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 7월 28일(금) 욥기 36:1-16 찬송 450장
1. 엘리후가 말을 이어 이르되
2. 나를 잠깐 용납하라 내가 그대에게 보이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아직도 할 말이 있음이라
3. 내가 먼 데서 지식을 얻고 나를 지으신 이에게 의를 돌려보내리라
4. 진실로 내 말은 거짓이 아니라 온전한 지식을 가진 이가 그대와 함께 있느니라
5. 하나님은 능하시나 아무도 멸시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지혜가 무궁하사
6. 악인을 살려두지 아니하시며 고난 받는 자에게 공의를 베푸시며
7. 그의 눈을 의인에게서 떼지 아니하시고 그를 왕들과 함께 왕좌에 앉히사 영원토록 존귀하게 하시며
8. 혹시 그들이 족쇄에 매이거나 환난의 줄에 얽혔으면
9. 그들의 소행과 악행과 자신들의 교만한 행위를 알게 하시고
10. 그들의 귀를 열어 교훈을 듣게 하시며 명하여 죄악에서 돌이키게 하시나니
11. 만일 그들이 순종하여 섬기면 형통한 날을 보내며 즐거운 해를 지낼 것이요
12. 만일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면 칼에 망하며 지식 없이 죽을 것이니라
13. 마음이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은 분노를 쌓으며 하나님이 속박할지라도 도움을 구하지 아니하나니
14. 그들의 몸은 젊어서 죽으며 그들의 생명은 남창과 함께 있도다
15. 하나님은 곤고한 자를 그 곤고에서 구원하시며 학대 당할 즈음에 그의 귀를 여시나니
16.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대를 환난에서 이끌어 내사 좁지 않고 넉넉한 곳으로 옮기려 하셨은즉
무릇 그대의 상에는 기름진 것이 놓이리라 (개역 개정)
32-35장 부분에서 엘리후가 등장하여 3차에 걸친 변론을 폈다.
엘리후는 욥의 고난을 하나의 연단의 과정으로 보고
이를 통해 욥은 자신을 먼저 돌아보고 그의 죄를 회개함으로써
하나님의 회복의 은총을 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엘리후는 욥이 징계 중에도
자신의 죄를 회개함 없이 교만하게 자신의 의를 고집하며
하나님의 초월적인 주권과 공의를 부인하고 대적하는 죄를
더하고 있다고 신랄하게 비판을 가하였을 뿐만 아니라
욥의 현재의 고난도 그러한 죄에 비한다면 심히 가벼운 것이며
욥이 회개치 않는한 고난이 계속되길 원한다고까지 폭언하였다.
그러한 엘리후의 변론은 욥에 대한 오해와 편견에서 나온 일방적인 것으로서
지극히 원론적이고 관념적인 논조로 욥을 책망하고 공격하는 성격이 강했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객관성을 잃어가며
비정하고 격앙된 감정을 노출시키는 것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36장과 37장에 소개되고 있는 엘리후의 4차 변론은
그렇듯 격앙되었던 어조가 다소 누그러져
일방적인 책망과 추궁이 아닌 부드러운 권면과 충고의 성격이 강하다.
특히 이번의 4차 변론은 하나님의 공의와 주권적 섭리,
그리고 초월성을 설명함에 있어 이전의 변론들보다 폭넓고 객관적이며 구체적이다.
이는 엘리후가 제한적이나마 성숙된 신앙 지헤와 영적 통찰력이 있음을 보여 준다.
그 중에서도 오늘 말씀은 특히 하나님의 공의로운 행사와 섭리에 대한
엘리후의 폭넓은 신앙지식을 보여 주고 있다.
특히 34:10-30에 나오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설명이
악인에 대한 징벌의 심판의 측면을 강조하고 있는데 반해
본문은 죄에서 돌이키는 자를 향한 구원자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회복의 은총을 보다 더 강조하고 있다.
이는 결국 하나님의 공의가 가지는 심판과 회복이라는
양면성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6,11절)
특히 여기에서 엘리후는 시험하고 연단키 위해 베풀어지는
의인의 고난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때 돌이키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에게
임하는 형통과 회복에 대해 밝힘으로서
욥의 고난을 단순히 죄에 대한 징벌로만 해석한
세 친구들의 도식적인 인과 응보론적 견해와는 다른 입장을 취한다.
즉 이 부분에서 엘리후는 욥의 고난을 단순히 죄에 대한 심판으로
결론짓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연단의 과정으로 보고
그 고난 뒤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의로우신 뜻과 은총을 시사함으로써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대한 보다 깊은 신앙 지혜를 보여 준다.(15-16절)
결국 엘리후는 본문의 설명을 통해 욥이 하나님의 의로우신 섭리에 대한
신앙적 한계를 극복하고 하나의 연단으로 주어진 고난 가운데서
먼저 회개를 통해 하나님의 교훈 하심에 청종함으로써
회복과 축복의 길로 나아가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케 된다는 사실 또한 명백히 밝힘으로써(12절)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징책과 교훈을 거역하지 말고 회개할 것을 충고하고 있다.
그리고 다음 단락에서도 이러한 맥락의 교훈이
보다 더 직접적으로 주어지며 심화되고 있다.
한편 여기에서 하나님의 의로우신 섭리 가운데에는
한없는 은혜와 사랑이 깃들어 있음을 보게 된다.
즉 하나님의 심판의 목적은 악을 멸하시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 죄를 깨닫게 하시고 돌이키게 하사 멸망의 자리에서
벗어나게 하실 뿐만 아니라 순종하는 자에게 예비된
은혜와 축복을 회복시키고 더하게 하시려는 데 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고난 역시 더욱 바른 길로 인도하고
하나님께로 가까이 다가서게 함으로써
더 큰 축복의 자리에 앉게 하시려는 사랑의 또다른 형태로 이해하여
이를 통해 더욱 성숙한 신앙을 갖는데 힘써야 한다.
15절) 「하나님은 곤고한 자를 그 곤고에서 구원하시며
학대 당할 즈음에 그의 귀를 여시나니」
우리는 보통 생각하기를 하나님께서 의인을 구원해 주실 것이면
이왕 그가 곤고하기 전에 구원해 주시든지,
아니면 아무런 고난도 허락하시지 않든지 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일면 맞는 생각인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인간으로서 당연하다.
그러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의인이 곤고할 때,
곤고함을 맛본 후에 구원하신다고 한다.
그렇다면 여기에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깊으신 뜻과 생각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무 생각 없이, 아무렇게나 하시는 일은 결코 없다.
그래서 한 신학자는 이 구절을 ‘하나님은 곤고한 자를 그 곤고로 구원하시며
학대로 그의 귀를 여신다’라고 번역하기도 했다.
그럴 경우 이 말씀은 의인이 당한 고난(곤고) 때문에
하나님을 더 분명하게 알게 되어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의미가 된다.
즉 하나님은 의인이 곤고함으로 인해 하나님에 대하여 더 깊이 알고
자기 자신의 연약함을 돌아보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들이 편안할 때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잘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곤고할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더 잘 느낀다.
그러므로 우리는 곤고함을 맛보게 하시는
하나님께 불평하고 원망하기보다는 도리어 감사해야 한다.
하나님의 계획은 예레미야의 고백처럼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며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렘29:11)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롬8:28)
전7:14 말씀에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고 했다.
하나님이 우리를 곤고하게 하실 때는
하나님의 큰 계획이 있음을 기억하고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이 어떤 일을 계획하고 계시는지 모르기에
선하시고 능력 있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께서 이 곤고함을 통해서 어떤 일을 이루실까를 생각하며
믿음으로 기다리고 인내해야 한다.
이때 우리는 풍랑 때문에 주께 더 빨리 나아간다고 찬송하고(373장, 고요한 바다로)
어두움 후에 빛이 오고, 바람 분 후에 잔잔하고, 소나기 후에 햇빛이 나며,
수고한 후에 쉼이 있다고 찬송하며(487장, 어두움 후에 빛이 오며)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때를 기다려야 한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약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