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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參 請 機 緣 第 六
(6. 참배하고 청법하는 기연품)
이 품에서는
제자의 근機와 스승의 인緣이 맞아
(계합) 법을 청해 듣는(법거량)
찰라에 깨닫게 되는
계기(조건)를 기연이라하며
학인이 조사를 찾아 뵙고
참문하는 것으로
10여분의 기연을 기록한 부분이다
師自黃梅得法하시고 回至韶州曹侯村하시니 人無知者이나
有儒士劉志略이 禮遇甚厚하였다 志略이 有姑爲尼하니
名無盡藏이라 常誦大涅槃經하였다 師께서 暫聽하시고
卽知妙義하시고 遂爲解脫하시니 尼乃執卷問字이니 師曰하시되
字卽不識이니 義卽請問하라시니 尼曰하되 字尙不識이신데
曷能會義니까 師曰하시되 諸佛妙理는 非關文字라하심에
尼驚異之하여 遍告里中耆德云하되 此是有道之士이니
宜請供養하라함에 有晋武侯-玄孫曹叔良-及居民이 競來瞻禮하니라.
조사께서 황매(五조 홍인대사)로부터
법을 얻으시고 소주 조후촌에 돌아오시니
사람들이 아는 이가 없었으나
선비 유지략이 있어
매우 두터운 예로 맞았다.
지략의 고모가 있어 여승이 되어
법명이
무진장인데 항상 대열반경을 외웠다.
조사께서 잠깐 들으시고
곧 깊은(奧妙) 뜻을 아시고
따라서 해설해 주시니
여승이 이에 책을 들고 글을 물으니
조사께서 이르시기를
"글자를 잘 알지 못하니 뜻을 청하여 물으라"
하시니
여승이 이르기를
"오히려 글자를 모르시는데
어찌 뜻을 알수 있나이까?"
조사께서 이르시기를
"모든 부처님의 오묘한 진리는
문자에 관계하지 않는 것이니라"
하심에
여승이 이에 놀랍고 이상히 여기어
마을 가운데 다니며 두루 고하고
덕이 높은 노인에게 이르기를
"이분은 도가 있는 보살(大士)이시니
마땅히 청하여 공양하라"
함에 진무후의 현손인 조숙량과
주민들이 다투어 와서 우러러 뵈었다.
강설:
법을 깨달았을지라도 아는 이가 없으면
유명하지 않은 것이야 당연하다 하겠다.
깨달음이 형상 있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요즘 명안종사가 귀한 시대에 이르르게 됨에
더욱 그러하니 큰 스님이라 칭하거나
조실스님, 종사, 선사란
도를 이루어 명안종사의 인가를 받은
대덕스님을 칭하는 것인데
근자에 와서는
그야말로 큰절 또는 종단의 직위를 가진
세속적 세력이 있는 이면 너나없이
큰스님이요
조실이다.
큰 스님이란
마하의 큰 도를 성취했다는 의미인 것이다.
3∼40년 전 만 해도 조실은
인가받은 이가 없으면
차라리 비워 두는 자리였으나,
지금은
법을 전해 받은 이도 거의 없을 뿐 만 아니라
세력이 큼이 큰스님이요
조실로 둔갑하게 된 괴이한 말법시대가 되 버렸으니
안타까움을 금할수 없다.
법답지 못한 법문을
그야말로 사자좌에 겁없이 올라
주장자를 굴리며 사자후랍시고
원숭이 소리를 질러 대어도
이 잘못된 처사를 누구도 탓하거나
지적하는 이가 없으며 스스로 깨친양 옳다한다.
선방에 앉은 수자들에게
화두를 근기 따라 간택해주는 이도,
깨달음을 점검하고 법을 거량하는 탁마도
거의 사라지다시피 한지 오래인것 같다.
법상에 감히 올라 마치 깨침을 열어 보이는 듯
흉내를 내나 살펴 보면 책을 읽고 들은 바를
주어 엮어 내는 남의 말이지
자기 스스로의 깨친 바의 불지견의 설법이 아니니,
듣는 이들은 모를지라도 스스로는 알면서도
죄업을 더하고 있는 현실이다.
법은 언설에 있지 않으며 깨달음에 있으니
깨친 이가 아니면 살필 수가 없으니
누가 가릴 것인가?
오호 통재로다!
육조께서 비구니의 대열반경 읽는 것을 듣고
대의를 알고 해설해 줄수 있었던 것도
법이 문자에 있지 않는 말밖의 소식임을
증명하는 대목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時에 寶林古寺가 自隋末-兵火已廢가된 遂於故基에
重建梵宇하고 延師居之하니 俄成寶坊하다 師住하신지
九月餘日에 又爲惡黨의 尋逐으로 師乃遁于前山하자
被其縱火-焚燒草木하여서 師께서 隱身 入-石中得免하셨다
石於是-有師趺坐膝痕 及衣布之紋因하여 名避難石했다
師憶五祖-懷會止藏之囑하시고 遂行하여 隱于二邑焉하셨다.
때에 보림사라는 옛절이
수나라 말기에 병화로 인하여
타서 폐허가 된 옛터에
다시 큰 사찰을 다시 세우고
조사를 모시어 머무시게 하니
얼마 걸리지 않아 도량을 이룩하였다.
조사께서 주석하신 지 9개월 여가 되어
또 악당들이 찾아옴으로
조사께서는
이에 앞산으로 가서 숨으시자
그들이 불을 놓아 초목을 태워서
조사께서는 돌 틈에 몸을 숨겨 모면하셨다.
그때 조사께서 가부좌 하셨던 무릎 흔적과
옷 자락의 무늬가 이 돌에 남아 있음으로 인하여
피란석이라 이름하게 된 것이다.
조사께서는
五조께서
"회자(懷)든 고장에서 멈추고
회자(會)든 곳에 숨으라"
하신 당부를 잊지 않으시고
드디어 따라 행하여 이 두 고을에 숨으셨던 것이다.
강설:
보림사는
일찌기 인도승 지약삼장이 이곳을 지나다가
인도의 보림산과 흡사하다하여
보림사를 세우라는 당부에 따라
지방장관의 주청으로 나라에서 보림사를 지었으며,
당나라 중종 황제 때 칙명으로
보림사를 중흥사라 고쳤으며
3년 뒤에는 법천사로 다시 고쳤으나
수나라 때 전쟁으로 불타고 빈터 만 남게 되었는데
六조를 모시고 보림사로 다시 이름하여
중창하게 되었다.
조사께서는
끈질긴 삿된 이들로 하여 몸을 피하여
산중에 숨게 되셨을 때 산에 불까지 질렀으나
바위 틈에 몸을 숨겨 위기를 모면하신 자리를
피란석이라 이름하여 지금도 유명한 성지가 되었으니,
정법을 폄이 이토록 험난한 것이다.
요즈음 포장된 邪법에는 문전성시를 이루나
정법은 아는 이가 드물다,
법연이란 이토록 참으로 귀한 것이다.
그러므로 "백천만겁난조우"란 정법 만나기가
어렵다하신 뜻이다는 것이다.
一僧法海는 韶州曲江人也라 初參祖師問曰하되 卽心卽佛을
願垂指諭하소서 師曰하시되 前念不生이 卽心이요 後念不滅이
卽佛이며 成一切相이 卽心이요 離一切相이 卽佛이니
吾若具說이면 窮劫不盡이니 聽吾偈하라 曰하시되
卽心名慧요 卽佛乃定이니
定慧等等하면 意中淸淨이라
悟此法門함은 由汝習性이니
用本無生이니 雙修是正이니라
法海가 言下大悟하여 以偈讚曰하되
卽心元是佛이거늘 不悟而自屈이라
我知定慧因이니 雙修離諸物이네.
법해라는
한 승은 소주 곡강 사람이다.
처음 조사를 참례하고 여쭙기를 "
곧 마음이 곧 부처라 이르심을
원컨대 가르쳐 깨우쳐 주옵소서"
조사께서 이르시기를
"앞 생각 나지 않음이 곧 마음이요,
뒷 생각 없어 지지 않음이 곧 부처이며,
모든 상을 이루는 것이 곧 마음이요,
일체의 상을 여읨이 곧 부처이니
내가 만약 모두 말하려면
겁이 다 해도 다하지 못하는 것이니
나의 게송을 들으라" 하시고 이르시기를
※
마음이 곧 이름하여 혜요
(마음은 곧 반야가 있음이요)
곧 부처가 이에 정이니
(부처는 본래 적정부동(定)한 것이니)
정과 혜가 같고 같아서
(따라서 정과 혜는 함께 둘 아니니)
뜻은 바로 청정함이라
(이 뜻은 맑아 깨끗함인 것이다)
이 법문을 깨달음은
(이 말에 깨달음은)
네가 익힌 마음으로 말미암음이니
(스스로 닦아 익힌 선근이지 대신함이 아니니)
작용은 본래 남이 없음이니
(작용함은 달리 나는 것이 아닌 마음 그대로 쓰임이니)
쌍으로 닦아야 바로 옳으니라
(정혜를 함께 닦아 증득해야 하는 것이니라)
법해가 말씀아래 크게 깨닫고
게송으로써 찬탄하기를
곧 마음이 원래 부처거늘
(자심이 본래 부처건만)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 굽었어라
(깨닫지 못하고 잘못 헤매였네)
내가 정혜의 인연 알았으니
(마음이 부처요 정혜임을 알았으니)
쌍으로 닦아 모든 것을 여의었네
(일체가 공함을 깨달아 정혜를 쌍收했네)
강설:
한 생각 나지 않는 마음(집착심이 없음)과
뒷 생각 없어지지 않음(항상 묘용함)이 마음이요
곧 부처인 청정 본성인 것이다.
모든 상을 이룸(일체 만유를 만:
(一體唯心造)이 마음이니
작용함이 있음(慧:用)이요,
일체의 상을 여읨(體: 定: 空)이
곧 부처인 것이니
말로써 이를 수 없는 것을 말로써
갖가지로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끝없이 설해도 실상 그대로를 이를 수 없는 것이라
다만 말 아래 스스로 깨달아 보아 아는 것이다.
이 마음이 곧 부처임을 증오하는 것은
3학(계, 정, 혜)으로 정혜를 쌍(함께)으로 닦아(修)서
쌍으로 거두(收: 증득)어야 하는 것이다.
"즉심즉불"의 고사가 있으니 대매 법상선사가
처음 마조 도일선사를 참문하여
"부처가 무엇입니까?"하니
"마음이 곧 부처(卽心卽佛)니라"
하는 말씀을 듣고
곧 마음이 열려 대매산에 들어가 떼집을 짓고
20여년 머물러 보림정진하니
주위에 도인이 있다고 소문이 자자하여
마조선사가 듣고 사람을 시켜 시험했다.
그가 "화상께선 마조로부터 무엇을 얻어
이렇게 계십니까?" 하니
"사께서 마음이 곧 부처라 했소" 하자
"요즘 마조의 불법이 다릅니다" 하니
"어떻게 달라졌소?" 하여
"요즘은 마조께서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다(非心非佛) 하십니다" 하니
"그 늙은이는 그렇게 할지라도
나는 마음이 곧 부처요" 하였다.
이 말을 들은 마조선사께서
"매실이 익었구나" 하고
간접인가를 하셨던 것이다.
僧法達은 洪州人으로 七歲出家하여 常誦法華經인데
來禮祖師함에 頭不至地거늘 祖訶曰하시되 禮不投地는
何如不禮리니 汝心中에 必有一物이니 蘊習何事耶인가
曰하되 念法華經을 已及三千部이니다 祖曰하시되
汝若念至萬部하여 得其經意라도 不以爲勝則이면 與吾偕行거니와
汝今負此事業하여 都不知過하니 聽吾偈라하시고 曰하시되
禮本折慢幢이거늘 頭奚不至地인가
有我罪卽生하고 亡功福無比리라.
승려 법달은
홍주 사람으로 七세에 출가하여
항상 법화경을 외웠는데
조사를 뵈옵고 절을 하는데
머리가 땅에 닿지를 않거늘
조사께서 꾸짖어 이르시기를
"땅에 닿지도 않는 절을 하는 것은
누구도 절을 하는 것과 같다 하지 못하리니
네 마음 가운데 반드시
한 가지 일(物)이 있기 때문이니
무슨 일을 익혀 쌓았느냐?" 하시니
이르기를
"법화경 외우기를 이미 삼천부에 미쳤나이다"
"네가 설사 외우기를 만부에 이르러서
경의 뜻을 얻었다 할 지라도
그것을 훌륭한(자만) 것으로 삼지 않으면
나와 더불어 함께 행하려니와
네가 이제 이일을 자부하여
도무지 허물을 알지 못하니
나의 게송을 들으라" 하시고 이르시기를
절은 본래 아만의 기를 꺾는 것이거늘
(절은 하심하는 공경의 예이거늘)
머리가 어찌 땅에 닿지 않는가
(아만이 공고하여 머리가 닿지 않으니)
내가 있음으로 죄가 생기고
(아집이 남아 죄업을 짓게 되고)
功을 잊으면 복이 비할데 없으리라
(안다는 생각 잊으면 도를 이루리라)
강설:
깨달음은
일체가 평등함(진공)을 증오하게 되므로
아만의 상을 자연 여의게 되는 것인데
안다는 생각을 갖게 되면 아상은 오히려
커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절은 하심과 공경의 예인데
머리를 바닥에 닿지 않는 절은
절이라 할수 없는 형식된 아만의 표현임으로,
六조께서 법달의 절하는 모습에서
저가 안다고하는 자만심이
팽배해 있음을 간파하시고
"무엇을 아는 것으로 쌓았는가?"
물으신 것이다.
법달이 법화경을 삼천번이나 읽었다 했으나
삼천이 아니라 만번을 읽어 달달 외우고
뜻을 안다 해도
그것을 알았다는 자부심이 있다면
無我의 도리를 깨우치지 못하여 아상이 있음이니,
참으로 깨달은 경계가 아닌 지식일 뿐이라
잘못된 공부는 이렇게 아상 만 높여
비뚤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지식의 지도는 반드시 요긴한 것이다.
師又曰하시되 汝名什 인가 曰하되 法達이니다 師曰하시되
汝名法達이니 何曾達法인가 復說偈曰하시되
汝今名法達이나 勤誦未休歇하니
空誦但循聲하고 明心號菩薩이니라
汝今有緣故로 吾今爲汝說하노라
但信佛無言하면 蓮華從口發하리라.
조사께서 또 이르시기를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르기를
"법달이라 하옵니다"
조사께서 이르시기를
"네 이름이 법달이라 하니
어찌 일찌기 법을 통달했는가?" 하시고
다시 말씀을 게송으로 이르시기를
네가 지금 이름은 법달이나
(이름은 법을 통달했다 하나)
부지런히 외우고 쉬지 못하니
(글에만 매달려 마음을 쉬지 못하니)
공연히 외기만 하면 소리 만 쫓게 되고
(글에 만 쫓아 외우는 건 공연한 짓이요)
마음을 밝혀야 보살이라 부르니라.
(마음을 밝혀야 보살(깨달은)이라 하니라)
네가 이제 인연이 있으므로
(네가 법연이 있으니)
내가 너를 위해 설하노라
(알아 듣고 깨달을수 있으니 설하리라)
다만 부처가 말이 없음을 믿으면
(부처가 말이 없음(진공묘유)을 알면)
연꽃이 입에서 피어나리라.
(입에서 연꽃이 피는 것을 보리라)
강설:
이름은 법달이로되
법화경 3천독을 해서 외울지라도
글에 굴림을 당했을 뿐, 글 가운데 깊은 뜻은
깨달아 이르지 못했으니 글을 굴릴 수 있어야
법을 통달했다 할수있는 것이다.
지극한 도는 말이 아니라
말 밖의 소식이요
말은 방편일 뿐이니,
손가락을 보고 잡아 꺾어도
가리키는 달을 보지 못했다면
얻는 바가 없으니,
3천독을 했다 3천배를 했다 하여 떠드는 것은
자칫 아상만 키울 뿐인 것이다.
이에 6조스님의 게송으로
법달의 아만이 조복되어 꺾인 것이다.
※
부처님의 가르침인 교설은
말 있음으로써 말 없음에 이르르고
조사의 돈교는
말 없음(말 밖의 소식)으로 말 없음에 이르는 것이다.
구경은 하나로되
방편의 길은 다르다.
"부처가 말이 없는 줄 알면 입에서 연꽃이 피리라"
이 말 아래 깨쳐 들어야 한다.
연꽃 피는 것을 어느 곳에서 보았는가?
연꽃 피었음을 보지 못하는가?
전광석화같이 지나 갔음을 깨달아 보아야 한다.
達이 聞偈悔謝曰하되 而今而後에 當謙恭一切하리다 弟子가
誦法華經이나 未解經義하여 心常有疑이오니
和尙께서 智慧廣大로 願略說經中義理하소서 師曰하시되
法達은 法卽甚達이라도 汝心不達이기에 經本無疑거늘 汝心自疑니라
汝念此經에 以何爲宗인가 達曰하되 學人은 根性暗鈍하여
從來但依文誦念이니 豈知宗趣이리까 師曰하시되 吾不識文字하니
汝試取經하여 誦之一 하라 吾當爲汝解說하리라
法達이 卽高聲念經하여 至譬喩品하자 師曰하시되 止하라
此經은 元來-以因緣出世로 爲宗이니 縱說多種譬喩이나 亦無越於此니라 何者因緣인가 經云하시되 諸佛世尊이 惟以一大事因緣故로
出現於世하시니 一大事者는 佛之知見也니라
世人이 外迷着相하고 內迷着空이니 若能於相離相하고
於空離空하면 卽是內外不迷이니 若悟此法하여 一念心開하면
是爲開佛知見이니라.
법달이 게송을 듣고 뉘우쳐 사뢰기를
"지금 이후로는
마땅히 일체에 겸손하고 공경하겠나이다.
제자가 법화경을 외웠으나
경전의 뜻을 알지 못해서
마음에 항상 의심이 있사오니
화상께서는 지혜가 넓고 크시오니
원하옵건대 간략한 경 가운데의 바른이치를
설해주옵소서"
조사께서 이르시기를
"법달은 법리는 곧 깊이 이르렀을지라도
네 마음을 통달하지 못한 때문에
경문에는 본래 의심할 것이 없거늘
네 마음이 스스로 의심하는 것이니라,
네가 이 경을 외움에 무엇으로써
종(근본이 되는 긴요한 뜻)을 삼는가?"
법달이 이르기를
"학인은 근성이 어둡고 둔하여
전 부터 다만 글에만 의지하여 외우고
생각했을 뿐 이오니
어찌 종취를 알겠사옵니까?"
조사께서 이르시기를
"나는 문자를 알지 못하니
네가 경을 한번 외우라.
내가 마땅히 너를 위해 해설하리라"
법달이 곧 큰소리로 경을 외워
비유품에 이르자
조사께서 말씀하셨다.
"그만 그쳐라,
이경은 원래 세간의 인연을 뛰어남으로써
종을 삼았으니 비록 여러 가지의 많은 비유를
들어 설하셨으나 또한 이것을 넘음이 없느니라.
무엇을 인연이라 하는가?"
경에 이르시기를
"모든 부처님들이신 세존이 오직 일대사
(생사를 뛰어 넘는 일) 인연을 위한 연고로
세상에 출현하셨다" 하시니
일대사란 부처님의 지견(보리)이니라.
세상 사람이 밖(現像)으로 미혹하여
相에 집착하고, 안(心)으로 미혹하여
空에 집착하나니,
만약 능히 상에서 상을 여의고
공에서 공을 여의면
곧 안팎이 어둡지 않을 것이니
만약 이 법을 깨달아서 한 생각 마음이 열리면
이것이 부처님의 지견이 열린 것이니라.
강설:
"법을 곧 깊이 달했다"는 것은
심오한 경 가운데 뜻을 마음에 계합하여
확철하게 깨우친 것이 아니라
글자에 굴려 意解로 헤아려 아는 것으로
법상이 있는 것은,
참으로 증오한 통달이 아니기 때문에
본성인 마음을 통달하지 못한 지식일 뿐인 것이다.
법은 문자에 있지 않으므로
법달이 읽는 묘법연화경을 듣고
경의 종지를 아신 六조께서 법달에게 물었으나
종지를 답할 경계가 아님은 당연한 것이다.
법화경의 근본 뜻인 종지는
세간의 인연을 뛰어남(출세간)이니
즉 일체상을 여의고 본성을 깨쳐 들어
생사를 뛰어나 항상하는 즐거움을 증득함인 것이다.
중생들이 알게 하시고자 이 비유 저 방편 등
갖가지로 교설 하셨으나,
구경의 지시는 이것을 깨우쳐들게 하심인 것이며
부처님의 출현하신 뜻도 오직 이것인 것이다.
여기서 종지로 삼는 인연이란
중생들로 하여금 불지견을 증득하는 것을
목적으로 세상사에 집착함을 여의게 함이니
세상사는 상견으로 상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이 相이란 마음의 그림자로 본심에서
생각을 일으킴을 因으로 하여 조건이 되는
緣의 결果로 잠시 생겼다가 필경 사라지는 것이다.
따라서 밖으로 상을 여의고
안으로 공(마음은 빈 것)이라는 것(생각) 마저도
집착하지 않아 공이라고 하는 공도 여의게 되면
안과 밖이 없는 안팎이 비어 사무치게 밝아
(내외명철) 理에도 事에도 어둡지 않게 되는 것이
불지견을 증득함인 것이다.
부처님의 출현하신 목적도
이것을 깨우쳐 스스로 부처임을 지시하시고 자 함이니,
본래 부처인 고요한 마음이 나투어 출현하심으로
부처님이 되시어 설해 보이시게 된 것이다.
참독송이란
입으로 읽고(송) 마음으로 뜻에 합하는 것(독)이다.
염불 또한 내 이름(불)을 하나 같이 불러
계합하여 생각(념)을 하는 것이니
타력인듯 하나 또한 자력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니,
아무리 경을 읽고 외워도 그 뜻에 계합하지 못하고
경 가운데 긴요한 뜻인 宗을 깨달아
구경으로 돌아 이르는 趣를 얻지 못하면
헛된 수고일 뿐 자랑 삼을 일이 못되는 것이나
중생들이 목적은 제쳐두고 수단만을 자랑하여
아만만 키워 전도몽상의 삿된 길로 빠져들게
되기 쉬운 것이다.
佛은 猶覺也라 分爲四門하면 開覺知見하며 示覺知見하며
悟覺知見하며 入覺知見이라 若聞開示하고 便能悟入하면
卽覺知見-本來眞性이 而得出現이니라
汝愼 勿錯解經意이니 見他道開示悟入하고 自是佛之知見이라
我輩無分이라하고 若作此解하면 乃是謗經毁佛也니라
彼旣是佛이라 已具知見인데 何用更開리요 汝今當信하라
佛知見者이 只汝自心이요 更無別佛이니라
蓋爲一切衆生이 自蔽光明하고 貪愛塵境하여 外緣內擾하여
甘受驅馳하니라 便勞他世尊께서 從三 起하시어 種種苦口로
勸令寢息이니 莫向外求하면 與佛無二이라 故로 云開佛知見이라하시니
吾亦勸一切人하나니 於自心中의 常開佛之知見하니라
世人心邪하여 愚迷造罪하며 口善心惡하여 貪嗔嫉嫉하고
我慢으로 侵人害物하여 自開衆生知見니라
若能正心으로 常生智慧하여 觀照自心하며 止惡行善하면
是自開佛之知見이니 汝須念念에 開佛知見하고
勿開衆生知見니라 開佛知見하면 卽是出世이요
開衆生知見하면 卽是世間이니 汝若但勞勞執念으로
以爲功課者이면 何異 牛愛尾인가.
※
부처란 오직 깨달음(覺)이라
네가지 門으로 나누면
깨달음은 지견을 열게 되며,
깨달음은 지견을 보이게 되며,
깨달음은 지견을 깨달으며,
깨달음은 지견에 들어 가게 되는 것이니라.
만약
열어 보이심을 듣고 문득 능히
깨달아 들어 가면
곧 깨달음의 지견인 본래의 참 성품이 나타남을
증득하니라.
너는 삼가 경의 뜻을 잘못 알지 말아야 하니
'남이 열어 보임으로 깨달음에 들어 간다'
말한 것으로 알아서 스스로
"이것은(열어 보이시는) 부처님의 지견이라
내같은 무리는 분(몫: 해당됨)이 없다"고
만약 이렇게 알게 되면
이에 곧 경을 비방하는 것이고
부처님을 헐뜯는 것이 되니라.
저(본성)는 이미 佛이라 지견을 갖추었는데
어찌 다시 열어줄 것을 쓰리요.
너는 이제 마땅히 믿으라,
부처님의 지견이 다만 네 스스로의 마음이요
따로 부처가 없느니라,
대게 모든 중생들이 스스로 광명을 가리고
더러운(塵) 경계를 탐애하여 밖으로 반연
(끄달림)하고
안으로 흔들려서(산란하여) 분주히 다님
(윤회)을 받게 되느니라.
문득 수고로이 세존께서 삼매로 부터 일어 나시어
(나투셔) 가지 가지로 고달프게 입(말씀)으로 이끌어
주시기에 자고 쉬는 것을 수고로이 하셨으니
밖을 향해 구하지 말면
부처와 더불어 둘이 없음이라,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부처의 지견을 연다'고 하신 것이니,
나도 또한 모든 사람에게 권하나니
스스로 마음 가운데의 부처의 지견을 항상 열라 하니라.
세상 사람들이 마음이 삿되어 어리석고 미한 탓으로
죄를 짓게 되며 입(말)으로는 선하지만
마음으로는 악하여, 탐내고 성내고 질투하고 아첨하고
아만으로 사람을 다치게 하고 사물을 해롭히며
스스로 중생의 소견을 여느니라.
만일 능히 바른 마음으로 항상 지혜를 내어
자기 마음을 비춰 보며(회광반조하여)
악을 그치고 선을 행하면
이것이 스스로 불지견을 여는 것이니,
너는 모름지기 생각 생각 부처의 지견을 열고
중생의 소견을 열지 말도록 하라,
부처의 지견을 열면 곧 이것이 세간을 떠난 것이요
중생의 소견을 열면 곧 이것이 세간이니,
네가 만약 다만 수고로이 집착하는 생각으로
그것을 공부한 것으로 삼는다면
얼룩소가 꼬리를 애착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강설:
부처는 本覺(법신)이며
이를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
곧 始覺(보신)이니
깨쳐듦이나
깨달을 본성이 不二로 부처
(佛)가 곧 깨달음(覺)과
같다 하신 것이다.
따라서
깨닫게(불지견에 들어 불지견을 증오하게)
됨으로써 불지견을 열어 보이게(교시) 되는 것이니,
이 법문을 듣고 문득 깨달아 들면
본래의 참면목인 실상을 증하게 되는 것이다.
"열어 보임으로 깨달아 들어간다"는 말에
국집하여 밖(남)으로 부터 깨닫게 해준다고
잘못 알아서는 그르치는 것이니
깨달음은 스스로 체달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원래 스스로 지견을 구족한 부처이거늘
어찌 밖으로 구함으로 찾고자 하며
밖으로 상에 끄달려 집착하고
안으로 번뇌, 망념으로 어지러워진
업행으로 인하여 六도윤회에 분주하게
생사 출몰함을 안타까이 생각하시어
자비심을 내셔서 삼매로부터 일어 나시어
(문득 부처님이 출현하시어)
깨달음을 열어 보이시어
스스로 깨달아 들게 하심이 수고로우셨으니
(빌어 드시고 노숙하시고 쉴 사이 조차 없이
東奔西走, 橫說竪說하심) 중생이 밖을 향해
구하지 않고 스스로 깨쳐 들어 계합하면
부처와 둘 아니니
六조께서도
같은 불지견으로 이와 같이 이끄신다는 것이다.
"상견으로 자기 소견을 짓고
법이라고 열어 보이는
허물은 삿된 아만이 원인이 됨이라,
항상 밝은 지혜로 스스로 반조하여
악한 생각과 행을 그치고
선한생각과 행을 함으로써
불지견을 열면 이것이 세간을 여읜 것이다"
하는 것이다.
따라서 안다는 생각, 옳다는 생각을
집착하는 것은
얼룩소가 보잘 것 없는 꼬리
(삿되거나 지말적인것)를
자랑하는 것과 같다고 비유하셨다.
어리석은 중생이 삿된 외도의 소견으로 잘못 되어,
모든 것은 무常하다 하여 사람도 죽으면
몸과 마음도 모두 멸한다는 생각으로
인과를 무시한 단견낙공의 소견을 짓거나,
상대적인 함이 있는 유위법인 상견에 집착하거나,
일체상을 여의어야 한다는 말에 떨어져
무위법이라는 법에 국집해서
오히려 법상에 걸리거나,
항상한다는 말에 집착하여
삶과 죽음은 항상 계속 되풀이 된다는
常견에 국집하게 되어,
중도의 因果 인연법을 모르게 되니,
본래 원만구족한 진여자성을 깨우쳐
이 모든 세속법에 물들지 않고 뛰어 넘는 것이
일대사이며 불지견이므로 밖에서
(불조나 누가) 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중생으로 하여금
스스로 열게 하며,
스스로 보며,
스스로 깨치게 하며,
스스로 들게 한다 하시는 것이다.
이 일이 중생을 뛰어나
불지에 오르는 일대사인 것이다.
達曰하되 若然者이면 但得解義하면 不勞誦經耶이니까 師曰하시되
經有何過이기에 豈障汝念인가 只爲迷悟이 在人하고 損益由己니
口誦心行하면 卽是轉經이요 口誦心不行하면 卽是被轉經이니라
聽吾偈하라 曰하시되
心迷法華轉하고 心悟轉法華이나니
誦經久不明하면 與義作讐家되리라
無念念卽正이요 有念念成邪이니
有無俱不計하면 長御白牛車하리라.
법달이 여쭙기를
"만일 그렇다면 다만 뜻만 알면
수고롭게 경을 외우지 않아도 되나이까?"
조사께서 이르시기를
"경이 무슨 허물이 있기에
어찌 너의 외움을 막을 것이겠는가?
다만 미하고 깨달음이 사람에게 있고
손해되고 이익됨이 자기로 말미암음이니,
입으로 외우고 마음으로 행하면
곧 이것이 경을 굴리는 것이요,
입으로 외우고 마음으로 행하지 않으면
곧 이것이 경(글)에게 굴림을 받는 것이니라,
나의 게송을 들으라" 하시고
이르시기를
마음이 미혹하면 법화에 굴리고
(깨닫지 못하면 法門의 文字에 굴림을 당하고)
마음을 깨달으면 법화를 굴리나니
(깨달으면 法文을 스스로 굴리나니)
경을 읽어도 오래 밝히지 못하면
(읽기만 하고 깨닫지 못하면)
경의 뜻과 더불어 원수가 되리라.
(경(말씀)의 뜻과는 등지게 되니라)
생각이 없음이 생각이 곧 바름이요
(망상없는 무념이 곧 바른 마음이요)
생각이 있음이 생각이 삿됨을 이루니
(분별 상념이 삿되게 되니
유무를 모두 계교하지 않으면
(있고 없다는 생각을 여의면)
백우거를 타고 길이 놀리라.
(불지위에 올라 영원히 자재하리라)
강설:
법달이 "경의 뜻만 알면 읽지 않아야 하느냐?" 고
물음에 6조께서
"경이 무슨 잘못됨이 있어 읽지말라 할 것인가?
읽되 입으로 외우(계합)고
마음에 합일된 생각을 내어 행하면
경을 스스로 굴림(자성의 불지견)이 되나,
입으로 글을 쫓아 외우기만 한다면
경(언사, 글)의 굴림을 받아
법집으로 남의 말의 종이 되는 것으로
글을 쫓아다니는 교학자가 되는 것이다.
무념이 바른 생각(반야)을 내는 것이요
분별계교하는 생각은 그르치게 되나니
분별심을 여의어야 백우거(청정한 마음)에 타고
(스스로 백우거인 자성불로) 영원히
상락아정하게 되는 것이라" 하신 것이다.
경의 제목을 투득하면 경 전체를 알게된다.
예를들면
"경의 제목인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10자를 바르게 깨달아 알면 반야심경
내용 전체의 뜻을 알수 있게되는 것이다"는
이 말에만 쫓아 요즈음 "묘법연화경"의
제목 만을 마치 주술처럼 "나무호랑교"를
진언처럼 되뇌이는 삿된 외도의 무리가 있으니
이런 무리는 불자가 아닌 것이다.
경은
부처님께서 깨우쳐 들게 하시고자
들어 보이신 교설이다.
따라서
언설의 방편이 필요하기에 쓰인 것이므로
반드시 본문 모두가
필요한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말이 실답지 않으나 또한 헛된 것이 아닌
무실무허한 뜻을 안다면
경을 깊이 살펴 읽어 그 뜻을 계합해야 하는 것이다.
경을 만지거나 들고 다니거나 제목 만 암송하는 것은
부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니
반드시 읽어 수지하는 독송을 해야 하는 것이다.
達聞偈하며 不覺悲泣하여 言下大悟하고서 而告師曰하되
法達이 從昔已來로 實未會轉法華하고 乃被法華轉이옵니다
再啓曰하되 經云하시되 諸大聲聞과 乃至菩薩까지
皆盡思共度量하여도 不能測佛智라거늘 今令凡夫가
但悟自心하면 便名佛之知見하시니 自非上根이면
未免疑謗이나이다 又經에 說三車하셨는데 羊鹿之車와
與白牛之車로 如何區別인지 願和尙은 再乘開示하소서.
법달이 게송를 들으며
(자기도)알지 못한 채
슬피 울다가 말 아래 크게 깨닫고서
조사께 사뢰기를
"법달이 오래 전부터 실로 법화를 굴리지 못하고
이에 법화에 굴림을 당했사옵니다"하고
다시 여쭙기를
"경에 이르시기를
모든 큰 성문과 이에 보살에 이르기 까지
모두 생각을 다하여 헤아리더라도
능히 부처님의 지혜를 측량치 못한다 하셨거늘,
이제 범부로 하여금 다만 스스로 마음을 깨달으면
문득 부처의 지견이라 이름한다 하시니
스스로 상근기가 아니면 의심하고
비방함을 면치 못하겠나이다.
※
또 경에 세가지 수레를 말씀하셨는데
양(성문)의 수레와
사슴(연각)의 수레와 더불어
백우(보살, 일불승)의 수레가 어떻게 다른지
원컨대 화상께서는 다시 열어 보여 주옵소서" 하였다.
강설:
六조스님의 게송을 들으며
법달은 자신도 모르는 법희에
눈물을 흘리게 된 것은
법우에 젖어 계합됨으로서이다.
다시 말해서 법화경 삼천독을 했어도
문자에 끄달려 다니며 안다는
아만심에 머물러 있었으나
이제 깨달음에 들게 되어 감격하게 된 것이다.
※
성문, 연각, 보살이
생각을 다하여 헤아리더라도
능히 부처님의 지혜를
측량할 수 없다 하신 것은
성문
(4성제를 듣고 이를 관하여 홀로 해탈을 지향함)
연각
(12연기법을 스승없이 홀로 깨침)
보살
(대승법의 자리이타를 행하면서 해탈하고
중생을 제도하는 보리심) 뿐 아니라
부처님일 지라도 헤아려(분별) 사량하면
불지견이 아닌 자기 소견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 뜻을 모르고
"그렇다면 상근기가 아닌
평범한 범부로서는
더욱 어림없는 일이 아닌가?"
하고 석가세존께서 비유로 교설하신
세가지 수레인
양(성문)
사슴(연각)
백우(일불승)의 수레가
다름을 교시해 주시기를 간청하였다.
다음 문에서 살펴보도록 하자.
師曰하시되 經意分明하거늘 汝自迷背니라 諸三乘人이
不能測佛智者가 患在度量也이니 饒伊盡思共推가
轉加懸遠이니라 佛께서 本爲凡夫說이요 不爲佛說이니
此理를 若不肯信者는 從他退席이니 殊不知-坐却白牛車-更於門外의
覓三車로다 況經文에 明向汝道하시되
惟一佛乘이요 無有餘乘-若二若三이며 乃至 無數方便과
種種因緣을 譬喩言訶는 是法이 皆爲一佛乘故라시니
汝何不省인가 三車是假라 爲昔時故요 一乘是實이라
爲今時故이니 只敎汝-去假歸實이나 歸實之後에는
實亦無名이니라 應知所有珍財-盡屬於汝하여 由汝受用이니
更不作父想하며 亦不作子想하며 亦無用想이라야
是名持法華經이니 從劫至劫토록 手不釋卷하며
從晝至夜토록 無不念時也니라.
조사께서 이르시기를
"경에 뜻이 분명하거늘
네가 스스로 미하여 등진 것이니라.
모든 3승의 사람들은 부처의 지혜를
능히 측량하지 못하는 것이
병이 헤아림 (분별)에 있으니,
아무리 저이가 생각을 다하여
함께 추구함이 현격히 멀어짐을 더하니라.
부처님께서
본래 범부를 위해 설하셨음이요
부처를 위해 설하신 것이 아니니
이 이치를 만일 굳이 믿고 긍정하지 못하는 자는
(이)자리에서 물러날 것이니,
백우거에 앉아서 다시 문 밖에 있는
세 수레를 찾는 줄 알지 못하는 것이로다.
하물며 경문에 그대를 향하여
밝혀 말씀하시기를
'오직 일불승이요
나머지 2승, 3승이라 한 것은
있음이 없는 것이며
내지 수 없는 방편과
가지 가지 인연을 비유해 말로써 일러 준 것은
'이 법이 모두 일불승이 되는 까닭이니라'
하셨으니,
네가 어찌 살피지 못하는가?
세가지 수레는 거짓(가설)이니
옛날(미했을 때)을 위한 까닭이요,
일승이 실다운 것이라 지금을 위한 까닭이니,
다만 너로하여금 가설(방편)을 버리고
실다움에 돌아 가게 가르친 것이나,
실다움에 돌아간 뒤에는 실(實)도 또한
(일승이라는)이름이 없느니라,
마땅히 알라.
있는 바 진귀한 보배와 재산이
모두 너에게 속해 있어
너로 말미암아 거두어 쓰는 것이니,
다시 아버지(나 아닌 부처)란 생각도 하지 말며,
아들(불자: 중생)이란 생각도 하지 말며
또한 (써도)쓴다는 생각도 없어야
이것이 이름하여 법화경을 지니는 것이니
겁 전으로 부터 겁 후에 이르도록
손에 책을 놓지 않는 것이며,
아침부터 밤이 되도록
생각지 않 는때가 없음인 것이니라.
강설:
3승과 부처님까지도 분별사량하게 되면
불지견과는 더욱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또 부처님은
미혹한 일체범부를 위해 스스로
부처임을 깨달아 들게 하시고자 설하심이요
스스로 부처요
스스로 깨우친 각인인 부처님을 위해
설하심이 아닌 이 이치를 들어도
모르는 이라면
법문을 들어도 이익됨이 없을 것이니,
마치 의사가 약을 처방해 줘도
병든이가 그 약을 제대로 먹지 못한다면
약을 줄 것도 받을 필요도 없는 것과 같으며,
스스로 백우거(청정본성의 마음)를 타고
다시 밖으로 세 수레를 찾음은
스스로 부처이거늘
그 도리를 깨치지 못한 중생들을 위해 설하신
차별문인 방편敎門의 말에 만 국집해
밖으로 구함과 같음인 것이다.
또한 오직 일불승
(일체가 한 부처임: 대승)을 깨우치시고자
2승, 3승을 방편으로 설하신 것이니
2승, 3승 심지어 일불승까지도
가설(거짓방편)로 쓰신 말일 뿐
실상이 아닌 것이니
이런 방편을
옛날(미혹한 중생)을 위해 베푼
가설의 말씀(수단)이요,
구경인 일승은
지금(계합하여 깨달음)을 위한것이다.
따라서
이 가설인 방편은 거짓이니
이 거짓을 버리고(말을 여의고)
실다움에 돌아 가게(뜻에 계합) 하심이니,
스스로 자성을 깨치면
본성인 마음에 일체가 구족되어 있고
포용하고 있으며 모두 거두어 쓰는 것이니,
일체의 본성이 스스로 부처라.
부처(아버지)라는 것도 불자(아들)라는 생각도
분별하는 생각이며 써도 씀이 없는 것을 쓰되
쓴다는 생각마저 없어야
이것을 법화경을 지닌다(계합하여
스스로 법화를 굴리게 됨) 하는 것이다.
이런 경계이면
옛부터 끝없는 미래토록
경을 놓지 않는 것이요
법화 가운데 상즉하는 것이라 하신 뜻이다.
達이 蒙啓發하고 踊躍歡喜하며 以偈讚曰하되
經誦三千部가 曹溪一句亡이네
未明出世旨하면 寧歇累生狂이리오
羊鹿牛權設이요 初中後善揚하니
誰知火宅內일까 元是法中王이로다
師曰하시되 汝今後로 方可名念經僧也라시니
達이 從此領玄旨하고 亦不輟誦經하다.
법달이 (마음이)열리어 밝혀짐을 얻고
뛸듯이 기뻐하며
게송으로써 찬탄하기를
경 외운 삼천번이 조계 일구에 멸하였네
(삼천 독경 알음아리 조사의 한마디에 사라졌네)
출세의 뜻 못 밝히면
여러생의 미친 짓(狂:헤맴)을 쉬리오.
(세간을 여읨을 깨닫지 못하면
여러생의 6도 생사를 쉴 수 있으리오)
양 사슴 소는 방편으로 베풂이요
처음 중간 뒤를 바르게 나타내니
(양 사슴 소수레는 방편으로 베풂이고
일체의 진리를 밝히시니)
누가 불이 난 집속을 알까
원래 일체만유의 왕이었도다.
(본래 마음이 어지러워진 속을 알까
원래부터 온 우주의 주인이로다)
조사께서 이르시기를
"네가 이 뒤로 바야흐로 가히
경을 염하는 승이라 이름하게 되리라"
하시니 법달이 이로부터 깊은 뜻을 알고
또한 경 읽기를 그치지 않았다.
강설:
사교입선 이라하여
아예 교설인 경을 읽을 필요가 없으니
읽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아는 이들을 특히 선객들에게서 많이 본다.
이것은 크게 잘못 아는 것이니
선과 교는 구경에 둘이 아님을
모르는 소치인 것이다.
다만 교설의 뜻을 모르고
글에 굴림을 당함이 잘못된 것이니
뜻을 알고 경을 외우는 것은
마땅히 허물이 없는 것이다.
捨敎入禪이란 것은
교리를 통하여 가는 길
(徑)을 알았으면 말을 버리고
직지인심의 禪으로 곧장 들어가
실상본성을 깨달아 들라는 뜻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