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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집(白水集) 양응수(楊應秀)생년1700년(숙종 26)몰년1767년(영조 43)자계달(季達)호백수(白水)본관남원(南原)특기사항권집(權), 이재(李縡)의 문인. 유언집(兪彥鏶), 박성원(朴聖源) 등과 교유
白水先生文集卷之十三 / 題跋 / 金陵金氏世稿跋
我族高祖文學贈吏曹參議諱時晉之配贈淑夫人金氏。以烈婦㫌其閭。而金氏之德。不止於婦而烈而已。以女則孝。以臣則忠。其至行懿節。昭載於邑誌及家乘。余嘗以爲以一身而備三綱之重。以女子而專天下之美者。古今惟金夫人而已。是其姿質之美。固有以過人者。而其於家庭之間。所以敎養而成就之者。亦必有其本焉。於是欲考其世德而未有因也。近者。金陵金君光晶。自泰仁。從余遊。卽金夫人兄進士鳴川公諱灌之五世孫也。因得其所謂金陵世稿者而讀之。乃金夫人曾王考生員諱若誨。號閒亭公。夫人考別提諱大立。號月峯公。曁鳴川公三世事行及遺詩。而鳴川公外裔黃進士胤錫所採錄者也。胤錫以博雅稱。其言皆有據可信。余於是知金夫人之至行懿節。盖有所自也。閒亭以正德進士。間遊太學。見己卯乙巳士禍之慘。遂謝絶當世。築亭于泰仁之古縣溪上。因以自號。與退溪,河西,一齋諸先生相從。有唱酬諸篇。此正所謂不見其山。願見其木者也。月峯亦隱居七寶山下松湖之上。與松江諸賢遊。鄭汝立卽公連姻。而所居又密邇。汝立登第。不仕歸鄕。以讀書爲名。出入栗,牛兩先生門。多士聞風從遊。至以竹島先生稱之。惟公知其性㐫悖。一不相見。嘗築溪亭。聞汝立欲來賞。卽撤去之。未幾。汝立果伏誅。壬辰之亂。公爲義兵募粟。後朝家以軍實不足。爲設屯田。因又量田。縣官請公視事。公往來溝洫。雖勞不辭也。鳴川克世其家。行己處事。一以古人爲法。孝友之行。爲鄕黨所服。訓誨之功。爲多士所推。在三昌戴頭之日。發憤痛哭。受沙溪義粟之託。繼美先烈。卒以鄕先生。腏食於武城書院。猗歟盛哉。三公俱以處士終老。雖不能行其所學。而其隱居求志。隨分盡職。交遊名賢。嫉斥凶邪。可以有辭於百世。其所爲詩。收拾於散亡之餘。雖不免寂寥零星。而亦可以見性情之發。而音調之不俗也。夫一門之內。得有一賢。亦難矣。而四世三賢。名德相承。啓後光前。金陵之金。宜乎其爲湖南之名族也。惟其如是也。故金夫人肧胎前美。服習義訓。高節卓行。厥有所本。余於是益信金夫人之培養擩染。自異於他門。而因金夫人。益信三公之爲賢父兄也。光晶從我於宿舂之地。不憚徒步以來相從。雖其不明於知人。而其好學之誠。蓋亦有所自來也。光晶請余以識其尾。余不爲辭。特書其所感如是。以寓景仰之誠云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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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호집(渼湖集) 김원행(金元行)생년1702년(숙종 28)몰년1772년(영조 48)자백춘(伯春)호미호(渼湖), 운루(雲樓)본관안동(安東)시호문경(文敬)특기사항이재(李縡)의 문인으로서 노론(老論) 낙론(洛論)을 대표하는 산림학자(山林學者)
渼湖集卷之十三 / 題跋 / 題金陵金氏世藁後
黃君胤錫。嘗爲余誦閒亭公四世文獻。蔚然爲湖南之選。今觀此卷。良然。獨恨世遠跡微。余又老退。甚無能以發揮之也。然其可書者。楊公季達之序已盡之。季達賢者。其言必不苟。卽余爲之。又何以加焉。只書此以見其文之可信。崇禎再周乙酉仲秋壬辰。安東金元行題。
미호집 제13권 / 제발(題跋) / 《금릉김씨세고》 뒤에 쓰다〔題金陵金氏世藁後〕
황군 윤석(黃君胤錫)이 예전에 나에게 한정공(閒亭公) 4대(代)의 문헌이 호남에서 우뚝이 빼어나다며 읊어주었다. 지금 이 책을 보니 참으로 그러한데, 다만 세월이 오래 흘러 행적이 희미해진 데다 나도 또 늙어서 그다지 드러나게 해 줄 역량이 없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그러나 쓸 만한 것은 양공 계달(楊公季達)의 서(序)에 이미 다 써 놓았다. 계달은 현자(賢者)이니, 그의 말이 필시 구차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만일 내가 쓴다 해도 또 무얼 더 덧붙이겠는가. 단지 이 글을 써서 그의 글이 믿을 만하다는 것을 보일 뿐이다.
숭정 두 번째 을유년(1765, 영조41) 중추(仲秋) 임진일에 안동 김원행이 제(題)하다.
[주-D001] 황군 윤석(黃君胤錫) : 황윤석(黃胤錫, 1729~1791)으로,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영수(永叟), 호는 이재(頤齋)ㆍ서명산인(西溟散人)ㆍ운포주인(雲浦主人)ㆍ월송외사(越松外史)이다. 미호의 문인이다. 1759년(영조35) 진사시에 합격, 1766년에 은일(隱逸)로서 장릉 참봉(莊陵參奉)에 임명되었고, 목천 현감(木川縣監), 전생서 주부, 전의 현감(全義縣監)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에 《이재유고(頤齋遺稿)》, 《이재속고(頤齋續稿)》, 《이수신편(理藪新編)》, 《자지록(恣知錄)》 등이 있다.[주-D002]
한정공(閒亭公) 4대(代) : 한정 김약회(金若晦), 시암(詩嵒) 김원(金元), 월봉(月峯) 김대립(金大立), 명천(鳴川) 김관(金灌)으로, 모두 소과(小科)에 합격하여 대대로 음관(蔭官)을 지냈다. 《頤齋遺稿 卷12 金陵金氏世藁後叙, 卷9 答丁進士書》[주-D003] 양공 계달(楊公季達) : 양응수(楊應秀, 1700~1767)로,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계달, 호는 백수(白水)이다. 권집(權緝)과 이재(李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경학과 성리학에 전념하여 〈사서강설(四書講說)〉ㆍ〈이기설(二氣說)〉ㆍ〈지각설변(知覺說辨)〉을 남겼으며, 천문학에도 밝아 〈혼천도설(渾天圖說)〉을 지었다. 저서로 《백수문집(白水文集)》이 있다.
ⓒ 고려대학교 한자한문연구소 | 강여진 (역)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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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서집(豐墅集) 이민보(李敏輔)생년1717년(숙종 43)몰년1799년(정조 23)자백눌(伯訥)호상와(常窩), 풍서(豐墅), 회심와(會心窩)본관연안(延安)시호정효(貞孝)특기사항이정귀(李廷龜)의 후손. 신소(申韶), 조경(趙璥) 등과 교유
豊墅集卷之十四 / 碑 / 月峯金公遺墟碑
古有湖南七君子者。憤時晦跡。皆自托於狂。以終其身。月峯金公爲之首。苦節遺風。至今使人激仰。况公克趾名祖名父之業。卓有樹立。至於其子
鳴川公。儒林尊之。配食武城書院。雖未有祿位之顯耀。而四代文獻相繼蔚然。信其爲南中望族也。始月峯公於所居泰仁松湖之上。搆成數架屋。杖屨嘯咏。所謂浩浩亭是已。會鄭賊汝立稱爲講學。營立儒宮於相望之地。且欲一來賞公亭。公聞卽撤毁。方汝立之盜名也。擧世顚倒。公燭辨之忒早。人或以爲過。未幾以逆誅。則莫不服公獨奸之明。絶惡之嚴。此當時諸賢所不及也。不亦韙哉。歲紀寢遠。覩聞漸泯。今諸孫不忍其亭廢址荒。合力立石。要余記之。嗚呼。追闡先矩。惓惓於嗣述無愆之圖者。其亦可書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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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천(鳴川) 김관(金灌)
조선 선조(宣祖) 때의 유학. 본관은 강진(康津).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김장생(金長生)을 도와 의병활동에 가담했으며, 태인(泰仁)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 배향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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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재집(剛齋集) 송치규(宋穉圭)생년1759년(영조 35)몰년1838년(헌종 4)자기옥(奇玉)호강재(剛齋)본관은진(恩津)시호문간(文簡)특기사항김정묵(金正默)의 문인
剛齋先生集卷之五 / 序 / 牧村遺稿序
嗚呼。士之治擧業者。鮮不以古人爲己之學。看作別件物事矣。生長僻鄕。而能讀書求志。不爲俗習所移者爲尤難。若牧村金公諱光億。果非其人耶。公之胤琰來訪。袖出公遺稿曰。非欲鋟梓而播布。將藏于家。以示子孫。願得一言。以弁諸卷。余以不文辭。不獲。遂受之而卒業。詩文摠若干篇。而所言率多治心修身之方。其自警而勉人者。意深而言懇。使讀之者。有足以感發焉。至若送子從師及戒勖其師門胤子二書。丁寧反覆之間。又可以想見其所自爲者矣。余之固陋。雖未得叩質於公之平日。今閱斯稿。聳然起敬。怳若奉良誨於左右。則其爲幸也。夫豈淺淺哉。世之工聲病鬬華靡。徒悅人耳目者。類多剞劂而行之。其視斯稿果何如也。然則金君之言。豈以其所編之少耶。抑守公謙挹之遺意也歟。余無筆力可能發揮。略書其所感于心者如此。琰卽承公命。而摳衣於過齋先生之門者也。
剛齋集 卷五 / 序 / 牧村遺稿序
嗚呼!士之治擧業者,鮮不以古人爲己之學,看作別件物事矣。生長僻鄕,而能讀書求志,不爲俗習所移者爲尤難。若牧村金公諱 光億,果非其人耶?公之胤琰來訪,袖出公遺稿曰:“非欲鋟梓而播布,將藏于家,以示子孫。願得一言,以弁諸卷。” 余以不文辭,不獲,遂受之而卒業。詩、文摠若干篇,而所言率多治心修身之方。其自警而勉人者,意深而言懇,使讀之者,有足以感發焉。至若送子從師及戒勖其師門胤子二書,丁寧反覆之間,又可以想見其所自爲者矣。余之固陋,雖未得叩質於公之平日,今閱斯稿,聳然起敬。怳若奉良誨於左右,則其爲幸也,夫豈淺淺哉?世之工聲病鬬華靡,徒悅人耳目者,類多剞劂而行之,其視斯稿,果何如也?然則金君之言,豈以其所編之少耶,抑守公謙挹之遺意也歟?余無筆力可能發揮,略書其所感于心者如此。琰卽承公命,而摳衣於過齋先生之門者也。
강재집 제5권 / 서(序) / 목촌유고서〔牧村遺稿序〕
아아! 과거 시험을 준비하는 선비들 중에는 옛사람들의 위기지학(爲己之學)을 별개의 일로 간주하지 않는 사람이 드물다. 후미진 시골에서 나고 자라면서 글을 잘 읽고 뜻한 바를 추구하면서도 세속 습관에 물들지 않기란 더욱 어렵다. 목촌(牧村) 김광억(金光億) 공이 과연 그러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공의 아들 김염(金琰)이 찾아와서 소매에서 공의 유고(遺稿)를 꺼내고 말하기를 “책판을 새겨 널리 퍼뜨리려는 것이 아니라 집안에 보관해 두어 자손들에게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한마디 말을 얻어 책머리에 붙이고 싶습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글솜씨가 없다고 사양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유고를 받아 서문을 쓰는 일을 마무리 지었다. 시(詩)와 문(文)이 모두 약간 편(篇)인데, 마음을 다스리고 몸을 닦는 방법을 말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 가운데 자신을 경계시키고 남을 권면하는 글들은 뜻이 깊고 말이 간절하여 읽는 사람이 감동받을 만하다. 또 자식을 보내 스승을 따르게 하는 내용과 그 사문(師門)의 아들을 타이르고 격려하는 내용의 편지 두 통은 간절하게 되풀이하는 말 속에서 그 자신이 힘쓴 바를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나는 고루하여 비록 공의 생전에 배움을 청한 적이 없지만 지금 이 유고를 열람해 보니 등골이 오싹해지며 경건한 마음이 일었다. 하물며 공의 옆에서 좋은 가르침을 받았다면 그 다행스러움이 어찌 자그마한 일이겠는가. 세상에서 성병(聲病)에 온 힘을 쏟고 화려한 수식을 일삼아서 사람의 귀와 눈만을 즐겁게 하는 글들도 대부분 간행하여 유포시키는데, 그것을 이 유고에 견주어 보면, 과연 어떻겠는가? 그렇다면 김군(金君 김염(金琰))의 말은 책 펴내는 일을 하찮은 일로 여긴 것인가, 아니면 공의 겸손한 유지(遺旨)를 지킨 것인가? 나는 그 뜻을 발휘할 수 있는 필력이 없어서 내 마음에 느낀 바를 대략 이와 같이 쓴다. 김염(金琰)은 바로 공의 명(命)을 받들어서 과재(過齋) 선생의 문하에서 배운 사람이다.
[주-D001] 위기지학(爲己之學) : 오직 자신의 덕성을 닦기 위해 공부하는 것을 말하는데, 남을 위한 학문인 위인지학(爲人之學)과 대칭되는 말이다. 《논어(論語)》 〈헌문(憲問)〉에 “옛날 학자들은 자신을 위한 학문을 하였는데, 지금의 학자들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학문을 한다.〔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 하였다.[주-D002]
김광억(金光億) : 1743~1799. 본관은 도강(道康), 자는 대지(大之), 호는 목촌(牧村)이다. 충민공(忠敏公) 김회련(金懷鍊)의 후손으로 명천(鳴川) 김관(金灌)의 5세손이다. 김원행(金元行)의 아들 삼산재(三山齋) 김이안(金履安)에게서 수학하였다. 그의 아들 김염(金琰)이 송치규에게 유고의 서문을 써 줄 것을 요청하였다.[주-D003] 성병(聲病) : 시를 지을 때 평(平), 상(上), 거(去), 입(入) 등 사성(四聲)을 조합하여 구성하는데, 그 구성이 일정한 규칙에 들어맞는 것을 성(聲)이라 하고 그렇지 못한 것을 병(病)이라 한다. 즉 시를 고심하며 짓는 행위를 가리킨다.[주-D004]
과재(過齋) 선생 : 김정묵(金正默, 1739~1799)으로, 자는 이운(而運), 호는 과재,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후손이고 송환기(宋煥箕) 등과 교유하였다. 《과재유고(過齋遺稿)》가 있다.
ⓒ 한림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 노재준 박해당 권민균 (공역) |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