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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춤의 의미.
2026년 1월19일 월요일
선경 정해균의 독서 노트
◐야망의 희생자.
요즘 경제학자들은 복권당첨자의사례를 들기를 좋아한다. 사람들은 거액의 당첨금으로 인생 역전을 꿈꾸며 복권을 구입하지만 우리는 실제로 복권에 당첨된 뒤 오히려 삶이 파괴되고 당첨전보다 더 불행해진 사례들을 너무나 자주 접한다. (아담)스미스는 오래전인 1759년에 이미 이사실을 알았다. ‘탐욕은 가난과 부의 차이를 과대 평가한다. 야망은 사적인 지위와 공적인 지위의 차이를, 헛된 영광은 무명과 명성의 차이를 과대 평가한다.’ 지금껏 우리는 가난과 부유함 사이, 무명과 명성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고 믿어왔다. 하지만 (아담)스미스는 우리가 희망과 꿈에 사로잡혀 생각하는 것만큼 큰 차이는 없다고 말한다. …
(아담)스미스는 많은 ‘도덕감정론’의 독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우화를 이용하여 이 주장을 납득시킨다. ‘도덕감정론’의 4부에서 그는 ‘가난한 사람의 아들’에 관한 경고성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늘이 이 아들에게 진노하여 야망을 그의 마음에 심었다. 젊은 이들이 자기주변을 돌아보다가 부자들의 생활여건에 감탄하게 된다.’ 그 뒤 그는 부자들이 부를 가진 것을 누린다는 것이 어떤 모습인지 상상하기 시작하고, 점차 엄청난 행복에 대한 터무니없는 생각에 빠진다. 그러고는 그것을 얻기 위해 일을 한다. 그의 부족함을 추구하는데 자신을 완전히 바친다.
지금까지 (아담)스미스의 주장을 따라온 사람이면 누구나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있다. 남보다 앞서기 위해 열심히 일한 그는 야망의 노예가 되지 않았다면 겪지 않았을 어려움을 겪는다. 일반적인 수준보다 몸이 더 피곤해지고, 마음도 더 불편 해 진다. 결코 도달하지 못할 지도 모르는 미래의 거창한 행복을 쫓아 가느라 자신이 항상 누릴 수 있는 실제적인 평온을 희생한다. 임종 때 그는 자기가 품었던 야망을 저주하고, 자신에게 실제로 아무런 만족도 주지 못했던 야망을 성취하려고 실제로 손에 넣을 수 있는 다른 기쁨을 어리석게 포기한 것을 한탄한다.
-라이언 페트릭 핸리 지음 ‘내 인생을 완성하는 것들’ 중에서
◐탐욕의 대가.
소작농인 바흠은 바시키르 마을의 촌장으로부터 천 루불만 내면 종일 밟은 땅을 모두 차지해도 좋다는 계약을 맺었다. 단 해가 질 때까지 출발지점으로 돌아오지 못하면 무효라는 조건이었다. 다음날 바흠은 동이 트자 마자 신이 나서 앞으로 걸어 갔다. 점심시간이 지나 돌아올 지점을 지났는데도 그는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갈수록 그의 눈앞엔 더욱 비옥한 땅이 펼쳐져 있었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땐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당황한 바흠은 젖 먹었던 힘을 다해 출발 지점으로 달려갔다. 마침내 해가 지기 직전에 가쁜 숨을 몰아쉬며 가까스로 출발점에 도착했다. 하지만 해가 서산으로 넘어 감과 동시에 가슴을 쥐고 피를 토하며 쓰러지고 말았다. 그가 차지한 건 고작 한 평 남짓한 자신의 무덤이었다.
-레프 니콜라비치 톨스토이 저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절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수단.
중독을 연구하는 분야에서 배고픔(hungry), 분노(angry), 외로움(lonely), 피로(tired)의 머리글자를 딴 ‘HALT(멈춰)’라는 약자를 중독이 재발하려는 신호에 보내는 문구로 쓴다. 반드시 주의해야 하고, 통제력을 잃어서는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을 잃을 위험이 있다.
절제, 자제는 자신을 통제하는 일을 뜻한다. 그 여정의 첫 단계가 바로 육체다. 우리는 육체를 엄격히 다루고, 억제하며 장악하고, 하나의 사원처럼 여긴다. ….. 육체가 정신을 장악해서 지배하지 않도록, 정신을 고갈시키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육체를 억제하려는 것은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자신을 자유롭게 하려는 것이다.
충동이나 나태의 노예인 사람, 강인한 의지나 확고한 계획이 없는 사람은 위대한 삶을 창조 할 수 없다. 분명 그들은 자기자신에게 너무 사로잡혀 있어서 다른 누구에게도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무슨 일이나 할 자유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무엇인가에 예속될 것이다.
절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수단이며, 쇠사슬을 푸는 열쇠다. 즉 자신을 구원하는 방법이다. 우리는 어려운 길을 선택해야 한다. 길게 보면 그것이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라이언 홀리데이 지음 “절제수업”중에서
◐항룡유회(亢龍有悔).
주역 건괘(乾卦)에는 항룡유회(亢龍有悔)라는 말이 있다. 항룡은 하늘 끝까지 다다른 용이다. 명예와 권력이 하늘을 찌를 듯이 가장 높이 올라간 단계를 말한다. 공자는 ‘항룡은 너무 높이 올라갔기 때문에 존귀하나 지위가 없고 너무 높아 교만하기 때문에 자칫 민심을 잃게 될 수도 있으며 남을 무시 하으로 보필도 받을 수 없다. 이 때문에 움직이면 후회함이 있다’ 라고 했다. 꼭대기까지 오르면 자신이 최고인줄 안다. 자신이 잘나서 그리 되었다고 여긴다. 올챙이 시절은 까맣게 잊고 받는 것에만 익숙해진다. 시키는 대로 주변사람들이 움직이니 세상이 자기마음대로 되는 줄 착각한다. 교만과 위선이 하늘을 찌른다. 그러나 달은 둥글고 나면 다시 기울기 시작하고 항아리는 물이 가득차면 더 이상 물을 담지 못하고 흘러 넘친다. 주위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고 결국 혼자 남는다. 끝까지 올라간 용은 반드시 후회한다. 적당한 선에서 그칠 줄 알아야지 끝까지 올라 가려 다가 스스로를 망친다. 지위가 높을수록 겸손이 필요하다.
-박수밀 저 오우아(吾友我,나는 너를 벗삼는다)중에서
◐멈출 줄 알면 오래간다.
知足不辱(지족불욕) 知止不殆(지지불태) 可以長久(가이장구)
만족할 줄 알면 치욕을 당하지 않고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아
오래 간다.
-노자 도덕경 제44장중에서
【선경의 독서노트】
‘하늘이 내린 재앙은 피 할 수 있지만 스스로 만든 재앙은 피할 수 없다’ 는 옛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뜻은 운명은 하늘과 같이 그것을 통제하는 보이지 않는 절대적인 존재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살면서 매순간 이루어진 바로 개체(자기 자신)의 선택적 행위에 의해 결정된다는 엄연한 사실을 깨닫을 수 있습니다.
라이언 홀리데이 지음 ‘절제수업(Discipline is Destiny)’에 미국건국의 아버지 조지워싱턴과 세계2차대전을 승리를 이끈 승리의 주역이자 미국 제34대 대통령을 역임한 아이젠하워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있습니다. 잠시 그분들의 인생 여정에서 보석처럼 빛나는 절제의 발자취를 살펴보겠습니다.
조지 워싱턴은 모든 일을 끝내고 집으로 향했다. 이제 막 미국 독립전쟁에서 대영제국을 무찔러서 미 대륙 전체가 그 앞에 전리품으로 펼쳐졌지만, 여기서 그는 권한을 내려 놓았을 뿐 아니라 그 어떤 명예도 실질적으로 거부했다. 워싱턴은 자기자신을 왕이라고 선포하고 자기가문이 수세기동안 통치할 기반을 다져놓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워싱턴은 절을 하고 검을 내려 놓았다. … 실제로 워싱턴이 건국의 아버지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람이 된 것은 노예를 해방하고 힘을 그들에게 넘겨주는 올바른 일을 했기 때문이다. 건국의 아버지 중에 그렇게 한사람은 워싱턴이 유일했다. …..
자신 앞에 놓인 기회를 온화하고 차분한 철학의 관점에서 바라본 워싱톤은 킨킨나투스의 길을 선택하고 마운트버넌으로 돌아 갔다. 워싱턴은 혼자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힘든 노동으로 자신을 낮추기를 원했다. 또한 민간 권력과 군사권력을 지켜보며, 국가를 자기 자신보다 우위에 두었다. ….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이 올바른 방식인지에 확고한 의견이 있는 야심가로서는 하기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워싱턴은 결국 대통령이 되지 않았는가?.. 그렇게 두번의 임기를 보내고 은퇴했는데, 그런 워싱턴을 따라 150년동안 대통령 임기를 두번만으로 제한하는 절제의 전통이 지켜지다가 1951년에는 수정 헌법 제 22조로 그 헌법이 전통으로 제정되었다.
아이젠하워는 장군 계급장을 달기까지 30년동안 평범한 직위에 머물렀다. 그러다가 1944년 제2치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을 이끄는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되면서 갑자기 300만군사를 통솔하게 되었고 최종적으로 5000만명이상의 병력을 지휘했다. 총7억명 이상의 시민으로 이루어진 다국적 연합을 이끌어야 하는 자리에서 아이젠하워는 자기자신에게 규칙을 그 어느때보다 더 엄격하 적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들을 이끄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을 강제하거나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설득하고 타협하며 인내심을 발휘해 자기 성미를 통제하고 무엇보다 (스스로) 모범을 보이는 것이었다… 그후 (미국 34대)대통령으로서 핵무기라는 새로운 무기를 감독하던 아이젠하워는 세상에서 가장 큰 권력을 쥔 사람이 되었다. 그런 아이젠하워의 임기동안에는 새로운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고 무시무시한 핵무기도 사용되지 않았으며 나라간 갈등이 깊어 지지도 않았다. 아이젠하워는 임기를 마치면서 이른바 군산복합체라 불리는 전쟁 무기를 만드는 군수산업단지와 군대가 공모하여 전쟁을 일으키려는 엄중한 경고를 남겼다.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으로서 재임하면서 군대를 동원한 일은 학교에 처음으로 등교하는 흑인 어린이들을 보호할 때 뿐이었다.
아이젠하워 어머니는 젊은 시절 그에게 ‘잠언’의 한구절을 읽어주었다. ‘쉽게 화내 지 않는 사람이 용감한 군인보다 낫고, 자기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이 한나라를 정복한 사람보다 낫다.’ 어머니가 아이젠하워에게 가르친 것은 고대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가 통치자들에게 조언할 때 심어주려 했던 것과 똑 같은 교훈, 바로 가장 강력한 사람은 ‘자기 힘으로 자신을 제어하는 사람’ 이라는 지침이었다. 그러니까 아이젠하워는 말그대로 자기를 먼저 정복함으로써 세계를 정복한 셈이다.
고대 그리스 인들은 사람의 마음속에 잠재되어 있는 탐욕의 제어 즉 절제의 미덕에 내재된 통제의 기술을 말할 때 ‘전차를 모는 마부’의 모습과 비교해 설명하곤 했다. 경주에서 이기려면 말들이 더 빨리 달리게 해야 할 뿐 아니라 말을 통제하고 말의 긴장과 불안을 진정시킬 줄 알아야 하며,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도 엄밀하고 정확하게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는 만큼 고삐를 단단히 쥐어야 한다.
전차의 마부는 엄격함과 다정함, 부드러운 손길과 억센 손길 사이에 균형을 잡을 줄 알아야 한다. 자신과 말들의 속도를 잘 조절해야 하며, 결정적인 순간에 최대치의 속력을 끌어 내어 야 한다. 말들을 통제할 줄 모르는 마부는 속력을 빠르게 낸다고 해도 결국에는 넘어지기 마련이다. 특히 경기장에서 급격히 꺽이는 구간을 돌 때 쉽게 균형을 맞추기 어렵다. 게다가 관중들은 경기장이 떠나 갈 듯 환호와 야유를 보내고, 상대를 이기고 싶은 경쟁심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솟아올라 무모하게 속력을 내도록 부추기면 더욱 그렇다. ….
모든 일을 가능하게 할 뿐 아니라 모든 일을 나아지게 하는 것이 (미묘한) 절제의 기술이다. 자기 절제 없이 진정한 위대함을 이룬 이는 없다. 참담한 몰락이 무절제의 결과가 아닌 경우가 있다면 꼽아 보시라. 삶에서 중요한 것은 재능보다는 기질이며 자제력이다.
이쯤해서 논어 제7편 술이(述而) 제 10장에서 공자(孔子)가 제자인 안연(顔淵), 자로(子路)와 함께 셋이서 나눈 대화의 내용을 음미해 봅니다(지면관계로 원문 생략). 이 대화에서 공자는 제자인 자로(子路)의 무모(無謀)함을 비판하면서 무모(無謀)의 정반대성격인 호모이성자 (好謀而成者)즉 일의성사를 위해 내적 준비가 철저한 (자제력을 갖춘)유능한 장군과 함께 할 것이라고 자신(공자)의 속마음을 털어놓고 있습니다. 아래 원문 해석은 학오(學吾)신동준(申東埈)선생의 ‘교양인의 논어’ 에서 가져왔습니다.
“공자가 안연에게 말했다. ‘등용되면 치도를 행하고 버려지면 치도를 속으로 간직하는 행보는 오직 나와 너 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자로가 (공자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3군을 지휘하게 되면 누구와 함께 할 것입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무모하게도 범을 맨손으로 때려잡고 황하를 맨발로 건너고자 시도하면서(暴虎馮河)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死而無悔) 인물과는 내가 3군의 지휘를 함께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일에 임해 두려워하여(臨事而懼) 계책을 세워 일을 성사시키려는 인물(好謀而成者)과는 3군의 지휘를 함께 할 것이다.
여기서 포호빙하(暴虎馮河)는 범을 맨손으로 때려잡기 위해 무모하게도 맨몸으로 황하를 건너는 것을 비유한 말입니다. 공자께서 안연 및 자로와 애기를 나누면서 자로의 충동적인 용맹을 (강하게) 경계하기 위해 ‘포호빙하(暴虎馮河)’의 표현을 사용한 것입니다. 사이무회(死而無悔)는 ‘죽을지라도 후회하지 않는 다’는 뜻으로 분별없이 함부로 날뛰는 용맹인 만용(蠻勇)을 에둘러 표현한 말입니다. 일을 착수하기 전에는 자제력을 발휘하여 머뭇거리지만 일을 일단 착수했다면 ‘두려워하며 신중하게 계책을 세워(臨事而懼) 일을 성사시키려는 인물(好謀而成者)’과 함께 할 것이다. 이것이 2500년전 공자가 나라를 지킬 군의 최고책임자를 뽑는 인선의 기준이었습니다. 무모(無謀)란 단어의 기준만 놓고 평가 할 때 자로(子路) 만도 못한 국방장관을 뽑아 ‘국민을 계몽하려고’ 계엄을 선포했다는 말을 들을 때 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은 왜 재임기간 중 논어 한 줄도 읽는 정신적여유를 가지지 못했던가 하는 착잡한 생각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It’s no use crying over split milk. 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조선시대 유학자 항해 홍길주(洪吉周 1786-1841)에게 지인이 자신의 집에 지지당(止止堂)이란 현판을 붙이고 항해에게 기문(記文)을 써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지지(止止)”는 주역(周易)에서 ‘멈출 곳에서 멈추니 속이 밝아 허물이 없다’ 에 출처를 두고 있습니다. 항해 홍길주(洪吉周)가 써준 기문(記文)의 일부를 인용하면 아래와 같습니다(원문생략):
‘위험한 곳을 만나 멈추는 것은 보통사람도 할 수 있지만 순탄한 곳을 만나 멈추는 것은 지혜로운 자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그대는 위험한 곳을 만나 멈추었는가? 아니면 순탄한 곳을 만나 멈추었는가? 뜻을 잃고 멈추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뜻을 얻고 멈추는 것은 군자만이 할 있다. 그대는 뜻을 얻고 멈추었는가? 아니면 뜻을 잃고 멈추었는가?
여러분들은 윤석열 전 대통령이 뜻을 얻고 멈추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뜻을 잃고 멈추었다고 생각 하십니까? 이질문에 대해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계몽논란은 봄눈 녹듯이 순식간에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에덴의 동쪽’에서 저자 존 스타인백은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말이 팀셀(timshel)이라고 단언합니다. 영어로 번역된 ‘십계명’은 말그대로 명령문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스타인백은 히브리어 ‘팀셀’은 ‘하지 말라’ 가 아니라 ‘할 수 있을 것이다(Thou mayest)’ 로 옮기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 스타인인백은 그 부분을 쓸 때 담당 편집자에게 이런 생각을 전했습니다. “여기에 ‘개인의 책임’ 과 ‘양심’ 이 개입하게 됩니다. 마음만 먹는다면 할 수 있지만 할지 안 할지는 자신에게 달린 일 이에요. 이 짧은 이야기는 알고 보면 세상에서 가장 심오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나는 늘 그렇게 느껴 왔지만 이제는 그렇다는 것을 압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든 헤리클레스의 이야기든 ‘에덴의 동쪽이나 파우스트’든 간에 이 우화를 전하는 메시지는 하나입니다. 바로 우리에게 선택권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통제와 무절제 사이에서, 미덕과 악덕 사이에서 (다른 사람의 간섭이나 통제를 받지 않고 자유롭게) 선택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자유로운 선택에는 반드시 상응하는 책임 따릅니다. 자유와 책임을 분리하면 많은 사람들이 자유를 남용하여 방종에 흐르기 쉽습니다.
지금 우리는 인류역사상 가장 풍요롭고 자유로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질과 권력에 대한 탐욕은 인간을 야망의 노예로 만들어 일상의 평화와 기쁨과는 거리가 먼 불안하고 공허한 삶속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삶이 부여하는 모든 풍요는 인간이 탐욕을 스스로 다스려 만족의 결핍상태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누릴 수 있습니다. 아담 스미스는 도덕 감정론에서 우화를 통하여 야망의 폐단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톨스토이와 조선의 유학자 홍길주는 “멈춤”의 지혜를 자신들의 작품을 통하여 후세 사람들 에게 고언(苦言)을 드리고 있습니다. 조지워싱턴과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는 절제력으로 자신을 다스려 욕망의 부추김에서 벗어 나 자유와 존엄을 만끽한 서양의 군자로 세상 사람들의 추앙을 받고 있습니다.
역설적으로 삶이 주는 모든 자유와 존엄은 자신의 욕망을 절제로 다스리며 삶의 주도권을 행사하는 개체(사람)의 것이라는 점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절제는 스스로를 구원하여 인간다운 삶의 모범을 보이는 가장 윤리적인 삶의 방법입니다. 수많은 삶의 모순과 허무함 속에서도 절제의 미덕이 유독 빛을 발하는 이유를 다시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게 하는 까닭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