’으로 산을 올라 험한 길을 걸어가면 사람들이 사는 마을은 없고 오직 얼음과 눈뿐인데 이곳으로 5백여 리를 가다 보면 걸반타국에 도착한다.
혜초의 기록은 현장보다 더 간단해서 싱거울 정도이다. 당연히 별 도움이 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이다.
또 호밀국에서 동쪽으로 15일을 가서 파밀천(播蜜川)을 넘으면 바로 총령진에 도착한다.
현장과 혜초의 기록이 다하였으니, ‘동남쪽’ 그리고 ‘동쪽’이란 한 마디를 길라잡이 삼아 온갖 지도를 뒤지는 수밖에… 조르쿨호수에서 그쪽 방향으로 난 고갯길은 대체 어디일까?
대, 소 파미르와 중국령 타클라마칸 사막 사이에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산맥은 사리콜이다. 그럼으로 북로의 분수령에 해당되는 총령은 이 산맥의 여러 고갯길 중의 하나일 것이고 ‘동남쪽’ 또는 ‘동쪽’이란 힌트로 보면 지도상의 사리코람(Sar-i-koram, 5,558m)고개가 가장 유력한 후보에 속하지만, 이 역시 중국과 아프간의 관계악화로 폐쇄된 지 오래되어 이에 대한 정보를 찾을 수 없었다. 그 다음으로는 사리콜산맥의 제일 북쪽에 있는 쿨마(Kulma Pass, 闊勒買山口, 4,363m/#9-1 쿨마패스길)14)도 역시 총령 후보군에 들 수 있다.
파미르고원의 분수령인 이른바 총령에서 동쪽으로 산을 내려가면 바로 옛 총령진(蔥嶺鎭)이라 불렸던 타쉬쿠르간(Tashkurghan/塔什庫爾干)15)에 “도착할 수 있다” 당나라 때나 지금이나 중원대륙의 서쪽 끝의, 바로 그 국경관문이다.
말하자면 이곳에 도착한다는 것은 인도에서 귀국길에 올랐던 구법승들이 일단은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장법사나 혜초사문의 경우가 바로 이에 해당된다.
그러나 마지막 코스를 앞두고 해동의 나그네는 뼈아픈 좌절을 맛 볼 수밖에 없었다. 위에서“도착할 수 있다.”라는 표현을 쓴 것은,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실제로는 불가능하다는 의미를 강조한 말투이다.
아! 총령진 타쉬쿠르간이 바로 저 산 넘어 인데도, 옛날 순례승들이 자유롭게 넘나들었던 고개들을 막상 본인은 그곳으로 내려갈 수가 없었다는 것은“사바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호수”라는 조르쿨까지 어렵게 올라간 우리의 갈 길도 현장법사나 혜초사문을 쫓아서 내려갈 수가 없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물론 그 이유야 물론 외국인에게 열려진 국경관문16)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인위적으로 그어진 국경이란 선과 각 나라마다 다른 통과의례가 문젯거리였다.
무릇‘역사’라는 것이 앞으로만 나아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드리기가 그리 쉽지 않았기에 그 좌절은 누군지 모를 대상을 향한 분노로 끓어올랐지만, 결국은 밀입국이라도 감행하고 싶은 만용을 애써 억누르면서 “막히면 돌아가라”는 단순하고도 명백한 논리 아닌 핑계로 스스로를 다독거리면서 발길을 돌려야만 하였다.
1) 한편 범어에서의 파미르(pamir)는 '거친 황야'를 뜻하고, 페르시아어인 바미둔야(Bam-i-dunya)는 '평평한 지붕'이라는 의미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현재 일반적으로 쓰이는 ‘세계의 지붕’ 뜻과 어원은, 범어의 ‘음’에 페르시아어의 ‘뜻’이 혼용되어 고착화 된 것으로 보인다. 파미르 고원은 힌두쿠시, 카라콜룬, 히말라야, 쿤룬, 천산 산맥 등 아시아의 거대 산맥들을 거느리고 있는 곳으로 동서문명교류의 대동맥인 실크로드 오아시스 육로의 필수 경유지로서, 오아시스 남․북 양도가 이곳을 지난다. 그리고 구법승들과 탐험가들을 비롯한 많은 왕래자들이 이곳을 목격하고 쓴 귀중한 기록들이 적지 않게 남아 있어 그 실태를 전해주고 있다.
지리학적으로 파미르고원은 ‘8대평원’으로 나누어진다. 예부터 파미르고원을 횡단하는 길은 여러 가지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별도로 부록을 참고 바란다.
2) 총령의 유래는, “총령은 돈황 서쪽 팔천 리 거리에 있는 높은 산인데, 산상에서 파(葱)가 나므로 옛날에 총령이라고 하였다고 한다.”라고 한 것을 보면 파에 관련된 지명으로 현재까지도 파미르 고원의 설선(雪線) 이상의 암석 틈에서 야생파가 자라고 있다고 하니 이 유래가 신빙성이 있다고 하겠다. 현장도 이 지명에 대하여 “땅에서는 파가 많이 나므로 총령이라 부른다.”고 하였다.
3) 진짜 생물학적인 실제 용이라기보다는 고산의 예측 불가한 일기변화를 법현은 의인화하여 표현한 것이다. 현대인들의 마음속에 아작도 용이 존재하고 있는데, 천 수백 년 전에 어찌 존재하지 않았으리..
4) 인더스의 본류가 아닌 지류의 하나인 키샨강가(Kishan-Ganga) 기슭에 작은 마을로 현 두란(Duran으로 비정되고 있다.
5) 고대 월지족의 후에로 백흉노(白匈奴) 또는 엡탈리트, 갈달, 읍달, 하이탈, 타프탈레 등으로 기록된 유목민족으로 5세기 경부터 유라시아에서 큰 세력을 이루어 6세기 초에는 헬레니즘을 계승한 마지막 국가인 토카라국[吐火羅國]을 멸망시키면서 중앙아시아에 정착하여 동쪽으로는 호탄, 서쪽으로는 사산조페르시아 까지 미치는 판도를 형성하여 인도, 중국, 페르시아 그리고 남러시아를 잇는 교역루트의 차지함으로써 당시 실크로드의 실권을 장악하다가 560년경 페르시아와 연합한 돌궐에게 멸망되었다. 송운의 에프탈에 대한 기록은 사서의 그것과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
6) 발화국은 분명 현 파키스탄 북부의 소발율, 길깃트이다. 그러나 기존 일부 역주본에서는 “발화국을 『대당서역기』12권의 달마실철제국 ” 으로 비정하고 있으나 이 구절은 수정해야할 부분이다. 이는 송운일행이 파미르에서 바로 「송운행기」의 기록 그대로 와칸남로를 따라 에프탈, 즉 현 아프간의 발흐로 갔을 것이라는 가정으로 비롯된 오류이다. 그래서 송운과 혜생이 행로를 둘로 나누었을 것이라는 가설이 설득력을 가진다.
7) 필자의 개인적인 가설로, 구체적인 내용은 졸저<실크로드 고전여행기 총서 5권 「송운행기」2장> 에 자세하다.
8) 파키스탄의 길깃트에서 쿤제랍(Khunjerab, 4,730m)고개를 넘어 중국령 타쉬크르간과 카슈가르에 이르는 총 700㎞의 도로를 말하는데, 이 도로는 1986년부터 외국인에게도 열렸다. 이 ‘국제버스’를 타면 타쉬쿠르간[竭盤陀; 石城; 蔥嶺鎭]에서-(카슈가르는 290㎞; 쑤스트 215㎞; 길깃트 410㎞)- 입,출국 수속을 하고 다음 날, 상대국 쪽 버스를 바꿔 타면 된다.
9) 대개의 여행기에서 나타나는 실크로드의 요충지로, 『왕오천축국전』에서는 총령진으로, 현장은 갈반타(羯盤陀)로, 법현은 갈차국(竭叉國])으로 부르면서 “갈차국에 이르러 혜경 등과 다시 만났다. (중략) 이 나라는 산속이고 추운 나라여서 다른 곡식은 나지 않고 오직 보리만이 생산된다. ”라고 기록하였다.
10) 넓게 보면 실크로드이지만, 서쪽의 서역으로 향하는 루트가 주로 대상로였다면, 인도쪽으로 향하는 길은 구법로로 주로 사용되었기에 구분된 명칭이다.
11) The Sarikol Range (Chinese: 色勒库尔山脉l) is a mountain range in the Pamirs on the border of Tajikistan and China. The range divides Tajikistan's GBAProvince and China's Xinjiang Uyghur Region and it runs parallel with the Muztagh Range to the east. The range extends 215 miles (346 km) from the Markansu River in the north to the Beyik Pass in the south. Its average elevation is roughly 5,000m and the highest point in the range is Mount Lyavirdyr at 6,351m. The range’s drainage basin feeds both the Amu Darya and Tarim River.
The name Sarikol has also been used to describe the local people who are historically known as Sarikolis; the local Sarikoli language; and Tashkurgan Town, which was historically known as Sarikol.
12) http://en.wikipedia.org/wiki/Wakhjir_Pass/ There is no road across the pass. On the Afghan side the nearest road is a rough road to Sarhad-e Broghil, about 100km from the pass by paths. On the Chinese side there is a jeep track about 15 km from the pass, which leads through the Taghdumbash Pamir to the Karakoram Highway 80 kilometres away. In the summer of 2009 the Chinese Ministry of Defence began construction of a new road to within 10 kilometres of the border, for use by border guards.
15) 현 중국령 신장(新疆)위구르의 파키스탄과의 접경도시인 타쉬쿠르간으로 파키스탄과의 연결도로인 카라코람 하이웨이(KKH)의 국제버스가 다니는 출발지점이기도 하다. 와칸(Wakhkhān)계곡으로 연결되는 사리콜(Sar-i Kol) 계곡에 위치한 국경요새로써 당 현종 개원 연간에 설치한 총령수착소(葱嶺守捉所)가 설치된 곳으로 예부터 서역과 중국간의 필수 경유지로 국겨을 지키던 군사들이 주둔하던 이 산성은 시내에서 2km거리에 석두성(石頭城)이란 이름으로 불리며 현재까지 건재하다.
총령의 유래는, “총령은 돈황 서쪽 팔천 리 거리에 있는 높은 산인데, 산상에서 파(葱)가 나므로 옛날에 총령이라고 하였다고 한다.”라고 한 것을 보면 파에 관련된 지명으로 현재까지도 파미르 고원의 설선(雪線) 이상의 암석 틈에서 야생파가 자라고 있다고 하니 이 유래가 신빙성이 있다고 하겠다. 현장도 이 지명에 대하여 “땅에서는 파가 많이 나므로 총령이라 부른다.”고 하였다.
첫댓글 이 책의 백미
ㅎㅎㅎ 제일 장고에 장고를 거듭했던 부분 맞습니다.
@다정/김규현 힘든 결론이었을 것 같습니다.
화룡점정~
총령 ᆞᆞ ᆞ
흥미가 쏠~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