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8년 혁명의 가장 중요하고 최종적인 결과는 농노의 궁극적인 해방이었다. 1848년 9월 7일의 해방법은 농민들에 대한 영주들의 모든 권리를 끝나게 했고 강제적인 노동 봉사를 폐지하였다. 영주들의 이러한 자유 노동자들의 상실에 대한 보상은 일부분은 국가에 의해서 그리고 일부분은 토지를 얻은 농민들에 의해서 지불되었다.
농민의 해방은 농업 생산과 일반적인 경제 생활에 큰 자극을 주었다. 농민들은 지주들을 위해 일했던 것보다 더 열심히 자신들을 위해 일했고 이전에 했던 것보다 더 많이 생산했으며 상당한 구매력을 가진 소비자가 되었다. 농민들의 강제 노역에 의한 낭비적인 방식으로 지탱되어온 거대한 토지는 더욱 효과적이고 경제적으로 운영될 수 있었다. 대영주들에게 지불된 보상은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토지를 자본주의적 기업으로 발전시킬 수 있게 했고 기계적인 농경을 위한 장비에 투자할 수 있게 했으며 양조장과 사탕무우 설탕 공장, 제재소등을 짓고 광산을 개발할 수 있게 했다. 다른 한 편으로 소귀족들은 자유 노동자 없이 자신들의 토지를 유익하게 운영할 만한 충분한 토지를 가지지 못 하였고 농업 기업가가 되기에 충분한 보상도 받지 못 하였다. 그들 중의 많은 수에게 농노의 해방은 경제적인 파멸을 의미하였고 그들로 하여금 공직을 위한 경쟁자가 되게 하였다. 왜냐하면 이들 가난한 귀족들은 여러 민족 출신이었고 그들의 경쟁은 제국내에서 민족간의적대감을 증폭하였기 때문이다.
부유한 농민들은 대영주와 마찬가지로 해방으로부터 이익을 얻었다. 황제 조셉 2세의 법은 전통적으로 농민들이 보유한 토지(시골의 땅)를 귀족들이 획득하는 것을 금지했다. 이러한 수단은 당시까지도 여전히 시행중이었는데 이 시골의 땅이 농민들보다도 적은 세금을 내거나 헝가리에서처럼 전혀 세금을 내지 않는 귀족들의 손에 들어가는 것으로부터 막는 만큼 농민들을 보호하지는 못하였다. 토지법은 농민들에게 부동산 보유권의 안전성을 주었으나 더 부유한 농민이 가난한 농민들의 땅을 구입하는 것을 막지는 못 하였다. 서유럽에서 그들에 대비되는 이들과 마찬가지로 부유한 농민들은 정치적인 보수주의로 향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이 기간동안 그들 역시 더욱 민족적인 자각을 하게 되었고 자신들의 민족적 단체들과 자신들의 이익을 동일시하기 ꁁ이었고 시작했다. 약간의 혹은 전혀 토지를 가지지 않은 더 가난한 농민들은 다른 이들의 토지에서 일하는 것으로 자신의 수입을 보충하거나 농장 노동자로서 완전히 생계를 이어갔다. 많은 이들이 도시를 동경하고 있었는데 도시에서 그들은 산업을 위한 노동력을 제공하였고 산업 프롤레타리아로서의 계급을 뽐내었다. 1848년 이후 비숙련 농민 노동자들의 대량 유입은 미래에 나타날 계급대립의 기초를 놓았고 또한 민족간의 대립에 원인이 되었다. 1848년 이전 제국내에서 대부분의 도시민은 독일인들이었으나 체코인, 폴란드인, 크로아티아인등의 도착은 도시에서 우월한 독일적인 성격을 파괴하였다. 하지만 독일인들은 일반적으로 여전히 경제의 통제에 남아있었고 노동자 고용의 주된 고용주였다. 그래서 계급과 민족 투쟁은 서로간에 강화되었고 노동자들 또한 민족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아마도 오스트리아의 농민 해방으로 인한 결과 가운데 가장 의미심장한 것은 산업 혁명의 진전을 가속화한 유동적인 노동인구공급의 창출이었다. 산업혁명은 같은 시기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합그부르크 제국의 경제적 변화의 뒤에 있는 큰 힘이었다. 정부는 1850년에 제국내에서 관세와 무역의 장벽을 철폐함으로써 그리고 광범위한 공공사업계획을 후원하고 제조업과 무역을 공식적으로 조장함으로써 공업 발전을 자극하였다. 그러나, 1850년 이후 자리잡은 공업의 붐을 위한 주요한 기동력은 자본주의적 재정의 급속한 성장이었다. 1848년 이전 제국내에서 주요한 자금의 원천은 독점적으로 정부와만 관계하는 오스트리아 국립 은행이었고 아직까지 보수적으로 활동하고 있던 로스챠일드가는 대부와 신용을 포함한 너그러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스트리아에서 최초로 넓은 지역에서 받아들일만한 신용을 창출한 은행은 1852년 파리에서 공업적 합자기업의 촉진을 위해 만들어지고 새로운 사업의 영역을 연 Cre'dit Mobilier 였다. 1853년에는 최초의 사설 오스트리아 은행 즉 Diskonto-Gesellshaft가 같은 목적에서 창설되었다. 그리고 1855년에는 높은 성공을 거둔 Cre'dit Mobiler 에 경쟁하기 위해 로스챠일드가가 Creditanstalt를 건립하였다. 이러한 기관들은 오스트리아 공업의 확대를 위한 경제적인 자극을 주었는데 이 자극은 특별히 비엔나와 보헤미아와 갈리시아 주에서 에서 번창하였다.
산업 혁명은 오스트리아에 도시 프롤레타리아, 슬럼가, 노동자들의 불만과 같은 도시 성장에 따른 일반적인 문제들을 가져왔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인구의 많은 부분에 부와 재산을 가져다 주었고 새로운 중산층을 창조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것은 행정과 군대에 필요한 금전과 원료를 제공하였다. 그리고, 군대의 강력함은 오스트리아로 하여금 제국의 내부에서 활동중인 파괴적인 힘에도 불구하고 열강 가운데에 존재하게 해 주었다.
출처:http://rose0.kyungpook.ac.kr/~z971554/archiv/modern/nation/peast.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