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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번째 동전
어떤 농부가 밭에서 일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사람들이 웅성웅성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뭔가 싶어서 농부가 가서 보니 한 외국인 선교사님이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자세히 들어보니 예수 믿고 구원얻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도 예수를 믿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은혜를 받고 믿음이 자라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하루는 장날 장에 가기위해 동전 일곱 개를 새끼에 엮어서 옆에 차고 장에 장보러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는 도중에 불쌍한 거지 하나가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새끼줄에 엮인 동전을 빼내어 여섯 개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거지가 여섯 동전을 받고도 감사하는 마음보다 따라오면서 마지막 남은 한 동전 한 닢을 몰래 훔치려 기회를 엿보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탐욕이 끝이 없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이 에스겔 24장은 가마솥 비유입니다. 이 가마솥은 당시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 가나안에 살며 하나님의 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잘 섬기지 아니하고 심지어 우상을 숭배하고 또 온갖 범죄에 빠짐으로 인해 결국 나라가 패망을 하고 왕과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게 됩니다.
2차 포로로 같이 끌려가게 된 에스겔 선지자가 바벨론 그발 강가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한 말씀이 에스겔서입니다. 에스겔의 말씀을 그 가마솥의 녹처럼 그것을 그 죄악을 빼내라는 것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후 인간에게는 죄가 들어와서 그 죄가 인처럼 사람에게 녹아 붙어 있는데 마치 가마솥에 있는 녹처럼 우리에게 죄가 붙어 있는 것입니다. 불에 태워 그 죄를 다 없애고 하나님 앞에 깨끗하고 거룩한 믿음생활 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첫째, 가마솥의 녹을 제거하듯이 죄를 씻으라!
에스겔 선지자은 2차 포로로 끌려간 유다왕 여호야긴과 함께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 때가 B.C597년입니다. 바벨론이 유다를 침공하여 여호야긴왕과 백성들을 포로로 끌고가며 시드기야왕을 세우고 떠났습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24:1말씀에 아홉째 해 열째 달 열째 날에 하나님의 말씀이 에스겔에게 임하였다고 했습니다. 바벨론에 끌려간 지 9년 째 되는데 즉 시드기야왕이 등극한지 9년 째 되는 해입니다.
이 때에는 B.C 588년입니다. 그 때에는 바벨론이 이미 유다에 3차 침공을 하여 예루살렘 성을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2년 뒤 586년에 멸망을 당합니다. 예루살렘 성이 멸망 직전에 에스겔을 통해 하나님께서 가마솥의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에스겔에게 큰 가마솥을 걸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양을 잡아서 각을 떠서 넣어라고 했습니다. 또한 물을 붓고 장작불을 떼서 그 가마솥을 끓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루사렘 성이 가마솥처럼 에워쌈을 당하여 바벨론의 군대가 불을 태우듯이 예루살렘 성에 공격을 가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가마솥에 있는 녹을 제거하기 위함입니다. 그렇게 불을 떼서 철저히 가마솥을 끓임으로 인해 그 속의 녹을 제거하기 위해서입니다.
왜 그렇게 하나님이 말씀을 하셨는가? 그토록 복을 받은 유다와 예루살렘이 하나님을 철저히 거역하고 우상을 숭배하고 죄악에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에스겔이 말씀을 전할 때 오홀라와 오홀리바의 비유를 말했습니다. 두 자매를 말합니다. 오홀라는 언니이고 북이스라엘을 비유하고 오홀리바는 동생인데 남유다를 상징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북이스라엘이 얼마나 악한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세벨이 시집을 와서 온갖 우상이 북이스라엘에 가득한 것을 아합의 시대에 보면 나옵니다. 그래서 결국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멸망을 당합니다.
그런데 남유다의 동생이 언니 북이스라엘보다 더하다고 성경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남유다의 말기가 얼마나 혼잡하고 죄악이 가득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굳이 몇 가지 예를 든다면 에스겔 22장에 구체적으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그들이 우상을 숭배했다는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셔서 가나안에서 복을 주신 하나님을 버리고 그들이 우상을 숭배하고 심지어 성전에서도 태양신과 벌레 같은 짐승을 숭배하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고관들은 부정을 저지르고 불의를 행하며 백성들을 착취했습니다. 뇌물을 받고 불의하게 재판을 하며 억울하고 약한 백성들을 착취하였습니다.
부모를 업신여기고 노인을 확대하며 고아와 과부를 해하였다고 성경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웃 여인과 부정한 일을 행하고 수치스러운 일을 하였다고 했습니다. 이런 일들은 이전에 이스라엘이 오기 전에 가나안 백성들이 그런 악을 행하였다고 하나님이 진노하여 그들을 심판하여 쓸어버리고 그 땅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이전의 가나안 백성들보다 더 악을 행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라가 어떻게 존재가 되겠습니까!
오늘날 비유한다면 지도자들이 불의하게 뇌물을 받고 재판을 잘못하여 억울하게 한다면 안 되는 것이죠. 비싼 사채나 너무 이자를 많이 부과하여 가난한 사람들이 결국 파탄을 당하고 몸을 파는 일들이 생기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날 뉴스에 보면 또 갓난아기를 죽게 한다든지 가까운 사람들을 함부로 상해를 하고 죽인다든지 우리가 생각지도 못하는 일들이 뉴스에 나오기도 합니다. 이미 한국 법에는 간통죄 자체가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7계명을 강조하지 사회에서는 죄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심지어 동성애를 인격이라고 하고 법으로 만들어 활성화하면 에이즈는 어떻게 치료하고 그 막대한 세금은 어떻게 하려고 하는 건지 이해가 안 됩니다.
이것은 세상에 일어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만일 한국교회 성도들이 그런 일에 동참을 하고 비슷한 일들을 하고 함께 뜻을 같이 하면 어떻게 교인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런 일들을 행하지는 않는다 하더라고 마음으로 동참을 하면 안 됩니다. 인간의 죄성은 끝이 없습니다. 가마솥의 녹처럼 인간 속에 내재된 죄는 한이 없습니다. 그것을 끊어 내려면 가마솥의 끓는 물이 녹아내는 것입니다.
에스겔 24:11에 [가마가 빈 후에는 숯불 위에 놓아 뜨겁게 하며 그 가마의 놋을 달궈서 그 속에 더러운 것을 녹게 하며 녹이 소멸되게 하라]라고 했습니다.
고난이 유익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철저히 바벨론에게 고난을 받아 연단을 받음으로 후에 그들이 회개하고 통회하고 변화를 받아 거룩한 백성으로 거듭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 시대 예루살렘처럼 그렇게 고난을 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말씀의 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은 악한 일이구나 깨닫고 죄로 치닫지 않으려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 마음속에 깊이 내죄된 죄악을 걷어내야 합니다.
예화) 구정물 속에 있는 음식 찌꺼기
우리가 클 때 시골에서 보면 이전에 어머니들이 밥을 하게 되면 쌀을 씻고 그 쌀뜨물을 구정물 통에 버려둡니다. 그리고 그 구정물 통에는 남은 음식물찌꺼기를 함께 버려둡니다. 그래서 모아서 소죽을 끓일 때 소에게는 좋은 영양가가 되니 소죽의 솥에 부어줍니다. 그런데 그 쌀 씻고 버려둔 물, 또 음식 찌꺼기 버려둔 물이 물통에 있는데 가만히 있으면 물이 맑아집니다. 밑에는 음식찌꺼기가 가득 있지만 위의 물은 맑은 물이 위로 뜨게 됩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작대기로 한 번 휘 젖으면 밑의 음식 찌꺼기와 더러운 것들이 확 올라옵니다.
이와 같이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죄가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우리가 보기에도 선해 보이고 깨끗해 보이고 훤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이 되면 우리 속의 죄가 확 차고 올라와서 범죄하게 된다든지 분노하고 싸우게 된다든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의 그 죄악을 제하여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철저히 죄를 끊어내고 주를 바라고 보고 끊임없이 기도하고 믿음을 나아갈 때 우리가 죄와 멀어질 수가 있습니다.
예화) 들판의 판때기 속의 벌레
넓은 들판에 잔디가 짝 깔려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한 쪽에 널판지를 그냥 둔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비가 와서 습기가 차고 또 시간이 지나면 그 널판지 밑에 햇빛이 잘 들어오지 않아 축축합니다. 그래서 그 널판지를 걷어 내어버리면 그곳에서 벌레가 우글우글합니다. 햇빛이 비추이면 벌레들이 사방으로 퍼져 도망을 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를 믿고 믿음생활을 하여 빛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우리의 빛이 시기 때문에 햇빛을 받은 잔디밭처럼 푸르고 맑고 환합니다. 그러나 내 마음 속에 일부는 주님께 마음 문을 열지 아니하여 그곳에는 널판지가 덥고 있는 들판처럼 징그러운 죄악들이 가득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한 구석에는 그런 것들이 없는지 우리가 살펴야 합니다.
때로는 주님 앞에 내어놓고 기도해야 합니다. 때로는 철저히 나를 쳐서 말씀에 복종을 하여 나를 주님께 순종하도록 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연단을 받아서 불같은 태우는 연단을 받아서 벌레 같은 죄악들을 다 태워야 합니다. 그리하여 주님 앞에 우리는 정결한 성도로 나아가야 합니다. 아멘
둘째, 가마솥의 어린양처럼 우리 주님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에스겔이 하나님께 받은 말씀은 가마솥의 비유에서 하나님께서 뼈가 무르도록 삶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장작을 준비해서 태우라고 했습니다. 물이 국물이 졸여지고 그 뼈는 태우고 가마솥이 달구어져 녹을 제거하라고 했습니다.
4절에 [건 후에 물을 붓고 양 떼에서 한 마리를 골라 각을 뜨고 그 넓적다리와 어깨 고기의 모든 좋은 덩이를 그 가운데에 모아 넣으며 고른 뼈를 가득히 담고 그 뼈를 위하여 가마 밑에 나무를 쌓아 넣고 잘 삶되 가마 속의 뼈가 무르도록 삶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원래 이 말씀은 가마솥의 양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두고 한 말씀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범죄함이 크고 하나님의 진노가 컸기 때문에 하나님이 철저히 물이 졸여들도록 삶고 삶아서 심지어 뼈도 탈 정도로 삶으라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 속의 녹을 제거하는 말씀입니다. 즉 죄를 없이 하라는 말씀이죠.
이 말씀은 물론 유다 왕과 귀족과 유다 백성들의 죄 때문에 심판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물론 고난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바벨론의 불같은 고난과 연단을 통해서 그 유다가 회복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신약시대에 살아가는 우리는 이 양을 예수님을 해석할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원래 우리가 죄가 있어서 만일 그 죄대로 다 갚게 된다면 우리 역시 철저히 징계를 받고 저주를 받아서 영원한 지옥 형벌을 면할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오늘날 그 때 당시 유다인들처럼 그런 범죄를 저지르고 다니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잘 믿고 어찌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원래 인간의 죄악이 그렇습니다. 사람은 가만 두면 죄로 치달아 결국 심판을 자초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무리 죄를 없이 하고 죄를 멀리하고 깨끗하고 거룩하게 살려고 노력한다고 해도 우리 힘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대속하셔서 우리가 죽지 않아도 될 만큼 주님이 심판을 받으셨습니다. 그 양이 죽임 당하고 피를 흘리셔서 그 피로 우리의 죄를 씻고 그 양이 우리를 위해 죽임 당하셨습니다. 그 양은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그 양이 가마솥에서 뼈가 타도록 고난을 받으시고 철저히 고통을 받으신 것은 우리가 그런 고난과 고통을 받지 않아도 되도록 한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주님의 대속이 없었다면 누가 스스로 죄를 이겨서 주님의 영광이 되어 스스로 심판을 면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게 될 것 같으면 예수님이 성육신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 도저히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니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그 죽임당한 어린양처럼 철저히 죽임 당하고 철저히 고난을 받으셔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에 사는 우리는 주님의 대속의 은혜 안에 거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 주님의 십자가 대속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설명이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복음송 중에 ‘은혜’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우리는 당연한 것이라 여겼던 모든 것이 사실은 은혜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호흡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조차 주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죄에 빠지지 않고 승리할 비결은 주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처절하게 고통과 고난을 받지 않아도 되는 것은 주님의 십자가 은혜입니다. 은혜가 아니면 이 모든 것이 설명되지 않습니다. 아멘
성경예화) 에스겔 선지자의 아내가 죽은 비유
이 에스겔 24장 후반부에 잃어보면 에스겔 선지자의 아내가 죽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미리 일어주십니다. 네 아내가 죽더라도 슬퍼하거나 울지 말라 합니다. 아니 아내가 죽는데 얼마나 슬프고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얼마나 고통스럽고 외롭겠습니까! 그런데 슬퍼하지도 말고 고통의 눈물도 흘리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포위가 되어 백성들이 칼에 비참하게 죽고 성은 파괴되어 무너지고 성전은 불타서 폐허가 되어버립니다. 곧 그렇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시드기야 왕과 백성들은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끌려갈 것이라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너는 눈물을 흘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슬퍼하지 말고 애통해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죄를 지었고 얼마나 하나님을 진노케 하였는가를 설명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복음시대에 살아갈 때 우리는 그런 고통을 받지 않아도 되는 희망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대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의 대속을 싶게 생각하고 소홀히 하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 대속과 구원을 등한시하고 길거리의 돌멩이 정도로 여긴다면 우리 역시 예루살렘 시민처럼 비슷한 고통을 받아야 할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죄성은 그 때나 지금이나 어느 시대나 별 차이가 없습니다. 아멘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주의 은혜 안에 거하고 오직 우리는 주님의 대속을 의지하고 오직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만 붙잡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넉넉히 죄를 이기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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