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미궁(紫微宮:천당) 간 김인후(金麟厚)
김인후(1510~60)는 조선 인종 임금 때 옥과(玉果) 현감을 지내고,
을사사화(1545) 이후 고향 장성(長城)으로 내려가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다가
많지 않은 나이 51세에 사망했다.
김인후가 사망하고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평소 김인후와 가까이 지내던 오세억(吳世億)이 갑자기 사망했는데,
오세억은 숨이 끊어진 지 반나절 만에 긴 한숨을 내쉬면서
다시 깨어났다.
그리고 가족들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거참 희한한 일을 다 겪었네.
내 저승사자의 안내를 받아 멀리 한 곳에 가니 궁궐 같은 큰 건물이 있었어.
그래서 쳐다보니 현판에 ‘자미지궁(紫微之宮:천당)’이라 써 있었고,
다시 저승사자의 안내를 받아 궁궐 안으로 들어가 엎드렸지.”
“아버님, 그 ‘자미자궁’이란 게 무슨 궁궐입니까?”
아들의 물음에 오세억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자미’는 북두칠성 뒤에 있는 별자리 이름이며, ‘자미궁’은 옥황상제가 자리잡고 있는 궁궐이라는
설명을 해주고 다시 말을 이었다.
“궁궐이 매우 크고 으리으리했는데,
난(鸞)새와 학(鶴)이 날고 있는 가운데 한 선비가 소련포(素練袍)를 입고
의젓하게 앉아 있더군. 그런데 얼마 동안 그 앞에 엎드려 있으니,
한참 만에 심부름 하는 사람이 나에게 종이쪽지를 전해 주지 않겠어.
그래서 그 종이쪽지를 보니 시 한 수가 적혀 있는데,
이런 시였단 말이야.”
여기까지 이야기한 오세억은 다시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크게 몇 번 숨을 내쉰 다음에,
그 시를 종이에 적어 보여 주면서 말을 이었다.
세억은 이름이요 자는 대년이라 (世億其名字大年),
문을 밀쳐 들어와 자미 신선 만났도다 (排門來謁紫微仙).
칠십칠 세 지난 후 다시 와 보자꾸나 (七旬七後重相見),
인간 세상 돌아가 소문내지 말지어다 (歸去人間莫浪傳).
“이런 시였거든.
그런데 그 속에 내 이름과 자(字)를 분명히 적었고 77세 이후에
다시 와서 만나자고 했으니, 하도 이상하여 얼굴을 들어 그 선비를 자세히 바라보았지.
그랬더니 글쎄 그 선비가 바로 얼마 전에 세상을 뜬 김인후 그 사람이었단 말이야.
하도 반가워서 인사를 하니 그는 웃으면서,
시구에 나타나 있는 대로 내 수명은 77세로 아직 죽을 때가 아닌데,
사자가 동명이인인 다른 사람을 잡아와야 할 것을 잘못 잡아왔다고 하면서 다시 나가라고 했어.”
“아니 여보,
그러면 김인후 그 사람이 하늘나라 옥황상제가 계시는 그 궁궐에 가 있더란 말씀입니까?
그러면 영감이 옥황상제도 만나 뵈었어요?”
부인이 남편의 이야기를 듣고 신기해하면서 물었다.
“응,
김인후 그 사람은 워낙 강직한 선비로, 성리학을 깊이 연구했거든.
그래서 옥황상제께서 어떤 일을 맡기려고 불러올린 것 같았고,
그 사람은 빨간 책을 들여다보며 내 수명이 77세라고 했어요.
하지만 옥황상제는 보이지 않았어.”
뒷날 오세억이 김인후와 가까이 지냈던 노수신(盧守愼) 정승에게 이 시를 보여 주고
저승 다녀온 이야기를 하니,
노 정승도 매우 신기해했다.
뒤에 오세억은 과연 77세에 사망했다. [조선 중기]
김인후(金麟厚)[본관은 울산(蔚山).
자는 후지(厚之), 호는 하서(河西)·담재(澹齋).
증조할아버지는 김의강(金義剛), 할아버지는 김환(金丸), 아버지는 김령(金齡)이다.
어머니는 조효근(趙孝謹)의 딸 옥천 조씨이고, 처는 윤임형(尹任衡)의 딸이다.
[활동 사항]
김인후(金麟厚)[1510~1560]는 1510년(중종 5) 장성(長城)에서 출생하였다.
타고난 성품이 청수(淸粹)했으며, 5~6세 때에 문자(文字)를 이해하여 말을 하면 사람이 놀랄 정도였다. 1519년(중종 14) 김안국(金安國)에게서 도학과 문학을 배웠으며, 1531년(중종 26)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이황(李滉) 등을 만나 도학을 토론하는 등
교우가 매우 두터웠다.
1540년(중종 35)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승문원 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에 등용되었고,
다음 해에 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홍문관 저작(弘文館著作)이 되었다.
1543년(중종 38)에 홍문관 박사 겸 세자시강원 설서(世子侍講院說書),
홍문관 부수찬이 되어 세자 보도(輔導)의 책임을 맡아 세자를 가르쳤다. 김인후는 세자의 어질고 현명함을 알아보고 정성껏 가르쳤으며,
세자 또한 스승의 높은 학문과 도덕을 존경하며 잘 따랐다.
1544년(중종 39)에 중종이 세상을 떠나고 세자가 즉위하니 그가 바로 인종이다.
그러나 인종이 즉위 8개월 만인 1545년(인종 1)에 세상을 떠나고
곧이어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김인후는 병을 이유로 고향인 장성으로 돌아갔다.
이후 조정에서 여러 차례 불렀으나 다시는 벼슬에 나가지 않고
순창군 복흥면 상송리에 은거하였다.
또한 순창군 복흥면 서마리와 쌍치면 중안리에 걸쳐 있는 백방산(栢芳山) 아래 훈몽재(訓蒙齋)를 짓고, 이곳에서 학문과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사제(私第)에 거처하면서부터는 성현(聖賢)의 학문에 전념하여
조금도 쉬지 않고 사색하고 강구하며
차례대로 힘써서 실천하니, 만년에는 조예(造詣)가 더욱 정밀하고 깊었다.
해서와 초서를 잘 썼고 필적은 기굴(奇崛)하였다. 1560년(명종 15)에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김인후는 조선 성리학의 이론적 탐구가 심화된 16세기 중반의 대표적인 유학자로 이(理)와 기(氣)에 관한 논쟁의 중심에 있었으며, 태극(太極)에 관한 이론에도 깊어 『천명도(天命圖)』를 완성한 도학자였다.
또한 천문, 지리, 의약, 산수, 율력(律曆)에도 관심이 깊었으며, 아울러 16세기 누정 문학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시인이기도 하였다.
김인후는 호남 가단(湖南歌壇)[호남 지방을 중심으로 자연과 벗하는 풍류 정신의 시조를 창작해 온 사람들]의 핵심적 거점이었던 면앙정(俛仰亭)과 소쇄원(瀟灑園) 등을 찾아가 이곳을 드나들던
기대승(奇大升)[1527~1572], 고경명(高敬命)[1533~1592], 송인수(宋麟壽)[1499~1547], 임억령(林億齡)[1496~1568], 정철(鄭澈)[1536~1593] 등과 두터운 교분을 나누었다.
김인후의 시풍과 풍류는 제자인 정철에게 이어져 강호가도(江湖歌道)로 분류되는 국문 시가가 꽃피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문집인 『하서집(河西集)』과 철학서인 『주역 관상편(周易觀象篇)』,
『서명사천도(西銘四天圖)』, 김인후가 편찬했다고 전해지는 『백련 초해(百聯抄解)』 등이 있으며,
그가 남긴 시 작품은 1,500여 수에 이른다.
[묘소]
묘소는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맥호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1669년(현종 10)에 문정(文靖)이라 시호하였다. 1796년(정조 20) 시호를 문정(文正)으로 고치고 영의정에 추증하였으며 문묘에 배향하였다.
순창의 화산 서원(花山書院)을 비롯하여 장성의 필암 서원(筆巖書院), 남원의 노동 서원,
옥과[지금의 전라남도 곡성군]의 영귀 서원(詠歸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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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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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자서 찾지 안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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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은 확실하게 따로있다
어떤박사도 모르느것 본인이알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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