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58.8월 사쓰마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는 죽기 직전 이복동생 히사미쓰(41세)에게 뒤를 부탁한다.
- 그러나 나리아키라가 죽자 에도에 있던 나리아키라의 아버지 나리오키가 귀향, 권력을 장악
(1년후 나리오키도 68세로 사망)
- 히사미쓰가 사쓰마의 권력을 쥐다 (국부로 자칭, 죽은 형의 정치 노선을 이어받아 부국강병을 꾀함)
* 1861년 고마쓰 타테와키를 중용하여 타테와키의 천거로 사쓰마 존왕양이 그룹의 정충조와 지사들을 중용
- 사이고 다카모리(안세이 대옥시 도망)는 3년만에 유배에서 풀려나 귀환 (히사마쓰는 건방진 사이고가 마음에 안 들었지만 정충조를 컨트롤 하기 위해 곁에 두다)
* 조슈 번의 부상
- 이전 쇼군 후계문제로 사쓰마가 가담한 히토쓰바시파와 난키파 대립시 구경만 하던조슈가 히토쓰바시파, 난키파가 힘을 잃은 틈에 국내외 교역을 인정받으며 부상
- 쇄국시기엔 류큐라는 대외교역 창구를 가진 사쓰마의 대외 밀무역 독점 이익이 좋았으나 개국 후엔 서양 상인들에 조슈 등 기타 여러 번들이 다 교역에 달려들어 사쓰마의 우월한 지위가 잠식당하다
- 특히 조슈가 막부에 항해원략을 통해 중앙정치의 조정자를 자임 우대 받으며 조슈의 이익 위주로 좌우하려는 분위기.
* 안세이 대옥 이래 히토쓰바시파는 모두 근신 처분을 받고 정치 참여가 금지되어 있었다.
- 1861년 말부터 사쓰마가 조정에 계속 청원을 넣으며 정치 참여 금지 해금을 로비
* 1862년 새해를 맞으며 히사미쓰가 교토 상격 입장을 분명히 하다
- 히사미쓰의 출병, 상경 소식에 전국의 존왕양이 지사들이 흥분.
- 사쓰마의 정충조를 중심으로 존왕양이 지사들이 대거 교토로 상경하다
(조슈의 쇼카손주쿠 일당과 도사의 근왕당도 서로 연락, 사쓰마 정충조에 호응해 교토로 상경계획 논의, 서로 눈치 보다 소수만 상경)
- 1862년 초부터 교토에는 흥분한 종왕양이 지사들이 득실 여기저기 과격한 대자보를 붙이고 다님 (친막부 귀족 저택 너머엔 협박장을 던지는 행패가 이어짐)
- 히사미쓰의 상경계획에 협조하지 ㅇ낳은 사이고는 두번째 유배 다시 2년간 오케노에라부섬에 거주한다
* 1862.4.14 히사미쓰가 1천여 병력과 함께 사쓰마 출발
- 한달 여정 후 5.14일 교토 도착, 교토의 치안 안정에 대해 입장을 표명(치안을 어지럽히는 존왕양이 지사들은 속히 고향으로 돌아가라)
- 5.21일 밤 교토의 데리다야 여관에 사쓰마 정충조 과격파들이 모여 교토의 최고위 인사들을 전부 암살하려는 작당중에 히사미쓰의 명을 받은 사쓰마 번사들이 여관에 도착 충돌 칼부림 결과 정충조 측 6명 사망 2명 할복, 체포조 측 1명 사망, 총 9명의 사망자가 나와 교토를 놀라게 하다
- 이를 계기로 조정에서 히사미쓰의 사쓰마 번병에 교토의 임시 근위병 역할 부여
(조정의 관백도 히사미쓰의 사돈인 고노에 다다히로로 교체, 찬황도 딱히 거부하지 않고 칙령을 내주다)
- 정충조 과격파는 어차피 숙청, 존왕양이 지사들이 히사미쓰에 너무 이용당하는 느낌이지만 히사미쓰가 권력을 잡게 되며 존왕양이 운동도 사쓰마라는 강력한 번의 힘을 이용할 수 있어 서로 이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