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디 자서전은 어떤 책일까?
아시아 역상서 가장 위대한 인물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물어보았고 1위는 바로 간디였다. 자서전은 사실을 좀더 과장할 수도 있다고 생각이 되지만 구지 간디의 자서전을 꼽은 이유는 특히 이 자서전이 지금 돈만 있으면 된다고 하는 시대에 올바른 길잡이가 되어 줄 수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간디는 권유로 자서전을 쓰기로 했지만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감옥에서 조차 자신의 일이 너무 많아서 작업을 할 수 없었다. 간디는 매일 해뜨기 전에 일어나 해가 뜰 때까지 명상을 하고, 6시간은 종교와 철학에 관한 책을 읽고, 4시간씩 물레를 돌리는 생활을 반복했다. 간디는 고요와 고독을 즐겼기에 감옥 생활이 오로지 공부에만 몰두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간디에게 맹장염이 생긴데다가 쉽게 호전되지 않아서 석방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간디는 56살에 나바지반이라는 잡지에 자신의 자서전을 책임감 있게 연재하기로 결심했다.
사실 정치를 하다가 생겨버린 마하트마라는 이름은 간디에게 기쁨을 주지는 못하고 오히려 깊은 상처를 남겨주고는 하였다. 간디가 말하는 하나님은 교회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아닌 진실 또는 진리라는 의미이다. 진리는 간디가 살아가는 평생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다. 간디는 자신의 자서전을 쓸 때마다 비폭력 선언을 하려고 노력했다.
간디는 어떤 사람일까? 자신을 다스리고 세상을 섬긴 인도 독립운동의 아버지
간디의 가문은 수 세기 전부터 토후국의 총리직을 맡아오고 있었다. 토후국의 지배자들 모두가 나쁜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어떤 지배자들은 자기부족을 지켜주는 개에게 사치를 쏟아 붓기도 하였다.
간디의 어머니는 신앙심이 깊은 사람으로 종교를 목숨과 같이 여겼다. 그의 기억에 제일 남는 어머니의 인상은 성자 같은 모습이었다. 그는 힌두교의 한 종류라고 할 수 있는 비슈누교의 영향 아래서 성장했지만 자이나교, 이슬람교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간디는 모든 종교를 받아드릴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간디는 열세 살이 되던 해 소녀와 결혼을 했다. 그리고는 대학 입학 자격시험을 치르려고 아메다바드로 가서 간신히 붙었지만 그리 크지 않은 대학교였음에도 불구하고 간디의 성적은 낮았다. 그래서 가족에게 도움을 주는 한 어른을 찾아가 도움을 빌었더니 아버지의 자리를 이으려면 영국에 가서 변호사가 되는 것이 좋겠다고 충고했다. 남아프리카로 더날 때 간디는 영국식 신사 복장을 쫙 빼입고 영국 없는 인도는 있을 수 없다고 믿는 영국식 생각이 들어찬 20대 젊은 변호사였다.
피닉스 정착촌, 톨스토이 농장을 만들어 사람들과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남아프리카 인도인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여러 가지 일들을 앞장서서 했다.
인도인들의 선거권 박탈, 인도 노동자들에게 부당한 세금을 내도록 하려함, 인도인들에게 지문 등록을 강요하고 이를 거부하면 벌금, 강제 이주, 징역에 처하는 것, 기독교도 간의 결혼만을 인정하는 것. 등에 대해서 진리의 힘이라는 뜻인 사티아그라하 비폭력 운동을 펼쳤다. 이런 활동으로 인해서 간디는 인도 사람들이 존경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영국은 전쟁이 끝났는데도 불구하고 재판 없이 사람들 감옥에 넣을 수 있는 롤래트 법을 시행했다. 그로 인해 간디는 상점이 문을 닫고 공장의 가동을 멈추는 전 인도의 총파업을 일으켰다. 깜짝 놀란 영국은 평화적인 집회를 벌이고 있던 사람에게 총을 쏘아서 300명이 죽고 1000명을 다치게 하였다. 간디는 너무 괴로운 나머지 총파업을 중지하고 단식에 들어갔다. 이로 인해 영국을 도와주었던 간디는 영국을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간디는 독립선거가 힌두교에서 불가촉천민을 분리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나쁘다고 생각했다.
이미 간디는 할아버지였기에 단식 며칠 만에 죽을 고비를 맞았다.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고 인도의 부왕은 인도인들과 상의 없이 전쟁에 참가했다.
75살에 간디는 지팡이를 짚고 벵골로 갔다. 오직 걷고 기도하며 힌두교와 이슬람교가 서로에 대한 증오를 버리고 서로 도우며 살자고 호소했다. 힌두교도가 보내는 편지는 간디가 이슬람교도 편을 든다고 진나의 노예, 마호메트 간디라고 부르기도 했고 이슬람교도가 보내는 편지는 파키스탄의 건국을 방해하지 말라고 쓰여 있었다.
1947년 인도는 마침내 독립했고, 파키스탄도 독립했다.
감상문
-나는 오늘 이 책을 읽고 간디에 대해서 알 수 있었다. 사실 이 책에서 나온 것처럼 우리는 동양인들 중에 위대한 사람은 그렇게 자세히 알지 못한다. 워싱턴이나 링컨은 알지만 중국의 마오쩌뚱 같은 사람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이 반성을 했다. 그리고 동양의 위인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간디는 정말 고독한 것을 무진장 좋아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감옥에서 지내는 것이 그럭저럭 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간디는 맹장염 때문에 감옥에서 나오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간디는 맹장염만 걸리지 않았으면 아마도 감옥에 있는 것을 더 좋아했을 지도 모른다. 암튼 간디는 인도의 위대한 리더인 것 같다. 비폭력 운동을 주체하고 인도가 영국에게 당하고 있는 것을 리더로써 해결하기 때문이다. 나는 간디를 보고 나도 저런 리더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간디처럼 위대한 리더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16일
이 과정에서 더위와 벌레, 배고픔과 공포로 처음에는 작은 사고들이 일어나더니 곧 서로를 주깅고 폭력으로 번져나갔다. 9월 1일 간디는 목숨건 단식을 시작했다. 그런데 단식이 끝나고 이틀 후인 20일 간디가 머물고 있던 곳에서 폭탄이 터졌다. 간디를 암살하려던 범인은 곧 체포되었다.
간디는 잠시 그 유명한 이 빠진 웃음을 지으며 합창을 했다. 순간 땅딸막한 젊은 남자가 군중을 밀치며 나와 간디를 향해 총을 세 발 쏘았다. 간디는 신의 이름을 나직이 흘리며 쓰려졌고 암살범은 폭탄을 터뜨린 사람과 같은 단체였고 이름은 나투람 고드세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신앙심에서 간디를 암살했다고 주장했고, 후에 교수형을 선고 받았다.
그의 화장터에서 높은 사람들이 간디에게 국가 원수로서의 경의를 표했다.
“한 위대한 생명이 우리의 곁을 떠나갔습니다. 그는 겸손과 진리가 제국주의보다 강한 것임을 알려주신 분입니다.”
13살에 아저씨가 된 간디
진리를 향한 열성은 그의 타고난 성격이므로 아내에 대해 거짓을 행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런 교훈이 내가 아내에게 성실을 맹세해야 한다면 아내 또한 나에 대해 성실을 맹세해야 한다. 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생각은 그를 질투하는 남편으로 만들어 버렸다. 인도가 강대국이 되지 못한 이유 중에 한 가지가 바로 조혼이다.
간디는 37살이 되던 해에 브라마차리아를 맹세했다. 브라마차리아는 쉽게 말하면 성관계를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는 소나 물소에게 마지막 한 방울의 우유까지 짜내려고 하는 모습을 보고 우유를 오랫동안 마시지 않았다. 그러나 몸이 너무 약해져 많은 의사들이 우유를 마시라고 권했다.
중. 고등학생 시절- 방황의 시간
간디는 라지코트에 있는 앨프레드 중. 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는 이때 결혼을 하는 바람에 한 학년이 늦어졌다. 산스크리트어는 간디가 가장 어려워 했다. 불교나 힌두교의 경전, 고대 인도의 문학이 다 산스크리트어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인도 사람은 꼭 공부해야 하는 언어이다. 그러다가 페르시아 어와 산스크리트어 사이에서 갈등이 되었고 페르시아어를 가르치시는 선생님이 좋은 분이라는 소문을 듣고 간디는 페르시아어 수업에 들어가 버렸다. 그러자 산스크리트어 선생님은 다시 자신에 반에 들어오고 자신이 모든 힘을 다해서 가르친다고 말했고. 간디는 선생님과 사랑을 저버릴 수 없었다.
영국 유학시절-성장의 시간
간디가 유학을 가는 것 때문에 총회가 열렸는데 판결은 유학을 금지한다고 났지만 간디는 돈을 빌려서 드디어 9월 4일에 뭄바이를 떠나 영국에 도착했다. 문제는 영국의 음식들 이었다. 인도의 음식과는 너무나도 달라서 더 달라고 하기가 힘들었고 인도에 사신 할머니에 집에서 살 때에도 입맛이 없었다. 간디는 그곳에서 채식주의를 위하여라는 책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아서 그는 스스로의 선택으로 채식주의자가 된 것이다.
간디가 영국신사 옷을 입을 때도 있었지만 정신을 차리고 돌아와서 범생이 룩을 맞춰 입었다.
채식주의를 하는 것이 생각처럼 간단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어떤 음식을 먹고, 먹지 말아야 하는지 헷갈릴 때가 자주 생겼기 때문이다.
외국에 가면 애국자가 된다는 사람들처럼 간디도 바가바드 기타를 읽고 영국에 와서야 자신의 뿌리를 만나게 된 셈이었다.
남아프리카의 쿨리 변호사-1등석은 안 돼!
인도에 돌아오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아주 슬픈 소식이 간디를 기다리고 있었다. 간디의 처음 재판은 아주 쉬웠음에도 불구하고 말을 하지 못했고 결국 교사가 되기로 했다, 하지만 교장은 졸업생이 아닌 것을 알고 거절해 버렸다.
감상문
-나는 오늘 이 책을 읽고 간디가 탕탕한 생활을 할 때 자살에 생각까지 했었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는 자살을 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역시 어떤 큰 결심을 할 때는 한 번 생각으로는 절대 후회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도 선택이나 결정, 결심을 할 때, 두 번 생각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간디는 너무 이른 나이에 결혼을 했고 성욕이 생긴 것 같다. 물론 그만큼 빠르게 억제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빨리 알아서 억제하는 기간동안이 많이 힘들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간디는 조금 황당하게 죽음을 맞이한 것 같다. 그리고 간디가 말을 잘 못하는 성격이라는 것에 대해서 놀랐다. 나는 간디가 자신감 있게 말을 하는 것은 어렸을 때부터 그런 것인 줄 알았는데 지금 이 자서전을 보니 그런 것이 아니었다. 나는 이 책을 읽기 정말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책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권해 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