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택(金聖擇)(1873 ~ 미상)】 "1909년 대한인국민회 멕시코 메리다지방회 창립, 독립자금 지원"
자료에 의하면 1873년경 서울 신문(新門) 밖 경교(京橋)에서 김진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경교는 지금의 서울 종로구 평동(平洞) 적십자병원 부근이다. 본명은 김성택(金聖澤)이나 자료에 김성택(金性澤) 혹은 김승택으로도 혼용되어 쓰이고 있다. 1925년 2월 멕시코에서 문익신의 딸 문 안니싸와 결혼하여 이듬해 4월 아들을 낳았다.
1905년 4월 1,033명의 한인들과 멕시코로 이민하였다. 멕시코 도착 후 부모와 함께 유카탄주 메리다 지방의 에네켄농장에서 4년간 참혹한 노동을 하였다. 4년간의 노예계약 기간이 끝난 후, 1909년 5월 9일 미주 국민회(國民會) 북미지방총회(北美地方總會) 산하 메리다지방회(美利多地方會)를 창립하고 창립 회원이 되었다. 1910년 2월 1일 이근영(李根永) 등 광무군인(光武軍人) 출신들이 작둔 지방에서 독립군 양성을 목적으로 숭무학교(崇武學校)를 설립하자, 5월 메리다지방회 회원들과 임시회를 개최하고 숭무학교를 위해 특별 연조(捐助)를 하였다. 같은 해 10월 『신한민보(新韓民報)』를 위해 메리다지방회 회원들과 의연금을 기부하였다.
1911년 12월 이근영 등 200여 명의 메리다지방 한인과 베라크루스(Veracruz)주 와하케냐(Oxaqueño, 일명 五岳基那)로 이주하여, 1912년 1월 와하케냐지방회(일명 五岳基那地方會)를 설립하였다. 동년 7월경 와하케냐지방회에서 한인 자녀 70~80명의 교육을 위해 일신학교(日新學校)를 설립하고 국어·한문·산술·창가·체조 등을 가르치자, 찬성원이 되어 매달 50전씩 후원하였다. 1913년 5월 와하케냐지방회 임원 선거에서 대의원 서현우가 자리를 비우자, 서병두와 함께 후임 대의원으로 선임되었고, 7월 다시 대의원으로 선임되었다. 1912년부터 와하케냐 인근 쌉뽀달 지방에서 이광화·서춘동·조여삼·안성우·유순명과 자영 농업에 착수한 지 3년 만인 1915년 11월경 벼와 잡곡 농사를 성공하여 수백 원의 이익을 얻었다. 1916년 1월 와하케냐지방회 임원 선거에서 법무원으로 선정되었고, 2월 국민회 창립기념식에서 ‘우리의 장래’란 제목으로 연설하였다. 1917년 생활난으로 각지에 흩어졌던 와하케냐지방회 회원들이 다시 모여들자, 3월 다시 지방회를 다시 설립하고 임원을 선정할 때, 학무원으로 선임되었다.
1925년 2월 메리다 인근 씨틴깝첸(Citingapchen) 지방에 거주하며 결혼하여 1926년 4월 아들을 얻었다. 1929년 5월 메리다에서 식품점을 운영한 것을 시작으로 1945년까지 식품점으로 생계를 꾸렸다. 1935년 2월 1일 멕시코 메리다지방회에서 국민회 창립 기념식을 마친 뒤, 지방회 청년과 유년 16~17명과 함께 청년회를 조직하고 총무로 선임되었다. 1936년 1월 11일 안창호(安昌浩)가 감옥에서 석방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메리다지방회원들과 특별의연금을 154원 50전을 모아 송금하였다. 같은 해 3월 1일 메리다지방회 주최로 열린 3·1절 기념식에서 양성용·현영환 등 6명과 매일 1전씩 1년간 저축한 삼일적립금 3원 65전을 기부하였다. 1939년 3월 메리다지방회 교육부 위원으로 선임되었고, 12월에는 1940년도 재무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1940년 2월 총무 김용걸이 사임하자, 후임 총무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41년 1월 메리다지방회 재무로 선임된 데 이어 1942년 1월에도 재무로 선임되어 2년 연속 재무로 활동하였다. 1942년 12월 메리다지방회 연종대회(年終大會)에서 차기 재무로 다시 선임되어 3년째 재무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1943년 1월 메리다지방회 통상회에서 재무직을 사임하였다. 1944년 1월 메리다지방회 재무로 또 다시 선임된 데 이어 1944년 12월에도 1945년도 재무로 선임되었다. 광복이 된 1945년 12월 메리다지방회 1946년도 재무로 선임되었으나, 신병으로 사면청원서를 제출하였다.
1917년부터 1945년까지 2·1기념금 3회 5원, 3·1기념금 6회 16원 65전, 국치기념금 1원 50전, 순국선열 기념금 3회 10원, 임시정부 후원금 12원, 광복군 후원금 4회 42전 50전, 독립금 7회 68원, 군자금 100원, 국민의무금 5회 22원, 국민부담금 2회 12원 50전, 인구세 10회 14원 39전, 국민회 기본금 5원, 군사운동금 50원, 중경특파원 여비 10원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재정 후원하였다. 특히 중일전쟁(中日戰爭)이 일어나던 1937년, 광복군이 창립되던 1940년을 비롯하여 1942·1943·1945년에는 적극적으로 재정을 후원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