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산진면목(廬山眞面目)> 소동파 시인의 시라고 합니다.
횡간성령측성봉(橫看成嶺側成峰)/가로로 보면 산줄기, 옆으로 보면 봉우리
원근고저각부동(遠近高低各不同)/멀고 가깝고 높고 낮음이 제각기 다르니
불식여산진면목(不識廬山眞面目)/진정으로 알 수 없노라 여산의 참모습을
지연신재차산중(只緣身在此山中)/그것은 이 몸이 산중에 있기 때문이리라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다 모르는데, 어찌 남을 알 수 있겠는가?
자기 자신은 자신이 자기라는 산중에 있기 때문에 자신의 진면목을 모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타인을 모르는가 하면 이것은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자신을 아는 것과 타인을 아는 것에는 어떤 인과관계가 있는가?
자신을 아는 것이 타인을 아는 것에 대한 전제조건인가?
자신을 아는 것과 타인을 아는 것의 상관관계는 반드시 없다고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있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제3자적 관점에서 타인을 관찰한 만큼 타인에 대해 알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부분적으로 타인에 대해 알 수 있다고 하는 것이 맞다 생각됩니다.
그렇다고 하면 자신에 대해서도 부분적으로 알 수 있다고 하는 것이 맞다 생각됩니다.
산 안에서는 산의 전체적 모습을 조망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산 밖 그러니까 다른 산이나 그 산에서 멀리 떨어진 평지에서 보면
전체적 모습을 알 수 있지만 그 산 내부의 모습에 대해선 역시 알기 어렵습니다.
안다는 것.
인류가 지금까지 축적해 온 것들이 있기에
바로 그러한 것들을 통해 자신과 타인을 이해하고
그 축적한 것들에만 의지하지 않고 새로운 경험을 통해
사람과 세상, 그리고 우주에 대해 그 앎을 넓혀가고 있다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앎을 계속 넓혀 왔는데,
과연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성경 빌립보서 2장 13절을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우리는 우리 자신이 스스로 생각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조금 더 자세히 보면
그 올라오는 생각은 입력된 정보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슬람국가에서 태어나 이슬람종교인으로 생활하는 경우를 보면
그 사람의 생각은 큰 틀에서 이슬람 종교관에서 벗어난 것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자신이 스스로 생각한다고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입력된 정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을 보면
그렇다면 그 생각이 정말 자신이 한 생각이냐 하는 것이며
여기서 자신은 무엇이라고 정의해야 하는 것인지 하는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색수상행식 즉 오온은 나가 아니다라고 합니다.
오온은 입력된 정보와 그 정보를 응용하여 표출하는 내부 프로그램에 의한 출력물이라고 하고
그리고 그 오온 외에 다른 자신은 없다고 하면
결국 스스로 생각한다는 것은 말로는 스스로 생각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스스로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뭐랄까요. 프로그램이 돌아가고 있다고 표현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아주 예외적인 경우 기존 입력된 정보의 틀을 벗어난 생각들이 올라오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예외로 어쩌면 위 성경 빌립보서에서 언급된 것처럼
사람이 아닌 외부 영역에서 어떤 새로운 생각을 입력했을 수도 있는데
이때도 역시 그런 경우를 자신이 생각한 것이라 할 수 있을까요?
알파고가 연습에 의해 몇주만에 이세돌을 능가할 실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알파고는 스스로 연습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알파고는 연습을 통해 스스로 그런 실력을 갖게 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알파고가 우리 앞에 모습을 보이고
그 이후 과정을 본 우리는
알파고 스스로 연습을 하고
알파고 스스로 그런 실력을 갖게 되었다 생각하진 않습니다.
불교가 자력신앙이라고 혹자는 이야기 하지만
부처님이 수행과정에서 지금까지와 다른 내용을 알게 되셨는데
어떻게 알게 되셨는지 하는 그 내밀한 과정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저에게 입력된 정보을 넘어선 어떤 생각들이 떠오르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믿는 종교적 신이 입력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왔었습니다.
그러나
그 부분에 대해선
그것은 제 생각일 뿐이며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누군가가
여산 전체를 보았다 해도
타인은 아직 그런 경험이 없다는 것을 안다면
자신의 경험을 강하게 주장하는 것은 어쩌면 그것은 마치 점령군과 같은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당연 있겠지만 말입니다.
종교에서 특히 교리적으로 사후 심판과 관계가 있는 종교의 경우
독선적으로 흐를 가능성을 그 자체적으로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있으면 그런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인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내세가 어떻게 펼쳐지게 될지
현세에 있는 우리들로선...
여산을 다 모른다는 언급이
앎에 있어 조금 더 잘 아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첫댓글 눈이 많이 내리고 있네요. 시커멓던 길이 전부 하얗게 변했습니다.
바쁘던 일상이 갑자기 멈춰버린 느낌입니다.
이런 생각은 어떨까요?
타인과 나는 같은 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내가 나를 관찰하는것도 나를 아는 방법이고
내가 타인을 관찰하는것도 나를 아는 방법이 되지 않을까요?
타인은 나의 거울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왜냐하면, 사람마다 생각하는 대상은 다르지만, 그 생각의 구조는 같다고 봅니다.
예를 들면, 심리적으로 우리는 누구나 무엇인가에 의존하는 마음이 있지요.
돈에 의존하는 사람, 권력에 의존하는 사람, 정치에 의존하는 사랍, 종교에 의존하는 사람 등등
마호멧을 비판하는 영화를 보는 경우
이슬람교인과 비종교인의 심리는 같지 않습니다.
마음이라는 것을 다 가지고 있지만
그 마음이 어떻게 채색되냐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요.
타인은 나의 겨울이 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달리다굼 저는 빨간 모자를 쓰고 있으나, 님은 파란 모자를 쓰고 있다면,
우리는 다른 색으로 보이지만,
모자를 쓰고 있다는 사실은 같다고 봅니다.
@올빼미 하여 같다고 하고 하여 다르다고 하지요.
같다고 할 때 왜 같다고 하는지를 살펴봐야 할 것이며
다르다고 할 때는 왜 그는 다르다고 할까를 살펴보면
조금 이해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하는 이가
다르다고 하면서 그것이 맞다고 하면
그때는 조금 상황이 달라지게 됩니다.
종교에 의존하는 사람은 돈에 의존하는 사람을 세속적이고, 탐욕적이라고 흉볼 수도 있겠지만,
의존하는 마음은 같은것이기에, 차이가 없게 되는 셈입니다.
그래서 산속에서 혼자 고립되어 사는것 보다는 세상에서 적절한 관계를 유지하며 사는것이
더 마음공부에 유리하지 않을까요?
그것은 그때 그때 다른 것 같습니다.
산 속에서 집중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좋을 때가 있고
강호에 나와 깨지면서 배우는 것이 좋을 때가 있기도 해서요.
게시글에서 프로그램이 돌아간다는 표현에 공감이 갑니다.
내가 왜 이러는지 영문을 모를때가 많거든요.
좋은 말을 백번이나 들었지만
돌아서면 곧바로 같은 반복을 하는 경우도 많지요.
누구 이야기가 아닌 제 이야기입니다.
@달리다굼 우리의 의식은 카메라와 같아서 안이비설신의 육근이 유경을 접하면 필림이 찍히듯
저장되어 있다가 스스로 또는 외부와 접촉하면 현상이 일어납니다.
사과로 저장된 정보가 우리가 눈으로 사과를 보는순간 부사니, 홍옥이니 판단을 합니다.
불교에선 그것을 종자현현 이라고 합니다
가끔 무의식에 저장된 (8시 아뢰야식)정보를 최면으로 꺼내어 범인을 잡았던 사례도 있었지요,
세상을 살아가는 개인이나 국가도
모든것을
자주적 입장과 창조적입장에서
사고하고 판단하고 행하여 나가는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주적 입장과 창조적 입장으로 살아가기 위해선
어떤 경우 그런 것을 답보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권모술수로 살며
추악한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정치로 아는 미제똥벌거지 이개찬같은
이익에따라 붙어먹는 갈보정치인들이
무수히 널린 수용소가
눈이 온다고 깨끗해질까요.
백성들의 마음처럼 그랫으면 좋으련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