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 11월 15일(수) 시편 75:1-10 찬송 14장
(아삽의 시, 인도자를 따라 알다스헷에 맞춘 노래)
1.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
사람들이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파하나이다
2. 주의 말씀이 내가 정한 기약이 이르면 내가 바르게 심판하리니
3. 땅의 기둥은 내가 세웠거니와 땅과 그 모든 주민이 소멸되리라 하시도다 (셀라)
4. 내가 오만한 자들에게 오만하게 행하지 말라 하며 악인들에게 뿔을 들지 말라 하였노니
5. 너희 뿔을 높이 들지 말며 교만한 목으로 말하지 말지어다
6. 무릇 높이는 일이 동쪽에서나 서쪽에서 말미암지 아니하며 남쪽에서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7.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
8. 여호와의 손에 잔이 있어 술 거품이 일어나는도다 속에 섞은 것이 가득한 그 잔을
하나님이 쏟아 내시나니 실로 그 찌꺼기까지도 땅의 모든 악인이 기울여 마시리로다
9. 나는 야곱의 하나님을 영원히 선포하며 찬양하며
10. 또 악인들의 뿔을 다 베고 의인의 뿔은 높이 들리로다 (개역 개정)
- 베어질 악인의 뿔과 높이 들려질 의인의 뿔 -
본시는 제 74편과 마찬가지로 아삽 자손이 지은 것으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날을 고대하며 지은 ‘찬양시’이다.
본시의 저작 배경은 분명치 않다.
다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히스기야 제14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남유다를 침략했던 때일 것으로 추정한다.(B.C.701년, 왕하18:13-19:37)
이러한 본시는하나님의 작정한 때에 있을 심판에 대해 예고하는 전반부(1-3절)와
그 심판날에 시행될 하나님의 심판의 양상을 언급하는 중반부(4-8절)
그리고 공의의 하나님을 찬양하는 후반부(9,10절)로 구성되어 있는데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에 대한 시인의 강한 신념과 소망이 잘 나타나고 있다.
특별히 본시는 첫 절과 마지막 두 절이 하나님께 대한 찬양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수미쌍관법적(首尾雙關法的) 기법으로서 중간에 언급된 내용,
즉 하나님이 이 세상의 주관자요 심판자이심을 인해
마땅히 하나님이 찬양받아야 함을 강조하는 표현법이다.
그리고 본시에는 위엄과 존귀를 상징하는 ‘뿔’(3,5,10절)
하나님의 진노를 상징하는 ‘잔’(8절)과 같은 은유적 표현이 사용되어 있는데
이는 나타내고자 하는 바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하여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 있는 적절한 표현이라 하겠다.
한편 여기서 시인은 악인이 어떠한 사람이냐에 대해서는 거론치 아니하고
악인의 결국이 어떻게 되느냐에 대하여 거론하고 있는데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 악인이 아무리 이 땅에서 형통할지라도
결국은 이 세상을 공의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징벌에 처하고 말 뿐이다.
특히 본시에서 시인은 심판의 때에 멸망받을 악인으로
교만한 자를 부각시키는데(4,5절),
교만이란 모든 것을 높이고 낮추시는 권(權)을 가지신 하나님을
무시하거나 대항하여 스스로 높아지려 하는 심각한 불경죄이다.(6,7절)
즉 교만은 천지 만물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에 대한 배역(背逆) 행위로
그 결국은 하나님의 엄정한 심판을 받게 된다.(10절, 잠16:18)
따라서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입고 있는 자들인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서 오직 겸손함으로 그분의 뜻과 의만을 구하며
따르는 자들이 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최종적 공의 실현을 믿고 소망함으로써
현재 악인의 형통함이나 높아짐이 실로 헛되고 헛된 것임을 깨달아
행여라도 그 일로 인해 낙심하거나 회의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시39:5,11; 73:2,3)
9-10절) 「나는 야곱의 하나님을 영원히 선포하며 찬양하며
또 악인들의 뿔을 다 베고 의인의 뿔은 높이 들리로다」
여기서 ‘야곱의 하나님’이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굳이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자기의 택한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와 구원의 확실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야곱은 이삭의 쌍둥이 아들로 차자(次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미의 태에서부터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다.
그런데 그는 매우 간교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교묘한 술수로 쌍둥이 형이었던 에서로부터
장자권을 빼앗는 것은 물론 아비 이삭도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받았다.
그리고 에서의 보복이 두려워 밧단아람에 있는 외삼촌 라반에게로 피신하였다.
그런데 오랜 세월이 흐른 후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의 모든 가솔(家率)과 재산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서 살려면 반드시 에서를 극복해야만 하였다.
그러한 그가 가나안 땅에 가까이 이르렀을 무렵
에서가 가병(家兵)을 이끌고 자신을 해하기 위하여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그는 압복강을 건너기 전 밤을 새워가며 하나님께 필사적으로 기도하였다.
성경은 야곱의 이러한 필사적인 기도에 대하여
하나님과 씨름한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 야곱의 기도를 들으시고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주셨다.
이는 하나님께서 야곱을 보호하여 주실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결국 야곱은 에서와 상면하였을 때 죽임을 당하기는커녕 도리어 환대를 받았다.
지금 시인은 바로 이러한 야곱의 경험을 염두에 두고
그의 자손들인 유다를 하나님께서 구원하여 주실 것이라는 확신과 함께
하나님을 영원히 선포하며 찬양하겠노라고 다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특별히 ‘악인들의 뿔을 다 베고 의인의 뿔은 높이 들리로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교만한 앗수르를 꺾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높이실 것이라는 신앙고백이다.
즉 시인은 아직 하나님의 구원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극도의 위기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높이시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을 영원히 찬양할 것을 다짐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의 이러한 태도와 고백을 통하여 찬양의 진면목을 발견할 수 있다.
진정한 찬양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면 자연스럽게 마음에서부터 찬양이 우러나온다.
그에 비하여 시련을 당하게 되면 찬양보다는 탄식이 흘러나온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이 환경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연약한 존재이기에 환경의 지배를 받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
그러나 시련을 만나 찬양 대신에 탄식만을 한다면
그것은 믿음이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은 능력의 주이시다.
우리의 상황을 얼마든지 바꾸실 수 있는 분이다.
더욱이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버리시지 않는 분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의뢰하는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며,
아무리 극심한 위기에 처하여 있을지라도 구원하심으로 높이시는 분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믿는다면
비록 멸망이 코앞에 이른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
진정한 찬양은 이렇게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에 근거하여
상황을 초월하여 드려질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환경을 초월하여 자기 백성을 높이실 하나님 찬양해야 한다.
다윗의 찬양이 왜 위대한가? 오늘 본문의 시가 왜 위대한가?
그것은 이 찬양이 고난의 현장에서, 핍박과 절망과 눈물의 현장에서
하나님께 드려진 감사이며, 찬양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찬양도 결코 상황에 따라 극단적으로 변하는 찬양, 조건적인 찬양이 아니라
언제나 영원토록 그쳐지지 않을 찬양이 되어야 한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행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