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리는 교회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가정에서, 직장에서, 세상의 모임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좋은 그리스도인들을 많이 길러냈습니다. 교회는 부흥했고, 선교의 지경을 넓혔으며, 이웃을 위한 구제도 힘써왔습니다. 그런데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줄어들지 못하고 계속 늘어나고 있습니다. 현정권의 지지도와 비슷합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요?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교회안에 머물러 있는 빛과 소금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세상속에서 빛의 역할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라는 뜻입니다. 어떤 비판적인 교회학자는 교회를 대형마트의 물건을 저장해 놓은 창고와 같다고 지적했습니다. 그 물건들은 진열대에 놓인 뒤에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팔려야 그 물건의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팔리기 전까지는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창고의 한쪽에서 기다려야만 합니다. 그런 재고가 많을수록 회사는 망하게 될 것입니다.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창고에서 팔리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신앙적인 책임도 있지만 세상에서 우리가 감당해야할 책임들이 있습니다. 가끔 빛과 소금의 역할을 신앙적인 행위로만 이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직장안에서 성경을 보고, 직장안에서 기도하고, 예배모임을 갖는 것이 직장안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회사에서는 회사 일에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종교적인 헌신을 위해서 회사 일을 게을리 하는 것은 주님과 교회에 덕이 되지 않습니다.
세상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직장안에서, 세상의 모임 가운데서 종교적인 행동을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의 하나님과의 동행은 작장 일, 모임안에서 책임을 다하는 삶의 태도와 행동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요셉은 17살에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형들이 돈을 받고 자신을 노예로 넘기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노역장이나 군대로 끌려갈 수도 있었는데 바로왕을 지키는 시위대장인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가게 되었습니다. 인생의 가장 나쁜 상황속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말도 통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아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노예로서 살아본 적이 없기에 모든 일이 낯설고 어려웠을 것이고, 그에게는 자유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요셉을 보디발의 집으로 보냈을까요? 보디발은 시위대장이었습니다.
후에 요셉을 신뢰하게 되었을 때에 집안의 모든 일을 다 맡긴 것을 보면 그는 다른 사람을 신뢰하여 책임과 권리를 줄줄 아는 리더였습니다. 자신이 해야할 나라 일과 집안 일을 구분할 줄 알았습니다. 요셉의 누명에 대해서 더 자세하게 살피지 않을 것을 보면 집안 일은 집안일, 나라 일은 나라일이었던 사람입니다.
이런 보디발의 자세는 이집트의 총리로 80년을 재직한 요셉에게는 공직자의 자세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만나게 되는 모든 사람들, 처한 상황이 하나님이 우리를 교육하시는 훈련의 재료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보디발이 요셉을 신임하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다. 창39:3-4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탁하니”“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보디발의 눈에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고, 그를 형통하게 하신 것이 보였습니다. 그가 성경을 읽는 것을 본 것이 아닙니다. 그가 기도하는 것을 본 것이 아닙니다. 그가 예배하고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것을 본 것이 아닙니다. 종교적인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을 보고, 요셉을 신뢰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요셉의 삶의 모습 즉 그의 태도를 보고 발견한 것입니다. 새번역으로 3절을 봅니다. “그 주인은, 주님께서 요셉과 함께 계시며, 요셉이 하는 일마다 잘 되도록 주님께서 돌보신다는 것을 알았다.”
요셉을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 말씀안에서 더 깊은 묵상으로 들어가야할 부분은 하나님은 어떤 사람과 함께 하시는가?입니다. 교회안에서처럼 종교적인 행동, 예배하는 사람, 말씀 읽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이 아닌 세상에서 살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과 함께 하십니까? 정직한 사람과 함께 하십니다. 시편140:13절 “분명히 의인은 주님의 이름에 찬양을 돌리고, 정직한 사람은 주님 앞에서 살 것입니다.”우리가 사는 세상은 적응을 잘 하는 사람을 정직한 사람보다 더 선호합니다. 어떤 드라마에 이런 대사가 있었습니다. 사업을 위해 장치인들에게 로비를 하던 사람이 하는 말. “7년동안 접대를 거절하는 사람은 딱 두사람 있었다.”자기 즐거움과 이익을 위해서 기회의 평등과 공정을 버린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공의를 위해서 가끔은 세상의 부적응자로 살아야 합니다.
보디발의 가정에서 요셉은 정직하고 신실한 사람이었습니다. 눈속임을 하거나 헐리웃 액션이 아닌 온 힘을 다해 바르게 행동하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과 함께 하십니까? 겸손한 사람입니다. 사57:15절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예수님은 겸손의 왕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평화의 왕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이 교만해서 자신의 권능을 자랑하고, 사람들을 굴복시키는데 그 힘을 썼더라면 우리의 구원자가 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과 같은 본체시나 그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고 가장 낮은 십자가를 지심으로서 우리들에게 겸손의 본이 되셨고, 평안을 주셨습니다. 겸손한 사람이 있는 곳에는 평안이 깃듭니다. 그러나 교만한 사람이 있는 곳에는 다툼과 불화가 있을 뿐입니다. 요셉은 겸손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고, 그가 하는 모든 일들은 형통한 일, 하나님이 돌보시는 일이 되었습니다. 요셉이 가진 능력 이상의 일을 척척 해나가는 것을 볼 때 보디발은 요셉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다고 믿었습니다.
사랑하는 예신 가족 여러분! 우리는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정직하고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롬12:2절에서 이런 자세를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말씀으로 표현했습니다. 세상에서 하나님과의 동행의 첫 번째 조건은 “이 세대와 다르게 사는 것”입니다. 세계에서 최고의 부자중 한 사람이 빌 게이츠입니다. 동시에 세계에서 기부를 가장 많이 하는 사람이 누구냐? 빌 게이츠입니다. 그가 원래부터 자선사업을 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90년대초만 해도 자기 이익을 위해 돈 벌 기회만 노리는 기업 사냥꾼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자선사업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우연한 기회에 아프리카를 여행하고 온 그의 아내 멜린다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아프리카를 여행하면서 아프리카 인들의 살아가는 보습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여행기간 내내 신발을 신은 여성을 보지 못했고, 아이들이 더러운 물과 부족한 식량, 벌레와 곤충에 노출되어 죽어가는 모습을 본 것입니다. 그녀는 여행을 마친 후 아프리카를 돕는 자선활동에 뛰어 들었고, 남편을 설득했습니다. 아내의 권유를 받아들인 빌게이츠는 세계인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는 부자가 되었습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 살던 기업 사냥꾼이 세계의 빈곤을 퇴치하겠다는 비전을 가진 자선사업가가 된 것입니다. 우연한 아프리카 여행이 한 사람의 가치관을 변화시켰고, 세계 최대의 자선 사업가를 태어나게 했습니다.
그렇다면 인생의 주인이 바뀌는 경험을 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어떤 가치관의 변화가 일어났을까요? 여전히 내가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삶의 가치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우리는 세상속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이 던져 넣은 구덩이속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곳에서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상징하는 채색옷이 형들에게 분노와 저주의 옷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옷이 자기를 구해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는 형들에게 굴복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앞에 굴복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구덩이에서 건져내어 보디발의 집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사랑을 의미하는 채색옷을 자랑하고, 형들의 허물을 아버지에게 고자질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형들의 분노는 동생을 죽이려는 마음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구덩이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아버지의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보디발에게 잘 보이는 사람이 아니라 그를 구덩이에서 건져내신 하나님께 잘 보이고 싶어 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에 대해서 언급한 구절은 29:9절입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그를 유혹했을때입니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주인의 눈치를 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며 살았던 사람입니다. Coram Deo! 하나님앞에서 살아가는 사람, 이것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사람입니다. 요즘 결혼한 사람들도 애인 하나 없는 사람이 없다는 말을 듣습니다. 성적인 유혹앞에서 정치인들도, JMS같은 이단이지만 목회자들도,일반인들도 무너집니다. 요셉도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받았지만 그는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었습니다. 유혹을 뿌리치고 감옥에 들어가는 선택을 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는 사람은 고난을 당하고 손해를 봐도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살고, 요셉은 그 본을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좋은 과일, 나쁜 과일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5만원짜리와 천원짜리 돈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내게 유익한 일과 나쁜 일을 분별하는 것은 어려워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을 살면서 가장 필요한 것 가운데 하나가 영적인 분별력입니다. 세상나라와 하나님 나라/ 특별히 나의 뜻과 하나님의 뜻을 명확하게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안되면 세상속에서 하나님과의 동행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가끔 자기 뜻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착각하고, 하나님의 뜻을 깊이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좋은 뜻을 하나님도 좋아하실 거라고 착각합니다.
에덴동산에서 하와는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 유혹에 넘어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창3:2-3절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하와는 유혹앞에서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는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반드시 죽으리라”가 “죽을까 하노라”로 달라졌지만. 하와는 죽지 않을 것이라는 뱀의 말을 신뢰함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불순종의 본질입니다. 자기 생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왜곡하는 것입니다.
가인도 하나님의 뜻을 알았지만 아벨을 죽였습니다. 창4:6-7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죄를 다스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지만 가인은 8절에서 들에서 아벨을 돌로 쳐서 죽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몰랐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날마다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날마다 해야할 일입니다. 성경은 마음을 가리켜 가장 부패하기 쉬운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여름철에 음식관리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닙니다. 밖에 두면 잠깐 사이에 상할 수 있습니다. 여름 철의 보관이 어려운 음식처럼 우리 마음도 부패하기 쉽습니다. 이 마음을 항상 새롭게 간직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과 우리 뜻을 혼동하지 않고 선명하게 분별하며 살 수 있습니다.
위대한 신앙의 사람들에게는 날마다 그들의 마음을 새롭게 하는 비결이 있었습니다. 우리도 그들을 본받아 실천해야 합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안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날마다 기도의 자리를 만들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날마다 시간과 물질에 대해 하나님의 것, 이웃의 것, 내 것을 분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과 이웃과의 나눔을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으로, 성령으로, 사랑으로 날마다 새로운 마음을 품고 주님의 뜻을 분별하고 세상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멘!
이 세대를 본받지 마십시오. 세상의 부적응자가 되더라도 믿음의 가치관으로 사십시오. 마음을 날마다 새롭게 하는 훈련을 성실하게 해서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분별하여 주님과 동행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