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죽은 아들살게 한 나인성 과부
눅7:11-17
서 론
나인성 문밖에 장례식 행렬이 지나갑니다. 상여군의 만가 소리와 함께 그 행렬이 장사진을 이루고 묵묵히 복망산을 향해 올라가고 있습니다. 누구나 동정하지 않을 수 없는 비참한 광경입니다. 죽어서는 안될 사람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 죽은 사람은 외 아들이었고 그 어미는 과부였으며 그 외아들은 젊은 청년으로서 제명을 다 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100세 천수를 다하고 죽어도 인간의 죽음을 슬픔을 주는데 꽃봉오리가 체 피워보지 못하고 죽어 갔으니 사회와 국가에 슬픔이 아니었겠습니까?
이 과부는 이제 독자가 죽었으니 앞으로 누굴 믿고 어떻게 살아 가겠습니까? 목놓아 통곡하는 과부 어머니의 울음은 산천을 울렸습니다. 죽은 아들을 상여에 실어 떠메고 나인성 문밖을 나와 공동묘에 흐느끼며 염치도 체면도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고 상여체를 부여잡고 끌려가면서 자식의 죽음 앞에 몸부림치며 울었습니다.
이 광경을 예수님께서 보시고 발걸음을 멈추셨습니다. 그리고 여인을 향하여 울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부드러우며 사랑스러운 주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이 시간 주님의 이 사랑스럽고 부드러운 음성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외아들을 잃어버린 과부의 심정으로 돌아가 자신들의 심령이 죄로 말미암아 마비되고 송장이 되어 저 북망산을 향하여 가고 있음을 생각하여 울어보자는 말입니다.
이 안타까운 몸부림과 울부짖음을 통하여서만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 것이며 “울지 말라”고 하시는 위로를 들을 줄로 믿습니다. 상여는 멈추었습니다. 북망산으로 가는 “죽어버린” 송장을 향해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청년아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다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이같은 내용으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여인의 눈물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어느날 나인이라는 조그만한 마을을 지나가시다가 장래 행렬을 보시었습니다. 의례히 그렇듯이 그 행렬도 구슬프기 짝이 없는 행렬이었습니다. 특히 이 장례 행렬은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한 채 옷은 풀어져 내리고 맨발로 애곡하며 뒤따르는 한 여인 때문에 더욱더 예수님의 눈길을 끌었습니다.
슬퍼하는 여인의 모습은 너무나 애처롭기만 합니다. 예리하신 통찰력으로 과부의 외 아들이 죽은 것임을 확인하는 예수께서 그의 고통을 없애시기로 하시고 청년을 살리신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우리를 어떻게 보시고 계실까? 우리 인생은 주님의 보심에 따라 우리의 삶의 생애가 바꾸어 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모든 대소사를 관찰하고 있다는 것을 깊이 생각하고 주님께로 인정받는 행동을 하여 은혜를 입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애가 축복이 넘치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의 발을 멈추게 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백부장의 종을 회복시키신 후 나인이란 성으로 발걸음을 옮기셨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의 고향인 나사렛에서 남동쪽으로 약16키로 정도 떨어진 곳으로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린 수넴지방(왕하4:8-11)과 모래의 언덕 사이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소개하자면 “나인”은 “엔돌” 지방에서 가까운 “헤르몬”의 작은 언덕 위에 위치해 있어서 그곳으로 올라가자면 좁은 급경사로 이루어진 길을 통과해야만 했고 그 길 양편에는 무덤 같은 굴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 지점 부근에서 예수께서는 나인성 과부 아들의 장례식 행렬을 보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곳에 주님께서 발걸음을 멈춘 원인은 무엇보다도 죽은 청년 때문도 아니요, 장례식 행렬을 보신 것도 아니요, 아니 주변에 있는 행렬에 참석한 문상객들도 아니라 그 죽은 청년의 어머니, 과부의 애절한 모습을 주시해 보시고 그곳에 발이 멈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찌하든지 주님의 발걸음이 멈춤으로서 죽은 자는 살게 된 것입니다.
(요11:21)에서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고 했습니다. 주님이 계신 곳에 죽음이 있을 수 없다는 의미다 하오니 주님이 발걸음이 머무르는 곳에 죽음으로 비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주님의 발걸음이 멈추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나의 참 진실이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 여인의 참 슬픔 애절한 모습, 순수한 그 모습을 보시고 주님이 이곳에 발을 멈춘 것입니다.
거짓되고 허영된 곳에 주님의 발이 멈추면 주의 진로와 책망뿐이지 그곳에 사랑의 역사, 생명이 구원받는 일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어느 장소, 때만 바라지 말고 내 모습의 거짓 없는 모습을 언제나 지니고 있다면 주님의 도우심이 언제나 계속될 것입니다.
3.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나인성 과부의 일생에 있어서 가장 기쁘고 참된 의미의 삶을 맛볼 수 있었던 사건은 바로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을 핍박하던 사울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변화되었던 것처럼 예수님과의 첫 만남은 곧 바로 인생의 지침을 돌려 놓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나인성 과부는 단 한마디의 간청도 없었습니다. 오직 예수님과의 만남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를 만나야 합니다. 만남은 분명 새로운 삶의 의미를 부여해 줄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삶을 통해 진정한 기쁨이 무엇인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4. 예수께서 불쌍히 여김을 받았기 때문에
예수께서 과부의 아들을 회복시킨 이유는 과부를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이같은 예수의 태도는 과부를 돌아보는 율법을 (출22:22-23,사1:17) 준수하심과 동시에 사람들에게 힘없는 과부를 돌보도록 권면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훈을 받들어서 사도바울은 (딤전5:3-16)에서 참 과부의 자격과 참 과부를 돌보아야 할 책임이 성도들과 교회에 있음을 설파(說破)하였으며 야고보 사도도 과부를 환난 중에 돌아보는 일은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1:27)이라고 칭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묘지까지 아들을 따라가는 그 가련한 과부를 보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는 이 일에서 과부를 위해 어떻게 해 달라는 요청을 받지도 않으셨습니다. 몇 마디 위로의 말씀을 하시는 일조차 요구받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즉 순전히 그의 인자한 본성에서 그는 그 여자 때문에 아픔을 느끼셨습니다.
그는 연미의 마음으로 이 일을 보셨습니다. 그의 눈을, 그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였습니다. 그는 그 여인에게 울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애통해 하는 자에게, 불쌍한 자에게 관심을 가지시며 왕과 그의 인자하신 축복으로 영접하신다(시59:10)는 점을 명심하자 그는 자기 사랑과 긍휼로 우리의 구원과 구속 역사를 떠맡으셨습니다.
(사63:9) 이것은 우리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와 그의 무한한 긍휼하심에 대해 얼마나 뜨거운 생각을 불어 넣어주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어떤 슬픔에 잠겨 있는 때에라도 이것은 우리에게 여간한 위로가 되는 게 아닙니다.
과부들은 슬픔 가운데에서라도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역경중에 있는 자들의 영혼을 아신다는 데에서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성도들이여 나의 처지가 가련하다고 비관하지 말고 주님만 믿어야 합니다. 주님이 보시기 때문에 필요시에는 다 주실 것입니다.
5. 과부로 수절했기 때문입니다.
(죽7:12)에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행동거지도 보신 것으로 생각되나니 사마리아에 여인은 남편이 다섯 명이나 두고서도 현재 있는 남편도 네 남편이 아니라고 하시었는데 여기 그녀는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외롭게 지내면서 오직 자녀 양육에 힘쓰고 지낸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같은 행위를 보신 주님은 그녀의 자녀 마저 데려가시면 안됨을 생각하셔서 살려 주셨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한 다른 말로 하면 자기의 본분을 다했나니 남편이 죽었다고 그 자녀를 버리고 재가하지 않고, 자기 개인의 위주로 살지 않았고 자녀를 위해 희생했습니다. 그런 그녀인데 그 희생한 보답이 없어서는 아니됨을 보시고 살리었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나의 본분을 다하여 봅시다. 주님이 다 아시고 계시기 때문에 주님께서 인정하시고 계시다가 때가 되면 다 이루어 주십니다.
6. 자녀의 가는 길을 알고 애통했습니다.
이 과부의 아들은 지금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길로, 육체는 땅속으로, 그의 영혼은 지옥을 향하여 가는 길입니다. 부모로서 이 길은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녀는 애통해 한 것입니다.
* 석가의 생사필멸이란 말이 있습니다. 석가모니가 한 도시에 갔습니다. 마침 그 도시에 삼대 독자를 잃고 반미치다 시피한 부인이 석가모니가 왔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가 석가모니님, 나는 삼대 독자를 잃었습니다. 석가모니님은 도가 깊으신 어른이 아니십니까! 죽은 내 삼대 독자를 살려주십시요,하고 애원했습니다.
석가모니는 부인을 한참 동안 바라다본 후에 이 도시에 삼대째 죽음를 보지 못한 집을 찾아서 쌀 세홉을 빌려오면 부인의 아들을 살려주겠소 라고 했다고 합니다.
절망에 처해 있던 여인은 그 말을 듣자 얼굴에 생기를 띠고 그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리고는 뛰어가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고 삼대째 죽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물어 보았습니다. 발이 부르트도록 그 도시의 집을 샅샅이 돌아 다녔으나 삼대가 죽지 않고 고스란히 살고 있는 집은 한집도 없었습니다.
몸과 마음이 지칠대로 지친 부인이 힘없이 석가모니에게 돌아오자 그는 “부인 삼대째 죽음이 없는 집에서 쌀을 구해 오셨소.” 하고 물었습니다. 부인이 삼대째 죽음을 보지 못한 집은 한집도 없었습니다 라고 대답하자 석가는 부인이여 깨달을 찐저 “생자필멸회자정리 라고 했소”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 뜻은 살아있는 사람은 반드시 죽는 것이요, 만나는 사람은 반드시 헤어지는 것이 우주의 법칙이니 깨닫고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의 죽음에 대한 철학적인 불교가 줄 수 있는 대답의 전부였던 것입니다. 석가는 깨달으라고만 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이런 죽음에서 살리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 우리 성도들의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어떠한 길로 가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렘21:8)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들의 자녀가 생명의 길이 아니라 사망의 길로 가고 있다면 문제는 심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자기들의 자녀가 지금 생명의 길이 아니라 사망의 길로 가는데도 애통해 할 줄 모르고 있으니 말입니다.
특히 여신도들이여 이 여인은 몇 시간 후면 영원히 결별의 순간인데 그 아들을 살리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들을 주께로 인도해야 할 것입니다. 자녀들을 그냥 두면 그들은 영혼이 멸망케 될 것입니다.
7. 아들을 덕망 있게 기른 것입니다.
2절에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했습니다. 옛 속어 가운데 아비가 없는 자식을 호래자식이라고 했습니다. 즉 부모의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성장했다고서 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같은 자와는 잘 상대해 주지 아니해서 외롭게 지내게 되며 자연 친구도 이웃도 친근하게 지내는 자가 별로 없고 더욱이 특별한 일에는 더욱 외로움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자는 젊은 청년이요, 과부의 아들인데 저의 장례행렬에는 대단한 성황이었던 것을 보게 되니 이는 참으로 이웃과의 인간관계가 원만하게 지낸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 인간관계가 원만하고 모나지 아니하도록 저가 살 수 있다는 것은 바로 어머니의 교육이 지대했으며 또한 저도 그 어머니 교훈에 잘 따라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성도들이여, 여러분의 자녀들이 부모님의 말씀을 얼마나 따르고 있습니까? 부모님의 말씀을 잘 따라 주는 자가 있다는 것은 행복이지만 말씀에 반대하고 따르지 아니하는 것은 결국에 있어서 가정의 불행이요, 그 자녀의 불행입니다. 이 과부의 아들이 살아 난 것은 주님이 보시고 판단하시기를 이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슬퍼하는 것을 보시고 그자가 죽으면 그 동리가 불행인 것을 보시었기 때문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성도들이여, 나의 자녀들을 신앙으로 바로 길러야 하며 교육을 바로 하여 주위의 사람들로 칭찬과 꼭 필요한 자가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것만이 불행에서 소망으로 바꾸는 일일 것입니다.
사실 세상에서 생활할 때에 인간관계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인간관계가 원만한 사람만이 세상을 성공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은 그같은 자를 필요로 여기시고 생명을 연장케 하시는 것입니다.
결 론
(눅8:54)에 보면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었는데 그때에는 야이로의 간구와 호소가 있었기에 살리시었다고 말 할 수 있으며 (요11:43-44)에는 나사로를 살리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리시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위에서 말씀한 것처럼 특별한 조건없이 한 여인의 애절함을 보시고 주님의 긍휼하심으로 살리시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들도 무엇보다도 영적으로 죽어가고 있는 자녀를 살리어야 하겠습니다.
여기 본문에 나오는 여인같이 주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도록 애절함이라도 보여야 할 것입니다. 자녀들의 영이 죽어가고 육이 죽어 가는데도 이를 살리려고 하지도 아니하고 무관심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주님이 지금도 자녀들을 둔 자들에 자녀들을 살리게 하는 역할의 계기를 마련하기를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