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의 역사와 문화유적
구석기·신석기 및 청동기시대의 유물·유적은 아직 발견된 것이 없다. 지금까지의 고고학적 발굴 성과에 의하면 본격적으로 이 지역에 거주하기 시작하였던 인간은 무늬없는 토기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이 산악지대에 거주하였던 것 같지는 않고 대체로 주변의 낮은 구릉에서 원시적인 농경을 행하면서 수렵과 어로 활동도 병행하였을 것이다. 남원시 이백면 초촌리 등지에서는 앞에 짧은 돌출부가 달린 진주식(晉州式) 장방형 석곽고분이 분포하고 있어 가야 지방으로부터의 영향을 말해 주고 있다. 산청에는 원삼국 시대의 유적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뒤 고대국가가 형성되면서부터는 지리산은 산신신앙의 대상으로 부각이 된다. 신라 때에는 삼산오악신(三山五嶽神)을 제사하였다. 삼산은 봉래·방장·영주로 이 중 방장이 지리산에 비견된다. 오악은 동의 토함산, 남의 지리산, 서의 계룡산, 북의 태백산, 중의 부악(父嶽)으로, 나라에서 제사하며 국가와 백성의 행복을 빌었다. 고려시대에도 계속 지리산을 남악으로 삼아 중사(中祀)에 올렸다고 하는데 이때 많은 사찰과 산신당이 세워지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지리산은 삼각산(三角山)·송악산(松嶽山)·비백산(鼻白山)과 함께 사악신(四嶽神)으로 정하여져 나라의 제사를 받았다고 한다.김종직(金宗直)의 「유두류록(遊頭流錄)」에는 대표적인 산신 신앙의 예가 수록되어 있다. 그가 마흔 살 되던 해 가을 종도(宗道)와 선공(鮮空)이라는 두 승려의 안내를 받아 지리산 주봉인 천왕봉에 올라 제일 먼저 성모묘(聖母廟)에 제사를 드렸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그가 당시 목격한 이 성모묘의 모습은 당집의 너비가 3칸이고 양쪽 벽에 중을 그린 그림이 걸려 있었으며, 성모상은 석상(石像)으로 분대(粉黛)로 얼굴과 머리, 눈, 눈썹이 칠하여져 있었다. 머리 부분에 칼로 벤듯한 금이 가 있어 그 연고를 물으니 태조가 등극 전에 이 근처 인월(引月)에서 왜구를 칠 때 크게 패한 왜병이 이 성모의 신조(神助)로 태조가 승첩을 거두었다 하여 보복의 뜻으로 두쪽을 내었던 것을 뒤에 모아 맞춘 것이라 하였다. 성모묘의 동쪽, 바위가 오목하게 꺼진 부분에 돌을 쌓고 그곳에 조그만 불상을 하나 세워 놓았는데 국사(國師)라 부른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민족의 성산(聖山)으로서의 지리산의 위치는 연면히 이어져 내려 오늘날까지도 변함이 없다. 영남과 호남의 양 지방에 걸쳐서 그 경계를 이루고 있다는 위치적 특성과 산세가 웅장하면서도 험하지는 않다는 지형적 특징 때문에 역사상 특이한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우선 백제의 망국민 일부가 유입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고, 섬진강 유로를 따라 연안에서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가 그 도피처로서 지리산을 취하는 경우가 간혹 있었다는 것이다. 조선 중기 이후 특히, 임진왜란을 겪은 뒤에는 병화(兵火)와 흉년이 없는 피란·보신의 땅을 찾는 정감록신앙(鄭鑑錄信仰)이 지리산을 찾게 된다. 『정감록』 감결(鑑訣)과 『삼한산림비기(三韓山林祕記)』·『도선비결(道詵祕訣)』·『남사고비결(南師古祕訣)』·『남격암산수십승보길지지(南格庵山水十勝保吉之地)』·『이토정가장결(李土亭家藏訣)』·『서계이선생가장결(西溪李先生家藏訣)』 등 도참서류(圖讖書類)에는 대부분 피란·보신의 장소로 열 군데(이름하여 十勝地라고 함)를 제시하고 있는데 그 중 운봉두류산(雲峰頭流山), 즉 지리산이 반드시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정감록 관념은 한말에 이르러 농민운동에 실패한 동학교인들이 유민이 되어 흘러 들어오고, 이들 일부가 신흥종교를 개창하였다.
오늘날 계곡 도처에 흩어져 있는 사찰과 산신당 이외에 이러한 민족종교의 전통을 이어받은 산간 마을이 일부 흩어져 있는데, 이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갱정유도(更正儒道) 신자들로 구성된 경상남도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 도인촌일 것이다. 그들은 묵계리를 전설상의 청학동(靑鶴洞)이라 일컬으며 댕기머리와 상투와 바지 저고리로 우리의 전통 문화관습을 유지하고 있다. 청학동은 선조 때의 문인 조여적(趙汝籍)의 『청학집(靑鶴集)』에 신선에 대한 기록에서 나온 말로, 우리 민족의 이상적인 길지로 구전되어 오던 곳이다. 이런 명산임에도 불구하고 현대사에서는 좌익·우익의 격전으로 뼈아픈 상처를 남기게 된다. 1948년 10월의 여순반란사건에서 패퇴한 좌익 세력의 일부가 지리산으로 입산하였으며, 1950년 6·25 때에도 북한군의 패잔병 일부가 노고단과 반야봉 일대를 거점으로 하여 양민 학살, 촌락 방화, 산림 남벌 등의 깊은 상처를 남기게 되었다. 우리나라 31본산(本山)의 하나이며 10대 사찰 가운데 첫째인 화엄사(華嚴寺)를 비롯한 10여 개의 사찰과 국보·보물·천연기념물 등의 많은 문화재가 있어 곳곳마다 유적지이다. 주능선을 기준으로 그 남쪽 면을 겉지리(表智異 또는 外智異)라 하고 북 사면을 속지리(裏智異 또는 內智異)라 하는데, 민간신앙과 관계된 유적은 주로 속지리 쪽에, 그리고 불교 신앙 유적은 겉지리 쪽에 분포하는 특성을 보이고 있다.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에 있는 화엄사는 신라 때인 544년(진흥왕 5) 연기(緣起)가 창건하였고, 임진왜란 때 왜병에 의하여 전소된 것을 인조 때 벽암(碧巖)이 재건하였다. 일설에는 화엄종(華嚴宗)을 우리나라에 처음 들여온 의상(義湘)이 전교하던 곳이라고도 한다.
경내에는 우리나라 3대 목조건물 중의 으뜸인 화엄사각황전(국보, 1962년 지정)을 비롯하여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국보, 1962년 지정)·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국보, 1962년 지정)·화엄사 동 오층석탑(보물, 1963년 지정)·화엄사 서 오층석탑(보물, 1963년 지정)·화엄사 원통전 앞 사자탑(보물, 1963년 지정)·화엄사 대웅전(보물, 1963년 지정) 등이 있다. 또 입구에는 1962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수령 300여 년의 올벚나무[彼岸櫻]가 있는데 인조가 병자호란 이후 무기 재료로 쓰기 위하여 심게 한 것이라 한다. 연곡사(鷰谷寺) 역시 연기에 의하여 화엄사와 같은 해에 창건된 사찰로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피아골 남쪽에 위치하여 있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중건하였으나 한국전쟁 당시 완전히 소실되었고, 지금은 일부만이 중건되어 남아 있다. 경내에는 고려 초의 석조 예술을 대표하는 연곡사 동 승탑(국보, 1962년 지정)·연곡사 북 승탑(국보, 1962년 지정)·연곡사 소요대사탑(보물, 1963년 지정)·연곡사 동 승탑비(보물, 1963년 지정)·연곡사 현각선사탑비(보물, 1963년 지정)·연곡사 삼층석탑(보물, 1963년 지정) 등이 있다. 천은사(泉隱寺)는 구례군 광의면 방광리 차일봉(遮日峰) 남쪽에 있는 사찰로, 829년(흥덕왕 4) 덕운(德雲)이 창건하였다.천은사는 본래 감로사(甘露寺) 또는 천언사(天彦寺)라 불리던 것을 임진왜란 때 불탄 이후 1678년(숙종 4)에 다시 세우면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지방문화재 두 점이 있으며 작설차(雀舌茶)의 산지로 이름이 높다.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에 있는 쌍계사(雙磎寺)는 723년(성덕왕 22)에 삼법이 창건하였다. 처음에는 이름을 옥천사(玉泉寺)라 하다가 정강왕 때 쌍계사라 이름 지어 하사하였다고 한다.
경내에는 최치원(崔致遠)의 친필 비문으로 된 쌍계사 진감선사탑비(국보, 1962년 지정)·쌍계사 승탑(보물, 1963년 지정) 등이 있다. 쌍계사 북쪽 8㎞, 화개면 범왕리에는 103년(파사왕 24) 가야국의 김수로왕이 일곱 왕자를 위하여 지었다는 칠불암(七佛庵)이 있다. 이 절에는 신라 효공왕 때 운공(雲空)이 만든 아자방(亞字房)이 유명하다. 아(亞)자형의 온돌방으로 한 아궁이에서 불을 때면 방 전체가 데워지도록 되어 있다고 한다. 천왕봉 동쪽 기슭 경상남도 산청군 삼장면 유평리에는 548년 연기가 창건한 대원사(大源寺)가 있다. 현재의 것은 1948년에 소실된 것을 1963년에 재건한 것이다. 법계사(法界寺)도 544년 연기가 창건한 가람으로 천왕봉 남쪽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에 있다. 경내에는 자연석을 기단으로 이용하여 만든 법계사 삼층석탑(보물, 1968년 지정)이 있다.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지리산 서북쪽 기슭 만수천(萬壽川) 강변에는 828년(흥덕왕 3) 증각(證覺)이 창건하였다는 실상사(實相寺)가 있다. 경내에는 실상사 수철화상탑(보물, 1963년 지정)·실상사 수철화상탑비(보물, 1963년 지정)·실상사 석등(보물, 1963년 지정)·실상사 승탑(보물, 1963년 지정)·실상사 삼층석탑(보물, 1963년 지정) 등의 문화재가 있고, 인근 산내면 대정리백장암(百丈庵) 삼층석탑은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특히, 실상사에는 풍수사상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전하고 있다. 이 밖에도 경상남도 산청군 삼장면의 내원사(內院寺), 산청군 신동면 율현리에 1963년 보물로 지정된 대웅전이 있는 율곡사(栗谷寺),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의상이 창건하였다는 정취암(淨趣庵), 함양군 마천면에 1968년 보물로 지정된 삼층석탑이 있는 벽송사(碧松寺) 등이 있다. 율곡사 대웅전은 가구수법(架構手法)이 특이하여 못을 전혀 쓰지 않고 조립한 것으로 일명 몽침절이라고도 불린다. 몽침이란 베고 자는 목침의 다른 이름인데, 목공(木工)이 목침을 쌓아 절을 만들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은 것이다. 문화 행사로 지리산약수제(智異山藥水祭)가 있는데 곡우절(穀雨節)을 전후하여 열린다. 이것은 신라 때부터 행하여지던 제천행사의 하나로 지리산신사(智異山神祠)라 하였으며, 고려와 조선 시대에는 남악사(南嶽祠)라 하였다. 현재의 약수제라는 명칭은 곡우 무렵에 거자목(距杍木)에 상처를 내서 나오는 물이 만병통치에 유효하다고 한 데서 유래한다. 이 약수제는 일제 침략과 한국전쟁을 전후로 중단되었다가 1962년부터 노고단을 중심으로 다시 열리면서 지역 주민의 공동체의식의 함양에 기여하고 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23-10-10 작성자 명사십리