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01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대림절 첫 주)
기다림 그리고 깨어있음
렘33:14-16; 살전3:9-13; 눅21:25-36
지난 한 주 동안, 우리는 가을과 한겨울을 모두 만나는 아주 독특한 경험을 했습니다. 주초에는 화려한 단풍과 바람의 리듬을 따라 떨어지는 낙엽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첫눈이 엄청나게 많이 내리면서 탄성이 절로 나오는 설경을 만났습니다. 낙엽이 진 빈 가지 위에 쌓인 눈꽃은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직 푸릇한 나뭇잎이 나무에 달려있는데, 그 위로 내려앉은 눈이 얼어붙으면서 맑고 투명한 보석처럼 빛나는 모습은 신비롭기까지 했습니다.
자연 속에서 가을과 겨울을 모두 만난 일이 제겐 가슴 설레고 신나는 경험이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눈이 만들어낸 멋진 풍광은 제 마음에 갑작스레 주어진 선물로 느껴졌습니다. 늦가을과 겨울을 함께 품은 자연이 사사롭지 않음을 알기에, 이 모든 변화가 자연스럽고 반갑게 여겨졌습니다. 오히려 요즘 뉴스에서 정치인들과 권력자들이 사사로움을 넘어 사회에 해악을 끼치고 있는 일들이 들려올 때마다 느낀 분노와 혼란을 순식간에 덮어버리고, 자기 자리에 우뚝 선 나무들과 함께 현존할 수 있었습니다. 자연 앞에 서면 우리 안으로 평화가 스며듭니다.
가을의 끝자락에 갑자기 내린 눈을 보면서, 비록 우리 사회가 갈등과 분열, 부조리, 무질서로 무척 혼란스럽지만, 지금이 진일보를 위한 일보후퇴, 기다림의 시기라는 희망을 가졌습니다. 우리 사회가 겉으로 보기에 매우 혼란스럽고 퇴보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이런 사회를 바라보는 사람들 개개인의 의식은 성장하고 성숙하면서 사회의 변화와 성숙을 위한 준비를 함께 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전쟁과 전염병으로 혼란과 불안이 가득했던 시대를 산 노리지의 줄리안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세상과 우리를 붙들고 계시기에, 결국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은 끝내 우리를 온전케 하실 것이다.”
오늘은 교회력에 따르면 대림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대림절은 이 땅에 오셨던 그리스도를 기억하면서, 동시에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당시 사람들이 기대하고 예상했던 것과 달리, 그리스도는 비천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구유 안에 누워있는 아기를 보면서 이것이 엄청난 영적 사건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대림절의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과 내면의 실재가 다른 것처럼,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도 겉으로 보이는 것과 그 내면이 다르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블린 언더힐에 따르면, 지상의 모습으로 변장한 주님이 오시는 것을 알아차리려면, 우리는 반드시 깊이 사랑하고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다가오시고,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우리는 대림 시기 동안, 하나님을 겸손한 마음으로 갈망하며, 기대하고, 기다리는 태도를 연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위해 만들어진 통로로 오시고, 그분을 향해 열린 마음으로 들어오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경이가 언제나 우리의 작은 영혼으로 들어오고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해서, 방탕과 술취함과 세상살이의 걱정으로 너희의 마음이 짓눌리지 않게 하고, 또한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닥치지 않게 하여라.”(눅21:34) ‘스스로 조심하다’는 말은 헬라어로 프로세코인데, 주의를 기울이다, 전념하다, 헌신하다의 뜻을 담고 있습니다. 즉, 마음이 짓눌리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 전념하라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먹고 사는 문제, 자식 키우는 문제,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생기는 문제에 골몰하다보면, 마음은 무거워지고, 걱정에 함몰되기 쉽습니다. 예기치 못한 일들이 생기고, 우리가 기대하는 방향으로 일들이 풀리지 않을 때, 우리의 마음은 온갖 걱정과 힐난의 소리들로 그 어느 때보다 시끄럽고 번잡스러워집니다.
마음이 걱정들로 가득 차게 되면 우리 안에 자기가 있을 자리가 없어집니다. 걱정과 비난의 소리로 인해 우리의 마음속에 아주 작은 틈마저 사라져버리게 되면, 우리의 내면은 자기를 소외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자신이 소외되고 있다는 사실마저 잊은 채, 우리의 마음은 이리저리 갈라지고, 외부로 시선이 향하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음이 짓눌리지 않도록, 마음이 짓눌렸더라도 알아차리도록, “기도하면서 늘 깨어 있어라.” 명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넘어지게 하고, 실패하게 만드는 일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바꿀 수 없는 일입니다. 주님은 세상살이에 대한 걱정으로 마음이 둔해지지 않도록 기도하면서 깨어 있으라고 당부하셨습니다. 문제는 언제든 일어날 수 있습니다. 걱정거리는 얼마든지 우리 삶 속에 있고, 걱정거리가 없으면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의 일들을 가져와 걱정하는 것이 우리의 습성입니다. 일어나는 걱정을 막을 수는 없지만, 그 걱정이 우리의 마음을 짓누르지 않도록 깨어있는 일은 우리가 노력해야 할 부분입니다.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우리에게 중요한 한 가지는 마음을 잘 돌보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걱정과 생각으로 흐트러진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주님이 계실 수 있도록 빈 공간을 만들어내는 일은 기도로서 가능합니다. 소란스럽고 복잡했던 세상에 하얀 눈이 내려 고요와 평화로 뒤덮이듯이, 시끄럽고 요동치는 마음은 침묵과 기도로 정화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 지향을 모으고 올라오는 생각을 끊임없이 떠나보내면서, 우리의 마음은 실제로 비워집니다. 바로 그 빈자리에 주님이 오셔서 새로운 창조와 변형이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주님께 달려있습니다. 다만,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들 속으로 자기가 함몰되지 않도록,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에 온통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의 실재에 주목하도록, 그리고 자기를 소외시키지 않도록, 마음을 잘 돌보고 지키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마음을 지키는 일이 정말로 중요한데, 그러기 위해서는 기도하고 늘 깨어있어야 합니다. 특별히 향심기도는 자기의 외부와 내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의 대비를 알아차리도록 우리를 일깨워줍니다.
토마스 키팅 신부님은 향심기도를 쉼이라고 표현합니다. “우리가 기도 안에서 쉴 때, 우리의 정체성이 우리의 심리적 인식의 표면보다 더 깊다는 것을 발견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향심기도 중에 밖으로 향해있던 시선을 안으로 거두어들여 침묵과 고요 속에서 자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 고요히 머물며 존재하기 때문에 이 기도는 쉼입니다. 쉼 안에서 우리가 인식하는 것보다 우리는 훨씬 더 크고 깊은 존재라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기도가 깊어질수록, 우리가 누구인지는 더 분명해집니다.
누가복음 뿐 아니라, 데살로니가전서에서도 마음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 안에서 사랑이 자라고 풍성해지길 기도하는데, 사랑은 사람의 마음을 굳세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풍성하게 흘러넘칠수록, 우리의 마음은 더 단단하고 견실해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거룩하고 온전하게 합니다. 사랑에 대한 이 말씀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와 우리의 삶 속에서 실제로 이루어지기를 정말로 바랍니다. 우리 안에서 실제로 사랑이 흘러넘쳐 나와 우리의 마음을 견고하게 하고, 우리가 거룩하고, 있는 그대로 온전해지도록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시기 이전부터 이미 우리를 사랑하셨고, 그 사랑은 언제나 변함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을 사랑하시기에, 슬픔과 어둠 속에 있는 우리의 마음을 당신께로 끌어당기시며, 분명하고 위로가 되는 삶의 생명력, 빛, 사랑이 우리 안으로 흘러들어가길 바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온유하셔서 당신의 생명력, 빛, 사랑은 당신을 향해 열려있는 마음 안으로만 들어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깊이 사랑하고, 항상 깨어 있어야만 합니다.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서 사랑이 흘러나오도록 깨어있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것이 오직 사랑이라는 것을 깊이 신뢰하면서, 그 사랑이 우리의 마음 안에 흘러들어 넘쳐 나오기를 갈망하고 기다리는 것이 대림절에 우리가 연습해야 할 마음가짐과 태도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 우리의 삶, 그리고 우리 자신이 정말 하찮고, 비천해보일 수는 있습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우리 삶과 우리 자신이 특별할 것 없고, 보잘 것 없어 보인다고해서 우리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의 실재도 그렇게 똑같이 싸잡아 형편없고, 하찮은 것으로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켄 윌버는 인간에게는 세 가지 종류의 눈이 있다고 합니다. 육신의 눈(eye of flesh), 정신의 눈(eye of mind), 관상의 눈(eye of comtemplation)이 그것입니다. 육신의 눈은 물질세계를 감각적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정신의 눈은 이성으로 언어, 상징, 개념의 세계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관상의 눈은 초월적인 것을 영혼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현상을 육신과 정신의 눈으로 보면, 말구유에 누워있는 아기 예수는 대수롭지 않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 아기를 관상의 눈으로 바라보면, 이것은 천지를 뒤흔들 엄청난 영적 사건이 됩니다.
우리 자신을 이 관상의 눈으로 찬찬히 바라보는 것, 이것이 대림시기에 우리가 연습해야 할 삶의 태도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이 관상의 눈은 하나님의 눈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우리 자신을 자세히 바라보고, 우리와 함께하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이 세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고요와 침묵 속에서 하나님의 눈으로 우리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우리는 사랑덩어리입니다. 이 사랑을 실제로 깨닫고 경험하기 위해 기도하면서 깨어있기를 연습하는 것이 대림절의 의미입니다.
자연 앞에 서면 평화가 우리 안으로 스며들어 옵니다. 주님 앞에 서면 사랑이 우리 안으로 스며들어 옵니다. 주님의 사랑과 평화가 언제나 우리 안으로 흘러들어 오도록 기다리며 깨어 있는 대림절이 되길 기원합니다.
다함께 기도드리겠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셔서 우리가 깊이 사랑하고, 늘 깨어 있도록 인도해주십시오.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