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은 예수님이 파송하신 70명의 제자가 돌아와서 보고 할 때 예수님이 반응하면서 말씀한 사실을 이야기합니다. 이 사건의 내용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는 방법으로 보면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공개적으로 돌아오는 제자들을 맞이하시며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같이 떨어진 것을 보았다 하며 기뻐하시고 감사하시는 장면입니다. 즉, 17~22절은 공개적인 설명과 감사입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이 제자들의 얼굴을 향하시고 조용히 말씀하신 장면입니다. 즉, 23~24절은 비공개적인 설명과 계시입니다.
먼저 예수님은 공개적인 설명과 감사에서는 성령 안에서 기뻐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보고를 듣고 기뻐하십니다. 이 기쁨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21절을 보면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라고 말씀합니다.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성령 안에서 기뻐하셨다”입니다. 복음서에 딱 한 번 여기에 나옵니다.
그러면 “성령 안에서 기뻐하셨다”라는 말은 다른 기쁨과 무엇이 다른가? 신약에 “성령으로 기뻐한다”라는 예를 두 가지 정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입성 후에 “그리스도”를 논쟁할 때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자신의 권위에 대해서, 유대인이 낸 세금에 대해서, 부활에 대해서 논쟁을 걸어온 대적자에게 물으십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의 아들이냐? 물으십니다. 그러자 다윗의 아들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시편 110편을 인용하는데, 이때“성령으로”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마태복음 22:43~44절 보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성령에 감동하여”라는 말이 오늘 본문의 “성령으로”입니다.
따라서 이런 예수님의 물음은 최상급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 누구도 다윗 위에 있을 수 없습니다. 유대인의 정체성을 가지면 다윗과 아브라함 위로 갈 수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최상급인데, 이런 다윗이 성령 안에서 말했고 그 내용이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라고 칭했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습니다. 최상급의 최상급입니다. 따라서 성령에 감동되어, 또는 성령으로 무엇인가를 말했다는 것은 자기 생각이나 지식이나 의지로 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본 계시로 전달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영적 분별력은 관찰로 얻어지지 않고(마태복음 16:17), 성령의 계시로 가능하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2:14~16, 12:3).
두 번째는 사도들이 박해받을 때 교회가 모여서 기도했는데, 이때 초대교회 교인들은 시편 2편을 인용하여 현재 상황을 묘사합니다. 이때 다윗이 했던 예언이 나옵니다. 사도행전 4:24~26절을 보면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요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시편 2편을 보면 “다윗이 성령으로”라고 표제가 되어 있지 않은데, 그런데 오늘 사도들은 “다윗이 성령으로 말씀하셨다고”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성령으로”를 직역하면 “성령을 통해 ”입니다. 지금, 이 기도를 하는 시점에서 다윗은 약 1,000년 전의 사람입니다. 1,000년 전 사람이 헤롯과 빌라도 그리고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이 합세해서 메시아 그리스도를 대적했다고 말합니다. 그 메시아이며 종인 그리스도를 대적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얘기가 아닙니다. 다윗은 자신이 보고 경험한 일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뛰어넘는 무엇인가를 전한 것입니다.
이 두 가지 관찰을 본문에 적용하면 “성령 안에서 말한다”, “성령 안에서 무엇을 한다”, “성령 안에서 기뻐한다”라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생각하거나 느끼거나, 알 수 없는 무엇인가를 한 것입니다. 본문에서 주님께는 기쁨이 적용되었기 때문에 인간적인 기쁨이 아닌 계시적인 기쁨을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찰하시는, 제삼위 하나님의 통찰과 하나님과 하나됨 안에서 나타나는 정서(기쁨)가 예수님이 지상에서 발을 딛고 70인 제자를 맞이할 때 나타난 것입니다. 이는 실로 대단한 일입니다.
70인 제자들이 돌아와서 보고하는 장면에서, 예수님 안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적 기쁨을 가지고 그 기쁨을 누리고 있는데 그것이 밖으로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기뻐했습니다. 이 기쁨은 인간적으로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기쁨이 아닙니다. 참으로 하나님만이, 하나님의 연합, 하나가 됨 안에서 느낄 수 있고, 알 수 있고, 표출할 수 있는 기쁨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기쁨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21절을 보면 “이것을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이것들(원어로 보면 복수)을 나타낸다”라는 말은 계시 용어로서, 일차적으로 예수님이 파송한 70인 제자들이 돌아와서 사역을 보고할 때 예수님이 보신 일과 관계됩니다. 결국 70인 제자 사역이 관련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은 무엇을 보시었는가? 18절을 보면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보았노라”라는 말은 미완료 시제입니다. 70인들이 복음 전파할 때 예수님이 생생하게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고 질병을 치료할 때,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할 때 사탄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즉, 제자들 사역과 사탄이 떨어진 일이 동시적 사건입니다. 사탄이 떨어지는 사건이 귀신들이 항복하는 사건과 동시 사건입니다. 사탄이 떨어지는 내용은 이사야 14:13~15절에 근거합니다.
18절부터 “마귀”(디아볼로스, 4:2, 3, 6, 13, 8:12)에서 사탄으로 (사타나스, 10:18, 11:18, 13:16, 22:3, 31)으로 바뀝니다.
“하늘”은 마태복음에서는 하나님이 계신 공간인데, 여기서는 사탄이 머물면서 자신의 통치를 인간에게 행사하는 영역입니다(에베소서 6:12). 사탄이 하늘에서 떨어짐은 그의 현재 권세가 자신의 명령에 따라 사는 이 작은 무리 앞에서 한순간에 무너짐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엄청난, 전무후무한 사건입니다. 사탄이 떨어짐이 종말 사건인 줄 알았는데, 현재적 사건(공생애 한복판에)으로 지상 세계에서 증명되는 순간입니다.
사탄의 패배는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70인 제자의 활동으로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이제 예수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고 사탄은 하늘에서 떨어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곧 다가올 십자가의 죽음을 사탄에 대한 결정적인 승리로 해석하고 현재 승리의 전조가 일어나고 있음을 목격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원리가 나타납니다. 새로운 원리는 70인 제자 사역과 이 사역 배후에 일어나는 일과 관련이 됩니다. 본문 보면 지혜 있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냅니다. 아버지의 뜻이라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생각과 계획을 말씀합니다.
그러면 이것이 예수님 사역 안에서 어떻게 실현되었는가? 하나님은 지금 일어난 일들을 아이들에게 나타내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어린아이들”은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의 반대입니다. 본문 상황에서 보면 “70인 제자”입니다. 소외되고 이름 없고 무명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서 권세자들, 지혜자들, 정치가, 학자들을 선택하고 협력한 것이 아니라 소외되고, 이름 없고, 무명한 사람들을 선택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십니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당시 율법 학자, 제사장, 서기관과 협력하는 방식을 버리시고, 자격 없는 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을 보내시며 사역하게 하십니다. 누가복음 10장을 보면 9절에서 가는 곳마다 병자를 고치십니다. 19, 11절을 보면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합니다. 17절에는 주의 이름으로 명령하면 귀신도 항복합니다. 18절을 보면 주님은 제자들이 사역할 때 사탄이 그 자리에서 떨어지는 일을 봅니다. 이들은 한결같이 자격 없는 자들입니다. 70인 제자는 적은 능력으로 많은 일을 합니다. 하지만 25절을 보면 율법 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많은 능력으로 아무 일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보잘것없는 도구와 같은 이들을 선택해서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일을 하시기로 계획, 결정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근본적으로 지금까지의 방식과 다릅니다. 정치력, 재력, 학력 등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그런 것들과 협력 없이 순수하게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하시기를 원했는데, 그것이 70인 제자를 통해 나타납니다. 주님이 전부인 사람을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 사람으로 사용하십니다.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 세우는 데 일꾼으로 사용하십니다.
둘째로 예수님이 제자들 얼굴을 향하시고 조용히 말씀하신 장면을 보고자 합니다. 즉, 23~24절은 비공개적인 설명과 계시입니다. 예수님은 비공개적인 설명과 계시에서는 제자들에게 축복을 선언하십니다. 23절을 보면 “제자들을 돌아 보시며 조용히 이르시되”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축복하십니다. 17~21절의 성령으로 기뻐하는 제자들을 향해 축복하십니다.
23~24절을 보면 일종의 특권을 소개합니다. 누가 일차적 수혜자입니까? “너희”, 즉 70인 제자입니다. 특권은 무엇입니까? 탁월한 신약 계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이후에 그전에는 닫혀 있던 수많은 일들, 계시들, 성경들이 다 풀리게 되었습니다. 다윗과 이사야 등이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이제는 설명이 가능합니다. 계시에 대한 더 온전한 이해는 부활 이후에 있게 될 것입니다(누가복음 24:31~32, 45).
신약에서는 구원의 기초가 되는 모든 것이 일상, 평범하게 보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찾아와서 구원하십니다. 이것이 이제는 일상 평범하게 보입니다. 제사 없는 속죄는 구약 백성들에게는 과히 혁명적입니다. 신자에게 거저 주어지는 칭의 역시 놀랍습니다. 율법이 아닌 구원으로 받는다는 사실도 충격적입니다.
시편 40:6~9절을 보면 “주께서 내 귀를 통하여 내게 들려주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지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그때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 내가 많은 회중 가운데서 의와 기쁜 소식을 전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내 입술을 닫지 아니할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주께서 내 귀를 통하여 내게 들려주시기를”이라는 말을 원어대로 직역하면 “당신은 나를 위해 내 귀를 팠습니다”입니다.
그러면 이 시인의 귀가 막혔을까요? 아닙니다. 원문에는 “들려주시다”라는 말이 없습니다. “나를 위해 내 귀를 팠다(뚫었다)”입니다. “카라”라는 말은 웅덩이나 우물을 팔 때 쓰는 말입니다. 귀를 마치 벽이나 동굴을 뚫는 것처럼 뚫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윗 왕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아니하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지 아니한다고 합니다. 구약의 속죄 방법이 이것밖에 없는데, 이것을 기뻐하거나 요구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그래서 구약에서는 이 말씀을 이해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면 죄인이 하나님께 나아갈 방법은 없는가?
물리적인 귀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다윗 왕의 귀를 강제적으로 뚫습니다. 그 말씀을 들어야 하는 생리학적인 귀가 아닌 신학적인 귀입니다. 예수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속죄의 방식이 현실적으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귀를 뚫어서라도 듣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원리는 바울이 말한 것처럼 없는 자들을 들어서 있는 자처럼 사용하십니다. 고린도후서 6:9~10절을 보면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라고 말씀합니다.
소외되고, 이름 없고, 무명한 사람들을 선택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십니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입니다. 어떤 협력도 없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나타나는 원리로 세우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리적인 귀가 아닌 신학적인 귀, 영혼의 귀를 뚫어서라도 다른 사람들, 다른 시대가 알 수 없는 것을 우리에게 계속 말씀하여 주십니다. 열려 있지 않은 귀를 뚫어서 다른 시대를 알 수 없는 것을 계속 말씀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