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제파악하는 성도가 되렵니다(2)
2023년 7월 9일 / 누가복음 17:7-10, 요 2:1-11
지난 2023년 4월 2일에 누가복음 14:7-11 말씀으로 ‘주제 파악하는 성도가 되렵니다’이란 설교를 한 적이 있었다. 누구에게 들으라는 설교가 아니고 나 자신을 향한 설교가 되고 싶어서 ‘주제파악하는 성도가 되렵니다’라는 제목을 붙이고 그렇게 살려고 하였다. ‘주제파악하는 성도가 되렵니다(2)’에서는 ‘주제파악하는 성도가 되렵니다(1)’의 내용을 많이 인용하였다.
나는 요즈음 종종 여러 사람에게 ‘나는 주제파악을 잘하였다’라고 하면서 섬기는 자가 되는 것이 얼마나 잘했는지 모른다. 나는 부흥강사는 아니지만, 부흥회에 참석하여 뒷자리에 앉아서 기도하면 나름의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다. 그렇다고 사도들처럼 행한다는 것은 아직은 아니다. 미미하지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에 그저 하나님의 은혜 감사할 뿐이다. 고등학교 다닐 때 대예배 때 뒷자리에 앉아 ‘하나님 은혜 1/10,000이라도 갚게 해 주옵소서’라고 울며 기도했던 것에 대한 실천일 뿐이다.
▶ 어떤 목사님이 신자들에게 ‘삼척이 어디에 있는 줄 아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신자들이 일제히 ‘강원도’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그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틀렸습니다. 삼척은 여러분들 마음 안에 있습니다. 잘난 척, 있는 척, 아는 척하는 이 세 가지가 바로 삼척입니다.’라고 했다.
그리스도인 곧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섬기며,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들어 모시는 신앙인들은 어떤 사람들이며, 또 어떤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가?
우리도 진정으로 겸손한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교회 생활에 앞장을 서는 열심있는 사람은 많이 보았다. 하지만 나 자신부터가 그러하듯 겸손한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겸손이란 무엇일까? 자신을 스스로 낮추는 일이 겸손일까? 결단코 그렇지 않다. 자신을 비굴하게 낮추고, 그것을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은 결코 겸손일 수 없다. 그뿐 아니라, 나중에 높은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계산된 마음으로 스스로 낮은 자리를 차지하는 행위도 겸손일 수 없다. 그것은 겸손이 아니라 오만함이며 거짓이다. 그렇다면 겸손이란 무엇일까? 겸손은 ‘자신의 한계를 아는 것이고 참된 자기 인식이다’라고 표현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겸손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아는 것, 하나님의 시선에서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다. 시쳇말로 주제파악을 잘하는, 분수를 아는 것이 겸손이라고 할 수 있다.
파악(把握)은 ‘손으로 잡아 쥠’, ‘어떤 대상의 내용이나 본질을 확실하게 이해하여 앎’의 사전적인 의미로, 주제파악(主題把握)이란 복합성어로 ‘변변하지 못한 처지 따위를 확실하게 이해하여 앎’이란 의미로 많이 사용된다. 주제 파악을 하자는 얘기는 정확하고 밀도 있게 나를 성찰하고, 본질을 파악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당연히 예수님처럼 나중된 사람들을 위해 먼저된 사람으로서 최선을 다해 발까지 씻겨주는 섬기는 봉사를 해야 한다. 이것이 주제파악을 한 성도로서 해야 할 일이다. 한 사람의 병자가 고침을 받아 새로워지는 일이 얼마나 필요한지!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오기 위하여 어떠한 수고와 땀 흘림이 필요한지! 집을 나간 아들이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하는 아버지의 심정, 하나님의 심정을 가지고 오늘도 내일도 수고를 아끼지 않아야 할 것이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일이다.
‘누가 설교하고, 누가 기도하고, 누가 앞장 서고, 누가 은혜를 많이 받았느냐’가 핵심이 아닌 오직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를 소원하여 그렇게 살고 싶기 때문이다.
마 6:9-10 / 그러므로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높임을 받으시며 10)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소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이 말씀에 근거하여 누가복음 2:25-32에 나오는 예루살렘에 사는 시므온이라는 사람처럼 하나님의 영광이 이 땅에 가득 차는 것을 보며 일생을 마쳤으면 한다.
눅 2:25-32 / 그날 성전에는 예루살렘에 사는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와 있었다. 그는 바르고 경건한 사람으로서 성령이 충만하여, 메시아가 곧 오실 것이라고 늘 기다리고 있었다. 26) 그는 하나님이 기름을 부으신 왕을 보기 전에는 죽지 않을 것이라는 성령의 계시를 받은 일이 있었다. 27) 그날도 그는 성령의 인도로 성전에 가게 되었는데 그때 마침 마리아와 요셉이 율법이 정한 대로 아기 예수를 주께 드리려고 들어왔다. 28) 시므온은 아기를 품에 안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29) `주여, 주께서 제게 약속하신 대로 이 종은 평안히 눈감게 되었습니다. 30) 주께서 세상을 위하여 보내 주신 구주를 내 눈으로 보았습니다. 31) 이분은 모든 나라를 비추는 빛이시며 32)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십니다.'
▶ 오래전부터 늘 마음에 품고 기도해오는 영적 부흥에 대한 염원이 있었다. 특히 지난 2월 8일 에즈베리 대학교에서 일어난 부흥의 불길이 우리 한국교회에서 일어나기를 소원하며 기도하고 있다.
많은 교회가 교회 내적으로 갈등에 휩싸여 있다. 교회가 사회에 대하여 선한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고, 부정적인 면을 자주 보여주었다. 물론 한국교회가 그늘진 곳에서 사랑의 수고를 했지만, 부정적인 면이 더 크게 부각됐다. 일부 대형교회의 세습문제, 아니 교회마다 대를 이어야 하는 문제에 심각한 분쟁, 교회의 물량주의와 성공 지상주의, 일부 목회자들의 비리 그리고 교회를 넘어 교단 내의 분쟁들이 악성 바이러스처럼 퍼져나가 무교회주의가 등장해야 하는 실정이 되어 독립교회주의가 확산하는 조짐이 보인다.
이렇게 된 원인 중의 하나가 대부분 부흥을 이렇게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흥을 ‘교회가 커지는 것, 교인 수가 늘어나는 것, 헌금이 많이 걷히는 것, 예배당을 크고 화려하게 짓는 것, 예배를 열광적으로 드리는 것, 찬양을 열심히 하는 것 등 … .’ 물론 이런 것들이 부흥의 결과로 나타나는 하나의 현상일 수는 있지만, 그것이 부흥의 본질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금 한국교회는 침몰하는 타이타닉처럼 표류하는 인상을 받게 된다. 늦기는 하지만 ‘교회는 세상의 유일한 희망으로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과연 지금 한국교회가 혼탁한 세상에 소망을 줄 수 있을까?’라는 점에 대해서 의구심을 갖게 된다.
이런 안타까움이 우리 안에 부흥의 소망을 갖게 된 동기가 되어야 한다. 이 땅의 교회가 인간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세워진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피로 값 주고 세우신 교회라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실현하실 것이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뜻있는 분들의 입에 흥얼거리는 찬양이 있다. 바로 ‘부흥’이다.
♪ 이 땅의 황무함을 보소서 하늘의 하나님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우리의 죄악 용서하소서 이 땅 고쳐주소서 이제 우리 모두 하나 되어 이 땅의 무너진 기초를 다시 쌓을 때 우리의 우상들을 태우실 성령의 불 임하소서 부흥의 불길 타오르게 하소서 진리의 말씀 이 땅 새롭게 하소서 은혜의 강물 흐르게 하소서 성령의 바람 이제 불어와 오- 주의 영광 가득한 새 날 주소서 오- 주님 나라 이 땅에 임하소서
젊은이들 입에서 먼저 불리던 이 노래가 어린이와 노인에 이르기까지 간절한 염원이 되어 불렸으며, 그것도 모자라 부흥 2000이란 노래까지 불려졌다.
♪ 오소서 진리의 성령님 이 땅 흔들며 임하소서 거짓과 탐욕 죄악에 무너진 우리 가슴 정케 하소서 / 오소서 은혜의 성령님 하늘 가르고 임하소서 거룩한 불꽃 하늘로서 임하사 타오르게 하소서 주 영광 위해 / 부흥의 불길 타오르게 하소서 진리의 말씀 이 땅 새롭게 하소서 은혜의 강물 흐르게 하소서 성령의 바람 이 땅 가득 불어와 / 흰 옷 입은 주의 순결한 백성 주의 영광 위해 이제 일어나 열방을 치유하며 행진하는 영광의 그 날을 주소서 오소서 진리의 성령님 이 땅 흔들며 임하소서 거짓과 탐욕 죄악에 무너진 우리 가슴 정케 하소서
지금은 우리 모두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위하여 부흥을 꿈꾸며, 부흥을 노래하며, 부흥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단순히 한국교회의 교인 수가 감소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근본적으로 이 땅에 악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노아 시대 모든 사람의 생각이 악하고, 세상이 악으로 가득 찼던 것처럼 지금 이 시대와 이 민족 안에 우상숭배와 거짓과 탐욕의 죄악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패역하고 황무한 이 땅을 새롭게 고칠 방법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부흥’이다.
우리는 이런 현실에 대해서 비난하거나 돌을 던지지도, 누군가에 책임을 전가하지도 말아야 한다. 우리 자신도 바로 그 속에서 함께 패악한 길을 걸어왔음을 인정하고, 이제는 더 비난이나 정죄가 아닌 우리 자신이 변화되기 위해서 몸부림쳐야 한다. 우리 교회부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해 힘써야 한다. 더 이상 뒤로 물러서서는 안 된다. 이제는 우리 자신들이 이러한 아픔을 끌어안고, 함께 기도하며, 새로운 부흥을 위해 부르짖어야 한다.
하박국 성경은 민족의 위기와 고통 속에서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는가를 잘 보여준다. 하박국이란 이름의 의미는 영어로 ‘embrace’ ‘포옹한다, 껴안다’라는 뜻이다. 하박국 선지자는 조국 현실의 위기와 고통 속에서 낙심하거나 도피하거나 원망ㆍ불평하는 자가 아니라 그 문제를 가슴에 끌어안고 하나님 앞에서 질문을 던지며 기도로 부르짖는 하박국 선지자와 같아야 한다.
▶ 먼저 ‘부흥’이란 단어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본다. 부흥이란 말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쇠하였던 것이 다시 일어남, 또는 다시 일어나게 함’이라고 되어 있다. 또 부흥이라는 말은 영어로 ‘revival(소생), reconstruction(재건축), restoration(회복)’이다. 대표적으로 revival이란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 단어는 ‘다시’라는 의미의 접두사 ‘re’와 ‘살다’라는 의미의 ‘vive’가 합쳐져서 ‘다시 살아나다’, ‘회복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부흥은 죽었던 영혼이 다시 깨어나고, 살아나고, 회복되는 것을 말한다. 낙심했던 자들이 새힘을 얻고, 절망 가운데 있던 자들이 소망을 발견하고, 어둠 가운데 있던 자들이 빛 가운데로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무능력하던 자들이 세상에 소망을 주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것을 말한다.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 예루살렘에 있던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초대교회를 보면 부흥의 특징을 잘 알 수 있다. 초대교회는 마가 다락방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마가 다락방에 모여 있던 주제파악을 했던 120명이 간절한 부르짖을 통해 권능을 힘입어 새로운 사람들로 변화되었다.
‘주제파악하는 성도가 되렵니다(2)’에서는 요한복음 2:1-11에 나오는 하인들의 모습을 통해 주제파악을 잘하는 성도가 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주제파악하는 성도가 되렵니다(3)’에서는 좀 더 깊은 면에서 사도 바울의 예를 들면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종으로서의 바른 자세를 갖추려 한다.
주제파악을 하고 열심히 봉사했던 가나의 혼인집 하인들의 수고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기적을 베푸셨다. 그것도 성경의 기록으로는 예수님의 공생애 첫 번째 기적이었다.
이 기적을 성경에까지 기록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물론 이 기적을 베풀어 주신 분 즉 주인공은 예수님이지만, 조연으로는 예수님의 지시에 불만 불평하지 않고 순종한 결과로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만나게 된 하인들에 대한 기록이라고 해도 괜찮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하인들의 마음을 곱씹어 보아야 할 것 같다.
상석에 앉기를 좋아하는 오늘날 우리 모두에게 주제파악을 잘한 귀감이 되는 하인들의 모습을 배우자.
● 요 2:1-2 / 이틀 후 갈릴리 가나 동네에 결혼잔치가 있었다. 그 잔칫집에는 예수의 어머니도 계셨고 2) 예수도 제자들과 함께 초대를 받아 와 계셨다.
갈릴리 가나라고 하는 작은 마을에서 혼인잔치가 벌어졌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혼인집에 있고, 예수님께서 아직 대중에게 잘 알려지기 전이요 가나 마을 사람이 아닌데도 제자들과 함께 초청을 받으신 것을 보면, 마리아의 친척 집이었던 것 같다.
3절 / 그런데 잔치를 하는 도중에 포도주가 떨어지자 예수의 어머니가 이 문제를 예수께 의논하였다.
유대인의 혼인이 보통은 일주일, 길면 이주일 계속되기도 하는데 며칠이나 지났는지 알 수는 없지만,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커다란 낭패이다. 보통은 혼인 잔치에 참여할 손님들의 수를 예상하여 충분하게 준비하는데, 아마도 혼인 잔치에 예상외로 많은 사람이 몰려든 것 같다. 해서, 혼인 잔치가 끝나기도 전에 포도주가 떨어지는 일이 벌어졌다. 지금이야 슈퍼에 가서 사 오면 되겠지만 옛날에는 ….
마리아는 예수님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라고 말을 전했다.
예수님께서 어머니 마리아를 ‘여자여’라고 부르신 것은 유대문화에서는 그리 이상한 것은 아니고 존칭의 표현이다.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말씀하심은 ‘포도주가 부족하여도 어머니가 제게 무엇을 기대하심이 합당치 않다’라는 뜻이다. 즉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은 사람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명령에 따른 것이라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때로 우리에게 잠잠하실 때라도 우리가 끈질기게 기도하면, 때로 하나님은 뜻을 돌이키시사 우리에게 주지 않으실 것도 허락하시는 경우가 있다.
5절 / 그러나 예수의 어머니는 하인들에게 ‘무엇이든지 그분이 시키는대로 하게’ 하고 일렀다.
마리아의 믿음도 보통이 아니다. 아들의 핀잔성에 가까운 거절이 있었는데도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께 대한 기대를 접지 않았다. ‘네가 내게 그럴 수 있어?’라고 화를 낼 수도 있는데, 아무 말대꾸 없이 하인들에게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한다. 그만큼 예수님을 신뢰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탁을 드리면 해 주실 것을 확신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6절 / 거기에는 마침 물이 너덧 말 들어가는 돌항아리 여섯 개가 놓여 있었다. 이 항아리는 유대 사람의 정결예식에 사용하는 것이었다.
돌 항아리 여섯은 유대인들이 외출에서 돌아오거나 손님으로 초대된 사람들이 몸을 정결케하기 위하여 손을 닦는 물을 준비해두는 항아리이다.
7절 / 예수께서는 하인들에게 ‘항아리마다 물을 가득 채우라’ 하고 이르셨다.
하인들은 여섯 돌 항아리에 물을 채우되 예수님이 시키신 대로 ‘아구까지’ 가득 채웠다.
8-10절 / 그들이 그 말씀대로 물을 다 채우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 물을 떠서 잔치를 주관하는 사람에게 가져다주어라.’ 9) 잔치를 주관하는 사람이 그 물을 맛보았을 때는 이미 물이 포도주로 변해 있었다. 하인들은 그 포도주가 어디서 난 것인지 알고 있었지만 그 사람은 그 포도주가 어디서 난 것인지 몰랐으므로 신랑을 불러 10) 말하였다. ‘이거 아주 훌륭합니다! 최고의 맛입니다. 누구나 처음에는 최고급 포도주를 내놓다가 손님들이 실컷 마시고 취한 뒤에는 값싼 것을 내놓는 법인데 당신은 마지막을 위해서 최고급품을 준비해 두었군요!’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고 하셨는데 물이 언제 포도주로 변화되었는지 알 수 없다. 물을 항아리에서 뜰 때 이미 포도주로 변화되었는지 아니면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는 사이 변화되었는지, 연회장의 손에 들려서 맛보는 사이에 변화되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런데 한 가지 예수님의 표적 또는 기사와 이적을 보면서 발견하는 것은 예수님의 능력은 자연스럽다(natural)는 것이다. 어떤 인위적인 것이 가해지는 것 같지 않다. 그저 능력이 자연스럽게 행사되며 언제 발생되는지 알 사이도 없이 일어난다. 우리가 예수님께 병 낫기를 구할 때, 어떤 문제가 해결되기를 구할 때 예수님의 응답 역사 또한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몸에 질병이 기도하는 사이 나도 모르게 치료되며, 나의 문제가 기도하는 나의 삶 가운데 눈 녹듯이 스르르 없어지기도 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처음 부르실 때,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 외에 제자들 앞에서 기적도 행하지 않으셨다. 안드레를 포함하여 세례 요한의 제자 둘, 시몬과 빌립과 나다나엘은 예수님의 삶과 말씀에 나타난 비범함과 권위를 보며 이분이 메시아라는 확신을 갖고 예수님을 좇았다. 예수님이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심을 보고 예수님을 따르고자 했던 자기네들의 생각이 옳았다는 확신을 가지며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을 것이다.
요 2:11 / 갈릴리 가나에서 있었던 이 이적은 예수께서 자인의 능력을 첫 번째로 사람들 앞에 나타내신 것이었다. 제자들은 참으로 예수가 메시아이신 것을 믿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 새로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려면 이러한 하인의 마음을 가진 이들이 많아야 한다. 예수님의 말씀이라면 말없이 그대로 순종했던 믿음의 선진인 노아를 비롯한 아브라함과 같은 신앙인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
▶ 요한복음 2:1-11을 조금 더 묵상하며 하인들의 마음을 가졌으면 한다.
예수님은 정결(淨潔)례를 행하는 여섯 개의 돌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명령하셨다. 하나에 보통 120ℓ 정도 들어가는 큰 항아리가 6개니까 7백 리터가 넘는 양이었다. 유대인들은 보통 신발을 신고 다니지 않기 때문에 발이 지저분했다. 또 기후도 매우 더운 날씨라서 땀이 많이 나기 때문에 몸에서 냄새가 많이 난다. 그래서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반드시 그 집에 있는 정결례 항아리에서 손과 발을 씻고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일종의 통과의례였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두 가지를 명령하시는데, 첫 번째 명령은 정결례를 행하는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라는 것이다. 아니 포도주가 떨어졌으면 사 오라고 돈을 주든지 하면 되는데, 왜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하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럴지라도 하인들은 말씀에 순종하여 물을 가득 채웠다.
그런데 두 번째 명령인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는 말씀은 나부터 순종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들이 떠다 주는 물은 더럽고 냄새나는 손과 발을 씻었던 정결례 항아리에서 떠다 주는 물이다. 하인들은 이 물을 떠다 주었을 때 무슨 욕을 먹을지, 무슨 봉변을 당할지 알 수 없다. 아무리 마리아가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했어도 쉽게 순종할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하인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였다.
이해되지도 않고, 따르기가 쉽지 않았지만, 주제파악을 잘하는 하인들로서는 예수님의 말씀이라면 끝까지 순종해야 한다. 그런데도 이런 사실을 우리 또한 기본적으로 알고 있지만 그대로 믿고 순종하는 사람이 몇 %나 될까? 성경은 그렇게 순종했더니 그들의 손에 들려있던 물이 어느새 포도주로 변하는 기적을 체험하게 되었다. 순종했더니 욕을 먹고 망신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연회장으로부터 ‘이렇게 최고로 맛있는 포도주가 어디서 났느냐?’고 칭찬까지 받았다.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는 예수님의 명령이 돈이 많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순종이 아니다. 자신들에게 있는 건강한 육체로 조금 더 순종하면 될 수 있다. 하인들에게 하시는 명령은 두 마디 밖에 없었다. 하인들에게 물을 포도주로 만들라고 하시지는 않았다. 하인들로서는 시키시는 대로 순종만 하면 된다.
그렇다고 하여 물을 떠다가 연회장에게 갖다 주는 일 또한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주제파악을 잘하였던 하인들은 예수님께서 시키신 대로 하였을 뿐이다.
본문에는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본 연회장은 이것이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했고, 물 떠온 하인들은 알았다고 되어 있다. 기적은 우리가 믿고 순종하는 순간부터 이루어지기 시작하며 순종한 사람만이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게 된다.
맹물을 떠서 연회장에게 가져가는 순간까지도 그 물은 맹물이었다. 그것은 확실하다. 예수님은 포도주를 갖다 주라고 하지 않으셨다. 이것이 믿음의 과정이다. 맹물을 들고 하인들이 연회장 앞에 갔는데 ‘언제 어떻게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었는지?’ 그 과정을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연회장이 받아든 것은 물이 아닌 전혀 맛보지도 못한 최고급의 향긋한 포도주였다. 물이 포도주로 변한 것은 언제였을까? 기적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시간에 이루어진다. 그렇다고 기적에 도취하여 신앙생활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
그렇다. 기적은 순종할 때만 경험할 수 있다. 먼저 순종할 때 기적을 체험하는 것이지, 계산해보고 따져보고 나서 순종하는 것은 순종이 아니다. 어려움을 당할수록, 위기를 당할수록 말씀에 즉각적으로 순종하면 능히 해결할 수 있게 해 주실 줄 믿어야 한다. 순종하면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역사가 일어난다. 즉 주제파악을 하고 자신이 하인 또는 종으로서 할 바를 하면 된다. 그 이상도 그 이하가 되어서도 안 된다.
※ 한 가지 더 묵상해야 할 것 있다.
누가복음 15:12-24에서 특히 17절 이하에서 둘째 아들의 결단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누가복음 15:17-19 / 그제야 제 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아버지가 계신 집에는 일꾼들까지도 양식이 풍족하여 먹고도 남는데 여기서 나는 굶어 죽겠구나! 18) 아버지께로 돌아가 이렇게 말씀을 드려 봐야겠다.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19) 그러니 이제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도 없습니다. 저를 일꾼으로라도 써주십시오.’
둘째 아들이 일찍부터 주제파악을 했더라면 불필요한 고생은 하지 않았을 것을 …. 온갖 고생을 다 한 후에 주제파악을 했으니 …. 그럴지라도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이 멀리서 걸어오고 있는 것을 본 아버지는 측은한 마음에 달려가 아들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이에 21절에서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드린 말씀은 우리가 되새겨야 할 주제파악에 대한 고백이다.
21절 /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도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말하였다. ‘빨리 집안에서 제일 좋은 옷을 꺼내다가 내 아들에게 입혀라. 그리고 보석 반지를 끼워 주고 신을 신겨라. 또 살찐 송아지를 끌어내다가 잡아라. 잔치를 열고 기쁨을 나눠야겠다. 죽었던 내 아들이 다시 살아왔다. 그를 잃었다가 찾은 것이다.’ 그래서 잔치가 시작되었다.
둘째 아들은 이후에 마태복음 20:6에 나오는 11시에 포도원에 들어와서 1시간 일을 한 일꾼처럼 최선을 다해 아버지를 도와 일을 했을 것이다. 물론 예수님께서 비유로 하신 말씀이지만 … .
이런 말씀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제파악에 대한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