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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사랑 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논시밭에 망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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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
선 채로 기다리기엔 세월이 너무 길다
말라붙은 은하수 눈물로 녹이고
가슴과 가슴에 노둣돌을 놓아
그대 손짓하는 연인아
은하수 건너
오작교 없어도 노둣돌이 없어도
가슴 딛고 다시 만날 우리들
연인아 연인아 이별은 끝나야 한다
슬픔은 끝나야 한다
우리는 만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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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흩어진 꽃잎이 내 뺨을 때린다. 울지 마라, 광주 "
....지난 22일 광주 충장로에서 열린 표창원 경찰대 교수의 '프리 허그'에
3천명이 넘는 인파가 모였다. 경북 포항 출신의 이 낯선 이의 방문에 광주는 눈물겨워 했다.
'박근혜 당선'이 확정된 20일 새벽, '직녀에게'를 부른 가수 김원중은 지인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지난 밤 찬바람에 꽃잎 다 떨어졌겠다. 모양만 따스한 햇살에 모두 말이 없는 아침.
흩어진 꽃잎이 내 뺨을 때린다. 나 달게 맞겠다. 울지 마라, 광주!"
그 시각 전남 영암 출신의 조정 시인은 페북에 이렇게 썼다.
"다른 모든 것에 대해서는 이가 악물어지는데
전라도를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고. 광주는, 전라도는 지금 지독한 외로움에 울고 있다.
"""트윗에서 초스코 라는 분
"광주랑 전라도만 생각하면 짠해죽겠다. 지난 주에 호남몰표로 욕하는 친구랑 싸웠는데, 오바했다 생각하지만 맘 아픈건 쉬이 사라지지않는다. 상처있는 사람들한테 소금은 뿌리지말지. "" 2012.12.26 <출처 중부일보 2012. 12.24>
'전라도'를 위하여 [지방신문 공동칼럼] 정운현 언론인
2012년 12월 26일 (수) 20:53:57 지면보기 15면 중부
크게 봐 경상도와 전라도는 북쪽의 덕유산과 남쪽의 지리산을 사이에 두고 동서 이짝저짝으로 나뉜다. 지리산 동쪽의 함양, 산청, 하동은 경상도, 서쪽의 남원, 곡성, 구례는 전라도다. 경남 함양 태생인 필자는 어린 시절 경상도와 전라도를 구분하지 못했다. 아니 굳이 구분할 필요도 없었고 또 구분되지도 않았다. 날씨 좋은 날 툇마루에 서면 저멀리 우뚝 솟은 지리산 천왕봉이 보였고, 마을 앞을 흐르는 냇물(위천)의 뒷산 너머는 전북 남원땅이었다. 읍내 장터 이름은 '물나드리'였는데, 남원 쪽에서 내려오는 냇물과 고향 마을 앞을 흐르는 냇물이 서로 나고 드는 곳이라는 뜻이다. 물나드리에서 고개를 하나 넘으면 남원의 아영, 인월, 운봉면으로 이어진다. 교통이 불편하던 그 시절엔 고개 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지만 지금은 그길로 88고속도로가 쌩쌩 내달린다. 그 시절에도 고개 이짝저짝은 서로 한 동네처럼 지냈으며 혼사도 잦았다. 우리 외가도 거기 있다. 그런데 열 살 때 온 식구가 대구로 이사를 나오면서 전라도를 잊었다. 청년기를 대구서 보내면서 나는 '진짜' 경상도 사람이 되었다. 대학 2학년을 마치고 입대했는데 자대가 부산이었다. 졸업 후 장가는 경북 안동으로 가게 됐고, 첫 직장은 삼성그룹 계열의 신문사였다. 회사 모임이나 동창회 모임도 가보면 모두 경상도 출신이었다. 전라도 땅 광주를 처음 가본 건 2002년 대선 때였다. 굳이 따지자면 그 이전엔 갈 일이 없었다. '광주학살'의 현장인 옛 전남도청 앞 충장로에도 가보았고, 5·18국립묘지에도 가보았다. 땅도 말도 모두가 낯설었고 나는 마치 이방인(異邦人) 같았다. 그러던 것이 그해 대선 열풍을 계기로 나는 처음 전라도를 내 가슴에 품게 되었다. 고마운 땅, 고마운 사람들이라는 걸 내 나이 40대 중반이 돼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올 대선이 끝난 지 일주일째,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세상은 평온해 보인다. 그러나 한 꺼풀만 벗겨 보면 상처투성이다. 세대별로 찢기고 계층별로 나뉘고 여기에다 지역별로도 확연히 갈렸기 때문이다. 크게 봐 5060/경상도는 박근혜를 밀었고, 2030/전라도는 문재인을 밀었다. 어느 쪽이든 그 나름의 이유와 명분이 있었겠지만 하나 분명한 것은 이번 대선이 경상도와 전라도 사이의 골을 더욱 깊게 파놨다는 점이다. 따지고 보면 경상도와 전라도는 '둘'이 아니었다. 이순신 장군이 전라도에 수군 본거지를 두고 있었대서 경상도를 나 몰라라 하지 않았고, 구한말 의병은 영남과 호남 모두에서 일어나 국운을 되살리고자 했다. 경상/전라가 둘로 나뉜 건 박정희/김대중이 맞붙은 1971년 대선 때부터였다. 이후 내리 40년을 경상도 정권이 이어왔고, 겨우 한 차례 김대중의 호남정권이 스치듯 지나갔다. 전라도는 늘 변방이자 비주류였고 그로 인해 조선땅 한 쪽은 기울어졌다. 꼭 10년 전, '경상도 사람' 노무현은 그런 적폐(積弊)를 청산하고자 했다. 전라도는 그런 노무현을 가슴으로 받아들였으나 노무현 정부는 전라도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이번 대선에서 '호남홀대론'이 그저 나온 게 아니다. 그럼에도 전라도는 다시 문재인에게 염치없을 만큼의 '몰표'를 몰아주었다. 그런 전라도가 대선 패배로 '섬'이 되었고, 심지어 '기괴한 침묵'에 빠져 있다. 지난 22일 광주 충장로에서 열린 표창원 경찰대 교수의 '프리 허그'에 3천명이 넘는 인파가 모였다. 경북 포항 출신의 이 낯선 이의 방문에 광주는 눈물겨워 했다. '박근혜 당선'이 확정된 20일 새벽, '직녀에게'를 부른 가수 김원중은 지인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지난 밤 찬바람에 꽃잎 다 떨어졌겠다. 모양만 따스한 햇살에 모두 말이 없는 아침. 흩어진 꽃잎이 내 뺨을 때린다. 나 달게 맞겠다. 울지 마라, 광주!" 그 시각 전남 영암 출신의 조정 시인은 페북에 이렇게 썼다. "다른 모든 것에 대해서는 이가 악물어지는데 전라도를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고. 광주는, 전라도는 지금 지독한 외로움에 울고 있다.
직녀에게/문병란 - 땅의 연가(1981)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
선 채로 기다리기엔 은하수가 너무 길다.
단 하나 오작교마저 끊어져버린
지금은 가슴과 가슴으로 노둣돌을 놓아
면도날 위라도 딛고 건너가 만나야 할 우리,
선 채로 기다리기엔 세월이 너무 길다.
그대 몇번이고 감고 푼 실을
밤마다 그리움 수놓아 짠 베 다시 풀어야 했는가.
내가 먹인 암소는 몇번이고 새끼를 쳤는데,
그대 짠 베는 몇필이나 쌓였는가?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
사방이 막혀버린 죽음의 땅에 서서
그대 손짓하는 연인아
유방도 빼앗기고 처녀막도 빼앗기고
마지막 머리털까지 빼앗길지라도
우리는 다시 만난야 한다
우리들은 은하수를 건너야 한다
오작교가 없어도 노둣돌이 없어도
가슴을 딛고 건너가 다시 만나야 할 우리,
칼날 위라도 딛고 건너가 만나야 할 우리,
이별은 이별은 끝나야 한다
말라붙은 은하수 눈물로 녹이고
가슴과 가슴을 노둣돌 놓아
슬픔은 슬픔은 끝나야 한다, 연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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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염원의 노래, 직녀에게,
<직녀에게>라는 나의 통일염원을 읊은 서정시는
70년대 중반쯤 <심상>이라는 시 전문지에
발표한 작품으로 1981년 창비사에서 간행된 <땅의 戀歌>란 시선집에 실려 있다.
이 시가 노래로 작곡되어 불리워진 사연은 다음과 같다.
1980년 5월 이후 검거망을 피하여 미국으로 망명한 윤한봉의 청탁에 의해 같이
활동하던 작곡가 김형성씨가 통일염원의 노래로 작곡을 하였고
그 노래는 미주와 유럽등지에서 해외동포에 의해 불리워지게 되었다.
내가 84년 제 3세계 예술제가 열리는 서독 베를린에 들렀다가
거기서 뜻있는 해외동포로부터 이 노래의 악보와 육성으로 부른 테잎을 가지고 왔다.
나는 이 노래가 국내에서도 불리워지기를 바라고 당시 전남사대 영문과를 나왔으나 딴따라
기질이 있어 방송계로 진출한 애제자 오창규군에게 건네어 주었다.
오창규는 그것을 다시 역시 교단을 버리고 통기타의 반려자가 된 노래꾼 박문옥에 건네었다.
해외에서 부르는 노래가 가곡풍인데다 국내의 정서와 맞지 않다고 판단,
일면 작곡에 대한 야심도 있었던지, 그 동일 가사에다 다른 곡을 붙였다.
그리하여 새로 탄생한 민중가요 <직녀에게>는 당시 <바위섬>이라는 노래로 한창 방송가의
인기를 타고 있던 신선한 목소리의 대학생 가수 김원중을 만나 음반으로 취입되었다.
그 노래는 서서이 반향을 일으켜 <바위섬>의 여운을 이어받는 듯했으나
작사자인 내가 군부독재정권에 의해 반체제 운운하는 운동권 재야 세력 탓인지
방송가의 전파에서 조금씩 밀리는 듯했다.
그러나 이 노래는 김원중의 열창과 더불어 이 땅의 모든 현장에서
민중가수의 상징적 애창곡이 되어 이 시대의 대표적 통일염원 노래로 사랑을 받았다.
분단 반세기를 넘긴 이 시점에서 김원중의 <직녀에게>는 남북한 구석구석까지 울려퍼져
이 땅의 통일을 앞당겨올 것이며, '우리는 만나야 한다'는
그의 절규는 온 누리에 메아리칠 것이다.
<문병란/ 시인. 조선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