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양명이 소동파 비석으로 만든 벼루와 소동파 글씨 12자
2020년 12월 10일
청나라 말기 기록을 보면 왕양명이 소동파(蘇軾, 1037-1101)가 글씨를 쓴 비석의 한 조각을 얻어 벼루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벼루에는 소동파 글씨 12자가 남았다고 합니다. 비석 조각을 얻은 시기는 가정 연간이니 또는 용장역에 귀양 갈 때라고 하는데, 시간은 서로 맞지 않습니다. 아무튼지 왕양명이 소동파 글씨 12자가 남은 비석 조각을 벼루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왕양명의 서예를 연구하는 데 필요한 자료입니다.
물론 청대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다지 믿기 어려운 것도 있습니다.
* 전영(錢泳, 1759-1844)이 쓴 글에는 북송시기 손각(孫覺)이 절강성 호주 지역에 남아있는 한나라와 당나라 비석을 모아 학교 안에 모아놓았다고 말합니다. 宋、談鑰,『(嘉泰)吳興志』,卷十四,郡守題名,孫覺 자료를 보면 부러지고 깨진 비석 대략 22개를 모아놓았다고 기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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錢泳(1759-1844),『履園叢話』,卷9,碑帖,「墨妙亭詩刻」:
북송시기 손각(孫覺, 1028-1090, 字莘老, 江蘇高郵人, 黃庭堅의 장인)이 절강성 호주부(湖州府) 지부를 지내는 동안에 한나라와 당나라 시기의 훌륭한 사람들의 서예 작품이 새겨진 비석을 수집하여 호주부 학교에 모아놓고 묵묘정(墨妙亭)이라고 불렀다. 소식(蘇軾, 1037-1101, 소동파는 손각에게 「贈孫莘老」를 써서 보냄)이 묵묘정 기록을 짓고 시(詩)도 지어 비석을 세웠다. 비석에서 “호주부(吳興) 지부는 정말로 옛것을 좋아하여, 부서지고 깨진 비석들도 사들여서 얇고 고은 비단을 뭉친 것으로 탁본을 뜹니다. 정자 안에는 거북이 빗돌 받침(龜趺)이 있고 빗돌 지붕 이수(螭首) 그림자가 담장에 어른거리는데, 빈 서재에서 조용한 낮에도 둥둥 탁본 뜨는 소리만 들립니다.”고 하였다. 이것은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오흥지(吳興志)』에서는 “담약(談鑰, 字元時, 1181년 진사)가 호주 지주가 되었을 때는 엉성한 큰 비석들이 마모되어 한나라와 당나라 각문(刻文)은 남은 것이 없고 오직 소동파 시(詩)를 새긴 빗돌 하나만 남았고 뒤에 이 비석마저 부러지고 깨져서 온전치 않다.”고 한다. 소동파 빗돌 한 조각은 가정 연간에 왕양명이 용장역 역승으로 귀양 갈 때 얻었고 다듬어 벼루를 만들었는데 소동파 글씨 12자가 남았다고 한다. 구일수(裘曰修, 諡文達, 1712-1773)의 기록에 적혀있다. 당시 고관들이 시를 지었고 그 가운데 장사전(蔣士銓, 字心餘, 1725-1785)의 칠언고시가 가장 뛰어났다. 다른 한 조각은 명나라 천계 연간 초기에 황도주(黃道周, 1585-1646)가 얻어 벼루를 만들었는데 소동파 글씨 17자가 남았다고 하며, 뒤에 요세옥(姚世鈺, 1703-1757, 字玉裁, 號慧田, 浙江歸安人)이 소장하였다가 뒤에는 절강성 동향현(桐鄕縣) 왕씨 3형제(汪文桂、汪文梓、汪文柏, 世称汪氏三子)가 소장하였다. 당시에 厲樊榭、丁龍泓、蔣心餘 등이 시를 지어 기록하였다. 나의 벗 장징군(張徵君)의 『금석계(金石契)』에 이야기가 실려있다. 내가 어렸을 때 탁본을 보았고 현재 『희홍당첩(戲鴻堂帖)』에 소동파 시의 글씨가 모두 인쇄되었는데 사옹(思翁)이 옛날 판각본을 임모한 것이며 비석에 새긴 진적은 아니다.
錢泳(1759-1844),『履園叢話』,卷9,碑帖,「墨妙亭詩刻」:
宋、孫莘老(孫覺,字莘老)嘗知湖州,彙集漢、唐諸賢名蹟,石刻於郡齋,署曰墨妙亭。東坡為作記,並賦詩刻石,中有云:“吳興太守真好古,購買斷缺揮縑繒。龜趺入座螭隱壁,空齋晝靜聞登登。”蓋紀實也。『吳興志』(宋、談鑰,字元時撰)云:“元人守湖州,粗砂大石皆磨去,是以漢、唐諸刻無有存者,惟存東坡詩一石而已。後此石亦斷缺不全。其一片嘉靖中王陽明守仁謫龍場驛丞時得之,曾琢為硯,存十二字。見裘文達公『曰修記』。一時朝貴俱有詩,蔣心餘七古一首尤為絕妙。其一片天啟初黃石齋道周得之,亦琢為硯,存十七字,為吳興姚玉裁所藏,後歸桐鄉汪氏,當時如厲樊榭、丁龍泓、蔣心餘諸公亦各有詩紀之,載吾友張芑堂徵君『金石契』中。余幼時猶見拓本,今『戲鴻堂帖』所刻全篇,是思翁取舊刻重摹,非真跡入石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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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蘇軾,「贈孫莘老(孫覺)」:
嗟予與子久離群,耳冷心灰百不聞。
若對青山談世事,當須舉白便浮君。
宋、蘇軾,「孫莘老(孫覺)求墨妙亭詩」:
蘭亭繭紙入昭陵,世間遺跡猶龍騰。
顏公變法出新意,細筋入骨如秋鷹。
徐家父子亦秀絕,字外出力中藏棱。
嶧山傳刻典刑在,千載筆法留陽冰。
杜陵評書貴瘦硬,此諭未公吾不憑。
短長肥瘦各有態,玉環飛燕誰敢憎?
吳興太守真好古,購買斷缺揮縑繒。
龜跌入座螭隱壁,空齋晝靜聞登登。
奇蹤散出走吳越,勝事傳說誇友朋。
書來乞詩要自寫,爲把栗尾書溪藤。
後來視今猶視昔,過眼百世如風燈。
他年劉郎憶賀監,還道同是須服膺。
* 杜甫,「李潮八分小篆歌」:“書貴瘦硬方通神。
* 栗尾:족제비(鼬鼠毛) 털로 만든 붓.
왕희지가 비단에 쓴 「난정서」는 당태종 이세민의 유언에 따라 묘지(昭陵)에 들어갔으나,
세상에 전해오는 왕희지 필세(筆勢)는 아직도 용이 날아오르는 듯하네.
당나라 안진경이 왕희지 필법을 바꾸어 새로운 필법을 창작하였는데,
가느다란 힘줄들이 뼈에 꼭 붙어있는 것(入骨)이 마치 가을의 송골매 근육과 같네.
당나라 서호(徐浩, 703-782)와 아들 서교(徐嶠)도 뛰어났는데,
글씨 밖까지 필력이 넘치고 붓끝 힘이 숨겨져 있네.
진(秦)나라 이사(李斯)이 썼다는 역산 각석(嶧山 刻石)의 전형은 아직도 남아,
천년을 내려와 당나라 이양영(李陽冰)까지 영향을 주었네.
두보(杜甫)는 서예를 평론하며 필획에는 비계 없이 근육이 눌러도 단단한 것(瘦硬)이 좋다고 하였으나,
이 평론은 옳지 않아 나는 받아들일 수 없네.
필획이 짧거나 길고 살지거나 마른 것은 각기 특징이 있으니,
당나라 현종이 좋아한 살진 양귀비(楊玉環) 또는 한나라 성제(成帝)가 좋아한 마른 조비연(趙飛燕)을 누구인들 싫어할까?
호주부(吳興) 지부는 정말로 옛것을 좋아하여,
부서지고 깨진 비석들도 사들이느라고 큰돈을 많이 썼네.
정자 안에는 거북이 빗돌 받침(龜趺)이 있고 빗돌 지붕 이수(螭首) 그림자가 담장에 어른거리는데,
빈 서재에서는 조용한 낮에도 둥둥 탁본 뜨는 소리만 들리네.
당신이 탁본한 것을 벗들에게 나누어주어 강소성과 절강성 지역에 널리 퍼졌는데,
좋은 일을 하였다는 소문은 벗 사이에서 자랑이라네.
나에게 서신을 보내 시를 짓고 반드시 직접 붓으로 쓰라고 하니,
족제비 털로 만든 붓을 들고 아주 좋다는 절강성 소흥부 섬계(剡溪)에서 생산된 종이에 쓰네.
뒷날은 오늘을 지나간 옛날이라고 여기겠지만,
빠르게 백대(百世, 百代)가 지나면 내 글씨를 비석에 새겨놓더라도 남아있을는지 바람 앞에 등불처럼 아슬아슬하네.
뒷날 사람들은 유우석(劉禹錫, 772-842)이 하지장(賀知章, 659-744)을 그리워하듯이 우리를 기억하며,
우리와 함께 살고 있었다면 반드시 존경하겠다고 말하겠지요.
* 瘦硬:杜甫,「李潮八分小篆歌」:“書貴瘦硬方通神.”
마를 수(瘦) 뜻은 돼지고기의 예를 들면 비계(지방)가 있는 것은 비육(肥肉)이고 비계 없이 살코기와 힘줄(筋)이 있는 근육을 수육(瘦肉)이라고 구분합니다. 단단한 경(硬) 뜻은 근육(肉筋)만 있는데(瘦) 물렁물렁하지 않고 눌러도 단단한 것을 말합니다. 수(瘦)와 경(硬)은 두 가지 뜻이 아니고 수(瘦)가 중심 뜻이고 경(硬)이 수(瘦)의 정도와 상황을 부연 설명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수경(瘦硬)은 비계 없이 단단한 근육만 있다는 뜻입니다.
“수경(瘦硬)하여야만 통신(通神)한다.”는 말뜻은 도가(道家) 양생술에서 육근골(肉筋骨) 셋으로 나누고 각기 정기신(精氣神)에 분배하여 설명합니다. 근(筋)이 아주 잘 발달한 뒤에야 뼈(骨)에 들어있는 신(神)을 이해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뼈에 신(神)이 있기에 높은 단계의 입신(入神)을 말하며 입골(入骨)은 입신을 말합니다. 따라서 필획의 수비(瘦肥)를 따지는 문제는 입골 곧 입신(入神) 경지를 바라보려는 것입니다.
宋、談鑰,『(嘉泰)吳興志』,卷十四,郡守題名,孫覺︰
右正言,直集賢院。熙寧四年十一月到任,六年三月移知盧州。熙寧中,以右正言守郡,始至,歲適大水,民人饑饉,欲相率亡去。公振倉廩,躬自撫循,富有皆爭出穀以佐官,所活不可勝計。又以其餘暇因網羅遺逸,得前人賦詠數百篇,為『吳興詩集』。其他刻尚存而偃仆斷缺於荒陂草野之間者,皆集於墨妙亭。(見舊編)
宋、談鑰,『(嘉泰)吳興志』,卷十八,「碑碣」,州治︰
唐太宗御製聖教序(僧智永集王羲之書,在墨妙亭。)
漢故梁相費府君碑(在墨妙亭。)
陳孝義寺碑(在墨妙亭。)
射堂記(在墨妙亭。)
項王蔬食文(在墨妙亭。)
干祿字書碑(在墨妙亭。)
斷碑(在墨妙亭。)
晉吳興太守謝公碑(在墨妙亭。)
太守歷官記(在墨妙亭。)
白蘋洲五亭記(在墨妙亭。)
袁高茶山述(在墨妙亭。)
沈府君墓銘(在墨妙亭。)
胡夫人墓銘(在墨妙亭。)
吳氏墓銘(在墨妙亭。)
秦篆嶧山記(在墨妙亭。慶歷戊子摹刻,參知政事宋庠跋。)
寶章法帖一部(在墨妙亭。)
梁太守柳惲並寇準江南曲(在墨妙亭。)
唐太守楊漢公杜牧詩(在墨妙亭。)
張逸碧瀾堂陳堯佐芳菲園詩(在墨妙亭。)
東坡六客詞(在墨妙亭。)
東坡墨妙亭記(紹興丁卯,蔣燦書,重刻。)
陳吏部修城記(在墨妙亭。)
卷十八,吳興詩集︰
熙寧中,知州事孫覺裒次為三卷,自晉至唐凡二百首。
三碑︰
舊編云︰昔有漢三□碑在其鄉,因以名其鄉。今移在烏程縣墨妙亭。按『統記』云︰顧祕、虞潭、謝安三碑在郡南道西。徐陵「孝義寺碑」云︰三碑之風可仰,蓋顧祕、虞潭、謝安皆為郡守,事必有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