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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울의 한계 / 우리가 의존해온 신앙의 원리가 적절치 않아
그 한계를 느낄 때..
원제: Bible Study Notes/합리적 이해
지은이: Anita S. Dole
옮긴이: 배제형
사무엘, 그의 인격과 직무는
판관시대와 제왕시대를 연결해 주는 다리 역할을 한다.
.. 백성들이 왕을 요구한 이유뿐만 아니라
이 요구에 대한 사무엘의 반응, 그리고 이 요구는 어느 면에서는
실제 주님과 사무엘을 거절하는 것임에도
주님이 이를 허락하신 이유도 알고 넘어가야겠다.
이런 모든 것이 우리에게 꼭 중요한 요소인
‘선택의 자유’에 근원하고 있다.
성 서 본 문: 사무엘상 13장
.. 4. 이스라엘 온 국민은 사울이 블레셋 수비대를 쳐서
블레셋 사람들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길갈로 모여 와 사울과 합세하였다.
5. 블레셋군도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모였다.
그들은 병거가 삼천, 기마가 육천이나 되었고
보병은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들은 베다웬 동편 믹마스에 올라 가 거기에 진을 쳤다.
6. 이스라엘군은 전세가 불리한 것을 보고
저마다 굴이나 바위틈이나 구덩이나 웅덩이를 찾아 몸을 숨겼고,
7. 더러는 요르단 여울을 건너 가드와 길르앗 지방으로 달아났다.
사울은 길갈에 남아 있었는데 그를 따르는 군대는 모두 떨고 있었다.
8. 사울은 사무엘을 만나려고 칠 일을 기다렸으나
사무엘은 길갈에 나타나지 않았다.
군인들은 하나 둘 사울 곁을 떠나기 시작하였다.
9. 사울은 기다리다 못하여
번제물과 친교제물을 가져오라고 하여 번제를 드렸다.
10. 사울이 번제를 막 드리고 나자 사무엘이 왔다.
사울이 마중 나가 인사하자 사무엘은
11.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오?”하며 꾸짖었다.
사울이 대답하였다. “군인들은 하나 둘 도망치고 선생님은
정하신 때에 오지 않으시는데다가 블레셋군은 믹마스에 집결해 있어
12. 야훼의 노여움을 풀어드리기도 전에
블레셋군이 길갈로 쳐 내려올 것 같아서 부득이 번제를 드렸습니다.”
13. 사무엘이 다시 사울을 꾸짖었다.
“그대는 어리석은 짓을 하였소.
어찌하여 그대의 하느님 야훼께서 내리신 분부를 지키지 않았소!
지키기만 했더라면 야훼께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그대의 왕조를 길이 길이 세워 주실 터인데,
14. 이제 그대의 대는 더 이어 가지 못할 것이오.
그대가 야훼의 분부를 지키지 않았으니,
야훼께서는 당신의 마음에 드는 사람을 다시 찾아
당신의 백성을 다스릴 수령으로 세우실 것이오.”
15. 그리고 나서 사무엘은 일어나 길갈을 등지고
산 쪽으로 올라 가 버렸다.
.. 19. 그 당시 이스라엘에는 대장장이가 한 명도 없었다.
블레셋이 히브리인들에게 칼이나 창 같은 것을
만들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20.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보습이나 곡괭이나 도끼나 낫을 벼리려면
블레셋 사람이 사는 데로 내려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21. 보습이나 곡괭이를 벼리는 값은 삼분의 이 세겔이었고
도끼를 벼리고 낫을 가는 값은 십분의 일 세겔이었다.
22. 그래서 그 전쟁이 터졌을 때
사울과 요나단을 따르는 무리에게는 칼도 창도 없었다.
무기를 가진 사람은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뿐이었다.
23. 블레셋군의 전초부대는 믹마스로 건너가는 길목까지 나와 있었다.
교리 요점
* 자아 대신 주님을 신뢰함이 영적 발전을 위한 기본자세이다.
오늘 공부는 이스라엘의 첫 왕에 대한 것이다.
우리속의 왕이란
새로운 종류의 지도자상을 말한다.
최초의 지도자라면 열조들 즉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이다.
유대족이란 실제로는 정확히 한 가족이었으나
이 가족이 숫적으로 불어나서
몇 개의 방계적인 친족을 형성했다.
그러나 그 때만해도 그들은 함께 모여 살았고
가장 나이 많은 남자가 그 가족의 우두머리로서
인정되고 있었다.
그런 다음 지도자가 없는
에집트에서의 시대가 뒤따르고 있다.
거기서 이들은 처음에는 보호되어졌으나 나중에는 노예화되었다.
그 뒤 모세가 들어 세워져 그들을 에집트 밖으로 인도해내고
광야를 통과하여 그들의 안내자인 주님으로부터
율법과 계명을 시나이산에서 받게 된다.
그 다음 그들이 거룩한 땅의 경계에 도착할 때
모세는 죽었다.
그 시점에서 군대의 지도자인 여호수아가 명령을 이어받아
백성들을 이끌고 거룩한 땅을 정복하게 되었다.
그 뒤 판관들의 시대,
즉 지방적인 지도자들의 시리즈가 있게 되는 바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개별적인 적들을 쳐부수기 위해
이 판관들을 들어 쓰셨다.
이때는 판관기 17장 6절에서와 같이
“사람마다 제멋대로 하던 시기”로서 비 조직화 된 시대이기도 하다.
마지막 판관은 사무엘이었다.
사무엘은 전 국토의 백성이 다 같이 공인한
유일한 사람이었는데
그 이유는 그가 예언자로서 백성들을 판결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랫동안 예언자를 갖지 못했다.
그러나 사무엘은 군대의 지휘자는 아니었다.
그래서 백성들은 그들로부터 군대를 모집해서
자기들의 적과 싸워줄 왕을 원했다.
첫 왕이 뽑혀진 뒤에도 사무엘은 자기의 권한을 잃지는 않았다.
그는 전 일생을 통해 백성들에게 주님의 대변자 역할을 해 왔다.
그리고 주님은 사무엘에게 첫 왕 뿐 아니라
두 번째 왕까지도 기름을 붓도록 하셨다.
첫 왕은 사울이었다.
백성들은 자기들의 키가 그의 어깨에도 차지 못하는 것을 보고
매우 기뻐했고 사울을 내세우면 적들이 놀랄 것이라고
느꼈던 것이었다.
많은 젊은이들이나 건장한 사람들처럼
그는 슬기롭기보다는 정력적이었다.
그가 암몬족에 대항한 첫 전투에서 승리하자
그는 자신을 과대평가했다.
그래서 그가 그 땅의 실제의 통치자가 되어
블레셋과의 전투가 있게 될 때,
이미 내려진 분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사무엘의 도움을 기다리지 않았다.
전투를 위해서 사무엘이 오게 되어 있었고
번제를 드리기로 되어 있었는데, 사울은 매우 성급했고
그래서 자기 손으로 번제를 드렸던 것이다.
그 뒤에 사무엘에게 변명을 늘어놓기를 군대들이 겁에 질리고,
뿔뿔이 흩어져 떠나가는 상황이어서
더 이상 사무엘을 기다릴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아마 우리들 대부분이
“주님의 분부를 받드는” 일을 하지 않았던 경험이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방법이 최선의 방법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어떤 고난이 우리를 압박하면
주님 대신 자아를 더 신뢰한다.
사울의 왕조는 더 이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사무엘은 사울에게 엄히 말했다.
우리는 자신 속에
보다 더 슬기로운 지도자를 갖도록 해야 한다.
거기에 더해서 인내와 신뢰 또한 배워야 할 것이다.
..
제 2반
.. 성경에서 왕이란, 그 원리가 좋든 나쁘든 간에
우리의 삶을 주도해 가는 원리를 말한다.
나쁜 왕이란 다른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기쁘게 하는 것만 해야 한다는 원리를 말하며
좋은 왕이란 우리가 주님께 순종해야 하며
이웃을 돕는 일을 해야 한다는 원리를 말한다.
이스라엘의 첫 왕, 사울은 자기 외모를 가지고 뽑힌 왕이다.
그는 보기에는 그럴 듯하지만 슬기롭지 않았다.
젊은이들은 보기에는 매끈하나 사울처럼 때때로 너무나 성급하다.
그들은 자기들의 행동이 과연 타당한지, 아닌지
생각해 볼 여유를 충분히 갖지도 아니한 채
그들에게 타당한 것처럼 보이는 것을 해버린다.
사울은 군인들이 하나, 둘씩 빠져나가는 상황에서 빨리 전투를
하지 않으면 그나마 전투에 승산이 없을 것처럼 보였다.
여러분은 사울이 알고 있던,
그래서 그가 거기서 더 좋은 것을 가르침 받을 수 있었던
이스라엘 역사에 있는 어떤 성경 스토리를
기억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은 그때의 이스라엘의 승리가
그들 자신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었다는 것을
이 백성들에게 누누이 보여주셨다.
사실 정복은 그들이 주님께 순종할 때,
주님의 힘에 의지해서만 가능해왔고
우리가 주님보다 더 똑똑하다고 생각할 때는 언제든지
우리의 머리를 재난으로 디밀게 한다.
따라서 주님께 순종함이
우리를 주도할 첫 번째 원리가 되도록 해야 하고
이것 때문에 사무엘은 사울에게
당신의 왕국은 길게 계속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
제 3반
.. 사무엘은
모든 백성이 그들의 지도자로 인정한
유일한 판관이었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사무엘이 우리 삶의 모든 부분에 적용되는 진리를
표징한다는 의미인 바,
우리가 가지는 모든 문제들에 있어서
첫 번째로 기억해야 할 진리는
주님의 계명에 순종하며 그분을 절대로 신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이 세상 누구보다 지혜로운 분이시기 때문이다.
백성들이 사무엘에게 순종하는데
매우 만족스러워 했었던 것 같았지만 사실상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적들이 아주 강한 것처럼 보이자
그들을 구원할 주님의 힘이 적들을 이겨낼 수 없을 것 같아
주님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다른 국가들처럼 왕을 원했다.
그 왕이란 그들을 이끌고 군대를 편성해서 전투해줄 왕을 말한다.
사무엘은 이 요구에 대해 매우 불쾌하게 생각했다.
그 이유는 백성들이 자기를 거절할 것임을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님은 사무엘에게
백성들이 원하는 길을 가도록 내버려두라고 말씀하셨고
그들의 첫 왕은 사울이 될 것이라고도 말씀해주셨다.
사무엘은 사울을 발견하고 그에게 기름 부은 다음
백성들이 그들의 선택에 하등의 이유가 없도록
백성들을 불러 모아놓고 제비로 왕을 뽑도록 했고
거기서 사울이 뽑혔다.
백성들은 사울이 왕으로 뽑힌 것에 만족했는데
그 이유는 그의 용모 때문이다.
사울은 건장하며 용감했으나 매우 현명치 못했다.
그렇다고 그가 인정받을 만한 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인정받을 만하게 여겨지던 사람들이
생각도 없이 행동하게 되면 매우 심각한 실수를 저지르는 광경을
여러분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사울은 자신의 안내자로 사무엘이 필요했다.
사무엘이 없었다면 사울은 백성들을
심각한 고난으로 끌고 갔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무엘은 사울의 통치가 거의 끝나는 때까지
주님의 예언자로서, 판관으로서의 위치를 잃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왕이란
각자의 삶을 주도하는 우리 속의 원리를 말한다.
제왕들 모두는 그 나름대로
주도하는 주님의 진리를 표징하지만,
서로 다른 상황에서는 진리를 다른 방식으로 이해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예를 들어 산상설교(마태복음 5:39)에서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악에 저항하지 말라.(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고..”
(But I say unto you, That ye resist not evil: but whosoever shall
smite thee on thy right cheek, turn to him the other also.)
이 대목을 읽을 때 여러분은 주께서 여러분에게
문자 그대로 순종하라는 명령을 내리신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것은 믿음의 초기에 있는 이들이 받아들인 방식들이다.
그러나 여러분은 곧 성경에는
우리가 확실히 악에 저항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다른 언급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따라서 주님이 이 명령으로 진정 무엇을 뜻하시는지
알려고 노력하기 시작한다.
만일 여러분이 충분히 노력한다면
“저항하다(resist)” 로 번역된 단어가 그리스어(Greek)로는
실제로 어떤 것을 그 자신에 맞서게 하는 것이라는 의미,
따라서 그것은(악에 저항하지 말라는 것) 오히려
"악으로써 악을 대항하지 말라"는 의미임을 알게 된다.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은
상대에게 나쁜 것을 되돌려줌으로 우리에게 가해진 나쁜 것을
앙갚음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If you try hard enough, you will find that the word translated
"resist" really means, in the Greek, to set something against itself,
so that the thought is rather "oppose not evil with evil,"
and what the Lord is telling us is that we should not try to
"pay back" wrongs that are done to us by doing wrong in return.)
그러므로 주님의 진리도
성급하고 피상적인 판단으로 인해 잘못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말씀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기 전
우리는 먼저 문자 그대로의 말씀을 읽고 배워야 한다.
- - -
(참고 : 마태 5장 39~
악 또는 악행자가 저항(앙갚음)을 받지 않게 된다는 것은
그러한 영적 공격을 받는 선 또는 선한 자가 그것에 보응하여
싸우러들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확신컨대 천사들은 악과 싸우지 않고
더욱이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다.
반면 그들은 할 수 있는 한
악령이 자신들을 해치게 하도록 허용하는데
그 이유는 지옥의 어떤 악도
그들을 다치게 할 수 없게 하는 주님의 보호 때문이다.
(That the evil, or the doer of evil, is not to be resisted,
signifies that the good, upon whom such spiritual assault is made,
are not to fight in return, and recompense evil with evil. Angels,
we may be sure, do not fight with the evil,
still less do they recompense evil for evil;
but they permit evil spirits to hurt them if they can,
because it is impossible for them to do it,
on account of the protection which surrounds the angels
from the Lord, which is such that no evil from hell can hurt them.)
그래서 주님께서는
저항(앙갚음)하지 말라는 교훈을 설명하시면서
“누가 오른 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대라”고 하신다.
이(tooth)가 외면의 진리를 의미함에 비해
뺨(cheek)은 내면의 진리에 관한 이해성과 지각을 의미한다.
오른쪽은 애정에 관계되는바,
오른쪽 뺨은 그 애정으로부터 있게 되는 진리의 지각을 말한다.
오른쪽 뺨을 친다는 것은
위와 같은 애정과 지각을 상하게 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쪽 뺨도 돌려대라는 명령이 함축하는 바,
순수한 선으로부터 오는 지각과 이해성을 지닌 사람들 안에 있는
내면의 진리에 관한 이해성이나 지각은
주님의 신성한 보호로 감싸여 있기 때문에
악이 실제로 상하게 할 수 없고 따라서 치도록 허용된다는 뜻이다.
(and the command to turn the other implies
that the attempt is to be permitted, because it; is impossible,
as just remarked, that the evil can do real injury to the perception
and understanding of interior truth in those who,
being grounded in such perception and understanding
from genuine good, are encompassed with the sphere
of the Lord’s divine protection.)
뺨이라는 단어를 그 단어의 근원에 의거 엄격히 사용한다면
광대뼈(cheek-bone), 위턱(upper-jaw)을 의미한다.
이 뼈를 뺨이 덮고 있는데,
이 뺨은 턱이 움직이도록 하는 근육으로 구성되어 있고
턱(jaw)은 입이 열리고 닫히게 한다.
입과 그것에 연결되는 모든 부분들, 즉 목구멍, 입술, 뺨, 턱 등등은
진리의 이해와 지각에 관련되는 제반 사항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마음 안에 있는 것들이 상응에 의해
몸에 있는 위 기관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씀의 글자에 신체기관이 거론됨으로
마음의 자질들이 표현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어서 주님은 말씀을 더 진행하신다.
“또 누가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려고 하거든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이 말씀은 만일 누가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내면의 진리를 빼앗으려 한다면
마찬가지로 외면의 진리도 그렇게 그가 취하도록
허락될 수 있다는 뜻이다.
(so when the lord says farther, And if any will sue thee
at the law, and take away thy coat, let him have thy cloak also,
the meaning is, that if any endeavour to take away
the internal truth of which, we are in possession,
he may be allowed to take the external truth likewise;)
속옷이란 내면의 진리를 의미하고
겉옷이란 외면의 진리를 뜻한다.
이미 살핀 바,
천사는 악한 자에게 악으로 갚지 않는다고 했다.
그 이유는 어떤 악(악한 자)일지라도
천사들처럼 선함과 진리를 원리로 꽉 붙잡고 있는 이들로부터는
그것을 빼앗아 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분개하는 심정, 증오나 시기로 끓고 있는 가슴을 지닌
이들로부터는 그들이 지닌 선함과 진리를 빼앗아 갈 수가 있는데
그 이유는 증오나 시기를 흠모하는 이들은
주님의 신성한 보호로부터 얼굴을 돌려놓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다시 말씀을 추가하신다.
“누가 억지로 오리(a mile)를 가자고 하거든
십리(twain)를 같이 가주어라.”
이때의 영적이고 참된 의미는
진리에서 거짓으로 물러나게 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저항을 받지 않는다는 뜻인데
이는 그가 그것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 도로나 길의 척도가 되는 일 마일은(a mile, 오리)
진리에로 인도되거나 진리로부터 물러나는 것을 나타낸다.
(So, again, when the Lord further says,
And whosoever shall compel thee to go a mile,
go with him twain, the spiritual and only true signification is,
that he who wishes to draw away from truth to falsity
is not to be resisted, because he cannot do it - a mile being
the measure of a road or way, which signifies
that which leads to truth, or from it.)
마지막 주님의 말씀은
“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꾸려는 사람의 청을 물리치지 말라.” 인데
이때의 의미는
우리가 알고 소유하는 선함과 진리에 관한 것은 무엇이든지
그것을 원하는 모든 사람에게 전달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것은 상대방이 그것을 진실로 원하든,
아니면 그것을 뒤엎어 타인에게서 진리를 강탈하기 위해 원하든
그 모두를 포함해서 이르는 말이다.
어찌됐든 이 사항도
그들은 실제로 할 수 없는 것들이다.
선한 목적이든 아니면 나쁜 목적이든,
또는 좀처럼 확실하게 판단할 수 없는 대상이든 간에
우리의 설명을 기반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 당시의 대상이 나쁜 것일 수 있다고 해도,
우리는 제공된 정보로부터 탐구자가 어떤 이익을
얻을 수 있는지 말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설령 때로 나쁜 것이라고 판단된 것도
그 사람의 개혁을 위한 수단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 가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면,
본문의 이 모든 명령들은 그렇게 수행함으로써
선이나 진리, 또는 지적, 영적 자질의 어떤 것도 잃지 않고
영적으로 수행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영적인 속옷과 겉옷을 잃지 않고
누군가 아무 거리낌 없이 그들을 가져가도록 할 수 있다.
우리는 어느 면에서도 더 가난한 자가 되지 않고
우리에게 구하거나 빌리는 자에게 줄 수 있다.
우리는 악한 자에게까지
갖가지 방법으로 기꺼이 선을 행해야 한다.
(When the Lord says, finally, Give to him that asketh thee,
and from him that would borrow of thee turn not thou away,
the meaning is, that whatever we possess or know of goodness
and truth is to be communicated to all who wish for it;
and this whether he desires it in sincerity or only to pervert it,
and deprive others of the truth by such perversion.
This, however, they are not able to do; and all who derive
instruction of us, whether for a good or a bad end or object,
of which we can seldom judge with certainty, are to receive it.
Even also when the object at the time may be a bad one,
we cannot tell what benefit the inquirer may derive
from the information imparted:
it may possibly be the means eventually of his reformation.
It is quite evident that all these injunctions may be carried out
spiritually without our losing anything of good or truth,
or any mental or spiritual endowment, by doing so.
We may freely let a man take our spiritual coat and cloak
without losing them ourselves; and we may give to him
who would ask or borrow of us
without being in any respect the poorer.
We ought ever to be willing to do good in all ways, even to the evil;)
그리고 악한 자에게 가장 확실하게 행해질 수 있는 가장 큰 선은
그들의 개혁에 도움이 될 수 있는,
특별히 배려된 친절로 주어진 가르침을 그들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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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이스라엘을 공격한 적은 블레셋이다.
이들은 지중해 연안을 따라 사는 거룩한 땅 지역 내에서
가장 강하고 번영하는 민족이었다.
이들은 이스라엘 민족을 아주 성가시게 했다.
이 당시만 해도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지배했는데
우리가 본문 19-22절을 읽어보면 알게 된다.
농사용 도구란 우리의 마음과 인격을 발달시키는데
사용되어지는 진리들을 말한다.
복음서에서 주님이 가르치신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우리들의 삶에 선과 진리가 발달되는 것들에 관한 가르침이다.
무기란 우리의 약함과 나쁜 습관들을 극복해내는데
사용되어지는 진리들을 말한다.
이 나쁜 습관이나 약함은 우리 모두가 가진 영적인 적들이다.
우리가 가진 영적인 적들 가운데 가장 위험한 적은 블레셋이다.
이 블레셋이란 우리가 행함이 없이도
오직 그저 옳은 것을 안다는 것에만 만족해 버리는
우리 속의 경향성을 말한다.
이 경향성은 우리가 영적인 무기들을 소유하고 사용하려는
것으로부터 우리를 방해한다.
이것이 여러분에게 있어 얼마나 실감이 날지 모르겠지만
성경의 글자 내용에서까지도 이것은 아주 심각한 문제점이었는데
이와 같이 사울의 군대는 숫자적으로도 블레셋 군대보다
훨씬 적기도 했고 게다가 좋은 무기마저 없는 형편이었다.
사울은 자기의 군대가 그 자체로 매우 미약하다는 것과
자기의 힘으로는 도저히 블레셋을 이길 수 없고
이기게 할 수 있는 분은 주님뿐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야말로 그는 이 사실을 정말로 실감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그가 전투에 나서기 전 반드시 주님에게 먼저 번제를
올려야 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두려움은
그와 그의 백성들이 매사 주님께 순종해야 한다는
사무엘의 강력한 경고의 말(12장 20-25)을 잊게 만들고야 말았다.
오늘 주어진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주님의 명령위에 우리 자신의 판단을 올려놓아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기본이 되어줄 상응 공부
블레셋 = 의를 행함도 없이 의를 안다는 것에 만족하게 하는 시험
사울 = 글자만으로 이해한 말씀의 진리
사무엘 = 어린 시절 같은 주님에 대한 신뢰와 순종
무기들 = 진리에 반대되는 거짓이나 시험에 대처하여
우리를 방어해 주는 진리들
농기구 = 인격을 발달시키는데 사용되는 진리들
제 4반
.. 사무엘은 마지막 판관이었으며
판관으로서 전 백성에게 인정되어진 사람이기도 했다.
사무엘 외의 다른 판관들은
주님이 우리의 기억 속에서 끌어 낸 특정한 진리들을 표징한다.
이 진리들은 우리를 괴롭히는
특정한 결점들을 극복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래서 우리의 결점이 극복되어지면, 이 특정한 진리들은
우리의 일반적인 지식 안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그러나 사무엘은 우리의 약함과 결점으로 인해
얻어진 경험들을 바탕으로 마침내 우리가 그것들을 깨닫도록
인도하는 일반적인 진리다.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에서 보면
우리는 어린아이같이 언제나 약하고 무지하다는 것과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아버지로서 그분을 찾아야 하며
우리가 그분의 명령들을 이해했든, 못했든
좌우간 그분을 신뢰하며 순종해야 한다는 것은 진리다.
그런다고 위의 논지가 우리로 하여금
말씀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중단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두뇌를 주셨고
비록 주님이 보시기에 우리가 실수하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계실 때조차도 그분은 우리가 자신들의 두뇌들을
사용하시기를 기대하고 있으시다.
우리가 의를 실천하려 하고
우리 속의 판관이 사무엘임을 인식하고 있는 한
주님은 우리가 저지른 실수로도
우리에게 득을 보게끔 도우실 수 있고
더욱더 많은 것을 이해하게 해 주실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사무엘이 살아 있으면서
이스라엘의 첫째, 둘째 왕인 사울과 다윗을 기름 부었다는 것과
그는 사울이 왕일 때조차도
이스라엘을 계속 심판해 왔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것들이다.
사무엘상 7장 15-17절을 읽어보자.
사울은 거의 40여 년 통치한 것으로 믿어지고 있으나
그 정확한 통치기간은 성경에 서술되고 있지 않다.
사무엘은 대략 사울이 죽기 사 년 전까지 살았었다.
이스라엘의 세 왕은
우리를 주도하는 연속적인 원리를 표징해줄 뿐만 아니라
주님의 진리가 세 가지 다른 방법으로 이해되어지는 것도 말한다.
사울은 진리에 대한 자연적인 이해를 말하는데
이러한 이해는 젊은이들이 흔히 가지기 쉬운 것이다.
자연적인 이해성도
주님을 섬기기를 바라고 있고
행동 면에서는 오히려 더 열성적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체함을 참지 못하고
표면적(가시적)인 것으로부터 추론하기 때문에
행해져야 하는 것에 대해 심지어 주님보다 더 나은 판단자로
자신을 올려 세우는 일이 자주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사울이 암몬족은 이겨냈으나 블레셋의 경우는
이기지 못했다는 사실이 갖는 의미이기도 하다.
제 11장에서는 사울의 첫 승리에 관해 말해주고 있다.
암몬족이란 롯의 후손에 해당되는, 우리의 외적인 악들을 말한다.
진리를 피상적으로만 이해한다고 해도
우리가 도덕적이며 유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정도는
그것이 보여줄 수 있다.
그러나 블레셋이란 시험은 상황이 다르다.
사람은 매우 정직한 외부 생활을 하면서도 내심으로는 여전히
이기심과 자만심, 그리고 자신의 지성에 자부심을 가질 수 있다.
블레셋이란 그러한 외적인 지식과 진리에 대한 수용이
필요한 전부라고 생각하는 시험을 표징한다.
사울이 블레셋을 대항하여 성공할 수 있었던 유일한 길은
그의 능력이 주께로부터 나왔다는 것,
그리고 예언자 사무엘을 통해 온 주님의 지시를
절대적으로 따를 때만이 승리를 바랄 수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그의 앞에 기억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울은 이러한 종류의 지혜와 용기를 가지지 않았다.
그가 실제로 신뢰한 것이란 표면상에 나타나 있는 힘일 뿐
주님에게 의존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의 군사들이 그를 떠나 뿔뿔이 도망치는 것을 보고,
그는 자기 손으로 손수 일들을 해치워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첫 번째 이해성이 행하는 것이다.
우리의 이 이해성은 빠른 결과를 원한다.
뭔가 일이 심상치 않게 풀릴 때는
어느 새로운 코스를 밟아 보려고 더욱더 서두르려고 애쓴다.
이 이해성은 주님에 대한 가장 단순한 순종심이라는
가장 궁극적이고 기초적인 지혜마저도
신용하려 들지 않는 것이 결정적인 흠이다.
사울에게 떨어진 벌은 너무 심한 것처럼 보일런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진리에 대한 우리의 초기 단계의 이해성은
우리의 적절한 안내자가 되지는 못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이 초기의 이해성은 내면의 깊이가 부족하고
또한 인내심도 결여되어 있다.
이 부적절한 안내자 대신에
우리의 마음을 다스릴 수령(왕)이 세워져야 한다.
즉, 제 14절에 “야훼께서는 당신의 마음에 드는 사람을...”
이 구절이 우리의 왕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제 19-22절을 주목해 보면
그 당시 이스라엘은 블레셋에 자기들의 무기나 농기구들을
전적으로 의존해 오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자기 과신에 포로가 되어있는 명확한 그림이다.
이러한 것들이
자연 과학과 인문 과학적인 추론의 발전을 찬양하면서
종교는 비실용적이라고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는 젊은 남녀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것은 주위를 조금 살피면 쉽게 확인된다.
왕으로서의 사울은
진리가 통치하는 것을 표징하지만
그 진리는 눈에 보이는, 외적이고 자연적인 방법으로
가늠이 가능한 진리들이다.
그 이해성은 명백히 약함을 가지고 있고 한계가 있다.
그래서 그 이해성은 더 깊고 더 영적인 이해성에 의하여
경질되어지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어찌됐든 자연적인 이해성도
어느 정도까지는 승리하기도 하고 또 약간의 순수한 진리나
교리도 생산해낼 수도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의 자연적인 이성이
우리를 이끌어 갈 수 있다는 데에 대한 진정한 교리는
사울의 아들 요나단에 의하여 표징되고 있는데
이에 대한 부분은 다른 공부 부분에서 더 살피게 될 것이다.
제 5반
..
말씀 전체를 망라하여
왕은 진리(또는 거짓)가 통치하는 것을 표징한다.
요한복음 18장 37절을 살펴보면
성경상의 왕이 진리(또는 거짓)의 통치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줄로 본다.
“‘아무튼 네가 왕이냐?’하고 빌라도가 묻자
예수께서는 ‘내가 왕이라고 네가 말했다. 나는 오직 진리를
증언하려고 났으며 그 때문에 세상에 왔다.
진리 편에 선 사람은 내 말을 귀담아 듣는다’”(요 18:37)
이스라엘의 세 왕 모두는
주님의 진리가 우리 삶에서 통치하는 것을 표징하나
세 왕들 각자는 세 가지 다른 각도에서, 또는 세 가지 다른
이해성의 차원에서 우리에게 보여지는 진리를 표징한다.
그러나 이 등차가 서로 다르다 해도
이 세 가지는 모두 다 성인들의 범주에 속하는 진리들로서
거듭 나아가는 단계에 필수적인 사항들이기도 하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우리가 사무엘의 지도하에 있는 삶을 사는 것이다.
아마 이런 삶을 실제 꾸리고 있는 이가 적기는 하겠지만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지나온 성경 부분 제 8장 6-7절을 상기해 보면,
백성들이 사무엘에게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했을 때
그는 마음이 언짢아했는데
그 이유는 자기 자신이 백성에게 거절당했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주님은 그에게 말하시기를,
“백성이 하는 말을 그대로 들어주어라.
그들은 너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왕으로 모시기 싫어서
나를 배척하는 것이다”고 사무엘을 타이르셨다.
사무엘의 지배하에 있는 것이
우리가 이상적인 상태에 있다고 할 수만은 없다는 말이다.
바꿔 말하면 우리는 자유롭게 자신 속의 지도자를
선택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진정으로 옳은 일 하기를 원하는 각 사람에게
그가 경험을 통한 ‘더 높은 합리성’을
자신의 지도자로 인정할 때까지
사무엘로 표징된 어린 아이와 같은 신뢰심이 여전히 그에게 남아
통치할 수 있도록 해주신다.
더 높은 합리성을 표징하는 다윗은
사울의 경우같이 처음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에 의해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다.
오직 사울의 나약함의 결과로 맛본 그들의 경험만이 그들로 하여금
다윗의 강함을 보게 해주었던 것이다.
우리가 기억하는 사무엘은
자신을 관리해보려 노력한 결과
불행한 경험들을 맛본 후
필요한 어린 아이와 같은 단순한 신뢰와 순종심으로
돌아가는 것을 표징한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을 기름 부을 때까지 살았다.
그의 죽음은 사울이 죽기 전이지만
그가 죽은 때는 다윗이 이미 온 백성에게서
명성을 얻은 뒤였다.(사무엘상 25:1)
예언자요 판관으로서의 사무엘은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으로 받아들여진 주님의 말씀을 표징하는데
이는 옳다는 것에 대해
우리 자신의 생각에 의존하는 상태에서
주의 인도하심을 받는 총명한 상태로 나아가기까지
우리를 가르치고 통치하는 말씀이다.
과거 모세가 이스라엘 후손들을
에집트에서 인도해낼 준비를 위해 미디안 땅에서
사십 년간을 체류해야만 했던 것처럼
사무엘은 지금 14절에서와 같이
“야훼의 마음에 드는 사람을 다시 찾아
당신의 백성을 다스릴 수령으로 세우실” 때까지,
즉 백성들이 주님의 뜻에 합당한 자를 용납할 때까지
거룩한 땅 내에서 자신의 권위를 유지해야만 했던 것이다.
사울이 왕으로 즉각 뽑힌 것은 그의 용모 때문이었다.
그 이유는 10장 23절에서와 같이,
“그가 사람들 가운데 서자 그들의 키는 모두
그의 어깨에도 차지 못하였다”와 같은 용모였기 때문이다.
어깨(shoulder)란 힘(power)에 상응된다.
백성들은 적에 대항하기 위해
자기들을 이끌 힘센 사람을 찾고 있었다.
왕으로서의 사울은 신성한 진리를 표징하되
그 진리는 딱딱하고, 고되게 느껴지며, 외향적인 양상뿐이고,
자비로 누그러져 있지 않은 진리의 겉을 표현한다.
이른바 이런 진리는
지혜나 경험의 차원에서 아직 어느 정도의 깊이에
들어가지 못한 이들에게 나타나는 바,
연령층으로 이를 비교해 본다면
아마 막 어른이 된 자(young adult)들일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방향설정, 자신의 지침을 마련하는데 스스로
독립된 판단을 형성해야 하는 출발점에 접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11장 1절을 보면 사울은 암몬족과의 전투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뒀다.
이는 그들이 야베스 길르앗을 공격했을 때
갓 지파의 영토로서 요르단 강 건너편에 위치하는 길르앗은
선한 일(good work)을 표징했기 때문에
외향으로 선한 일을 행하고 싶은 마음을
눈멀게 만들고 노예화시키는 거짓된 주장을,
진리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 정도만으로도
그것을 인식하여 추방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Saul was completely victorious in his battles with the Ammonites
(I Samuel 11) when they attacked Jabesh-gilead,
because Gilead, in the territory of Gad across the Jordan,
represents good works, and even a superficial understanding
of the truth is able to recognize and repel the false arguments
which would blind and enslave the affection for doing
external good works.)
그러나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공격자인 블레셋족은
위의 적과는 색다르고 미묘한 특성을 갖춘 내적인 적으로
우리 속에 항구적으로 따라 붙어 다녔으며
올바른 것을 행하려는 노력은 없이
아는 것에 만족한 채 안심하는 강력한 시험을 뜻했다.
피상적으로만 이해된 진리가
이 적을 이길 수 없는 것은 명백하다.
사무엘은 자신이 와서
주께 제사를 드리고 승리를 확신하게 될 때까지
사울에게 길갈에서 이레 동안 기다리라고 했다.
그러나 사울은 성급했다.
군사들이 하나둘씩 자기를 빠져 도망감으로
전투를 지체함은 군사력만 약화시키고 있는 것 같이 보여
결국 참다못해 그는 자기 손으로 문제들을 해결하려 작정하고
사무엘을 더 기다리지 못해 스스로 번제를 드렸다.
젊은이들의 경우는
사울의 이 성급함에 대해 상당한 동정심을 느낀다.
사실 이렇게 느끼는 그들의 동정심이
바로 사울이란 진리가 갖는 상응의 의미에 꼭 들어맞음으로
오히려 이런 젊은이들이 이 구절의 증거자가 되고 만다.
우리가 젊고 활동적이었을 때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한다고 믿는 일을 하기 위해
적절한 시간과 방법을 기다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울이 그랬던 것처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상황은 점점 더 나빠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우리에게 남아있는 어린 아이와 같은 신뢰심이
실제적 임무를 수행할 때가 이르기 전에
눈에 보여진 결과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해 버리고야 만다.
사실 우리는 주님의 판단보다 우리 자신의 판단을 우선시 한다.
그로 인해 필연적으로 결과되는 실패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우리가 의존해온 원리들이 적절치 않다는 것,
만일 우리의 선한 의도가 선한 결과를 얻으려면
그들은 단순한 외향적 판단과는 다른 수준의 더 깊이 파고드는
어떤 새로운 원리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 왕국은 사울로부터 거두어져
다른 이에게 주어지게 된다는 것이 삼상 13:14절의 말씀이다.
(삼상 13:14)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
외관으로 만의 판단은 실패한다.
그리고 그 실패로 배우는 첫 번째 교훈은 시편 27편 14절이다.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마음을 강하고 담대하게 하는 것이
주께서 기다리고 계시는 것이라는 말이다.
참을성은 시련을 통하여서만이 발달되어지는
우리 품성 가운데 하나이다. 사울은 이 참을성, 인내력이 없었다.
주위에 있는 젊은 층의 경우를 예로 보면,
그들은 개혁이 천천히 이루어지는 것을 참지 못하는 것을 흔히 본다.
이들에게 있어서는 행동 안하고 가만히 있느니 보다는
차라리 행동하는 편을 선호한다.
따라서 이들은 경험을 통해서 일하는 것도 배워야겠지만
가만히 기다리는 것도 배워야만 된다.
사울의 모든 힘은 주님의 도우심 속에 있었다.
그가 사무엘을 통하여 내려오는 주님의 분부 위에
자신의 판단을 더 올려놓았을 때
그의 노력은 실패로 머리를 디밀고 있는 셈이다.
자신의 판단이 성공을 가져올 것 같이 계산되고
주님의 섭리는 막연한 듯 보여 실패할 것같이 상상하거나
단지 외관상 나타나는 것에 기초해서 판단할 경우
매사에 사울의 실패는 우리의 실패도 되고 만다.
우리가 주님의 계명에 반대되게 행동할 때는 언제든지,
설사 선한 목적을 위해서 또는 흔히 말하는
“주님의 일을 거들어 드리는데 좀 성급한 행동을 보였기로서니...”
라고 자신에게 말할 수 있는 때도 포함해서 언제든지
우리는 선함을 생산할 수 있는 유일한 힘, 그 근원으로부터
자신 스스로를 차단시키고 만다.
그 이유는 선함을 위한 실재의 유일한 힘은
우리 속에 계신 주님의 힘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최적기, 최선의 것을 알고 계신 분이다.
이사야 60장 22절에서 이를 적절히 표현하고 있다.
즉 “가장 보잘 것 없는 자가 천명으로 불어나고
가장 하잘 것 없는 자가 강대한 민족을 이루리라.
나 야훼가 제 때에 지체 없이 이루리라.”
사울이 이루어 놓은 업적은
백성들이 왕의 통치에 숙달되게 하고
왕권의 등장을 기정사실화 시켜주고,
왕권 건립에 용기를 주면서 정작 그들에 필요한 것을
그들 스스로 요구하도록 가르쳐지는데 한정되었지만
사울의 수준에서는 그 정도로도
충분한 성취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 속의 사울의 경우도
외향적인 적들을 극복해 주고 부분적이지만 내향적인 적도
극복하게 해줌은 인정되는 공적이다.
그러나 이 사울은 성급하여 참지 못하고 자기를 너무 내세우며
판단에 있어서도 피상적이어서
얼핏 하면 주님의 명령이 이러이러함을 뻔히 알면서도
그 명령 위에 자신의 판단을
올려 세우기 십상인 것이 결정적인 흠이다.
진리의 껍질만을 보아 진리를 이해하는 것은
진리가 우리의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태도를
수락시키는 데는 별 탈이 없다.
또 어떤 상황에 진리가 요구될 때
과감히 진리를 들어 쓰게 하는 우리의 능력을 발달시켜 주는 데도
그런 대로 실력발휘를 해준다.
그러나 자신 속의 악이나 세상 악들의 뿌리를 찾아내는 과정같이
시간이 걸리는 것에 대하여는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하고 만다.
19-22절의 구절들은 이에 대한 생각을 구체화해서
흥미 있는 생각을 줄 것이다.
각기 다른 도구(tool)들은 각기 다른 진리들을 표징한다.
전쟁 도구인 무기(weapon)는 악과 싸우는데 쓰여지는 진리들이다.
농기구(farm implement)란 우리 인생의 어떤 부분을
발달시키거나 준비하는데 필요한 진리,
이 진리는 우리 속에서 “과실과 곡식”을 생산하게 해준다.
블레셋족이란 진리에 관한 한 유식하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 하지만
그 진리에 따라 살고 싶은 생각이 없는 자들을
통괄해서 표징하고 있다.
이 구절들에서는 이런 사람들이 가진 특별한 면,
즉 지적인 토론을 꽤 즐기는 사람들을 암시해 주는데
그 이유는 20절의 “... 낫을 벼리려면”이라는 말은
지성을 날카롭게 만드는 일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자신들이
상당히 “경건한 사람들”이라고 자처하는데 꽤 열성적이면서도
자신들의 방향이나 지배하에 있지 못하게 하는 토론,
다시 말해서 자신들의 약점이나 이기적인 원인들이
노출될 것 같은 토론은 회피하는 특성을 가진 바,
각자 스스로 우리속의 블레셋을 점검해 보는 기회를 가지기 바란다.
참고 문헌 - 스웨덴볽의 저서 「요한계시록 설명 제 700-20항」
“블레셋 사람들은
사랑과 인애의 선을, 따라서 삶의 선을 중요시하지 않고
대신에 종교에 관한 모든 것을
지식과 인식 속에만 놓아두는 이들을 표징했다.
그러므로 오늘날에 믿음만을 강조하는 이들,
그래서 인애에서 떨어져나간 믿음만을 추구하는 이들과 같다.
그것은 인애와 결합된 신앙이 교회의 필수요건이며
구원의 본질인 것을 무시하는 셈이다.
그래서 이들을 두고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이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할례 받지 않았다는 것은
영적인 사랑, 따라서 선함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교회 안에 있는 자들에 대해 언급했기 때문에
그들은 영적이지 않고 다만 자연적이었다.
이는 인애나 삶의 선을 중요시 하지 않는 사람은
그저 자연적이거나 심지어는 감각적으로 되고,
세속적인 것만을 사랑하게 되고,
영적으로 어떤 진리도 이해할 수 없게 되며
자연적으로 이해한 진리들을 그는 왜곡하거나 더럽히기 때문인데
그런 사람들이 바로 말씀에서 "블레셋"이 의미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왜 블레셋이 이스라엘 자손과 자주 싸웠는지,
그리고 때로는 블레셋 사람이 이기기도 하고,
때로는 이스라엘 자손이 이기기도기도 했는지가 명백하다.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율례와 가르침들을 지키지 않을 때는
블레셋이 이겼으나 그들을 따라 살았을 때는 그들이 이겼다.
주님의 가르침과 율례에 따라 산다는 것은
그들에게는 삶의 선이요 사랑의 선이었다.
이 당시에는 이스라엘 후손들이 블레셋에 정복당해 있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여호와를 예배함에서 떠나
잡신들을 예배했기 때문인데
특히 사무엘상 7장 3절을 보면 아스다롯을 예배했던 것을
사무엘이 꼬집어 말한 데서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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